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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보다 더 강하게, 보다 더 풍요롭게

청소년 대상의 강의안.

 

 

2009. 11. 16. 수유 너머 구로 문방사우 2기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보다 더 강하게, 보다 더 풍요롭게

 


김강기명

 

 

 

오늘 차라투스트라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도덕에 대한 세 가지 상식을 깨뜨리고 있습니다. 그 세 가지는 무엇일까요? 첫째는 “복수는 나쁜 짓이니 용서해야 한다.”, 둘째는 “결혼은 남녀가 서로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 함께 살아가는 것이다.”, 셋째는 “목숨은 소중한 것이니 잘 돌보고 오래 살아야 한다.”입니다. 세 가지 모두 우리에게 아주 당연한 것처럼 여겨지는 것입니다. 하지만 차라투스트라는 그러한 도덕적 상식 속에 자리 잡은 독버섯들을 발견하고, 우리에게 새로운 가치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 세 가지를 차례차례 살펴보도록 합시다.

 


1. 복수는 나쁜 짓이다?

복수에 대한 평범한 상식은 이런 것입니다. “복수는 또 다른 복수를 부를 뿐이지. 용서를 해야만 우리는 복수의 사슬을 끊고 평화를 만들 수 있어.” 우리는 그러한 용서를 “악을 선으로 갚는 일”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차라투스트라는 이런 사고방식을 매우 싫어합니다. 그에게 이런 복수 금지의 도덕은 ‘적’을 부끄럽게 만들고, 불명예스럽게 만듦으로써 정작 자기를 초월하기 위한 싸움에 나서지 않으려는 약자의 도덕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지금 하늘에 독수리 한 마리가 있고, 땅에 양 한 마리가 있다고 해 봅시다. 양은 독수리를 발견할 능력도, 독수리의 발톱을 피할 능력도 없습니다. 그리고 독수리는 높은 곳에서 양을 발견하고 그를 잡아챌 능력이 있습니다. 그리고 배고픈 독수리는 그의 본능과 그가 가진 힘에 따라 양을 잡아챕니다. 그런데 여기에 대해 양이 이렇게 말한다면 어떨까요? “이 나쁜 독수리야! 네가 나한테 이렇게 너의 힘을 사용하다니! 난 너한테 이렇게 힘을 사용하지 않았는데……. 하지만 난 너를 용서하겠어. 난 착한 양이니까.” 사실 냉정하게 말해 독수리는 힘이 있을 뿐이고, 양은 힘이 없을 뿐인데, 여기서 양은 독수리가 마치 악을 행한 것처럼 몰아세우고 있습니다. 게다가 쥐뿔도 그럴 능력도 없으면서 자기가 독수리를 ‘용서’하겠다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차라투스트라가 보기에 양의 이런 행동은 일단 거짓된 것일뿐더러, 독수리로 하여금 자신의 그 힘을 부끄럽게 여기도록 만드는 아주 더러운 짓입니다.

 


더 문제가 되는 것은, 힘과 힘이 부딪히는 싸움을 이렇게 도덕 문제로 바꾸어 버리는 양의 도덕, 약자의 도덕이 언제나 국가권력을 요구한다는 점입니다. 자, 사실 양은 힘이 없습니다. 그런데 독수리를 나쁜 놈이라고 비난은 해야겠습니다. 그럴 때 양이 할 수 있는 일은 도덕의 심판관인 국가에게 모든 힘을 다 양보하고, 국가더러 독수리를 벌해달라고 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결국에는 절대적인 지배자 하나만이 승리하고 모두가 패배자가 되는 게임이 바로 이 도덕의 게임입니다.

 


니체는 대신에 “작게나마 앙갚음을 하는 것이 앙갚음을 전혀 하지 않는 것보다는 그래도 인간적이다.”라고 말합니다. 정의나 올바름이라는 도덕을 추구하지 말고, 눈앞의 적과 맞서서 싸울 네 힘을 키우고, 그것을 통해 사자로, 어린아이로 변신하라는 것이겠지요. 도덕을 추구하느니 차라리 불의해 보이더라도 복수와 싸움을 통해 강해지라는 것입니다. 물론 가장 강한 자는 살무사의 기습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웃어넘길 수 있을 만큼 강한 자일 것입니다. ‘용서’는 오직 그런 강한 자만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 차라투스트라는 우리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2. 결혼은 서로를 보듬는 것?

결혼이란 무엇일까요? 혹은 ‘연애’란 무엇일까요? 우리는 외로우니까 연애를 하고 결혼을 한다고 흔히 생각합니다. 내가 외롭고 부족하니까 나를 채워줄 ‘반쪽’을 갖고 싶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차라투스트라는 묻습니다. “너는 아이를 원할 자격이 있는 자인가? 너는 승승장구하고 있는 자, 자신을 제압한 자, 관능의 지배자, 네 자신의 덕의 주인인가?” 차라투스트라는 우리의 생각과는 달리 결혼을 부족한 자들이 해선 안 된다고 보았습니다. 부족한 자들이 남자를 찾고 여자를 찾는 것, 차라투스트라는 그것을 짐승이 서로를 찾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고 신랄하게 비판합니다.

 


대신 차라투스트라는 자신을 제압한 자, 전투를 피하지 않으며 그 끝에서 새로운 가치라는 아이를 창조하려는 자, 그들이야말로 결혼을 할 ‘자격’이 있는 자라고 말합니다. 결혼은 두 명의 강자가 그들보다 더 뛰어난 사람 하나를 낳으려는 의지에서 비롯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연애는 언제나 자신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줄 사람을 찾는 행위가 아니라 “우리 자신을 뛰어넘어 사랑하기를 배우는” 행위입니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 우리는 무수한 “사랑의 쓴 잔”들을 마셔야 할 것입니다. 이건 연애를 여러 사람과 많이 해보라거나, 실연을 많이 당해보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한 사람을 오래 만나도 거기에서 강렬한 자기-극복이 있는가를 묻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연애를 하고 있습니까? 밍숭맹숭한 연애, 그냥 하나쯤 있으면 뽀대가 나니까 하는 그런 연애를 하느니 차라리 외로운 것이 낫습니다. 하지만 지독한 사랑 한 번 제대로 해 보고 싶다면, 여러분의 나이를 신경 쓰지 말고 연애를 통해 자신을 한 번 넘어서는 그런 경험에 도전해 보길 바랍니다.

 


3. 목숨은 소중한 것이다?

그렇습니다. 목숨은 소중하지요. 그러나 차라투스트라는 여기에도 태클을 걸고 있습니다. “제 때에 죽도록 하라!” 이것은 자살을 찬양하고 목숨을 함부로 하라는 말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제 때에 죽을 수 있는 자, 그는 오직 “제 때에 사는 자”입니다. 즉 차라투스트라는 오직 ‘목숨’만을 마치 인간이 지켜야 할 최고의 덕목인 것처럼 떠받들지만, 정작 자신의 삶을 강하고 풍요롭게 가꾸는 데는 신경 쓰지 않는 나약하고 비루한 인간들을 비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자들은 “목숨은 소중한 것이니 이 땅의 것을 참고 견뎌내라.”고 설교하는 자들입니다. 아까 말씀드렸던 복수할 능력이 없어서 용서를 말하는 자들이 이런 사람들일 것입니다. 사실은 세상을 증오하면서, 앙상한 목숨을 유지하려는 자들. 니체가 볼 때엔 당시의 기독교인들이야말로 바로 그런 것을 설교하는 자들이었습니다. 차라투스트라는 기독교인들이 숭배하는 예수는 그들과는 아주 다른 사람이었다고 말합니다. 그는 만일 예수가 죽음과 용서를 가장한 증오를 설교하는 당시의 히브리인들 - 오늘날 하느님의 사랑을 말하면서도,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만이 죽어서 천국에 간다고 주장하는 기독교인의 모습은 이들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  사이를 벗어나 광야에서 삶과 대지를 사랑하는 법을 더 배웠다면 그토록 일찍 자신을 십자가로 내던지지 않았을 것이라 주장합니다.

 


차라투스트라는 진정으로 성숙한 자는 자신의 죽음을 자신이 판단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단지 생물학적인 죽음, 목숨에만 매달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죽음조차도 하나의 축제로, 새로운 가치의 창조로 만들 수 있는 사람, 그리하여 자신의 목표를 또 다른 위대한 자들에게 상속하는 사람의 죽음이야말로 “죽음을 맞이해서도 정신과 덕이 ‘대지를 에워싸고 있는 저녁놀’처럼 활활 타오르는” 그런 죽음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죽음은 오직 “제 때에 산 사람”만이 경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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