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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종인식과 2종인식.

1종 인식과 2종 인식.

다르게 말해보면, 1종 인식은 '외재적 인식'이고, 2종 인식은 '내재적 인식'이라 할 수 있다.

또 다르게 말해보면, 1종 인식은 '표상적 인식'이고, 2종 인식은 '행동학적 인식'이라 할 수 있다.

스피노자 자신은 "표상"(이미지)과 "공통 개념"이라고 부른다.

 

1종 인식은 언제나 외재하는 대상에 대한 인식이다.

우리가 갖고 있는 수많은 사물들의 이미지는 모두 1종 인식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여기서 이미지는 단지 시각적 이미지만을 뜻하지 않는다.

그것은 '나'에 대한 인식도 마찬가지다. 1종 인식으로 '나'를 파악할 때 우리는 '나'를

바깥의 '대상'처럼 인식하기 때문이다.

불교 식으로 말하면 1종 인식은 분별하는 앎이라 할 수 있다.

 

2종 인식은 구성적 실천 속에서만 생겨나는 내재적 인식이다. 

그것은 이미지를 통한 인식이 아니다.

이를테면 내가 펜을 들고 글을 쓴다고 하자.

사실 이 문장은 그 행동에 대해 제대로 말해주고 있지 않다.

왜냐하면 내가 펜을 들고 쓸 때 그것은 사실 '나'라는 '주체'가 '펜'이라는 '대상'을

움직이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저런 문장이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작업이 그런 거라고 착각하게 만드는

1종 인식을 불러일으킨다.

 

스피노자의 사유에 따르면

"펜을 들고 글을 쓰는 나"는 "자전거에 앉아 페달을 밟고 있는 나"와는 다른 존재라 할 수 있다.

펜과 나(펜을 들기 이전의 어떤 '나')는 사실 하나의 신체를 이루고 있다.

그리고 이 신체에 어떤 정신이 있다면 그것은 펜과 분리된 '나'만의 정신이 아니라

"펜+나"의 정신이 있는 거다.

 

마찬가지로 자전거를 타는 나의 경우,

"내"가 "자전거"를 운전하는 것이 아니라

"나+자전거"가 움직이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이 펜+나의 정신, 혹은 나+자전거의 정신이 바로 2종 인식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2종 인식은 언제나 실천 속에서만 나타난다.

물론 어떤 능력의 증가가 수반되는 실천이다.

이를테면 펜이 뭔지를 모르는 사람에게 펜은 외재적이기만 할 것이다.

혹은 펜이 뭔지는 알지만 그것을 전혀 다룰 줄 모르는 사람도 마찬가지다.

(펜의 예가 어렵다면 '자전거'로 생각해보자. 자전거가 뭔지는 다 알지만

모두가 자전거를 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걸 가지고 연구실 문제에 대해 쓰고 싶었는데

컴퓨터 켜고 웹서핑 하는 동안 다 까먹었다.ㅡ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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