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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민중이 사라진 시대, 민중신학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2019년 1월 복음과 상황 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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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신학, 고통의 시대를 읽다

 이상철 외 공저, 분도출판사 펴냄, 2018년

 

작년 한 해 이런 저런 경로로 등단한 신인 소설가들 중 가장 큰 대중의 주목을 받았던 작가는 《일의 기쁨과 슬픔》(창비신인소설상 당선작)의 장류진(張琉珍) 작가였다. 창비에서 온라인으로 그의 소설을 공개하자마자 소셜미디어와 커뮤니티들 상에서 폭발적인 반응이 일어난 그의 단편은 (웹상에서의 평가에 따르면) 하이퍼-리얼리즘 자본주의 비판 소설이라 할 수 있는데, 짧은 분량 안에서도 판교 테크노벨리의 IT기업 및 재벌 대기업의 사내문화와 직장갑질, 소셜네트워킹을 기반으로 한 시장거래의 작동방식과 그것을 떠받치고 있는 직장인의 비참에 대해 코메디적 터치로 두텁게 묘사한 이 작품의 작가 본인이 테크노벨리의 한 회사의 직장인이었다는 점이 알려지면서 다시 한 번 화제가 되기도 했다.

 
나 역시 이 작품을 둘러싼 화제를 온라인상에서 접했는데, 이후 몇 달 동안 화두처럼 떠나가지 않는 질문이 생겨났다. 이 소설을 수용하는 여러 사람들, 그리고 나 역시 위의 문단을 작성하면서 아주 자연스럽게 쓰지 않은 두 단어 때문이었다. ‘노동’ 그리고 ‘노동자’가 그것이다. 이 소설이 90년대에 발표된 소설이라면 어떤 카테고리로 수용이 되었을까? 장류진 작가는 무려 ‘현장 노동자’이고, 자신의 ‘노동현장’을 소설로 담아냈고, 이 소설의 가장 큰 주제는 ‘노동의 소외’라 할 수 있었다. 이 소설은 그렇다면 전형적인 ‘민중문학’ 작품이 아닌가? 하지만 놀랍게도, 혹은 하나도 놀랍지 않게도 2018년의 그 누구도 장류진 작가를 ‘노동작가’라거나 ‘민중문인’이라 부르지 않았다(아마 작가 스스로도 원치 않을 듯 싶다). 그렇다면 “이것은 왜 민중문학이 아니란 말인가?”
 
이 시대는 어떤 애도도 없이, 한 터럭의 놀람도 없이 찾아왔다. 시나브로 민중문학이 불가능한 시대가 된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곧 세상의 비참과 사회적 고통을 이야기하는, 혹은 약자들의 연대를 이야기하는 소설이 없어졌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사라진 것은 그 고통의 소식들, 연대의 언어를 하나로 묶여주던 그 ‘말(言)’이다. 어느 시기엔 고통과 연대의 경험 속에 있는 사람들이 자신의 경험을 말하게 하고, 보편적인 것으로 만드는 것이었던 그 ‘말’은 이제는 오히려 그 경험들을 설명해줄 수 없는, 그 ‘말’을 꺼내면 사람들이 어색함과 민망함을 느끼고 마는 ‘말’이 되어 버렸다. 나이든 사람이 ‘민중’이란 말을 입에 올리면 고루한 옛날사람으로, 젊은 사람이 ‘민중’이란 말을 입에 올리면 과도한 자의식을 가진 중2병 환자로 보이는 시대가 된 것이다.
 
이것은 문학이나 언중의 언어생활에서만 일어난 현상이 아니다. 남한의 진보적 인문사회과학 및 공공담론은 물론 관(官)에서조차 (“민중의 지팡이”) 활발하게 사용되었던 ‘민중’ 개념은 2010년대에 접어들면서 사실상 완전히 퇴조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인문사회과학자들이 마지막으로 활발하게 ‘민중’ 개념과 의의, 그것의 존재양태에 대해 토론한 것은 2008년 촛불집회 때였다. 결론이 내려졌던 토론이 아니었지만, 그 이후 ‘민중’은 사회과학적 용어로서의 생명력을 상실했다. 동시에 ‘민중운동’이라는 말이 더 이상 남한 사회의 좌파적 운동 혹은 각종 인권사회운동을 포괄하는 단어가 아니게 되었다. 오늘날 성소수자 운동, 페미니즘 운동 등이 약자들의 대중운동으로서 그 어느 때보다도 활발하게 벌어지고 있지만 그 운동의 주체들은 이전시기와 같이 스스로를 ‘민중’이라는 큰 범위 안에서 이해하려 하지 않는다. 전통적으로 더욱 ‘민중운동’으로서 이해되었던 노동, 철거민, 통일운동 역시 세대를 지나며 더 전문적이고 분화된 성격을 보이고 있다. 진보좌파 정당은 물론 의제를 아우르는 정치적 성격의 사회운동체들이 급격하게 몰락한 것 역시 ‘민중’의 사라짐과 때를 같이 한다.
 
‘민중신학’은 한 때 그 담론이 가진 여러 신학-너머의 이론적 성찰에도 불구하고 세간에서 논의되는 수많은 민중에 대한 담론의 종교적 버전으로 받아들여졌고, 신학계와 사회과학계 양 쪽에서 이론으로서의 고유성originality이 없는, 그저 기독교인들의 사회참여를 위한 실천적 담론 정도로 받아들여지곤 했다. 그런데 2000년대 이후의 변화를 지나온 지금, 놀랍게도 민중신학은 ‘민중(民衆)’을 학술용어로 삼고 있는 유일한 이론/담론이 되었다. 그러니까 지금 남한에서는 ‘민중신학’이 하는 이야기가 곧 “민중에 대한 인문사회과학적, 이론적 성찰”인 상황이 된 것이다. 그렇다면 민중신학을 자신의 필드로 삼고 있는 일군의 연구자들은 이러한 새로운 담론 지형 속에서 자신의 작업을 새롭게 발견하고 있을까? 그리고 여전히 ‘민중’이 유의미한 이론적/실천적 범주임을 설득력 있게 제시하고 있을까?
 
한국민중신학회와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가 공동 기획하고 분도출판사에서 출간한 《민중신학, 고통의 시대를 읽다》는 오늘날 민중신학자들이 가진 상황 인식과 이에 대응하는 입장들을 보여주는 반가운 책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이 책에 들어간 다수의 글들은 전술한 상황 속에서 생겨난 질문에 충분한 대답을 내놓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지난 시대 민중신학의 익숙한 담론들을 반복하거나, 그것에 새로운 주제 몇 가지(여성, 성소수자, 청년, 난민, 재개발 피해자, 촛불집회 등)를 추가하는 정도에서 멈추고 있다. 지난 시대 민중신학 내부의 두 담론, 즉 기독교 지향적 담론 — 기독교인들이 어떻게 고통 속에 놓인 약자들을 품을 것인가?(박지은, 홍정호), 그에 부합하는 기독교 영성과 성서해석은 무엇인가?(정경일, 이영미, 김희헌) — 과 사회비평신학 지향적 담론 — 사회적 고통의 주체들인 민중(김윤동, 박재형)과 사회운동의 여러 주제들(황용연, 최형묵)에 어떻게 신학의 언어로 참여할 것인가? — 은 이 책에서 서로 간의 논쟁적 대화 없이 평행선처럼 반복되고 있다. 상황은 지금 민중신학에 ‘민중’이라는 말 자체를 더 이상 사용하지 않는 한국사회에서 왜 여성, 성소수자, 철거민, 난민 이슈들, 통일과 경제민주화 이슈를 ‘여전히’, ‘민중’이라는 범주에서 다루어야 하느냐는 사회과학적/이론적 질문을 던지고 있는데, 전자의 필자들은 이에 관심이 없고, 후자의 필자들은 이 질문에 답변하는 대신 ‘기존의 민중신학’을 자기참조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민중신학은 ‘누가 지금 쫓겨나고 있는지’를 물어야 한다. 이를 통해 ‘지금 누가 민중인지’를 재발견하고, 그 […] 메시아적 사건을 증언하며 이에 참여하도록 소리쳐야 한다.”(박재형, 147쪽) “그들(청년세대)은 […] 세상의 모든 구조에서 오는 피해를 짊어진 무리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으로 다시 호명할 것을 제안한다. […] 추방당하고 낙인찍힌 ‘한(恨)’ 서린 민중으로 말이다.”(김윤동, 68쪽)
 
20세기 전반부에 디트리히 본회퍼는 서구 사회의 세속화 이후 이 (신을 더 이상 필요로 하지 않는) ‘성숙해진 세계’에서 기독교인들의 삶-세계가 ‘값싼 은혜’라는 싸구려 종교로 전락한 것을 관찰하고, 신학이 대체 이 세계에 무엇을 말할 수 있을지를 고민했다. 같은 형식의 고민이 오늘날 민중신학에도 필요하지는 않은가. 오늘날 민중신학 역시 어쩌면 (좋다 나쁘다를 떠나) ‘성숙해진’, 즉 민중이 사라진 시대에 한때 사회 한 켠에서 얼마간 대중화되었던 적 있는 ‘운동권 기독교’의 언어를, 20세기 독일 루터교의 값싼 은혜의 언어처럼, 반복하고 있는 것은 아닐지 고민해야 하지 않을까.
 
이 고민의 작업은 철저히 사회비평/이론 학술장을 수신자로 둔 ‘이론적 실천’이 될 수밖에 없다. 한편으로 (그 반대항인) ‘실천적 이론’으로서 민중신학 담론이 이전 시대에서 만들어져 경화(硬化)된 통속적 운동권 신학의 언어를 벗어나지 못한 채 사실상 시효가 만료되었고, 다른 한편 각종의 정체성들이 부각되고 있는 시대에 현재의 사회비평/이론이 새로운 보편성의 언어를 찾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물론 그 보편성의 언어가 ‘민중’이어야 하는지는 민중신학 연구자들 스스로 이론적 고투를 통해 대답해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이 읽혀져야 할 이유는 바로 이 사회이론적 고투에 나서며 민중신학의 다음 세대 담론을 형성하려 시도하는 몇 편의 글들 때문이다.
 
신익상(“잔여/주체, 포스트휴먼과 마주하다”)은 오늘날의 ‘4차 산업혁명’ 등의 용어를 통해 진행 중인 전지구적 산업구조의 변화 속에서 민중신학의 의의를 새롭게 그려낸다. ‘인공지능’과 ‘연결’을 키워드로 하는 소위 4차 산업혁명은 근대적 자본-노동관계 속에서 형성된 인간 주체성의 변화를 암시 혹은 요구하고 있는데, 이러한 포스트휴먼 담론을 신익상은 기술을 통한 인간의 혁신을 말하는 포스트휴먼-이즘과 근대적 인간중심주의의 극복을 추구하는 포스트-휴머니즘으로 나눠서 설명하고, 전자는 기술낙관주의에 머무르면서 자본주의가 낳는 소외와 차별을 오히려 강화할 수 있다고 비판하고, 후자 역시 연결과 확장을 통한 인간주의의 철폐에 대한 낙관적 전망에 비해 그 경로가 불분명하다고 지적한다. 양자 모두 남겨진 이(것)들, 즉 ‘잔여’의 문제에 대답을 못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신익상은 민중신학의 “사건으로서의 민중” 개념을 통해, 포스트휴먼이라는 보편적 주체 형성의 이면에 놓인 ‘잔여’의 배제와 망각을 폭로하며 다른 보편성을 요구하는 주체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이상철(“논란의 중심, 민중 메시아” 및 프롤로그)과 이정희(“민중신학, ‘어디로?’: 그 원천을 질문하면서”)는 최근 유럽 정치철학에서 주목받았던 비판적 철학 내부의 신학적 담론들 — 알랭 바디우, 슬라보예 지젝, 조르지오 아감벤 등 — 을 민중신학의 맥락에서 살펴보고 있다. 민중신학은 이러한 철학자들의 담론과 동시대에 유사한 사유를 전개해 왔음에도, 민중신학이 갖는 민족주의적‧국지적‧반(反)엘리트주의적 성격으로 인해 이들 정치철학자들의 논의와 민중신학 간의 비판적 대결은 그동안 본격적으로 이뤄지지 못하고 있었다. 두 글(및 필자들의 최근 단행본들)은 이러한 대화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고 있다는 점에서 반가운 일이지만, 유럽 철학자들의 논의를 통해 민중신학을 재설명하는 것 이상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서 아쉬움이 남는다. 거꾸로 민중신학의 사유가 서구 정치철학의 신학적 담론에 줄 수 있는 자극이 무엇인지, 이를 통해 유럽중심주의를 넘어선 보편성을 신학이 어떻게 사유할 수 있는지를 설득할 수 있을 때에야 의미 있는 대화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정용택의 “왜 고통이 중요하며, 왜 고통이 문제인가?”는 이 책에서 사회과학/사회비평적 이론으로서 민중신학의 성격을 가장 분명하게 보여주는 글이다. 그가 보기에 민중신학은 초창기부터 민중을 어떤 사회적 실체로 직접적으로 정의하는 담론이 아니라 ‘사회적 고통’의 사건을 통해서 민중을 발견하고 증언하려 한 탈재현적 비판담론이었다. 문제는 민중신학이 ‘민중의 사회적 전기(傳記)’를 방법론으로 하면서도, 그 전기가 자리 잡은 사회와 사회적 고통의 양태와 조건, 본질에 대한 이론적 탐구에는 상대적으로 소홀했다는 점이다. 앞으로의 두터운 작업의 서론 격이 될 이 짧은 글에서 필자는 민중의 고통의 증언을 강조한 민중신학 1세대, (마르크스주의적인) 경제사회 구조 분석에 나섰던 2세대, 민주화 이후 비가시화된 민중의 사회적 고통에 주목한 3세대의 문제의식 — 민중신학의 세대적 흐름에 관해서는 김진호의 “에필로그: ‘운동의 신학’에서 ‘고통의 신학’으로: 포스트-‘1987년 체제’의 민중신학”을 참조 — 을 종합적으로 수용하면서 이를 통해 마르크스주의 및 비판이론의 주요 흐름에서 발전되어 온 가치이론, 인정이론, 정신분석학의 토론에 참가하면서 ‘민중’이 유의미한 사회이론적 범주라는 점을 설득하고 있다.
 
이 책은 오늘날 민중신학이 처한 위기와 기회를 동시에 보여주고 있다. 표지의 판화나 뒷면의 문구가 상징적으로 보여주듯 민중신학을 여전히 1980년대적 감성계 및 당시에 형성된 문제의식 안에 머무르게 하는 힘은 강력하다. 또한 새로운 문제의식을 가진 연구자들의 경우 서로의 작업을 사실상 거의 참조하지 않고, 논박하지도 않으며 자기 작업에만 몰두하는 경향을 보여주고 있다. 그들이 참조하는 민중신학은 오늘날 동료 연구자들의 민중신학이 아니라 1세대 민중신학일 뿐인 것처럼 보일 정도다. 전술하였듯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민중신학의 담론’이 곧 ‘민중에 대한 담론’이 된 상황에서 민중신학은 이론화를 요구받고 있으며, 그에 응답하는 작업들이 속속들이 나오고 있다는 것을 이 책은 보여주고 있다. 관건은 이 작업들이 얼마나 두터운 생태계 속에서, 연관 학문분야와의 대화와 논쟁을 통해 발전해갈 수 있느냐 하는 점이다.
 
*이 글은 월간 <복음과 상황> 온라인 판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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