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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다중, 국민, 집단지성, 시민, 학생, 노동자, 여성, 청소년... 그 모두이자 아무도 아닌.
촛불봉기의 대중을 바라보면서 가장 놀라운 것은 역시 그들이 보여준 놀라운 “힘”입니다. 바로 직전까지 지극히 무능력하게 끌려 다니고 있던 바로 그 사람들이 그 다음 순간 엄청난 힘으로 자신의 삶과 신체를 바꾸고, 국가를 벌벌 떨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분명 이 힘은 이들 안에 먼저 있었다거나, 혹은 누군가가 부여해준 것이라 보기 힘든 것이었습니다. 집단지성이나 “다중”, 웹 2.0 등을 논하면서 대중의 능력을 찬양하는 목소리들을 곳곳에서 만나지만, 이것들이 봉기 이전에라고 없었던 게 아닐 텐데 왜 그 때는 그런 힘을 보여주지 못했는지를 설명해주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집단지성이나 “다중”과 같은 그들의 “정체성”이 그런 힘을 낳았던 것이 아니라고. 오히려 집단지성이나 “다중”은, 그들이 그 이전의 “정체성들”(다중이나 집단지성까지 포함하여)을 탈(脫) 함으로써만 가능했다고 말입니다. 저는 이번 촛불집회 기간에 유통된 다중이나 집단지성 담론의 상당수는 지극히 다중적이지 못하고, 집단지성적이지 못한 이해를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이를테면 다중을 “청소년, 노동자, 학생, 회사원, 주부, 백수, 예비군 등 다양한 이해와 관심사를 갖고 있지만 하나의 공통된 목소리를 내는 집단” 정도로 이해하거나, 집단지성을 이야기하면서 “지식인이 아닌 대중의 지성”, “이성적인 대중운동” 등으로 이해하는 것은 그 개념들의 의미를 충분히 설명해주지 못한다는 것입니다.1)
촛불집회의 대중을 “다중”이라고 말할 있다면 그것은 그들이 여전히 청소년, 학생, 노동자 등의 정체성을 갖고 있으면서 연대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더 이상 청소년, 학생, 노동자가 아닌 존재가 되기 때문입니다. 즉, 각각의 개별자들이 모여서 다중이 되는 것이 아니라 각각의 개별자 안에 있는 다중(적 성격)들이 다른 이들과의 마주침 속에서 튀어 나오고, 그래서 이전과는 다른 내가 되는 것, “다중” 안에서 이전과는 다른 정체성을 가진 내가 되는 것, 이것이 다중이 아닐까요. 청소년을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우리가 “청소년”이라고 할 때 그것은 단지 그들의 물리적인 나이만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몇 가지 코드들이 그들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어리고, 아직 공부하는 학생이고, 어른한테 반말하면 안 되고, 연예인들 좋아하고, 교복입고 등등. 그러나 이들이 5월 2일에 모여서 촛불을 들었을 때, 또 6월 1일의 물대포를 맞으며 함께 새벽을 맞이할 때 이들은 청소년이 아닌 청소년이 됩니다. 이를테면 우리가 흔히 운동가, 혁명가라고 부르는 그런 정체성으로 변환된 것입니다.2) 다른 존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부이나 더 이상 주부가 아닌 존재, 학생이자 학생이 아닌 존재, 노동자이나 노동자가 아닌 존재가 되는 것, 이것을 들뢰즈라면 아마 “대중-되기”라고 불렀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다중” 역시 “다중이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집단지성 역시 그러합니다. 이 말은 원래 곤충들이 무리 지어 행동할 때 보이는 고도의 합리성을 설명하기 위한 개념입니다. 개미들 각각이 갖고 있는 지성(이런 게 있다면)과 개미떼의 “집단 지성”은 연장선상에 있지 않습니다. 개미‘떼’는 ‘개미’와 어떻게 보면 다른 생물체입니다. 이런 점에서 보면 촛불봉기의 대중이 “집단지성”을 소유하고 있다는 말은 어폐가 있습니다. 그것은 여전히 개인이 지성을 소유한다는 근대적 개인관/이성관과 멀지 않습니다. 집단지성이란 그 개인성이 탈각됨으로써 얻어진 지성, 대중이 더 이상 정체성에 입각한 개인이기를 그치고 하나의 떼 혹은 네트워크 속에서 다른 존재가 되는 과정, 즉 ‘대중-되기’ 속에서 발현되는 능력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집단지성의 곤충학적 성격을 염두에 둔다면 들뢰즈를 따라 ‘동물-되기’라 말해도 무방할 것입니다.)
봉기는 이러한 탈정체성의 사건들을 무수히 만들어냅니다. 봉기의 현장에서 우리는 수많은 마주침들과 대중-되기 속에서 이전의 나와는 다른 나로 변합니다. 이것은 단지 촛불 이전과 이후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봉기의 순간 순간에도 지속적으로 벌어지는 일입니다. 봉기의 현장 속에서 우리는 장기의 말에서 바둑알로 변화합니다. 더 이상 어떤 고정된 내적인 정체성을 갖는 존재가 아니라 무수히 많은 것들로 변화/분화할 수 있는 존재, 함께 봉기에 참가하는 대중들과 함께 여러 결들을 따라 마주침을 수행하면서 새로운 신체와 새로운 관계를 끊임없이 생성하는 존재, 어제와 다른 사건을 벌이며 국가 장치가 가두거나 지배할 수 없는 공간으로 탈주하는 존재, 이것이 촛불봉기에서, 특히 초창기의 모습 속에 나타난 대중의 모습이었고, 바로 이러한 대중의 바둑두기야 말로 그들의 힘의 근거가 되었던 것입니다. 촛불봉기가 시작되자마자 그 의제와 구호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폭발적으로 터져 나왔던 건 결코 누군가가 강력한 리더십으로 위에서 의제를 던져주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바로 이러한 생성들 속에서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던 일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대중의 힘의 상승은 어느 시점부터 그 가속도를 잃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제가 판단하기로는 7월 첫 주간의 천주교 사제들을 비롯한 종교인들의 참여와 7월 5일 대책위의 이상한 “국민승리선언” 이후 대중의 힘은 더 이상 상승하기를 멈추고 하강했습니다. 이것은 촛불집회가 온전히 바둑의 공간만은 아니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사실 애초부터 촛불집회는 두 개의 기획 - 대중의 바둑과 국민의 장기3) - 이 동시에 수행되는 공간이었고, 이 두 기획은 서로 충돌하기도 하고, 협력하기도 하면서 공존하고 있었습니다. 5월 2일의 청소년들의 봉기, 24일의 대책위 주도의 집회로부터의 이탈과 거리행진, 갖가지 구호로 무장한 대중의 다종다양한 ‘자기표현’으로서의 가두시위의 모습, 막으면 돌아가는 떼 지성의 흐름, 지도에 대한 끊임없는 거부 등이 대중-되기의 예들이라면, 대형무대의 설치, 구호의 단일화, 방송차의 행진 지도, 각종 ‘국민 대토론회’, 시위대를 호명하는 ‘국민’ 호칭, 대책위 일부의 정부와의 협상시도, 국회등원요구 등은 국민-되기의 예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국민-되기의 기획에서 대중은 하나의 시민, 혹은 국민으로, “집단 지성”의 소유자로, “민주공화국”이라는 공화주의 이념에 입각한 정치적 주체로 정체화됩니다. 촛불집회 초창기에 “청소년들은 10시에 자율귀가 합니다.”라는 진행자의 공지 속에서, 거리시위가 벌어지기 전 “노동자들이 선두에 서서 범국민대책위의 지도하에 거리로 나가자.”는 <다함께> 회원의 연설 속에서, “여러분은 우리의 지도를 따라주셔야 합니다. 단독행동은 위험합니다.”라는 방송차에 탄 대책위 사회자의 말 속에서, “촛불 소녀”라는 캐릭터 속에서 대중은 “국민”의 보호를 받아야 할 청소년, “국민”을 이끌어야 할 “국민대책위”, “국민전선”의 주체인 “노동자 대오”라는 익숙한 정체성들 속으로 다시 끌려들어갑니다. 이러한 국민-되기의 기획 속에서 대중은 더 이상 국가장치가 가늠할 수 없는 존재로 생성되기를 그치고 측량 가능하며, 지각 가능한, 그래서 “진압 가능한” 존재로 축소되고 맙니다.
물론 국민-되기의 완성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촛불봉기 내에서 국민-되기의 기획을 이끌어 온 “국민대책위”가 아니라 “정의구현사제단”이 그 기획을 완성시켰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은 그만큼 촛불봉기에서 ‘국민-되기’의 기획이 어려웠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종교라는 초월적 수준에서가 아니면 도저히 ‘국민’으로의 통합이 불가능했던 것입니다.4)
1) 박정수, <대중지성과 욕망> 참조
2) 어느 청소년 활동가의 말, “촛불 집회 초창기에는 정말 놀라울 만큼 어른들이 우리를 존중하고, 반말도 함부로 하지 않았다. 그런데 뒤로 갈수록 ‘꼰대’들이 늘어났다. 그래서 ‘어른들이 무슨 죄냐, 청소년이 지켜주자’ 같은 구호를 외치거나 청소년 캠패인을 벌이기도 했다.”
3) 이하 대중-되기와 국민-되기. 그러나 두 되기는 대칭적인 것이 아니다. 대중-되기가 끊임없는 탈영토화라면, 국민-되기는 강박적인 재영토화라 할 수 있다.
4) 김강기명, <이전과 결코 같지 않으리>, 민중언론 참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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