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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구되는 상상력 - 대중집회를 넘어 소수 정치로
그렇다면 이제 무엇을 할 것인가? 촛불집회는 이제 광우병 쇠고기 반대 내지는 몇 가지 핵심 이슈들만이 이야기되는 ‘국민저항’의 공간이 되어버렸고, 그 이슈 바깥의 주장, 또한 국민 바깥의 주체성들을 배제하고 있다. 자연스럽게 봉기의 형식 역시 “대형무대와 방송차, 말하는 지도부와 듣는 청중”의 질서로 배치되고 있다. 나는 과감히 이런 식의 촛불 집회를 포기할 것을 요청하고 싶다. 더 이상 집회를 나가지 말자는 이야기가 아니라 그것이 우리의 봉기에 있어 유일한 직접행동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고 대중집회의 안팎에서 현재의 봉기 형식, 주체성, 내용 모두를 넘어서는 상상력을 발휘하자는 것이다.
청와대로 가는 거보다는 이미 우리가 2달 동안 점유한 거리 그곳에 대한 지배를 기정사실화 하는 게 더 중요하지 않았을까. 우리의 낙서, 목소리들이 설치 미술이 되고 있는 그곳. 밤마다 좀비들이 득실거리는 곳으로 기정사실화 하는 것. 아예 그곳에서는 언제든지 누구라도 어떤 이야기를 하는 것이 당연하고 듣는 것이 당연한곳으로 .. 원봉(주: 원천봉쇄)이 되면 다른 곳으로 이동해서 난장을 벌이고 지구에 대해 삶에 대해 정의에 대해 이야기 하는 거다. 언제나 이 썩은 사회를 향해 시위하는 곳으로 그곳의 의미를 점유하고 공간을 점유해버려야 하는 게 아닐까. 사실 이미 그런데 그걸 더 의미화 하는 작업이 필요할거 같다. 승리했네 승리할 꺼네 이런 소리보다는 말이야.(진보넷 블로거 달군, <거리점유>, http://blog.jinbo.net/dalgun/?pid=1249)
이러한 형식 속에서 아직 표현되지 않는, 혹은 이미 배제되어버린 다양한 소수적 외침들을 외쳐야 할 때이다. 집회 초기부터 열심히 결합하고 있는 한 성소수자 활동가는 “촛불집회 사회자가 ‘촛불 소녀 오셨습니까?’, ‘노동자 여러분 오셨습니까?’, ‘유모차부대 오셨습니까?’라고 참가자들을 호명할 때 ‘성소수자 오셨습니까?’라고 외치는 걸 상상하곤 해요. 그런데 한편으론 그렇게 부르지 않았으면 하는 찜찜한 기대를 동시에 하게 됩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 “찜찜한 기대”란 이미 그 장이 “국민”의 장이 되어버렸기 때문일 것이다. 국민의 하나로 호명되는 것도 찜찜한 것일 테고, 또 그 ‘국민’들이 국민으로 인정해주지 않을 것 같다는 찜찜함도 있을 것이다. 우리는 이런 목소리들이 말 하도록 해야 한다. 이런 목소리들이 터져 나올 공간을 창조해야 하는 것이다.
다시금 이 촛불의 공간이 “모든 이들이 모든 능력을 표현하며, 모든 요구를 말하는 공간”이 되어야 한다. 물론 이 ‘촛불’은 저녁의 촛불집회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일터가, 학교가, 또 그밖에 다종다양한 우리의 삶터 모두가 촛불의 공간이 되어야 할 것이다. 또한 저녁의 촛불집회를 이러한 소수 정치의 공간으로 재전유해야 한다. 솔직히 정말 죄송한 마음으로 고백하건대 나는 방송차를 경찰이 탈취했을 때 한편으로 환호하기도 했었다. 촛불집회는 다시 지도부 없는 공간이 되어야 한다. 물론 경찰의 방송차 탈취를 통해서가 아니라 우리 힘의 분출로서 그리 되어야 하겠지만.
그렇게 될 때 우리는 진정한 승리 - 즉 국민의 공화주의적 기획을 넘어서는 새로운 변혁적 주체성과 새로운 세계의 창조 - 를 누릴 수 있을 것이다. 인권침해와 입시지옥에 저항하는 학생들의 외침이, 노동과 삶의 불안정화에 투쟁하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외침이, 주거권을 요구하는 빈민과 노숙인들의 외침이, 장애를 가진 것이 문제가 되지 않는 세상을 만들기 위한 장애인들의 외침이 그 어느 때보다도 바로 지금 그들의 삶터와 촛불집회의 현장 모두에서 외쳐지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실질적인 승리들을 만들고, 또 그 승리들을 서로 연결함으로써 우리가 함께 살아갈 공통의 세계를 창조해야 할 때이다. “우리는 이미 승리했다.”는 말은 바로 이런 의미에서만 참일 수 있을 것이다.
어른들이 무슨 죄냐, 청소년이 지켜주자 - 7.30 교육감 선거에 붙여
이 글에서 이러한 소수 정치의 직접행동에 대한 구체적인 지침을 제시할 능력이 내게는 없다. 그러나 곧 열리게 될 7.30 서울시 교육감 선거를 앞에 두고 한 가지만 제안을 해 보고 싶다.(혹은 하나의 낮 꿈을 꾸고 싶다.) 이 싸움에서도 두 가지 기획 - 국민화 기획과 전위적 기획 - 은 충돌하고 있다. 국민화 기획은 이미 밑그림이 그려졌지만(시민사회진영의 단일후보 지지운동) 전위적 기획은 아직 만들어지지 않았다.
우리는 선거에 대응하는 국민화 기획 속에서는 정작 교육감 선거로 인해 가장 크게 삶을 좌우당할 ‘청소년’이 배제당하고 있다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청소년들은 그간의 촛불집회에서도 체계적인 배제를 경험해야 했다. “아이들이 무슨 죄냐, 어른들이 지켜주자.”라는 구호, “청소년은 10시가 되면 자율귀가 합니다.”라는 촛불집회 사회자의 망언(이게 망언이 아니면 무엇인가!)은 이들이 최초의 봉기자가 되어 마련한 공간을 이들에게서 박탈해버렸다. 그리고 이제 청소년들은 투표권도 없는 교육감 선거를 통해 이들의 삶의 문제, 교육의 문제를 해결하자고 하는 식이다.
그러므로 나는 낮꿈을 꾼다. 청소년들과 “청소년-되기”를 하는 많은 이들이 이 선거를 “우리의 삶을 어른들에게 맡길 수 없다. 투표권을 달라!”고 외치는 또 다른 봉기의 장으로 삼기를. 물론 ‘투표권 요구’는 현실가능하지도 않고, 또 투표권 자체가 운동의 목표는 아닐 것이다. 투표권은 사실 자신들의 삶을 주체적으로 살고 싶다는 삶정치의 한 표현일 뿐이다. 우리는 몇 년 전 “죽음의 트라이앵글”에 항의하며 거리로 나왔던 청소년들에게 소위 “교육운동”을 한다는 전교조 등의 운동가들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를 똑똑히 기억해야 한다. 수능 대신 내신을 강화하자는 그들의 운동은 청소년들에게는 또 하나의 지옥을 제공할 뿐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거리의 청소년들에게 “너희가 아직 잘 몰라서 그런다.”는 식으로 대응했다. 그랬던 이들이 이제는 또 자기들의 대표를 세워 교육문제를 해결하자고 하고 있다.
교육감 선거는 중요하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청소년들이 자신의 삶을 자신이 결정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그들의 봉기를 꿈꾸며, 그들의 봉기에 결합하고 싶다. 이 운동을 7월의 “투쟁 과제”의 하나로 제출하는 바이다. 이전과는 결코 같지 않을, 우리의 새로운 삶을 함께 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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