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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학 나온지 3년이 넘었으므로 - 물론 훨씬 오래 성공적으로 유학생활을 하고 있는 분들이라면 코웃음 칠 일일지도 모르겠다만 - 나도 이런 메모를 써 보기로 한다.
1. 어학공부에는 지금 당신이 생각하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시간이 들어간다.
-박사유학을 나올 때 쯤이면 우리 나이란 아무리 낮춰 잡아도 이미 스물 여섯 일곱은 되었을 것이다. 그 때까지 우리는 한국어로 인문학을 하느라 우리 언어를 얼마나 열심히 다듬었나. 우리가 쓰는 한국어는 전공 언어 뿐 아니라 그 이십 여 년을 반도에서 살면서 받았던 초중등교육, 수많은 경험들, 미디어, 문학 등의 복합물이다. 그리고 보통 인문계열의 공부란 이 모든 것을 필요로 한다. 그걸 외국어로 하는 게 유학생활이라는 것을 잊으면 안 된다. 여기서 함께 공부하는 연구자들은 우리가 한국어를 다듬으며 보낸 그 시간만큼 자기들의 모국어로 시간을 보냈다. 게다가 영어든 불어든 아무튼 인도유럽어 계열 외국어 역시 우리보다 훨씬 더 잘 한다. 당신이 현지의 모국어 사용자와 연애든, 깊은 우정이던, 룸메이트건 함께 사는 시간을 보낼 천혜의 기회를 누린다면 모르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정말 끝나지 않을 어학 공부를 계속해서 이어가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언제나 당신이 유학 나오기 전에 생각했던 것보다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이 들어가기 마련이다.
2. 박사논문의 계획은 아주 분명하게 미리 세워져 있어야 하며 그렇지 않다면 과감하게…
-이것은 나라마다 조금 다를텐데, 독일의 경우 대부분의 인문계 유학생들이 택하게 되는 개인연구형 박사과정은 사실 '박사과정'이 아니다. 코스웍이 없기 때문에 스스로 연구하고 제출해서 학위를 받는 시스템이다. 때문에 한국에서처럼 일단 설익은 계획이라도 내고 박사과정 속에서 공부하면서 논문 계획을 다듬을 수 없다. 처음부터 - 물론 나중에 대폭 수정되는 것이지만! - 완성형의 연구계획서가 있어야만 박사논문 지도교수를 찾을 수가 있다. 내 경우는 조금 불분명한 형태로 처음엔 니체와 벤야민에게서 나타나는 시간론, 혹은 영원회귀론을 각각 그리스적인 것, 유대-기독교적인 것의 틀로 비교연구하려는 계획이 있었는데, 역시 막상 해 보려니 엄두가 나질 않았다. 이곳의 쟁쟁한 벤야민 연구물들이 마침 또다시 나오고 있기도 했고. 그래서 결국 석사논문의 주제를 발전시켜서 다듬었다. 아무튼 당신은 이것을 독일어나 프랑스어 기타 등등으로 써야 한다! 그리고 연구계획서에는 이미 이 주제와 관련한 선행연구의 흐름이 정리되어 있어야 하고, 어떤 주제를, 누구와 상대하며 쓸 것인지도 이미 분명하게 계획이 서 있어야 한다. 거의 논문의 첫번째 챕터 분량의 연구계획이 필요한 것이다.
-때문에 당신이 그런 분명한 연구계획서를 어학자격시험을 마치고 1년 안에 완성해서 교수들을 찾아다닐 수 없을 것 같으면 과감하게 석사과정을 다시 밟을 것을 추천하고 싶다. 여기엔 많은 이득이 있다. 일단 석사를 마치면 "독일 학위"가 생긴다. 나는 아무리 박사과정에서 공부를 한다 해도, 독일대학에서 받은 졸업장이 없다. 그냥 유학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갈 생각이라면 이게 큰 문제가 아닌데, 독일이건 유럽 어디서건 자리를 잡고 싶은 사람이라면 이 학위는 매우 큰 메리트다. 공부를 포기하게 되어도 아무튼 학위를 가지고 정착하는데 도움이 조금은 된다. 실천적으로도, 석사과정을 밟으면서 빡세게 강제로 공부를 하게 되다보면, 현지어로 공부를 하는데 큰 진보가 없을 수가 없다. 한학기에 두개씩 꼬박꼬박 페이퍼를 쓰면서 학위논문을 현지어로 쓸 준비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대학에서 인맥도 쌓을 수 있는 가능성도 박사과정부터 시작하는 사람보다 훨씬 더 많다. 이런 것들은 어학공부에도 다 큰 재산이 된다. 때로 외국인 박사과정생들은 아무튼 아무 논문이나 써서 돌아갈 손님 정도로 취급받는 경우도 있다. 실제로 아무튼 논문을 쓸 수는 있지만 학문적 대화를 따라가지 못한 채로 학위받고 돌아가는 사람이, 아니 그 전에 모든 것을 포기하고 돌아가는 사람들이 정말 많다. 이런 점에서 지금 당장 쓸 수 있는 분명한 주제와, 그 주제분야에 대한 높은 이해를 갖고 있지 못하다면 석사과정을 하면서 준비하는 게 좋다. 어차피 박사과정으로 바로 들어가도 어학 때문에 시간 많이 쓰게 되는 것은 마찬가지다. 그리고 낮은 단계의 학위를 한다고, 하는데 잘 못하기까지 한다고 쓸 데 없이 자존감 상해하지만 않으면 그 몇년의 시간은 미래를 위한 귀중한 투자가 될 것이다.
3. 조바심 내지 않을 성정과 체력을 갖추지 못했다면 유학은 나오지 않는 것이 좋다.
-인문계열의 유학과정은 그야말로 장기전이다. 당신이 구사해야 할 언어는 이 사회에서도 가장 고급스러운 언어다. 그리고 그것을 갖추기 위해서는 정말 긴 시간이 들어간다. 당장 유학을 나온 첫 몇 해 동안 - 몇 달이 아니라 몇 해다! - 당신은 이곳에서 어린아이와도 같다. 그것을 즐길 수 있어야 한다. 즐기지 못하면 견디기라도 해야 한다. 중학생으로 돌아가서 6개월마다 자신이 학교를 하나씩 월반한다고 생각하면 조금 도움이 된다. 그리고 이런 식으로 긍정적으로 상황을 받아들이는 것은 체력에 달려 있다. 체력이 원래 약하거나, 체력단련을 싫어하거나 한다면 유학을 나오지 않는 게 좋다. 유학은 고통이다.
4. 공부가 급하다고 공부만 하면 공부도 못한다.
-안다. 당신이 공부를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당신이 그 속에서 얼마나 깊은 행복을 누리고, 당신의 주제가 얼마나 오늘날 학문의 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 것인지를. 하지만 어떤 공부도 맥락을 벗어나 있지 않다. 당신이 독일어로 그 논문을 쓴다면, 그것은 독일어를 쓰는 독자를 향한 것이다. 당신은 그 독자들을 "알아야" 한다. 어학공부를 위해서라도, 전공공부만 하는 것은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여러 사람들을 만나고, 혹은 어떤 특정한 취미 그룹이든, 정치단체건 당신의 삶을 일정하게 공유할 수 있는 현지인들과의 만남 속에서 공부를 하는 것이 좋다. 텍스트 역시 전공서적만이 아니라 소설, 잡지, 신문 등을 폭넓게 읽고 많은 어휘들을 익혀야 한다. 한국에선 그렇게 안 했다 할지라도, 여기선 뉴스도 매일매일 챙겨보는 것이 좋다. 당신이 살고 있는 그 사회가 어떻게 움직이는 지를 알면, 이 사회에서 어떤 학문적 필요를 가지고 있는지도 알 수 있는 법이다.
-당신이 만약 신학을 공부하고 있다면, 한인교회 다닐 생각일랑 일치감치 버리고 동네의 교구 교회를 다니길 추천한다. 많은 신학생들이 "유학가서 한인교회에서 전도사/부목사 하면서 학비 해결해야지" 정도의 나이브 한 생각을 너무 일찌감치 갖고 오는데, 나는 한번 어학공부 초기에 어학원에서 "유학온 지 4년 된 장신 출신 목사님"과 B2 수업을 같이 들은 적이 있다. 그것은 충공깽... 물론 나는 심지어 한인교회를 다니면서 한국인들과 많은 시간을 어울려 다님에도 독일어로 훌륭한 논문을 써서 학위를 받는 사람들을 진심으로 존경한다. 그는 초인임에 틀림없다. 그리고 당신은 아마 초인이 아닐 것이다. 나도 초인이 아니다.
5. 돈
-말해 무엇하나. 많으면 많을 수록 좋다.
6. 나는 근데 어학이 그렇게 힘들진 않을 걸 이라고 생각할 필요는 없다.
-사람의 아들(딸)이여, 나도 그렇게 생각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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