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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일요일 저녁, 10%대 후반의 시청률을 자랑하는 제1 공영 ARD의 국민토크쇼 귄터 야우크 쇼에 깜짝 게스트가 있었다. 그리스 재무장관 야니스 바로파키스를 직접 연결해서 토론을 했던 것. 아쉽게도 제대로 된 토론은 없었다. ARD가 작심하고 바로파키스의 면전에서 쇼비니즘적 악선전을 준비했기 때문이었다. 사회자인 야우크가 2년 전 크로아티아에서 열린 "Subversive Festival"의 영상 중에서 바로파키스가 강연 중에 독일인들을 향해 가운데 손가락을 올렸다고 주장하며, 강연 장면을 캡쳐해서 틀었던 것. 야우크는 이 영상을 보여주며 비장한 표정과 목소리로 냉각 중인 그리스-독일 관계에 대한 책임을 바로파키스에게 추궁했다. 웃자고 한 게 아니었던 것.
바로파키스는 즉각 이 영상이 편집된 것이라고 주장했지만, 이 토론 이후 독일 언론계와 소셜미디어를 통해 거센 반응이 일어났다. 누구보다 황색지 BILD가 이 틈을 놓칠 리가 없었다. 이들은 전문가들을 동원해 바로파키스가 이 영상이 편집되었다고 주장한 것이 거짓말이라고 주장했으며, 그간 지속적으로 해오던 "게으른 그리스인들이 독일 납세자들과 예금주들의 돈을 받아먹고 갚지 않으려 한다."는 프로파간다를 이 손가락 스캔들로 더 강화하려 했다. 편집인인 카이 디크만이 직접 나서서 바로파키스를 공격하는 칼럼을 썼다. 동시에 야우크 쇼가 토론이 아니라 타국 재무장관을 앞에 두고 창피를 주었다는 비판 역시 제기되었고, 신경질적인 논쟁이 이어졌다.
이 스캔들의 방향은 코메디언이자 제2 공영 ZDF의 Neo 채널에서 Neo Magazin을 진행하는 얀 뵈르머만이 자신의 쇼에서 "귄터 야우크는 우리가 조작한 영상을 진짜인냥 틀었다."고 주장하면서 확 바뀌게 된다. 독일의 정치풍자 코메디쇼는 그 수위가 매우 높은데, 공영방송의 정치풍자쇼에서조차도 주류 정치인들과 미디어에 대한 직접적인 풍자를 서슴치 않고, 대부분 급진좌파적인 포지션을 보여주는 편이다. 뵈르머만은 쇼의 시작부터 출연진들과 함께 계속해서 가운데 손가락을 들어 보이면서 양식있는 토론대신 손가락 영상 따위에나 몰두하는 독일 주류 언론을 풍자했는데, 압권은 스텝들이 실제로 이 영상을 날조하는 장면과 이들이 "가운데 손가락 없는 원본"이라고 주장한 영상과 조작되었다고 주장한 영상 둘 다를 반복해서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똑같은 시점에서 진행되는 두 영상은 모두 진본처럼 보였던 것이다.
쇼가 끝나자마자 독일 언론들과 소셜 미디어에서는 거대한 후폭풍이 불었다. ARD와 BILD지에서는 엄숙한 어조로 자신들이 결코 날조된 영상을 쓰지 않았다고 주장했으며, 뵈르머만 역시 유투브에 다시 한 번 영상을 찍어 올리면서 - 역시 풍자인지 진짜인지 모를 어조로 - 우리가 주장한 것은 100% 사실이며, 그보다 이 페이크의 페이크의 페이크의 페이크에나 몰두하고 있는 게 얼마나 바보같은 일인지를 다시 한 번 우스꽝스럽게 주장했다. 야니스 바로파키스는 트위터 계정에서 뵈르머만의 풍자를 칭찬하면서 ADR와 BILD지의 사과를 요구했다. 사실 이 영상이 사실이라 해도, 야우크가 애초에 틀었던 영상엔 전후 맥락이 삭제 되어 있었기 때문에 일치감치 편집을 통한 조작으로 타국 장관을 물먹였다는 비판이 나오고 있었다.
뵈르머만의 풍자 이후 여전히 사실관계를 가지고 소셜미디어에서는 갑론을박이 나오고 있지만, 무엇보다 야우크 쇼가 얼마나 바보같은 짓을 했는 지에 대해선 모두가 잘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신경질적인 민족주의-쇼비니즘적 미디어라는 독약에 대한 멋진 해독처방이었던 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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