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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새로운 오리엔탈리즘

독일 다큐멘터리 영화 «아트 워»는 어떻게 이집트 혁명을 힙스터 예술가들의 퍼포먼스로 기념하고 있는가

 

베를린의 영화감독 마르코 빌름스는 2011년 상반기에 혁명을 필름에 담기 위해 카이로로 향했다. 카이로의 젊은 혁명적 예술가들을 다룬 90분짜리 장편 다큐멘터리 «아트 워»에서 그는 새롭고 젊은, 반란의 이집트를 보여주겠노라 천명하고 있다. 그러나 좋은 의도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새로운 종류의, 더욱 미묘해진 오리엔탈리즘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전통적인 오리엔탈리즘은 에드워드 사이드가 비판했던 것처럼, “오리엔트”를 남성 지배가 관철되고, 폭력적이고 미개하며, 변하지 않는 곳으로 구성하면서 그것을 통해 오리엔트를 지배할 수 있고, 조종할 수 있는 곳으로 만드는 것이다. 아랍 국가들에서 일어난 봉기를 통해 오리엔탈리즘 담론은 새로운 상황 속으로 들어가게 되었지만 여기서도 아랍 세계와 사람들에 대한 서구오리엔탈리즘의 특권적 시선은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이 영화는 그것을 잘 보여주는 교과서같은 작품이다. 이 영화는 쿨하고 영어를 쓰며, 힙합과 일렉트로 뮤직을 듣고, 스니커즈를 신고 그래피티를 그리는 예술가들과 수염을 기른 남성 및 베일을 쓴 여성들을 구분한다. 후자는 마치 알라에게 정신이 나가 하늘을 가리키며 “혁명적 청년”들이 주도하는 이집트 혁명을 위협하는 사람들로 그려진다. 우리와 비슷한 사람들, 우리와 같은 음악을 듣고, 같은 옷을 입고 있는 사람들과 우리와 완전히 다른 사람들 사이의 이러한 이분법은 “오리엔탈(인)”에 대한 비합리적이고 위험하며, 수염을 기른 존재라는 전통적인 상을 그래도 유지하고 만다.

 

“오리엔탈”이라는 단어는 이 «아트 워»에서 등장하지 않는다. 이 단어는 위협적인 군중의 모습이나 가짜 수염을 붙이고 이상한 영어를 쓰면서 멍청함을 발산하는 이슬람교인의 캐리커쳐 같은 모습으로 등장한다. 청중들이 이슬람 주의와 전통적인 오리엔탈 문화의 위협에 대해 확신하게 만들기 위해서 말이다. “혁명적 청년”들은 이와 반대로 서구의 모범을 따르는 민주적 이집트를 대변한다. 그들은 스프레이를 뿌리면서 혹은 마치 파티를 하는 것처럼 자기들의 존재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한다. 하지만 과연 이 스타일리쉬한 상류층의 아이들이 “악마적인 동성애자들”(주-역설적인 의미인 듯)에 대해 노래하고, 수염을 기른 꽉 막힌 이슬람주의자들을 조롱할 때 무엇을 원하고 있는 걸까? 성 혁명에 대해 말하려는 것일까? 자신들의 파티 뮤직비디오를 촬영하면서 이들은 누구에게 말을 걸고 있는 것인가?

 

«아트 워»는 두 명의 “우리와 같은” 이집트 예술가들의 초상을 그려나가며 그들을 “혁명적 청년”이라 칭한다. 이를 통해 이 영화는 이집트 혁명이 마치 우리(주-서구)의 고유한 가치체계에서 나온 산물인냥 묘사한다. 그 가치체계는 “오리엔탈”을 자신의 위협으로서 (재)생산하며, 자신을 진보적이며 해방된 존재로 구성하기 위해서 젠더를 분석을 위한 범주로 사용하지만 결코 계급을 들먹이지는 않는다. 다른 사람들 - 우리만큼 해방되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와 다른 사람들 -, 그리고 이집트의 서발턴들 - 노동자들과 실업자들 - 이 혁명을 이끈 것이 아니라 힙스터, 성적으로 해방된 일렉트로 뮤지션들, 그래피티 예술가 등이 혁명의 주역이다. 우리는 그들의 예술 속에서 우리 자신을 보게 된다. 왜냐하면 그 예술은 우리를 위해 그려진 것이기 때문이다. «아트 워»의 “혁명적 청년”들은 이집트 인들을 향하여 말하지 않는다. 그들은 우리에게 말을 건다. 그들의 혁명은 어떤 정치적 목적도 추구하지 않는다. 그것은 사실 우리를 위해 마련된 퍼포먼스다.

 

에드워드 사이드는19세기의 오리엔탈리즘 담론이 옥시덴트와 자기 자신을 창조하기 위해 어떻게 오리엔트와 타자를 만들어냈는지를 분석했다. «아트 워»는 이집트 혁명에 대해 어떤 것도 말하지 않는다. 모든 것은 그들에 대한 우리의 상상을 다루고 있을 뿐이다. «아트 워»는 “서구”의 “우리”에 대해 무엇을 말해 주고 있는가? 우리는 그래피티와 일렉트로닉을 사랑하며 성적으로 자유롭다. 하지만 해방되지는 않았다. 우리는 혁명의 미학에 관심을 가지고 있지만, 그것의 원인에는 관심이 없다. 우리는 우리와 다른 사람들을 경멸하며 그들이 자신의 권리를 요구하는 것을 두려워한다. 우리는 우리에게 생소한 나라에 살지만, 우리처럼 살기를 원하는 사람들에게 동감할 뿐이다. 우리는 지금 포스트-정치적이며 혁명을 정치적 권리에 대한 싸움이 아니라 퍼포먼스로 이해하고 있을 뿐이다.

 

«아트 워»를 본 이후로 나는 서구 기독교 사회를 진심으로 걱정하고 있다.

 

필자 카트야 얀센_은 라이프치히에서 살면서 오리엔트 연구소에서 동시대 팔레스타인 디아스포라의 시에 대한 주제로 박사논문을 스고 있다. 

출처: http://akweb.de/ak_s/ak592/35.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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