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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의 수험생 김재석씨는 유죄인가

아내와 함께 백화점 식품관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일주일에 한번, 유학생 신분에 거의 유일하게 부리는 사치인 '린트너' 빵집의 통밀 식빵을 사기 위해서였다. 모처럼 나왔으니 평소엔 잘 안 먹는 벨기에 초콜렛도 하나 사 보자며 우리 둘은 들떠 있었다. 길게 늘어선 줄을 지나 계산을 할 때까지만 해도 우리는 무척 행복했다. 장갑 한 짝이 없어진 걸 발견하기 전까지.  
 
둘이서 백화점 안에서 지나다닌 길을 두 번이나 샅샅이 뒤졌지만 결국 장갑을 찾을 수 없었다. 10유로. 그닥 비싸지 않고 따뜻한 겨울 장갑의 가격이었다. 둘이서는 집에서 요리를 해먹으면 며칠 식비 정도 되는 금액이다. 별 것 아니라면 별 것 아닌 돈이다. 하지만 참을 수 없이 화가 났다. 조금 전까지 분명히 하고 있었던 장갑인데. 이걸 도대체 어디서 떨어뜨린 걸까. 나는 왜 여기서 생돈 10유로를 그냥 길바닥에 버린 걸까. 한 짝은 멀쩡하게 있는데 한 짝이 없어진 상황도 어처구니가 없고 더 화를 돋우었다. 그래. 결국 내가 죄인이다. 이 나이 먹도록 부모님께 생활비 받아 쓰고 있는 내가 죄인이고, 죄인 주제에 물건을 잃어버리기까지 하니 더욱 죄인이다. 생각이 여기까지 흐르니 이번엔 이 유치한 감정에 또 화가 난다. 
 
10유로. 한화로 따지만 15,000원 조금 못 되는 이 돈에 사람은 이렇게 화가 날 수 있다. 그런데 어느 날 하루 아침에 460만원을 모아야 한다면. 그 돈이 없어서 지금껏 살아온 삶에서 손꼽을만한 기쁜 일 하나를 그냥 공중에 날려버린다면. 그것도 거의 성사되었던 일 하나를. 그리고 결국 돈은 구하지 못하고, 어떻게 파국을 막아보고자 애 썼지만 그 기회가 지나가 버렸다면. 그는 얼마나 화가 날까. 이 세상에. 그리고 그 보다 스스로에게. 서울에 사는 수험생 김재석 씨가 겪은 일이다. 
 
'인권과 평화의 대학' 성공회대학교에 그동안 여러 운동현장에서 활동해온 경력을 인정받아 NGO전형에 합격한 김재석씨는 2월 초가 되어서야 등록금 고지서를 받았다. 460만원이라는 금액이 찍혀 있었다. 평범한 '19세'의 시민으로써 이 금액에 숨이 턱 막히지 않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리고 이런 일을 잘 도와줄 가족 친지도 별로 없는 가난한 '19세'의 시민으로써 등록금 문제, 학자금 대출관련 정보, 공인인증서와 액티브X, 인터넷 보안 등 한국의 특수하고 불편하기 그지 없는 금융관련 절차에 홀로 능통한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 그는 조금 늦게, 하지만 여하간 신청기간 내에 등록금 '대출'을 한국'장학'재단에 신청했다. 등록금 납부일은 8일에서 10일 단 삼일이었다. 승인은 더디고 더졌다. 등록금 납부기간이 될 때까지 발을 동동 구른 김재석 씨가 전화를 하면 재단 측에서는 "일단 사전 등록을 하던가, 460만원을 학교에 먼저 내고 기등록을 한 후 돈을 받도록 하라."라는 대답을 했다. 그러나 성공회대학교에는 사전 등록 제도가 없었고, 460만원을 당장에 그가 마련할 길은 없었다. 물론 길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이런 돈을 갑자기 댈 수 있는 친척이 없다 해도 잠깐이지만 사채를 끌어 쓸 수도, 혹은 굴욕을 무릅쓰고 돈을 빌리러 다닐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껏 여러 청소년 인권활동을 해 왔지만 그렇다고 이런 일에까지 능통할 수는 없을 19세의 평범한 시민에게 460만원을 하루만에 마련할 길은 없었다. 
 
그는 등록을 하지 못했다. 10일 2시에 승인이 났다는 것을 알았지만, - 만약 그가 회원가입시에 sms를 등록하면 된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더 일찍 알았을 수도 있다. - 집에 인터넷을 할 수 있는 컴퓨터가 없는 김재석씨는 PC방에 가야 했고, 외장하드에 담아온 공인인증서가 오류가 났다는 걸 알고, 다시 은행에 다녀와야 했고, 한국장학재단 홈페이지에 들어가서 이체를 시도했지만, 보안이 낮은 PC방 컴퓨터로는 액티브 액스를 깔고 공인인증서로 로그인을 하고 계좌 이체를 하는 그 모든 절차가 잘 안 된다는 걸 업무마감시간인 4시를 넘겨서까지도 알지 못했다. 그는 성공회대에 전화를 했다. 하루만 기다려줄 수 있냐고. 지금 승인이 났는데 컴퓨터가 문제가 생겨서 입금을 못한 거라고, 한국장학재단이 일처리가 늦었던 데다가 내 서류 팩스를 한번 누락하기까지 하는 실수를 저질렀다고. 안 된다고 했다. 처음엔 소명서를 받으면 도움을 줄 수 있다는 말을 내비쳤다가 윗선에서 안 된다고 했는지 다시 전화가 와서 절대로 안 된다고 했다. 
 
우리는 김재석씨를 쉽게 비난하고 싶은 유혹에 빠진다. 이미 기사화된 그의 이야기에 달린 댓글들을 보면, 그리고 그가 직접 올린 호소문에 달린 댓글들을 보면 "1월에 합격해 놓고 2월까지 왜 손놓고 있었냐.", "장학재단 홈페이지가 그런 걸 몰랐냐."라는 이야기가 줄줄줄 올라온다. "학교나 장학재단이 문제가 많지만 김재석씨의 행동도 실수가 많았네요 안타깝습니다." 식의 양비론으로 자신은 이렇게 바보같지 않다는 걸 확인하는 헛똑똑이들의 댓글도 달린다. 
 
19세의 시민 김재석씨는 죄인인가. 어렸을 때부터 저축이라도 하고, 알바라도 해서 460만원을 갖고 있지 못했던 김재석씨가, 명시적으로 공지된 절차보다 더 많은 절차와 복잡한 기술적 문제가 있다는 것을 몰랐던 김재석씨가, 자신의 인생에 대하여, 등록금을 마련해주지 못해 한없이 미안해하는 그의 가족에 대하여, 뒤늦게 이 사실을 알고 함께 괴로워하는 친구들에 대하여, 결국 너무 화가나서 쓴 호소문에 들어간 몇 가지 실수에 대하여, 성공회대와 한국장학재단의 욕먹는 담당자들에 대하여 죄인인가? 김재석씨의 이야기가 알려지자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같은 문제를 겪었다는 것이 알려졌다. 비슷비슷하게 학교와 장학재단 사이에 치여서, 자신의 무능을 탓하고 있던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을 우리는 알게 되었다. 이들이 죄인인가? 
 
서울의 4년제 대학교 한학기 등록금 및 입학금 460만원. 이것은 내가 멍청하게 어딘가에 떨어뜨린 10유로가 아니다. 이 금액을 내야만 교육을 받을 수 있는 세상이, 조그만 실수라도 몇 개가 쌓이면 온갖 굴욕을 겪으면서 돈을 마련하거나, 등록을 못해 호소문을 쓰면서 '그것도 제대로 못했냐.'라는 댓글을 보게 만드는 이 세상이야말로 유죄가 아닌가! 나는 묻고 싶다. 만약 김재석씨가 힘겹게 460만원을 마련하여 등록을 한다면, 그가 이런 저런 전화나 민원을 넣어서 그의 사정을 이미 알고 있을 장학재단의 담당자나, 성공회대 입학처의 직원은 "정말 이렇게 굴욕을 감내하게 해서, 힘겹게 해서 죄송합니다."라는 사과 한 마디라도 했을까. 아니다. 그들은 그럴 필요가 없다. 그들은 절차상 잘못한 게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적어도 그들이 그런 사과 한마디를 하지 않아도 되는 이 시스템은 유죄가 아닌가. 
 
이게 사는 건가. 10유로짜리 장갑의 한 짝을 잃어버려도 화가 치솟고 스스로를 탓하는 인간이 적지 않을(그렇게 믿고 싶다.) 이 세상에서, 매년 수많은 젊은이들이 수백만원의 돈에 가슴이 턱 막히고, 몇 개의 실수가 겹쳐서 그동안 공부하고, 활동했던 것을 통해 얻은 대학입학의 자격을 박탈당하고, 가족들과 친구들에게 한없이 미안해야 하고, 악플까지 받아 가면서 성인으로써의 첫 발을 내딛는 이런 게 사람 사는 건가. 한 학기에 30만원 정도의 돈을 내면 시내 교통비까지 포함된 학생증을 주고, 1학기 째에는 시청에서 100유로의 돈을 주는 독일같은 곳이 없더라도,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독립해서 살 수 있도록 월세와 기본생활비까지 주는 덴마크 같은 곳이 없더라도 이 사회는 유죄다. 
 
나는 내 친구 김재석씨가 부디 성공회대 합격이 취소되지 않고 이번 학기부터 학업을 시작할 수 있기를 바란다. 그것은 그가 단 하나의 실수도 없이 당당하게 입학을 주장할 수 있기 때문은 아니다. 19세의 실수 많았던 시민에게서 공부할 자격을 박탈할 권리가 이 죄 많은 사회에는 없기 때문이다. 김재석씨 한 사람을 이번 학기에 성공회대학에서 받아들이는 건 원칙에 위배되는 온정주의적 해법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온정주의는 그 원칙이 정의로운 사회 안에 있는 원칙일 때만 비판받아야 한다. 그 전까지는, 그것은 모든 것을 전부 개인의 책임으로 돌리고 손을 떼는 이 자본주의 세상에도 '사람'이 있다는 것의 증거일 뿐이다. 그래서 김재석씨는 3월부터 공부를 시작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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