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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수업 문서 주소 _ 트친소 선생님들 보세요.

 

 

 

1. 안녕하세요 @minkim48 김갑수입니다.  오늘 수업은 Google Docs에서 제공하는 스프레드시트에서 협동학습으로 진행합니다.  말은 거창하지만 하지만 뭐 아이들이 웹 페이지에다가 모둠별로 간단한 소설을 한 편 쓰는 활동입니다.

 

2. 오늘 수업을 트친 선생님께 공개하였는데 다음 사항을 지켜주세요.

 

- 수업 진행을 보시고 싶으시면 f5를 눌러주세요. '저장'은 누르지 말아주세요. 아이들 자료가 날아갑니다.

- 수업에 참여하실 수 있는데, 저장을 하실 때는 꼭 쓰신 내용을 블록을 지정하여 복사한 후에 f5를 누르시고 (즉, 아이들이 실시간으로 저장한 내용이 반영된 후에)  복사한 블록을 저장해주세요.

 

2번 사항을 지켜주시지 않으면 수업이 안드로메다로 날아갑니다. (아이들 자료가 날아갑니다!)

 

 

 

 

1모둠

http://docs.google.com/Doc?docid=0Aeq88VvVxc6dZGc5ZGozNGJfMTdmZDhwcHpjZA&hl=en


2모둠


http://docs.google.com/Doc?docid=0Aeq88VvVxc6dZGc5ZGozNGJfMThoZzVxOGRnbQ&hl=en


3모둠

http://docs.google.com/Doc?docid=0Aeq88VvVxc6dZGc5ZGozNGJfMTlkZmJuOHRnNQ&hl=en


4모둠

http://docs.google.com/Doc?docid=0Aeq88VvVxc6dZGc5ZGozNGJfMjBmNmpoZmhoZA&hl=en


5모둠

http://docs.google.com/Doc?docid=0Aeq88VvVxc6dZGc5ZGozNGJfMjFxN3NtbmRkdg&hl=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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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공이

 

각 모둠별로 끌어다 붙여 주세요.

 

1모둠

http://docs.google.com/Doc?docid=0Aeq88VvVxc6dZGc5ZGozNGJfMTdmZDhwcHpjZA&hl=en


2모둠


http://docs.google.com/Doc?docid=0Aeq88VvVxc6dZGc5ZGozNGJfMThoZzVxOGRnbQ&hl=en


3모둠

http://docs.google.com/Doc?docid=0Aeq88VvVxc6dZGc5ZGozNGJfMTlkZmJuOHRnNQ&hl=en


4모둠

http://docs.google.com/Doc?docid=0Aeq88VvVxc6dZGc5ZGozNGJfMjBmNmpoZmhoZA&hl=en


5모둠

http://docs.google.com/Doc?docid=0Aeq88VvVxc6dZGc5ZGozNGJfMjFxN3NtbmRkdg&hl=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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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성산별곡_본문 해설

  성산별곡(星山別曲)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어떤 지나가는 나그네가 성산에 머물면서,
서하당 식영정의 주인아 내 말을 들어 보소.
인간 세상에 좋은 일이 많거마는,
어찌 한 강산을 갈수록 낫게 여겨,
적막한 산중에 들어가고 아니 나오시는가.
솔뿌리를 다시 쓸고 대나무 침대에 자리를 보아,
잠시 올라앉아 어떤가 하고 다시 보니,
하늘가에 떠 있는 구름이 서석을 집을 삼아.
나가는 듯하다가 들어가는 모습이 주인과 어떠한가.
시내의 흰 물결이 정자 앞에 둘러 있으니,
하늘의 은하수를 누가 베어 내어,
잇는 듯 펼쳐 놓은 듯 야단스럽기도 야단스럽구나.
산 속에 달력이 없어서 사계절을 모르더니.
눈 아래 헤친 경치가 철을 따라 절로 생겨나니,
듣고 보는 것이 모두 신선이 사는 세상이로다.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매창 아침볕의 향기에 잠을 깨니,
산늙은이의 할 일이 아주 없지도 아니하다.
울타리 밑 양지 편에 오이씨를 뿌려 두고,
김을 매고, 북을 돋우면서 비 온 김에 가꾸어 내니,
짚신을 죄어 신고 대나무 지팡이를 흩어 짚으니,
도화 핀 시냇길이 방초주에 이어졌구나.
잘 닦은 거울 속에 저절로 그린 돌병풍,
그림자를 벗삼아 서하로 함께 가니,
무릉도원이 어디인가, 여기가 바로 그곳이로다.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남풍이 문득 불어 녹음을 헤쳐 내니,
철을 아는 꾀꼬리는 어디에서 왔는가.
희황 베개 위에 선잠을 얼핏 깨니,
공중의 젖은 난간이 물 위에 떠 있구나.
삼베옷을 여며 입고 갈건을 비껴 쓰고,
허리를 구부리거나 기대면서 보는 것이 고기로다.
하룻밤 비 온 뒤에 붉은 연꽃과 흰 연꽃이 섞어 피니,
바람기가 없어서 모든 산이 향기로다.
염계를 마주하여 태극성을 묻는 듯,
노자암을 건너보며 자미탄을 곁에 두고,
큰 소나무를 차일삼아 돌길에 앉으니,
인간 세상의 유월이 여기는 가을이로구나.
청강에 떠 있는 오리가 흰 모래에 옮겨 앉아,
흰 갈매기를 벗삼고 잠깰 줄을 모르나니,
무심하고 한가함이 주인과 비교하여 어떤가.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오동나무 사이로 가을달이 사경에 돋아오니,
천암만학이 낮보다도 더 아름답구나.
호주의 수정궁을 누가 옮겨 왔는가.
은하수를 뛰어 건너 광한전에 올라 있는 듯.
한 쌍의 늙은 소나무를 조대에 세워 놓고,
그 아래에 배를 띄워 가는 대로 내버려 두니,
홍료화 백반주를 어느 사이에 지났길래.
환벽당 용의 못이 뱃머리에 닿았구나.
푸른 풀이 우거진 강변에서 소 먹이는 아이들이,
석양의 흥을 못 이겨 피리를 비껴 부니,
물 아래 잠긴 용이 잠을 깨어 일어날 듯,
연기 기운에 나온 학이 제 집을 버려 두고
반공에 솟아 뜰 듯.
소동파의 적벽부에는 가을 칠월이 좋다 하였으되,
팔월 보름밤을 모두 어찌 칭찬하는가.
잔구름이 흩어지고 물결도 잔잔한 때에,
하늘에 돋은 달이 소나무 위에 걸렸으니,
달을 잡으려다 물에 빠졌다는 이태백의 일이 야단스럽다.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공산에 쌓인 낙엽을 북풍이 걷으며 불어,
떼구름을 거느리고 눈까지 몰아 오니,
온갖 나무들을 잘도 꾸며 내었구나.
앞 여울물 가리워 얼고 외나무 다리 걸려 있는데,
막대를 멘 늙은 중이 어느 절로 간단 말인가.
산늙은이의 이 부귀를 남에게 소문내지 마오.
경요굴 은밀한 세계를 찾을 이가 있을까 두렵도다.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산중에 벗이 없어 서책을 쌓아 놓고,
만고의 인물들을 거슬러 세어 보니,
성현도 많거니와 호걸도 많고 많다.
하늘이 인간을 지으실 때 어찌 무심하랴마는,
어찌 된 시운이 흥했다 망했다 하였는가.
모를 일도 많거니와 애달픔도 끝이 없다.
기산의 늙은 고불(古佛) 귀는 어찌 씻었던가.
소리가 난다고 핑계하고 표주박을 버린 허유의 조장이 가장 높다.
인심이 얼굴 같아서 볼수록 새롭거늘,
세상사는 구름이라 험하기도 험하구나.
엊그제 빚은 술이 얼마나 익었느냐?
술잔을 잡거니 권하거니 실컷 기울이니,
마음에 맺힌 시름이 조금이나마 덜어지는구나,
거문고 줄을 얹어 풍입송을 타자꾸나.
손님인지 주인인지 다 잊어버렸도다.
높고 먼 공중에 떠 있는 학이 이골의 진선이라.
이전에 달 아래서 혹시 만나지 아니하였는가?
손님이 주인에게 이르기를 그대가 곧 진선인가 하노라.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요점 정리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지은이 : 정철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연대 : 조선 명종 때(1560년)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갈래 : 서정 가사, 양반 가사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형식 : 총84절(행), 168구이며 3·4조가 주축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성격 : 전원적, 풍류적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주제 : 성산의 풍물과 김성원의 풍류를 예찬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내용 연구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구성
    서사 : 김성원의 전원 심취와 식영정 주변의 모습
    본사1 : 성산의 봄 풍경(春景)
    본사2 : 성산의 여름 풍경(夏景)
    본사3 : 성산의 가을 풍경(秋景)
    본사4 : 성산의 겨울 풍경(冬景)
    결사 : 전원 생활의 멋과 풍류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어떤 지나가는 나그네가 성산에 머물면서,
서하당 식영정의 주인아 내 말을 들어 보소.
인간 세상에 좋은 일이 많거마는,
어찌 한 강산을 갈수록 낫게 여겨,
적막한 산중에 들어가고 아니 나오시는가.
솔뿌리를 다시 쓸고 대나무 침대에 자리를 보아,
잠시 올라앉아 어떤가 하고 다시 보니,
하늘가에 떠 있는 구름이 서석을 집을 삼아.
나가는 듯하다가 들어가는 모습이 주인과 어떠한가.
시내의 흰 물결이 정자 앞에 둘러 있으니,
하늘의 은하수를 누가 베어 내어,
잇는 듯 펼쳐 놓은 듯 야단스럽기도 야단스럽구나.
산 속에 달력이 없어서 사계절을 모르더니.
눈 아래 헤친 경치가 철을 따라 절로 생겨나니,
듣고 보는 것이 모두 신선이 사는 세상이로다.
-
서사 - 김성원의 전원 심취와 식영정 주변의 모습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매창 아침볕의 향기에 잠을 깨니,
산늙은이의 할 일이 아주 없지도 아니하다.
울타리 밑 양지 편에 오이씨를 뿌려 두고,
김을 매고, 북을 돋우면서 비 온 김에 가꾸어 내니,
짚신을 죄어 신고 대나무 지팡이를 흩어 짚으니,
도화 핀 시냇길이 방초주에 이어졌구나.
잘 닦은 거울 속에 저절로 그린 돌병풍,
그림자를 벗삼아 서하로 함께 가니,
무릉도원이 어디인가, 여기가 바로 그곳이로다.
-
본사 1 - 성산의 봄 풍경(春景)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남풍이 문득 불어 녹음을 헤쳐 내니,
철을 아는 꾀꼬리는 어디에서 왔는가.
희황 베개 위에 선잠을 얼핏 깨니,
공중의 젖은 난간이 물 위에 떠 있구나.
삼베옷을 여며 입고 갈건을 비껴 쓰고,
허리를 구부리거나 기대면서 보는 것이 고기로다.
하룻밤 비 온 뒤에 붉은 연꽃과 흰 연꽃이 섞어 피니,
바람기가 없어서 모든 산이 향기로다.
염계를 마주하여 태극성을 묻는 듯,
노자암을 건너보며 자미탄을 곁에 두고,
큰 소나무를 차일삼아 돌길에 앉으니,
인간 세상의 유월이 여기는 가을이로구나.
청강에 떠 있는 오리가 흰 모래에 옮겨 앉아,
흰 갈매기를 벗삼고 잠깰 줄을 모르나니,
무심하고 한가함이 주인과 비교하여 어떤가.
-
본사 2 - 성산의 여름 풍경(夏景)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오동나무 사이로 가을달이 사경에 돋아오니,
천암만학이 낮보다도 더 아름답구나.
호주의 수정궁을 누가 옮겨 왔는가.
은하수를 뛰어 건너 광한전에 올라 있는 듯.
한 쌍의 늙은 소나무를 조대에 세워 놓고,
그 아래에 배를 띄워 가는 대로 내버려 두니,
홍료화 백반주를 어느 사이에 지났길래.
환벽당 용의 못이 뱃머리에 닿았구나.
푸른 풀이 우거진 강변에서 소 먹이는 아이들이,
석양의 흥을 못 이겨 피리를 비껴 부니,
물 아래 잠긴 용이 잠을 깨어 일어날 듯,
연기 기운에 나온 학이 제 집을 버려 두고
반공에 솟아 뜰 듯.
소동파의 적벽부에는 가을 칠월이 좋다 하였으되,
팔월 보름밤을 모두 어찌 칭찬하는가.
잔구름이 흩어지고 물결도 잔잔한 때에,
하늘에 돋은 달이 소나무 위에 걸렸으니,
달을 잡으려다 물에 빠졌다는 이태백의 일이 야단스럽다.

-
본사 3 - 성산의 가을 풍경(秋景)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공산에 쌓인 낙엽을 북풍이 걷으며 불어,
떼구름을 거느리고 눈까지 몰아 오니,
온갖 나무들을 잘도 꾸며 내었구나.
앞 여울물 가리워 얼고 외나무 다리 걸려 있는데,
막대를 멘 늙은 중이 어느 절로 간단 말인가.
산늙은이의 이 부귀를 남에게 소문내지 마오.
경요굴 은밀한 세계를 찾을 이가 있을까 두렵도다.
-
본사 4 - 성산의 겨울 풍경(冬景)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산중에 벗이 없어 서책을 쌓아 놓고,
만고의 인물들을 거슬러 세어 보니,
성현도 많거니와 호걸도 많고 많다.
하늘이 인간을 지으실 때 어찌 무심하랴마는,
어찌 된 시운이 흥했다 망했다 하였는가.
모를 일도 많거니와 애달픔도 끝이 없다.
기산의 늙은 고불(古佛) 귀는 어찌 씻었던가.
소리가 난다고 핑계하고 표주박을 버린 허유의 조장이 가장 높다.
인심이 얼굴 같아서 볼수록 새롭거늘,
세상사는 구름이라 험하기도 험하구나.
엊그제 빚은 술이 얼마나 익었느냐?
술잔을 잡거니 권하거니 실컷 기울이니,
마음에 맺힌 시름이 조금이나마 덜어지는구나,
거문고 줄을 얹어 풍입송을 타자꾸나.
손님인지 주인인지 다 잊어버렸도다.
높고 먼 공중에 떠 있는 학이 이골의 진선이라.
이전에 달 아래서 혹시 만나지 아니하였는가?
손님이 주인에게 이르기를 그대가 곧 진선인가 하노라.
-
결사 - 전원 생활의 멋과 풍류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이해와 감상

  이 작품은 당시 성산동 식영정에 모인 사선(四仙), 즉 김성원, 정철, 임억령, 고경명이 같은 제목과 압운으로 지은 한시 '식영암잡영' 20수를 부연, 설명하고 탈태시켜 만든 것이므로 엄밀히 말해서 정철 자신의 순수한 창의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시인으로서의 정철 자신의 순수한 생활면에서 빚어진 작품이고, 그의 일과 개성이 비교적 풍부하게 반영되어 있어 또 다른 그의 일면을 엿볼 수 있는 작품으로 정철이 25세 되던 해, 그의 처 외재당숙인 김성원(金成遠)이 서하당과 식영정을 지었을 때, 사계절에 따른 그 곳의 풍물과 김성원에 대한 흠모의 정을 노래한 작품이다. 정철은 을축사화로 말미암아 귀양다니던 아버지를 따라 16세 때 낙향하여, 등과한 27세까지 전남 함평 지곡리에서 지냈던 것이다. 이 작품은 서하당의 주인인 김성원의 멋과 풍류를 노래하고 있지만, 사실은 정철 자신의 풍류를 읊은 것이라 할 수 있다. 다른 작품에 비해서 한자어와 전고가 많아 한시적인 분위기가 짙고, 한 개인의 칭송에 치우친 감이 있어 보편성이 희박한 점이 아쉽기는 하지만, 송강 정철의 체험에서 우러난 전원 생활의 흥취와 지은이의 개성이 잘 드러난 작품이라 하겠다.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심화 자료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성산별곡

 조선 선조 때 정철(鄭澈)이 지은 가사. 총 84절(행) 168구이며, 3·4조가 주축을 이루고 있는데 4·4조, 3·3조, 2·4조 혹은 2·3조, 4·3조 등도 더러 있다. 송강가사 松江歌辭≫·≪송강별집추록유사 松江別集追錄遺詞≫·≪서하당유고 棲霞堂遺稿 등에 수록되어 있다.
성산은 전라남도 담양군 창평면 지곡리에 있는 지명이다. 정철이 25세 이후에 당쟁으로 정계를 물러나 이곳에서 살 때 김성원(金成遠)을 위하여 이 작품을 지었다고 한다. 당시의 문인 김성원이 세운 서하당(棲霞堂)
·식영정(息影亭)을 중심으로 계절에 따라 변하는 경치와 김성원의 풍류를 예찬한 노래이다.
내용은 전체를 6단으로 나눌 수 있다. 제1단은 서사(緖詞)에 해당한다. 서하당
·식영정에 머물며 세상에 나가지 않는 주인 김성원의 풍류와 기상, 그리고 선간(仙間) 같은 식영정의 자연경관을 노래하였다.
제2단은 춘사(春詞)로 성산의 봄 경치와 주인공의 생활을 그린 것이며, 제3단은 하사(夏詞)로 신선하고 한가한 성산의 여름 풍경을 묘사하였다. 제4단은 추사(秋詞)인데, 성산의 가을 달밤 풍경을 읊었다. 제5단은 눈 내린 성산의 겨울 경치와 이곳에 은거하는 늙은이의 부귀를 노래한 동사(冬詞)이다.
끝으로 제6단은 결사(結詞)로서 산중에 벗이 없어 독서를 통하여 고금의 성현과 호걸들을 생각하고 그 흥망과 지조를 느끼며, 뜬구름 같은 세상에 술 마시고 거문고나 타는 진선(眞仙)같은 생활의 즐거움을 노래하였다.
이 작품은 당시 성산동 식영정에 모인 사선(四仙), 즉 김성원
·정철·임억령(林億齡)·고경명(高敬命)이 같은 제목과 압운으로 지은 한시 식영정잡영 息影亭雜詠 20수를 부연, 설명하고 탈태(奪胎)시켜 만든 것이다. 즉 엄밀히 말해서 정철 자신의 순수한 창의라고 할 수는 없다.
다른 작품에 비하여 한어구(漢語句)와 전고(典故)가 많아 한시적인 분위기가 짙고, 한 개인과 지역에 대한 칭송이기 때문에 보편성이 희박한 점이 아쉽다. 그러나 시인으로서의 정철 자신의 순수한 생활면에서 빚어진 작품이고, 그의 얼과 개성이 비교적 풍부하게 반영되어 있어 이 작품을 통해 그의 또다른 일면을 엿볼 수 있다.

참고문헌 松江歌辭(金思燁, 文豪社, 1959), 鄭松江硏究(金思燁, 啓蒙社, 1950), 松江·蘆溪·孤山의 詩歌文學(朴晟義, 예그린出版社, 1978).(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출처 : http://www.seelotus.com/frame_g.htm '희망의 문학'

직접 해석해 보고 위 해설과 비교해 보세요. 문제 해설은 내일 올리겠습니다.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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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성산별곡_본문 해설

  성산별곡(星山別曲)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어떤 지나가는 나그네가 성산에 머물면서,
서하당 식영정의 주인아 내 말을 들어 보소.
인간 세상에 좋은 일이 많거마는,
어찌 한 강산을 갈수록 낫게 여겨,
적막한 산중에 들어가고 아니 나오시는가.
솔뿌리를 다시 쓸고 대나무 침대에 자리를 보아,
잠시 올라앉아 어떤가 하고 다시 보니,
하늘가에 떠 있는 구름이 서석을 집을 삼아.
나가는 듯하다가 들어가는 모습이 주인과 어떠한가.
시내의 흰 물결이 정자 앞에 둘러 있으니,
하늘의 은하수를 누가 베어 내어,
잇는 듯 펼쳐 놓은 듯 야단스럽기도 야단스럽구나.
산 속에 달력이 없어서 사계절을 모르더니.
눈 아래 헤친 경치가 철을 따라 절로 생겨나니,
듣고 보는 것이 모두 신선이 사는 세상이로다.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매창 아침볕의 향기에 잠을 깨니,
산늙은이의 할 일이 아주 없지도 아니하다.
울타리 밑 양지 편에 오이씨를 뿌려 두고,
김을 매고, 북을 돋우면서 비 온 김에 가꾸어 내니,
짚신을 죄어 신고 대나무 지팡이를 흩어 짚으니,
도화 핀 시냇길이 방초주에 이어졌구나.
잘 닦은 거울 속에 저절로 그린 돌병풍,
그림자를 벗삼아 서하로 함께 가니,
무릉도원이 어디인가, 여기가 바로 그곳이로다.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남풍이 문득 불어 녹음을 헤쳐 내니,
철을 아는 꾀꼬리는 어디에서 왔는가.
희황 베개 위에 선잠을 얼핏 깨니,
공중의 젖은 난간이 물 위에 떠 있구나.
삼베옷을 여며 입고 갈건을 비껴 쓰고,
허리를 구부리거나 기대면서 보는 것이 고기로다.
하룻밤 비 온 뒤에 붉은 연꽃과 흰 연꽃이 섞어 피니,
바람기가 없어서 모든 산이 향기로다.
염계를 마주하여 태극성을 묻는 듯,
노자암을 건너보며 자미탄을 곁에 두고,
큰 소나무를 차일삼아 돌길에 앉으니,
인간 세상의 유월이 여기는 가을이로구나.
청강에 떠 있는 오리가 흰 모래에 옮겨 앉아,
흰 갈매기를 벗삼고 잠깰 줄을 모르나니,
무심하고 한가함이 주인과 비교하여 어떤가.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오동나무 사이로 가을달이 사경에 돋아오니,
천암만학이 낮보다도 더 아름답구나.
호주의 수정궁을 누가 옮겨 왔는가.
은하수를 뛰어 건너 광한전에 올라 있는 듯.
한 쌍의 늙은 소나무를 조대에 세워 놓고,
그 아래에 배를 띄워 가는 대로 내버려 두니,
홍료화 백반주를 어느 사이에 지났길래.
환벽당 용의 못이 뱃머리에 닿았구나.
푸른 풀이 우거진 강변에서 소 먹이는 아이들이,
석양의 흥을 못 이겨 피리를 비껴 부니,
물 아래 잠긴 용이 잠을 깨어 일어날 듯,
연기 기운에 나온 학이 제 집을 버려 두고
반공에 솟아 뜰 듯.
소동파의 적벽부에는 가을 칠월이 좋다 하였으되,
팔월 보름밤을 모두 어찌 칭찬하는가.
잔구름이 흩어지고 물결도 잔잔한 때에,
하늘에 돋은 달이 소나무 위에 걸렸으니,
달을 잡으려다 물에 빠졌다는 이태백의 일이 야단스럽다.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공산에 쌓인 낙엽을 북풍이 걷으며 불어,
떼구름을 거느리고 눈까지 몰아 오니,
온갖 나무들을 잘도 꾸며 내었구나.
앞 여울물 가리워 얼고 외나무 다리 걸려 있는데,
막대를 멘 늙은 중이 어느 절로 간단 말인가.
산늙은이의 이 부귀를 남에게 소문내지 마오.
경요굴 은밀한 세계를 찾을 이가 있을까 두렵도다.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산중에 벗이 없어 서책을 쌓아 놓고,
만고의 인물들을 거슬러 세어 보니,
성현도 많거니와 호걸도 많고 많다.
하늘이 인간을 지으실 때 어찌 무심하랴마는,
어찌 된 시운이 흥했다 망했다 하였는가.
모를 일도 많거니와 애달픔도 끝이 없다.
기산의 늙은 고불(古佛) 귀는 어찌 씻었던가.
소리가 난다고 핑계하고 표주박을 버린 허유의 조장이 가장 높다.
인심이 얼굴 같아서 볼수록 새롭거늘,
세상사는 구름이라 험하기도 험하구나.
엊그제 빚은 술이 얼마나 익었느냐?
술잔을 잡거니 권하거니 실컷 기울이니,
마음에 맺힌 시름이 조금이나마 덜어지는구나,
거문고 줄을 얹어 풍입송을 타자꾸나.
손님인지 주인인지 다 잊어버렸도다.
높고 먼 공중에 떠 있는 학이 이골의 진선이라.
이전에 달 아래서 혹시 만나지 아니하였는가?
손님이 주인에게 이르기를 그대가 곧 진선인가 하노라.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요점 정리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지은이 : 정철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연대 : 조선 명종 때(1560년)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갈래 : 서정 가사, 양반 가사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형식 : 총84절(행), 168구이며 3·4조가 주축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성격 : 전원적, 풍류적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주제 : 성산의 풍물과 김성원의 풍류를 예찬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내용 연구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구성
    서사 : 김성원의 전원 심취와 식영정 주변의 모습
    본사1 : 성산의 봄 풍경(春景)
    본사2 : 성산의 여름 풍경(夏景)
    본사3 : 성산의 가을 풍경(秋景)
    본사4 : 성산의 겨울 풍경(冬景)
    결사 : 전원 생활의 멋과 풍류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어떤 지나가는 나그네가 성산에 머물면서,
서하당 식영정의 주인아 내 말을 들어 보소.
인간 세상에 좋은 일이 많거마는,
어찌 한 강산을 갈수록 낫게 여겨,
적막한 산중에 들어가고 아니 나오시는가.
솔뿌리를 다시 쓸고 대나무 침대에 자리를 보아,
잠시 올라앉아 어떤가 하고 다시 보니,
하늘가에 떠 있는 구름이 서석을 집을 삼아.
나가는 듯하다가 들어가는 모습이 주인과 어떠한가.
시내의 흰 물결이 정자 앞에 둘러 있으니,
하늘의 은하수를 누가 베어 내어,
잇는 듯 펼쳐 놓은 듯 야단스럽기도 야단스럽구나.
산 속에 달력이 없어서 사계절을 모르더니.
눈 아래 헤친 경치가 철을 따라 절로 생겨나니,
듣고 보는 것이 모두 신선이 사는 세상이로다.
-
서사 - 김성원의 전원 심취와 식영정 주변의 모습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매창 아침볕의 향기에 잠을 깨니,
산늙은이의 할 일이 아주 없지도 아니하다.
울타리 밑 양지 편에 오이씨를 뿌려 두고,
김을 매고, 북을 돋우면서 비 온 김에 가꾸어 내니,
짚신을 죄어 신고 대나무 지팡이를 흩어 짚으니,
도화 핀 시냇길이 방초주에 이어졌구나.
잘 닦은 거울 속에 저절로 그린 돌병풍,
그림자를 벗삼아 서하로 함께 가니,
무릉도원이 어디인가, 여기가 바로 그곳이로다.
-
본사 1 - 성산의 봄 풍경(春景)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남풍이 문득 불어 녹음을 헤쳐 내니,
철을 아는 꾀꼬리는 어디에서 왔는가.
희황 베개 위에 선잠을 얼핏 깨니,
공중의 젖은 난간이 물 위에 떠 있구나.
삼베옷을 여며 입고 갈건을 비껴 쓰고,
허리를 구부리거나 기대면서 보는 것이 고기로다.
하룻밤 비 온 뒤에 붉은 연꽃과 흰 연꽃이 섞어 피니,
바람기가 없어서 모든 산이 향기로다.
염계를 마주하여 태극성을 묻는 듯,
노자암을 건너보며 자미탄을 곁에 두고,
큰 소나무를 차일삼아 돌길에 앉으니,
인간 세상의 유월이 여기는 가을이로구나.
청강에 떠 있는 오리가 흰 모래에 옮겨 앉아,
흰 갈매기를 벗삼고 잠깰 줄을 모르나니,
무심하고 한가함이 주인과 비교하여 어떤가.
-
본사 2 - 성산의 여름 풍경(夏景)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오동나무 사이로 가을달이 사경에 돋아오니,
천암만학이 낮보다도 더 아름답구나.
호주의 수정궁을 누가 옮겨 왔는가.
은하수를 뛰어 건너 광한전에 올라 있는 듯.
한 쌍의 늙은 소나무를 조대에 세워 놓고,
그 아래에 배를 띄워 가는 대로 내버려 두니,
홍료화 백반주를 어느 사이에 지났길래.
환벽당 용의 못이 뱃머리에 닿았구나.
푸른 풀이 우거진 강변에서 소 먹이는 아이들이,
석양의 흥을 못 이겨 피리를 비껴 부니,
물 아래 잠긴 용이 잠을 깨어 일어날 듯,
연기 기운에 나온 학이 제 집을 버려 두고
반공에 솟아 뜰 듯.
소동파의 적벽부에는 가을 칠월이 좋다 하였으되,
팔월 보름밤을 모두 어찌 칭찬하는가.
잔구름이 흩어지고 물결도 잔잔한 때에,
하늘에 돋은 달이 소나무 위에 걸렸으니,
달을 잡으려다 물에 빠졌다는 이태백의 일이 야단스럽다.

-
본사 3 - 성산의 가을 풍경(秋景)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공산에 쌓인 낙엽을 북풍이 걷으며 불어,
떼구름을 거느리고 눈까지 몰아 오니,
온갖 나무들을 잘도 꾸며 내었구나.
앞 여울물 가리워 얼고 외나무 다리 걸려 있는데,
막대를 멘 늙은 중이 어느 절로 간단 말인가.
산늙은이의 이 부귀를 남에게 소문내지 마오.
경요굴 은밀한 세계를 찾을 이가 있을까 두렵도다.
-
본사 4 - 성산의 겨울 풍경(冬景)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산중에 벗이 없어 서책을 쌓아 놓고,
만고의 인물들을 거슬러 세어 보니,
성현도 많거니와 호걸도 많고 많다.
하늘이 인간을 지으실 때 어찌 무심하랴마는,
어찌 된 시운이 흥했다 망했다 하였는가.
모를 일도 많거니와 애달픔도 끝이 없다.
기산의 늙은 고불(古佛) 귀는 어찌 씻었던가.
소리가 난다고 핑계하고 표주박을 버린 허유의 조장이 가장 높다.
인심이 얼굴 같아서 볼수록 새롭거늘,
세상사는 구름이라 험하기도 험하구나.
엊그제 빚은 술이 얼마나 익었느냐?
술잔을 잡거니 권하거니 실컷 기울이니,
마음에 맺힌 시름이 조금이나마 덜어지는구나,
거문고 줄을 얹어 풍입송을 타자꾸나.
손님인지 주인인지 다 잊어버렸도다.
높고 먼 공중에 떠 있는 학이 이골의 진선이라.
이전에 달 아래서 혹시 만나지 아니하였는가?
손님이 주인에게 이르기를 그대가 곧 진선인가 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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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사 - 전원 생활의 멋과 풍류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이해와 감상

  이 작품은 당시 성산동 식영정에 모인 사선(四仙), 즉 김성원, 정철, 임억령, 고경명이 같은 제목과 압운으로 지은 한시 '식영암잡영' 20수를 부연, 설명하고 탈태시켜 만든 것이므로 엄밀히 말해서 정철 자신의 순수한 창의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시인으로서의 정철 자신의 순수한 생활면에서 빚어진 작품이고, 그의 일과 개성이 비교적 풍부하게 반영되어 있어 또 다른 그의 일면을 엿볼 수 있는 작품으로 정철이 25세 되던 해, 그의 처 외재당숙인 김성원(金成遠)이 서하당과 식영정을 지었을 때, 사계절에 따른 그 곳의 풍물과 김성원에 대한 흠모의 정을 노래한 작품이다. 정철은 을축사화로 말미암아 귀양다니던 아버지를 따라 16세 때 낙향하여, 등과한 27세까지 전남 함평 지곡리에서 지냈던 것이다. 이 작품은 서하당의 주인인 김성원의 멋과 풍류를 노래하고 있지만, 사실은 정철 자신의 풍류를 읊은 것이라 할 수 있다. 다른 작품에 비해서 한자어와 전고가 많아 한시적인 분위기가 짙고, 한 개인의 칭송에 치우친 감이 있어 보편성이 희박한 점이 아쉽기는 하지만, 송강 정철의 체험에서 우러난 전원 생활의 흥취와 지은이의 개성이 잘 드러난 작품이라 하겠다.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심화 자료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성산별곡

 조선 선조 때 정철(鄭澈)이 지은 가사. 총 84절(행) 168구이며, 3·4조가 주축을 이루고 있는데 4·4조, 3·3조, 2·4조 혹은 2·3조, 4·3조 등도 더러 있다. 송강가사 松江歌辭≫·≪송강별집추록유사 松江別集追錄遺詞≫·≪서하당유고 棲霞堂遺稿 등에 수록되어 있다.
성산은 전라남도 담양군 창평면 지곡리에 있는 지명이다. 정철이 25세 이후에 당쟁으로 정계를 물러나 이곳에서 살 때 김성원(金成遠)을 위하여 이 작품을 지었다고 한다. 당시의 문인 김성원이 세운 서하당(棲霞堂)
·식영정(息影亭)을 중심으로 계절에 따라 변하는 경치와 김성원의 풍류를 예찬한 노래이다.
내용은 전체를 6단으로 나눌 수 있다. 제1단은 서사(緖詞)에 해당한다. 서하당
·식영정에 머물며 세상에 나가지 않는 주인 김성원의 풍류와 기상, 그리고 선간(仙間) 같은 식영정의 자연경관을 노래하였다.
제2단은 춘사(春詞)로 성산의 봄 경치와 주인공의 생활을 그린 것이며, 제3단은 하사(夏詞)로 신선하고 한가한 성산의 여름 풍경을 묘사하였다. 제4단은 추사(秋詞)인데, 성산의 가을 달밤 풍경을 읊었다. 제5단은 눈 내린 성산의 겨울 경치와 이곳에 은거하는 늙은이의 부귀를 노래한 동사(冬詞)이다.
끝으로 제6단은 결사(結詞)로서 산중에 벗이 없어 독서를 통하여 고금의 성현과 호걸들을 생각하고 그 흥망과 지조를 느끼며, 뜬구름 같은 세상에 술 마시고 거문고나 타는 진선(眞仙)같은 생활의 즐거움을 노래하였다.
이 작품은 당시 성산동 식영정에 모인 사선(四仙), 즉 김성원
·정철·임억령(林億齡)·고경명(高敬命)이 같은 제목과 압운으로 지은 한시 식영정잡영 息影亭雜詠 20수를 부연, 설명하고 탈태(奪胎)시켜 만든 것이다. 즉 엄밀히 말해서 정철 자신의 순수한 창의라고 할 수는 없다.
다른 작품에 비하여 한어구(漢語句)와 전고(典故)가 많아 한시적인 분위기가 짙고, 한 개인과 지역에 대한 칭송이기 때문에 보편성이 희박한 점이 아쉽다. 그러나 시인으로서의 정철 자신의 순수한 생활면에서 빚어진 작품이고, 그의 얼과 개성이 비교적 풍부하게 반영되어 있어 이 작품을 통해 그의 또다른 일면을 엿볼 수 있다.

참고문헌 松江歌辭(金思燁, 文豪社, 1959), 鄭松江硏究(金思燁, 啓蒙社, 1950), 松江·蘆溪·孤山의 詩歌文學(朴晟義, 예그린出版社, 1978).(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출처 : http://www.seelotus.com/frame_g.htm '희망의 문학'

직접 해석해 보고 위 해설과 비교해 보세요. 문제 해설은 내일 올리겠습니다.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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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보기와 세상 살기 - D- WAR

심형래 아저씨의 영화 D-War가 '드디어' 한국에서 개봉했다.
 
심형래, 사실 나는 그를 아주 가까이서 본 적이 있다. 1984년의 일이었다. 나는 개봉동성당의 꼬마복사였다. 어쩌다가 중고등부 미사에 복사를 서게 됐는데 그 미사에 심형래 아저씨가 나왔다. 아마 영구시리즈가 나오기 전이었을 것이다. (확실치 않다)
신부님께서는 심형래 아저씨가 고려대학교를 졸업하셨고 훌륭한 연예인으로, 종교인으로 살아가고 있다고 소개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모든 복사들이 그렇듯, 나는 신부님 옆에 꼭 붙어 서서 코 앞에 있는 심형래 아저씨를 - 꽤 못생긴 얼굴을 - 바라보았었다. 나는 그때 분명 그를 동경하고 좋아했었다. 코미디언으로서 말이다.
 
세월이 23년이 흘렀다. 사실 그 중간에 '용가리'라는 영화로 '신 지식인 1호'라는 공익광고로 그의 얼굴을 심심치않게 보았으니 인터넷 상에 화려하게 다시 나타난 그의 모습이 썩 낯설거나, 놀랍거나 하지는 않았었다. 하지만  심형래라는 이름을 제목으로 달고 끊임 없이 흘러 나오는 영화 '디 워'에 대한, 토씨만 다른 복사-재복사 기사들에 대해서는 꽤나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사실 좀 이상했다. '보도자료'라는 것의 속성과 일부 기자들의 기사작성 행태 - 한 네티즌은 이를 두고 '기사는 발가락으로 십 분 만에 조낸 쓰는 거다'라고 말했다. - 에 대해 알고 있으면서도 동일한 내용을 담고 있는 기사들이 복사, 재복사 되어 무한정 배포, 재배포 되는 모습을 보며 혹시 내가 알던 훌륭한 연예인이자 종교인인 심형래 아저씨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던 것이다. 
 
그러다 영화를 보았다.
 
아, 이것은! 1984년도에 만난 심형래가 아닌가 하는 느낌이었다. 번쩍! 정수리에 우레를 얻어 맞고는 과거로 회귀한 듯한 느낌이었다. 정말 친숙했다. 나의 성장과 함께 회를 거듭해 온,  맞춤법이 틀린 영화 - 우뢰매('우레매'가 맞다)의 장면들이 2007년의 '디 워'에서 되풀이 되는 것이 아닌가. 
브라퀴 대장이 칼을 들고 한 번 베면 100미터 앞에 있는 사람들이 쾅 하고 다 터져 죽는다든지, 이쪽에서 포를 쾅 쏘면 저쪽에 있는 사람들이 '아으!'하며  날아간다든지 (전설의 고향 스턴트- 배운 사람들은 이를 '특촬물 촬영'이라고 하던데, 특촬물이 뭘 줄인 말인지 잘 모르겠다.) 하는 모습들 말이다.
 
게다가 '대한민국의 자랑'이라는 CG는 실사와 계속 어긋나서 도대체가 이야기에 집중을 하지 못하는 수준이었다. 물론 뒷배경이 실사가 아니라 CG로 만들었을 경우 (용과 이무기의 결투) 같은 것은 매우 자연스러웠다. 박수 쳐 줄만 했다. 하지만 이건 컴퓨터 게임이 아니라 영화 아닌가, 영화. 
 
내내 지적되었던 스토리라인은 그야말로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개연성을 완전히 상실한 이야기는 내내 물음표를 끌고다니다가 영화가 끝날 때까지 마침표를 찍지 못했다. 혹시 감독은 '선한 이무기가 이겼으니 됐다.'고 생각하는 걸까. 이거야 말로 우레매의 전형적인 엔딩이 아닌가. 권선징악.
 
영화를 보고 나오며 나는 사실 뿌듯했다. 내 좋은 친구, 동료들에게 일인당 약 7000원씩의 피같은 돈을 절약하게 해 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심야 할인을 받은 영화비 5000원으로 내 말에 동조할 20여명(아닐 지도 모르지만)의 사람들의 돈 14만원을 절약하게 해 줄 수 있다니! 나는 정말 몸바쳐 친구들에게 좋은 일을 한 셈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런데, 다음 날 출근을 해서 사람들에게 영화평을 들려주자, 그이들은 반신반의 하거나 발끈 하는 것이었다. 그들이 그토록 반발했던 이유는 전날 저녁에 본 영화평들과 관객들의 반응을 실은 기사들 때문이었다.
 
나는 집으로 돌아와 인터넷을 검색해 보았다. '관객들은 따뜻했다.' 혹은 '관객들 기립박수' 따위의 제목이 포털에 도배돼 있었다. 역시 나는 영화를 보기 전의 궁금증과 의아함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어째 이건 좀 이상하지 않은가. 어째서 이 수준의 영화에 사람들이 기립박수를 친 단 말인가.
 
얼마 전 퀴어 영화로 독립영화감독상을 받은 이송희일 감독은 이에 대해  "이 영화가 참 거시기하다는 평론의 글마다 주렁주렁 매달려 악다구니를 쓰는 애국애족의 벌거숭이 꼬마들을 지켜보는 건 정말 한 여름의 공포다” 라고 말했다. 나는 이 말에 전적으로 동감한다. 이 나라 사람들은 참 많은 것들을 민족주의 혹은 국가주의와 연결시켜 반응한다. 영화도 우리나라 영화, 축구도 우리나라 축구, 옷도 컴퓨터도 메이드인 코리아라는 자랑스러운 마음 말이다. 그리고는, 그 포장지에 스스로를 현혹시켜 속아넘어간다.
 
심감독의 노림수 (혹은 배급, 홍보회사의 노림수)가 그런 것이 아니었을까. 결국 대중은 무지하며, 선동에 의해 여론을 만들고 그 집단적인 여론은 개인의 판단을 마비시킬 수 있다는 생각이 있었던 게 아닐까. 그리하여 자신의 영화에 아리랑을 넣고 추접스럽게도 '나 영화 만드는 데 조낸 힘들었어.'라는 문구를 써 넣은 후에 사람들에게 영화와 관련 없는 감상을 강요했던 게 아닐까. (우리 모두 아는 얘기 아닌가. 이 세상의 모든 창작자들은 고통을 통해, 도전을 통해 창작하고 그 결과물로 평가 받는다. 하지만 대부분의 정직한 창작자들은 자신 몫의 고통을 관객에게 떠넘기지 않는다. 심지어 고등학교 연극반 아이들도 연극을 마치고 무대에 서서 '우린 조낸 힘들었어요.'라고 말하지 않는다. 박수 받았으면 고마워하고 야유를 받으면 마음 아파하며 입술을 깨물 뿐이다.) 어쩌면 사람들이 보고 싶었던 건 영화 '디 워'가 아니라 스크린이 암전 될 때마다, 애국애족하고 국가와 민족을 사랑하는 자랑스러운 대한국인 심형래 (혹은 자기 자신)가 아니었을까.
 
이런 식의 사회현상이 나는 씁쓸하다. 붉은 옷을 입고 시청에 나가지 않으면 안 되는 사회, 대형 서점에서 일주일 만 자신이 출판한 책을 사재기 하면 반년 동안 베스트 셀러로 자리매김 하는 사회, 영 거시기한 영화 한 편을 만들어 놓고 애국애족, 민족, 국가, 아아 대한민국으로 읍소하고 여론 몰이를 하면, '어 그래 너 힘들었다. 아이고 300억이나 쓴 우리나라 영화로구나, 이 영화에 대해 토를 다는 놈 모두 죽어라.' 소리지르는, 우리 천박한 사회, 넥타이 맨 맨발의 세상을 보는 것이 아프다.  
 
나는 묻고 싶다. 디 워가 좀 망하면 어떤가. '고통 속에서' 창작되는 수많은 영화들이 완성도 되지 못하고 퍼져버리는 게 충무로의 현실, 아니 전 세계 영화판의 현실이다.  심감독에게 열정이 남아 있다면 소설도 좀 읽으시고, 카메라 앵글도 좀 더 공부하시고, 영구아트무비의 CG만으로 불가능한 부분은 다른 도움도 좀 받으면서 다시 찍으면 될 일이다.
 
마치 디 워가 망하면 우리나라의 영화판이 다 망해버리는 것처럼 쓰는 거짓말 기사들(삼성전자 반도체공장에 전기가 나가서 500억의 손실이 날테고 장기화 되면 몇 조원의 손실이 생길거라는 J일보의 1면 헤드라인(그래서 어쩌라고?!) - 삼성이 망하면 나라가 망한다는 인식을 심어주기 위한 거짓말들- 과 너무나 판박이인) 이 '메이드인 코리아' 액정 화면에서 번쩍거리며 내 눈을 찌른다.
 
참, 오줌 마려운 세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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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모르겠지만

 

 

좀 궁금했다.

너희들은 '짐승'이니?

 

 

예전에 교생실습을 나갔는데 말이지, 그 학교에 근무하시던 어떤 선생님께서 그러셨어.

"선생님~ 얘네들은 다 돌고래예요 돌고래. 사람 취급을 해 주면 안 돼. 그냥 밥 주고 시킬 거 시키면 돼. 인간들이 지능이 안됐어. 아니 돌고래라니깐.."

 

 

그 사람의 얼굴은 참 표독스러워보였지만 한편으론 굉장히 측은했었어. 그 말이 8년이나 지난 지금도 아직도 머릿속에서 잊히지 않는단다.

그런데 오늘도 그런 얘기를 들었다. 아이들은 주체적이지 못한 존재들이라고. 자신의 삶을 아직 결정할 능력이 없다고.

나는 그렇지 않다고 믿고 살아왔는데, 어쩌면 내가 틀린 건지도 모르지. 고민중이다. 너희들은 너희들의 삶을 주체적으로 만들어가고 바꾸어 갈 줄 모르는 짐승들이니? 아니면 여건이 되면 스스로 삶을 꾸려갈 수 있는 존재들이니?

 

궁금하다. 얘들아.

 

 

일희일비 하지 않겠다고 마음 먹었지만, 어째 오늘은 좀 슬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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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손톱을 깎다가

 

주당 20시간의 정규수업과 5시간의 보충수업을 합쳐 스물다섯 시간을 수업하고 있다. 과연 만만한 시간은 아니다. 나는 늘 수업 준비에 쫓긴다.

 

그나마 1교시가 비어있는 날이 몇 되는 건 다행이라면 다행이다.  나는 수업준비를 하려다가 손에 붙은 굳은 살을 손톱깎이로 잘라내고 있었다. 손톱도 꽤 자랐다. 나는 일주일째 몸살감기에 시달리고 있는 중이다.

 

그동안 형님이 결혼을 했고, 누군가는 나를 떠났으며 어떤 이는 내게로 걸어들어왔다.

 

갑자기 나는 내가 잘라 낸 손톱만도 못하다고 느껴졌다. 눈물이 나려다가 말았다.  나는 어리석다. 나는 다시금 내가 세상에 저지른 못된 일들에 집착하는 중이다. 훌륭하게 사는 건 역시 어려운 일이다. 아니 목숨을 부지하는 일조차도 때로는 쉽지가 않다.

 

내 밥그릇이 저 앞에서 딸랑거리며 앉아 있다.

 

날씨가 흐리다. 사고로 끊어졌다 도로 붙은 내 아킬레스건이 욱신욱신 거리며 내가 살아온 부끄러운 날들을 셈하고 있다.

 



 

살면 살수록

 

부끄럽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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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어 (상) 1. 읽기의 즐거움과 보람 - 황소개구리와 우리말

 

안녕 친구들!

 


 

 

수업 내용과 관련된 자료를 올립니다.  먼저 교과서를 충실히 읽은 후에 다음 자료들을 참조하기 바랍니다. 자기 생각 없이 남의 글만 읽는 것은 올바른 사고를 방해할 수 있습니다. 주제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정리한 후 다른 사람들의 견해를 읽고 이해해 보기 바랍니다.

 

단원에 관련된 여러가지 역사적, 사회적 사실들을 모아 놓았습니다. 읽어보면 우리가 몸담고 있는 세계에 대해 조금쯤 다른 생각을 갖게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열심히 노력해서 한 차원 높은 사고를 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자료1 )  영어 공용화 논쟁

 


 

국어 (상) 보충학습 교재

* 영어 공용화 논쟁 *


영어 공용화 논쟁(복거일의 민족어와 국제어에서 영어 공용화 주장)

조선일보 (1998년7월) 대논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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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론] 남영신씨, 복거일씨의 `국제화' 비판 [조선일보 98년7월6일]

## 세계화 위해 민족 버리자니…천박한 과잉 세계주의 ##. : 한국 사회에서 민족주의의 역할은 이제 끝난 것인가. 세기말, 세계화 열풍 속에서 민족주의의 유효성에 대한 회의가 지식인 사회일각에서 싹트고 있다. IMF 사태의 근본 원인이 따지고 보면 상대를 도외시한 채 자기세계에만 빠져 있던 맹목적 민족주의 사고에 있었다는 지적도 나온다. 민족주의 비판이 최근 가장 감성적이고 극적으로 나타난 케이스가 소설가 복거일씨의 저서 '국제어 시대의 민족어'(문학과지성사간)이다. 그는 "우리사회의 시급한 과제 중 하나가 민족주의를 제어하는 것"이라며 심지어 영어를 공용어로 할 것까지 주장했다. 20세기 한국을 이끈 가장 중요한 이데올로기 중 하나인 민족주의는 어느 정도 심각한 위험상황인가. 복씨의 주장이 조선일보 7월3일자 책 소개를 통해 보도되자 인문과학자들 사이엔 격렬한 논쟁이 일 조짐이다. 이번엔 복씨의 논거에 대한 반박이다. .

요즘 사회가 민주화되면서 우리의 의식 구조도 상당히 다양해져 예전에는 생각지도 못했던 주장들이 제기되는 경우를 많이 본다. 그러나 최근 간행된 소설가 복거일씨의 '국제어 시대의 민족어'에 실려 있는 주장들은 그런 부류의 하나로 보고 그냥 넘기기에는 너무 심각한 독이 들어 있다. 이 책은 크게 두 부분으로 되어 있다. 첫번째 부분에서는 '민족주의를 버릴 것'을 주장하고 있고, 두번째 부분에서는 '민족어를 버릴 것'을 주장하고 있다. '지구 제국' 시대에는 민족주의나 민족어는 불필요하다는 생각에서인 것 같다. 그의 말대로 이는 대단히 '용감한 주장'이라고 할 수 있다. 먼저 그는 독도 영유권 분쟁이나 동해 표기 등의 문제가 터졌을 때 우리사회에 나타났던 여러 부정적인 민족주의 행태를 지적하면서 이제는 민족주의를 버릴 때가 되었다고 충고하고 있다. "…일본과의 관계만 따진다 하더라도 둘 사이에서 약한 나라는, 그래서 둘 사이의 분쟁에서 훨씬 손해를 크게 입을 나라는 우리다. 아쉬운 쪽은 일본이 아니다….". 그가 우리 사회에 민족주의를 버릴 것을 요구하는 이유는 우리가 상대적으로 약소국이기 때문이라는 점을 쉽게 짐작케하는 대목이다. 그렇다면 강대국의 민족주의에 대항할 수 있는 약소국의 대응전략은 무엇인가. 국제 사회에 호소하고 국제 기구에 하소연하는 것인가? 그가 주장한 우리 사회의 감정적인 민족주의의 위험성에 일면 동의하면서도 그의 경제적 이익을 얻기 위한 '민족주의 죽이기'에 동의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의 두번째 주장은 '민족어를 버리고 영어를 모국어로 삼자'는 것이다. 그가 영어를 모국어로 삼자고 주장하는 근거는 놀랍게도 단순하다. 지금은 미국을 지도국으로 하는 '지구 제국' 시대이고 이 시대에는 영어가 국제어로 자리잡고 있으므로 우리가 '지구 제국' 중심부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영어를 잘 구사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려면 영어를 처음부터 모국어로 배우는 것이 가장 낫다는 것이다. 다만 지금 당장은 민족주의자들의 맹렬한 반대로 그렇게 할 수 없으니 영어를 공용어로 채택하여 국어와 함께 사용하게 하자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지구 제국'이 어떤 나라인지 그가 밝히지 않았으니 알 수는 없으나 공용어인 영어만 잘하면 그 나라의 중심부에 들어갈 수 있다는 생각도 천박할 뿐만 아니라 영어를 공용어로 채택하면 모든 일이 술술 풀릴 것으로 보는 생각도 단순하고 위험하기는 그가 배척하고 있는 민족주의자들보다 더욱 심각한 수준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한편 영어를 국제어로 보고 국어까지 내버릴 준비가 되어 있는 그가 어떻게 하여 국어 속에 들어와 있는 '쓰리, 와이로, 히야카시' 같은 일본어 찌꺼기를 되살려 쓰자고 주장하게 되었는지 궁금하기 짝이 없다. 일본어는 영어와 같은 반열에 있다고 생각해서 그랬을까, 아니면 국어는 아무렇게나 의사소통을 쉽게 하는 방향으로 사용하면 되는 하급언어라고 생각해서 그랬을까. 1천년 전에 자기 정체성을 잃고 국어를 중국어의 하위 언어로 전락시켜 우리 문화와 민족의 자주성을 송두리째 짓뭉개버렸던 신라의 지식인이 21세기를 앞두고 환생한 것이 아닌지 착각하게 한다. ('국어 천년의 실패와 성공'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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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 민족주의를 찾아서.....복거일 [조선일보 98년7월7일]

## 한국은 민족주의 과잉...영어 공용어는 현실 ##.

이 글은 졸저 '국제어 시대의 민족어'를 비판한 남영신씨의 '세계화 위해 민족 버리자고?'에 답하는 글이다. 남씨의 글을 읽으니, '민족주의와 민족어는 너무 예민한 주제들이어서 논의가 차분히 진행되기 어렵다는 사정'을 새삼 절감하게 된다. 민족주의와 민족어에 관한 내 생각은 지금 인류 사회들이 느슨하게나마 하나의 제국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에 바탕을 두었다. 이제 이 세상에서 국경 안에서 끝나는 일은 드물다. 정치든, 경제든, 문화든, 또는 환경 문제 등. 이번 외환 위기가 우리에게 아프게 일러준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그런 사정을 반영해서, 영어가 실질적 국제어로 자리 잡았다. 놀랍지 않게도, 이제 민족주의는 점점 현실에서 유리되고 비적응적으로 되어간다. 특히 다른 민족들과 민족국가들의 권리를 존중하고 함께 살기를 거부하는 '닫힌 민족주의'를 지닌 사람들은 둘레에 괴로움을 끼칠 뿐 아니라 스스로에게도 해를 입힌다. 민족주의적 열정은 불이다. 그것을 잘 다스리면, 사회에 활력이 넘치지만, 잘못 다스리면, 많은 것들을 잃는다. 우리는 민족주의적 열정을 잘 다스려서 '열린 민족주의'로 다듬어내야 할 것이다. 남씨의 주장과는 달리, 나는 '민족주의를 버릴 때가 되었다'고 한 적이 없다. 그렇게 버릴 수 있는 것이라면, 민족주의에 대해 무슨 걱정을 할 필요가 있겠는가? 나의 논지는, 민족주의를 추구함에 있어서, 우리가 이해득실을 냉정하게 계산해야 한다는 것이다. 몇 해 전 일본의 순시선이 독도 근해에 나타났을 때, 우리 대통령이 군함을 보내 시위한 일이 있었다. 그것은 분명히 국내 정치를 겨냥한 과잉 대응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외교적으로 큰 손해를 보았다. 우리가 외환 위기를 맞자, 바로 그 대통령은 서둘러 경제 부총리를 일본에 보내 원조를 요청했다. 그나마 돈도 빌리지 못했다. 나는 이런 공허한 민족주의를 경계하는 것이다. 국제어와 민족어에 관한 내 주장을 '민족어를 버리고 영어를 모국어로 삼자'로 요약한 것은 지나친 단순화다. 국제어로 자리잡은 영어를 모국어로 배우지 않은 사람들이 입는 손해가 이미 너무 크고 앞으로는 더욱 커질 터이므로, 경제 논리는 사람들이 영어를 모국어로 삼도록 만든다는 것이 내 주장의 바탕이다. 우리 사회에서도 이미 많은 사람들에게 영어는 생존에 결정적인 기술이 되었고, 모두 영어를 배우는 데 큰 투자를 하고 있다. 아직 모국어도 배우지 못한 아이를 영어 학원에 보내는 부모들부터 이어폰을 끼고 영어 회화를 배우는 중년들에 이르기까지. 안타깝게도, 그런 투자는 효율이 아주 낮다. 그래서 나는 일단 영어를 우리말과 함께 공용어로 삼을 것을 제안한 것이다. 나는 독자들에게 물었다. '만일 막 태어난 당신의 자식에게 영어와 조선어 가운데 하나를 모국어로 고를 기회가 주어진다면, 당신은 어느 것을 권하겠는가? 한쪽엔 영어를 자연스럽게 써서 세상 사람들과 쉽게 어울리고 일상과 직장에서 아무런 불이익을 보지 않고 영어로 구체화된 많은 문화적 유산들과 첨단 정보들을 쉽게 얻는 삶이 있다. 다른 쪽엔 조상들이 써온 조선어를 계속 쓰는 즐거움을 누리지만, 영어를 쓰는 것이 힘들어서 다른 나라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피하고 평생 갖가지 불이익을 보고 분초를 다투는 정보들을 뒤늦게 오역이 많은 번역으로 얻어서, 그것도 이용 가능한 정보들의 몇십만 분의 일이나 몇백만 분의 일만 얻어서, 세상 사람들과 경쟁해야 하는 삶이 있다. 당신은 과연 어떤 삶을 자식에게 권하겠는가? 아예 그에게서 선택권을 앗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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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거일씨의 '탈민족주의' 비판-"지구제국"은 강대국 희망사항이다……


한영우 [조선일보(98년7월9일)]: 민족주의 논쟁이 뜨겁게 이어지고 있다. 서울대 국사학과 한영우 교수가 소설가 복거일씨의 저서 '국제어 시대의 민족어'(문학과지성사 간행)를 비판하는 글을 기고했다. 복씨는 이 책에서 작금의 경제위기도 따지고 보면 우리 사회의 거친 민족주의 탓이 크다며, '영어 공용어'론까지 제기하며 탈민족주의의 필요성을 주장한 바 있다. 그의 이같은 주장에 대해 국어연구가 남영신씨가 '과잉 세계주의의 천박성'이라고 비판하자, 복씨는 다시 이를 반박하는 글을 발표했었다. (편집자).

강자와 약자가 서로 맞섰다고 가정할 때, 약자가 싸우지 않고 항복해 버리는 것은 일단 합리적인 선택이다. 질 것이 뻔한 싸움을 왜 하는가. 그러나 지고 나서 계속 강자만 섬긴다면 이미 노예다. 경제논리로 본다면 노예처럼 안정된 삶도 없다. 강한 주인을 만났으니 최소한의 삶은 보장된다. 또 주인을 흉내내다 보면 자기발전도 있다. 인간의 삶은 기본적으로 두 가지다. 노예로서 편안하게 사느냐, 경제적으로 어렵더라도 주인노릇을 하면서 제멋으로 사느냐이다. 역사를 보면, 대다수의 인간은 후자의 길을 선택하면서 살아왔다. 그래서 사람은 합리적으로만 사는 것도 아니고, 빵으로만 사는 것도 아니라고 했는지 모른다. 우리 역사에서 경제논리와 극단적 합리주의가 나라를 망친 사례가 바로 대한제국의 멸망이다. 사실 친일파들은 스스로 매국노라고 생각해본 일이 없다. 경제와 기술을 발전시키려면 강하고 앞선 나라와 하나가 되는 것이 가장 빠른 지름길이라고 믿었다. 이보다 합리적인 판단이 어디에 있는가. 문제는 대다수 사람들이 그것을 원하지 않은 데 있다. 그리고 합리를 모르는, 어리석게 보이는 사람들이 목숨을 걸고 싸워서 광복에 이바지하였다. 그 덕에 오늘 우리가 있다.

요즘 IMF시대가 되면서 경제논리와 경제적 합리주의가 우리 사회의 지표가 된 듯한 느낌이다. 경제와 관련이 없는 분야까지도 경제논리와 경제적 합리주의가 우리 사회의 지표가 된 듯한 느낌이다. 경제와 관련이 없는 분야까지도 경제논리로 촌탁하고, 그 기준에 맞춰 시비가 결정되고있다. 사실, 시장경제 원리보다 합리적인 것은 없다. 우수한 자만이 살아남는 사회가 되어야 발전이 있다. 하지만 인간사회는 발전만이 능사가 아니고, 합리주의만이 행복을 보장하는 것도 아니다. 합리주의와 관계없는 문학, 예술, 종교 따위는 왜 필요한가. 오히려 합리주의가 극단으로 가면 사회가 위태롭다는 것도 기억해 두어야 한다. 적자생존을 신봉하는 경쟁원리가 제국주의를 낳았고, 그것이 세계평화를 깨지 않았던가. 개체의 발전이 반드시 더 큰 공동체의 안정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시장경제는 무수한 약자의 희생을 전제로 한다. 여기에 문화전통이 다른 강자의 시장원리가 적용될 때에는 정서적 불안이 공동체를 급속도로 파괴할 수 있다. 지금 세계가 하나로 통일되고, '지구제국'이 올 것 같은 예언을 하는 것은 환상이다. 그것은 몇몇 강대국이 가진 희망사항일 뿐이다. 역사를 거시적으로 보면, 그렇게 되지도 않을 것이며, 또 그렇게 되는 것을 환영할 일도 아니다. 소설가 복거일씨의 책 '국제어시대의 민족어'는 각론 부분에서는 경청할 만한 대목이 많다. 지나친 배타적 민족주의를 비판하고 합리주의를 강조한 것도 기본적으로 옳다. 그러나 모든 사물을 경제논리로 보고, 인간이란 무엇인가, 한국인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성찰이 없는 것이 유감이다. 경제와 거리를 두어야 할 문학인의 시각이 그렇다는 것이 더욱 놀랍다. 영어를 공용어로 해야 한다는 주장도 국민을 향해서 할 이야기는 아니다. 영어가 짧아서 우리 사회의 위기가 온 것은 아니다. 오히려 자기 정체성도 모르고, 분수없이 세계를 향해서 뛰다가 당한 것이다. 지금 우리 사회의 위기는 총체적이다. 따라서 그 진단과 처방도 총체적이어야 한다. 지엽을 가지고 본질인 것처럼 과대 포장하면, 교각살우의 우를 범할 수 있다. 비단 복거일씨의 경우만이 아니다. 지금 두려운 것은 IMF 그 자체가 아니다. 오히려 이 체제의 단기적 처방에만 급급하고, 인류의 미래를 문명사적인 관점에서 거시적으로 설계하는 안목의 부족이 가장 두렵다. (서울대 교수․한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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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쟁] `지구제국'은 실제로 존재한다....복거일 [조선일보;1998년 07/10(금) 19:24 입력] 국경 없는 경제시대...IMF-인터넷 등 초국가적 질서 생겨 . 이것은 졸저 '국제어 시대의 민족어'를 비판한 한영우 교수의 글 (10일자 17면)에 답하는 글이다. 한 교수께서 지적한 사항들은 여럿이 지만, 중요한 것들은 둘이다. 하나는 경제 논리에 한계가 있다는 것이 고, 다른 하나는 지구제국은 환상이라는 것이다. 경제학은 일반적으로 물자와 돈을 다루는 학문으로 여겨진다. 틀린 생각은 아니다. 그러나 경제학은 본질적으로 사람들이 행동하는 모습 을, 특히 그들이 시간이나 돈과 같은 자원을 여러 목적들에 나누어 쓰는 모습을 연구한다. 그래서 그것은 너른 뜻에서의 심리학의 한 분야 다. 자연히 사람들의 활동들은 모두 경제적으로 접근할 수 있다. 결혼, 출산, 선거, 또는 범죄처럼 일반적으로 경제적 활동으로 여겨지지 않는 행동들도 경제학은 잘 설명하고 예측한다. 물론 경제적 접근엔 한계가 있다. 아마도 가장 심각한 한계는 경제학이 사람들의 심리상태를 주어진 조건으로 여긴다는 사실일 것이다. 그래서 경제학은 사람들의 가치 판단에 대해 별다른 얘기를 하지 않는 다. 경제학의 틀을 따르면서, 나는 사람들의 가치 판단에 대해 직접 평가를 하는 일을 되도록 피했다. '한국인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성찰이 없다'는 한 교수의 지적은 어쩌면 그런 점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졸저에서 '지구제국'이란 말은 다분히 상징적으로 쓰였다. 그 말은 근년에 세계가 하나로 통합되어 가면서 제국의 성격을 지닌 질서가 나타났음을 가리킨다. 그 말을 엄격하게 해석할 경우, 한 교수께서 내놓은 비판이 강력해진다는 것을 나는 선선히 인정한다. 현대판 로마 제국이 나타나리라고 믿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반면에 지금 세계는 단순한 민족국가들의 조합은 아니며 주권국가들 을 넘어서는 초국가적 질서가 자리잡았다는 사실을 부인할 사람도 드물 터이다. 정치적으로는 '국제연합'을 비롯한 국제 기구들이 나름의 몫을 하고 있다. 경제적으로는 우리가 이번에 아프게 경험한 것처럼, 국경은 상당히 낮고 성기어졌으며, '세계무역기구'나 '국제통화기금' 과 같은 국제기구들이 중앙정부 노릇을 어느 정도 하고 있다. 과학, 기술, 예술, 종교와 같은 분야들에선 국적은 이미 큰 고려 사항이 아니다. 그리고 인터넷과 같은 통신수단들이 세계를 하나의 유기체로 묶는 신경노릇을 하고 있다. 물론 '지구제국'이 이상적 사회는 아니다. 다른 사회들과 마찬가지로, 그것은 중심부와 주변부로 나뉘고, 그것의 운영은 중심부의 강대국들이 주도한다. 그러나 강대국들만이 그것에서 이득을 보는 것은 아 니다. 실은 약소국들이 상대적으로 더 큰 이득을 본다. 국제적 질서는 비록 공평한 것이 아닐지라도, 약소국에 이롭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지구제국'이 정복을 통해서 나온 것이 아니라 경제 활동을 통해서 나왔다는 사실이다. 경제 논리는 사람들로 하여금 국경을 넘어 활동하도록 만든다. 그리고 그런 활동은 묵은 질서를 바탕부터 허문다. 따라서 한 교수께서 전쟁과 노예-자유민을 대비한 것 은 적절한 틀이 되기 어렵다.

위에서 살핀 것처럼 '지구제국'은 이미 새로운 질서로 자리잡고 우리 삶의 모든 부면들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 사실은 우리의 판단과 행동이 새 환경에 맞게 조절돼야 함을 뜻한다. 거친 민족주의적 행동을 삼가고 실질적 국제어인 영어를 호의적으로 대해야 한다는 주장은 바로 그런 논거에서 나왔다. ( 소설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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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쟁/이윤기] "선택하라면 국어다", `영어 공용어'론 비판, 조선일보(98년07/12(일) 19:32 입력 7월13일자) '셰익스피어를 잃지 않고도 세르반테스를 얻는 방법'. 두 꼭지의 뜻있는 글을 최근 읽었다. 어느 일간지가 번역, 게재한 미 국 듀크 대학 교수이자 극작가 아리엘 도르프만의 '미국은 2중 언어교육 을 실시해야 한다'와 도정일 교수가 잡지에 쓴 글 '아이자이어 버얼린의 선택'이란 글이다. 도르프만의 글 요지를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나는 영어로 자서전을 쓰고 스페인어로 희곡을 쓰는 혼성 인간이 다. 나처럼 언어의 양손잡이로 크는 것은 흔한 일일 수 없다… 미국인들 은 모든 나라들이 영어를 '당대의 언어'로 다투듯이 받아들이고 있는데 왜 다른 나라 말을 배워야 하느냐고 할 것이다… (하지만)그건 단견이다. 언어 교육정책을 바꾸지 않으면 미국은 백년이 못 되어 멋진 다언어 세 계에서 단일언어 국가로 쳐질 것이다… (영어권 어린이가 스페인어를 배우면) 셰익스피어를 잃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세르반테스를 얻게 될 것이다." 도정일 교수가 쓴 글의 요지는 이렇다. "유럽 지성사 연구에 탁월한 업적을 남긴 버얼린은 유태인이다. (그 가) 친구에게 이런 테스트를 건 적이 있다. '알라딘 램프를 문지르면 기적을 일으킬 수 있네… 램프를 문질러 전세계 유태인들을 한 순간 스칸디나비아인으로 만들 수도 있어. 그렇게 되면 유태인은 역사의 기억, 오 랜 고통, 유태인을 유태인이게 하는 모든 것들을 몽땅 잃겠지만 대신 행복한 백성이 될 수 있겠지. 문지를 텐가?'… 그는 유태인이기를 포기한 일이 없다. 그가 선택한 것은 '문지르지 않는다'였던 셈이다. 세계화주의자들이 모르는 것이 있다. 인간의 가장 자연스런 감정, 그 가 가진 인간적 가능성의 만개를 위한 조건, 그의 존재에 의미를 주고 그를 가장 편안하게 하며 그를 가장 인간답게 하는 것은 추상적인 세계성이 아니라 집, 고향, 동네, 친구들 같은 구체적이고 특수한 '국지성'이며 국지적 관계이다. 이 국지성은 세계성과 반드시 상치 대립하는 관계에 있지 않고 세계성 때문에 희생되어야 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세계성은 국지성 '때문에', 그것을 근거로 해서 가능하다." 중학 1학년 때 나와 함께 미국으로 간 아들은 8년째 미국에서 공부하고 있다. 그는 지난겨울, 영어를 자유자재로 쓸 수 있게 되었고, 영어라는 무기의 확보가 무한 경쟁 시대의 유리한 고지 선점이 될 수 있는 만큼, 일찍이 영어 학습환경을 만들어준 부모에게 무척 고마워한다고 말했다. 효율의 측면만 본다면 맞다. 아들은 도르프만의 길을 가고 있다. 하지만 딸은 버얼린의 길을 갈 모양이다. 초등학교 5학년 때 도미한 딸 의 영어는, 한국어 발음 습관의 잔재가 묻어 있는 아들의 영어와는 달리 현지인 영어와 조금도 다르지 않다. 그런데도 딸은 재작년, 입시 지옥을 알면서도 귀국을 고집했다. 딸은 너무 늦기 전에 한국어를 완벽하게 구사할 수 있도록 공부하고 싶다고 했고, 하고 있다. 아들의 경우 어휘가 풍부하고 표현이 세련될 수는 있을지언정 현지인 발음은 불가능에 가까울 것이라는 뜻에서, 나는 영어 조기 교육을 강화해야 한다는 주장에 찬동한다. 그러나 영어 조기 교육이 민족어 교육에 지장이 될 정도로 강화되는 것에는 절대로 찬성하지 않는다. 영어가 판치는 세상이 올 것이라는 주장은 부정하지 않지만, 민족어교육에 앞세워야한다는 주장이나 민족어가 사멸하게 될 것이라는 전망에는 동의하지 않는 것이다. 복거일씨의 전망이 얼마나 조심스러운 것이고 그의 대안 제시가 얼마나 고뇌에 찬 것인지 나는 짐작한다. 어머니가 문둥이라고 할지라도 클레오파트라와 바꾸지는 않을 것이라던, 유태인 아이자이어 버얼린 같은 조선인 김소운선생이 그리워지곤 한다. <소설가․번역가>

영어 `내것화'가 관건이다......정과리 [조선일보,98년07/13(월) 19:16 입력]

 복거일씨의 '영어 공용화론' 옹호-.

복거일씨의 책 '국제어 시대의 민족어'(문학과지성사간)가 불씨가 되어, 남영신 한영우 이윤기 제씨가 잇달아 지핀 논쟁은 민족주의와 세계주의의 대립으로 이해되고 있으나, 실제로는 아니다. 복거일씨는 '영어를 모국어로 삼자'고 '주장'하지도 않았고, '지구제국'이라는 말을 단순히 강대국의 세계지배라는 뜻으로 사용하지도 않았다. 만일 비판자들이 그의 책을 꼼꼼히 읽었다면, 그 안에는 진단과 처방 사이에 미묘한 길항이 있으며, 진단은 세계 질서의 현재적 흐름에 대한 지나 칠 정도로 투명한 분석인 반면, 그 처방은 역설적이게도 뜨거운 민족주의적 열정을 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을 것이다. 엄격히 보자면, 이 논쟁의 대립은 민족주의와 세계주의의 대립이 아니라 원리민족주의 와 실용적 민족주의의 대립이다. 그러나 이 대립이 이렇게 첨예하게 부각되는 것은 단순히 오해로 인한 것만은 아닌 듯하다. 실로 이 둘 사이에는 도저히 소통을 불가능하게 하는 빗장이 질러져 있으니, 그 빗장이란 '세계화'라는 세 음절 안에 집약되어 있다. 세계화란 무엇인가? 일차적으로 그것은 냉전체제 의 붕괴, 경제망의 확산, 그리고 무엇보다도 전자문명의 발달에 힘입어 세계가 점차로 하나의 생활권을 형성하게 되는 현상을 뜻한다. 원론적인 관점에서 보면, 세계화는 민족국가의 운명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러나 지금 지구상에서 벌어지고 있는 세계화는 전혀 별개의 또 다른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 유럽의 지식인들이 자조적으로, 그러나 정확하게 지적하고 있듯이 지금의 세계화는 곧 미국화와 동의어라 는 것이 그것이다. 실로 현실사회주의 몰락 이후 정치와 경제뿐만이 아니라, 학문 문화 기술 언어 등 삶의 모든 부문들이 미국의 영향력 안에 놓이고 미국적 방식으로 재편성되고 있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현 실이며, 바로 이것이 민족주의의 심장부를 치명적인 바늘처럼 파고들 어 한 패권국에 의해 여타 민족국가들이 노예의 운명으로 전락할지도 모른다는 공포를 주입하는 것이다. 복거일씨의 문제제기는 그러나 팍스 아메리카나의 수락이 아니다. 씨가 촉구하는 것은 세계화의 이중적 상황에서 한국인에게 요구되는 불가피한 생존조건에 대한 성찰일 뿐이다. 복거일씨는 원리 민족주의자에게 바늘이 되었던 것을 내시경으로 바꾸자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 내시경으로 비추어볼 때, 세계화는 역전될 수 없는 추세이고, 그것 의 기본 도구들을 미국이 선점했으며, 그러나 그 도구들을 기민하게 받아들여 우리의 자산으로 제것화한다면 세계 체제 내의 능동적 참여자로서 새로운 역사를 시작할 수 있으며, 그래야 한다는 것이 복거일 씨 주장의 요체이다. 그 주장의 실천적 항목의 하나로 복거일씨가 들고 나온 것이 세상 을 들끓게 하고 있는 영어 공용화론이다. 우선, 이것이 영어의 모국어 화와는 다른 착상임을 지적하기로 하자. 다음, 영어가 사실상의 국제어가 되었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면, 그것을 다음세대들이 자유롭게 쓸 수 있도록 노력을 하는 것은 앞세대 한국인들의 피할 수 없는 의무이다. 토론은 그 의무를 전제하고서 진행되어야 한다. 영어가 국제어가 된 오늘의 언어환경은 단순히 영어권 국가의 영향력이 커졌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영어가 인류 전체의 자산 이 될 가능성의 폭이 그만큼 넓어졌다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그러니까 중요한 문제는 타인의 도구를 활용하면서 어떻게 자신의 역사적 경험 과 문화적 유산을 거기에 새겨 넣어 실질적인 제것화를 달성하느냐이지,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의 문제가 아니다. 이것은 결국 한글과 영어의 공존의 방식에 대한 토론으로 이어지게 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영어 에 대한 준비와 아울러 한글의 세련화를 서로 떼어놓을 수 없는 이중적 과제로 떠맡아야만 한다.




더 자세한 사항을 알고 싶은 학생은 다음 사이트를 참조 바랍니다.

http://prome.snu.ac.kr/~news/home/virtual/critic/data/eng2.htm

http://anu.andong.ac.kr/~soongu/word/bokkeuil.htm

 

 


 

자료 2) 영어 공용화의 주요 쟁점 - 민족주의와 제국주의

 


 

* 어려운 개념들이 많이 쓰였습니다.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너무 자책하지 마세요.^^

영어공용화의 주요 쟁점 - 민족주의와 제국주의


가) 민족주의 - 민족주의란 것은 무엇인가?

               문화 상대론 적인 관점에서 보아 민족주의란 것은 자민족의 테두리를 잘 지

               키고 보전하여 ‘우리’ 로서의 자존을 지키는 것을 의미한다.


            [열린 민족주의 와 닫힌 민족주의]


민족주의는 본래 매우 비합리주의적이고 다의적인 개념이기 때문에 이것에 일률적인 정의를 내리기는 어렵다.

민족주의가 성립하는 데는 2가지 조건이 필요하였다. 첫째, 세계는 하나라고 하는 이상과 이것을 바탕으로 하여 세워진 세계제국(世界帝國)이 무너지고 많은 독립국가가 나타나, 종래의 보편적인 종교 ․문화를 대신하는 새로운 민족적인 종교 ․문화를 창조하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둘째, 이렇게 이룩된 독립국가를 국민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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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성산별곡_본문 해설

  성산별곡(星山別曲)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어떤 지나가는 나그네가 성산에 머물면서,
서하당 식영정의 주인아 내 말을 들어 보소.
인간 세상에 좋은 일이 많거마는,
어찌 한 강산을 갈수록 낫게 여겨,
적막한 산중에 들어가고 아니 나오시는가.
솔뿌리를 다시 쓸고 대나무 침대에 자리를 보아,
잠시 올라앉아 어떤가 하고 다시 보니,
하늘가에 떠 있는 구름이 서석을 집을 삼아.
나가는 듯하다가 들어가는 모습이 주인과 어떠한가.
시내의 흰 물결이 정자 앞에 둘러 있으니,
하늘의 은하수를 누가 베어 내어,
잇는 듯 펼쳐 놓은 듯 야단스럽기도 야단스럽구나.
산 속에 달력이 없어서 사계절을 모르더니.
눈 아래 헤친 경치가 철을 따라 절로 생겨나니,
듣고 보는 것이 모두 신선이 사는 세상이로다.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매창 아침볕의 향기에 잠을 깨니,
산늙은이의 할 일이 아주 없지도 아니하다.
울타리 밑 양지 편에 오이씨를 뿌려 두고,
김을 매고, 북을 돋우면서 비 온 김에 가꾸어 내니,
짚신을 죄어 신고 대나무 지팡이를 흩어 짚으니,
도화 핀 시냇길이 방초주에 이어졌구나.
잘 닦은 거울 속에 저절로 그린 돌병풍,
그림자를 벗삼아 서하로 함께 가니,
무릉도원이 어디인가, 여기가 바로 그곳이로다.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남풍이 문득 불어 녹음을 헤쳐 내니,
철을 아는 꾀꼬리는 어디에서 왔는가.
희황 베개 위에 선잠을 얼핏 깨니,
공중의 젖은 난간이 물 위에 떠 있구나.
삼베옷을 여며 입고 갈건을 비껴 쓰고,
허리를 구부리거나 기대면서 보는 것이 고기로다.
하룻밤 비 온 뒤에 붉은 연꽃과 흰 연꽃이 섞어 피니,
바람기가 없어서 모든 산이 향기로다.
염계를 마주하여 태극성을 묻는 듯,
노자암을 건너보며 자미탄을 곁에 두고,
큰 소나무를 차일삼아 돌길에 앉으니,
인간 세상의 유월이 여기는 가을이로구나.
청강에 떠 있는 오리가 흰 모래에 옮겨 앉아,
흰 갈매기를 벗삼고 잠깰 줄을 모르나니,
무심하고 한가함이 주인과 비교하여 어떤가.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오동나무 사이로 가을달이 사경에 돋아오니,
천암만학이 낮보다도 더 아름답구나.
호주의 수정궁을 누가 옮겨 왔는가.
은하수를 뛰어 건너 광한전에 올라 있는 듯.
한 쌍의 늙은 소나무를 조대에 세워 놓고,
그 아래에 배를 띄워 가는 대로 내버려 두니,
홍료화 백반주를 어느 사이에 지났길래.
환벽당 용의 못이 뱃머리에 닿았구나.
푸른 풀이 우거진 강변에서 소 먹이는 아이들이,
석양의 흥을 못 이겨 피리를 비껴 부니,
물 아래 잠긴 용이 잠을 깨어 일어날 듯,
연기 기운에 나온 학이 제 집을 버려 두고
반공에 솟아 뜰 듯.
소동파의 적벽부에는 가을 칠월이 좋다 하였으되,
팔월 보름밤을 모두 어찌 칭찬하는가.
잔구름이 흩어지고 물결도 잔잔한 때에,
하늘에 돋은 달이 소나무 위에 걸렸으니,
달을 잡으려다 물에 빠졌다는 이태백의 일이 야단스럽다.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공산에 쌓인 낙엽을 북풍이 걷으며 불어,
떼구름을 거느리고 눈까지 몰아 오니,
온갖 나무들을 잘도 꾸며 내었구나.
앞 여울물 가리워 얼고 외나무 다리 걸려 있는데,
막대를 멘 늙은 중이 어느 절로 간단 말인가.
산늙은이의 이 부귀를 남에게 소문내지 마오.
경요굴 은밀한 세계를 찾을 이가 있을까 두렵도다.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산중에 벗이 없어 서책을 쌓아 놓고,
만고의 인물들을 거슬러 세어 보니,
성현도 많거니와 호걸도 많고 많다.
하늘이 인간을 지으실 때 어찌 무심하랴마는,
어찌 된 시운이 흥했다 망했다 하였는가.
모를 일도 많거니와 애달픔도 끝이 없다.
기산의 늙은 고불(古佛) 귀는 어찌 씻었던가.
소리가 난다고 핑계하고 표주박을 버린 허유의 조장이 가장 높다.
인심이 얼굴 같아서 볼수록 새롭거늘,
세상사는 구름이라 험하기도 험하구나.
엊그제 빚은 술이 얼마나 익었느냐?
술잔을 잡거니 권하거니 실컷 기울이니,
마음에 맺힌 시름이 조금이나마 덜어지는구나,
거문고 줄을 얹어 풍입송을 타자꾸나.
손님인지 주인인지 다 잊어버렸도다.
높고 먼 공중에 떠 있는 학이 이골의 진선이라.
이전에 달 아래서 혹시 만나지 아니하였는가?
손님이 주인에게 이르기를 그대가 곧 진선인가 하노라.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요점 정리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지은이 : 정철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연대 : 조선 명종 때(1560년)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갈래 : 서정 가사, 양반 가사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형식 : 총84절(행), 168구이며 3·4조가 주축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성격 : 전원적, 풍류적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주제 : 성산의 풍물과 김성원의 풍류를 예찬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내용 연구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구성
    서사 : 김성원의 전원 심취와 식영정 주변의 모습
    본사1 : 성산의 봄 풍경(春景)
    본사2 : 성산의 여름 풍경(夏景)
    본사3 : 성산의 가을 풍경(秋景)
    본사4 : 성산의 겨울 풍경(冬景)
    결사 : 전원 생활의 멋과 풍류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어떤 지나가는 나그네가 성산에 머물면서,
서하당 식영정의 주인아 내 말을 들어 보소.
인간 세상에 좋은 일이 많거마는,
어찌 한 강산을 갈수록 낫게 여겨,
적막한 산중에 들어가고 아니 나오시는가.
솔뿌리를 다시 쓸고 대나무 침대에 자리를 보아,
잠시 올라앉아 어떤가 하고 다시 보니,
하늘가에 떠 있는 구름이 서석을 집을 삼아.
나가는 듯하다가 들어가는 모습이 주인과 어떠한가.
시내의 흰 물결이 정자 앞에 둘러 있으니,
하늘의 은하수를 누가 베어 내어,
잇는 듯 펼쳐 놓은 듯 야단스럽기도 야단스럽구나.
산 속에 달력이 없어서 사계절을 모르더니.
눈 아래 헤친 경치가 철을 따라 절로 생겨나니,
듣고 보는 것이 모두 신선이 사는 세상이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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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사 - 김성원의 전원 심취와 식영정 주변의 모습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매창 아침볕의 향기에 잠을 깨니,
산늙은이의 할 일이 아주 없지도 아니하다.
울타리 밑 양지 편에 오이씨를 뿌려 두고,
김을 매고, 북을 돋우면서 비 온 김에 가꾸어 내니,
짚신을 죄어 신고 대나무 지팡이를 흩어 짚으니,
도화 핀 시냇길이 방초주에 이어졌구나.
잘 닦은 거울 속에 저절로 그린 돌병풍,
그림자를 벗삼아 서하로 함께 가니,
무릉도원이 어디인가, 여기가 바로 그곳이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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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사 1 - 성산의 봄 풍경(春景)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남풍이 문득 불어 녹음을 헤쳐 내니,
철을 아는 꾀꼬리는 어디에서 왔는가.
희황 베개 위에 선잠을 얼핏 깨니,
공중의 젖은 난간이 물 위에 떠 있구나.
삼베옷을 여며 입고 갈건을 비껴 쓰고,
허리를 구부리거나 기대면서 보는 것이 고기로다.
하룻밤 비 온 뒤에 붉은 연꽃과 흰 연꽃이 섞어 피니,
바람기가 없어서 모든 산이 향기로다.
염계를 마주하여 태극성을 묻는 듯,
노자암을 건너보며 자미탄을 곁에 두고,
큰 소나무를 차일삼아 돌길에 앉으니,
인간 세상의 유월이 여기는 가을이로구나.
청강에 떠 있는 오리가 흰 모래에 옮겨 앉아,
흰 갈매기를 벗삼고 잠깰 줄을 모르나니,
무심하고 한가함이 주인과 비교하여 어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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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사 2 - 성산의 여름 풍경(夏景)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오동나무 사이로 가을달이 사경에 돋아오니,
천암만학이 낮보다도 더 아름답구나.
호주의 수정궁을 누가 옮겨 왔는가.
은하수를 뛰어 건너 광한전에 올라 있는 듯.
한 쌍의 늙은 소나무를 조대에 세워 놓고,
그 아래에 배를 띄워 가는 대로 내버려 두니,
홍료화 백반주를 어느 사이에 지났길래.
환벽당 용의 못이 뱃머리에 닿았구나.
푸른 풀이 우거진 강변에서 소 먹이는 아이들이,
석양의 흥을 못 이겨 피리를 비껴 부니,
물 아래 잠긴 용이 잠을 깨어 일어날 듯,
연기 기운에 나온 학이 제 집을 버려 두고
반공에 솟아 뜰 듯.
소동파의 적벽부에는 가을 칠월이 좋다 하였으되,
팔월 보름밤을 모두 어찌 칭찬하는가.
잔구름이 흩어지고 물결도 잔잔한 때에,
하늘에 돋은 달이 소나무 위에 걸렸으니,
달을 잡으려다 물에 빠졌다는 이태백의 일이 야단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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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사 3 - 성산의 가을 풍경(秋景)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공산에 쌓인 낙엽을 북풍이 걷으며 불어,
떼구름을 거느리고 눈까지 몰아 오니,
온갖 나무들을 잘도 꾸며 내었구나.
앞 여울물 가리워 얼고 외나무 다리 걸려 있는데,
막대를 멘 늙은 중이 어느 절로 간단 말인가.
산늙은이의 이 부귀를 남에게 소문내지 마오.
경요굴 은밀한 세계를 찾을 이가 있을까 두렵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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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사 4 - 성산의 겨울 풍경(冬景)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산중에 벗이 없어 서책을 쌓아 놓고,
만고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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