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게시물에서 찾기2007/05/22

2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7/05/22
    출퇴근길 단상(2)
    미토콘
  2. 2007/05/22
    인간예수
    미토콘

출퇴근길 단상

지하철을 타고 다니다 보면, 역사마다 명언(?)이 담겨 있는 액자가 걸려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액자를 읽고 있노라면, 선생님이 될 수 있고, 철학자가 될 수 있고, 그리고 때로는 큰 깨달음에 이른 스님이 될 수 있었습니다. 다양하게 살아온 사람들이 깨달은 내용들을 읽어가며 그들의 삶에 나를 겹쳐 보기도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글들은 고단하고 힘겨운 사람들의 삶은 말해주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나약한 마음을 잘 다스려 용감무쌍한 마음으로 무장한 용기 있는 사람이 되어야한다는 글. 시기심과 질투심을 극복해서 타인을 위해 공헌해야 한다고 설교하는 글. 혹한과 사나운 바람, 부족한 공기, 그리고 적은 강수량 등 지구상의 가장 나쁜 생존 조건 속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었던 강인한 소나무를 빗대어 ‘강인한 인간형’을 구현하자는 저 이들의 말에는 '온기가 없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과는 너무나 거리가 먼 말 들을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할까요. 이세상은 액자에 쓰인 말처럼 자신을 갈고 닦아서 승리한 사람들만 원한다는 것을 느끼게 했습니다. 그 말들은 역설적으로, 굳건한 ‘용기’를 갖고 모진 바람을 이겨내서 부러지지 않고 시들지 않는 강인한 소나무가 되지 않으면 살기 힘든 현실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선전하는 문구들 속에서 좌절한 삶들을 감싸려는 마음은 느낄 수 없었습니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항상 경쟁을 해야 했고, 경쟁에서 승리하려면 강인한 용기와 필요한 도덕성을 끊임없이 습득해야만 했습니다. 우리는 그동안 사회가 요구하는 방식대로 살아가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낙오자라는 딱지를 붙이기에 주저하지 않았는지 생각해 볼 일입니다. 용기와 자비로 무장한 강인한 사람들만이 살아갈 수 있는 사회의 일면을 보여주는 것 같아 소위 말하는 ‘액자 속 따뜻한 말들’에서 온기는 느낄 수 없고, 오히려 경쟁 질서를 당연하게 받아들여야 한다고 선전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왜 우리는 그런 생각에 딴죽 걸어야 한다는 생각을 못했을까? 왜 지하철 역사마다 걸려 있는 심오한(?) 글들을 아무런 의심 없이 받아들여야 했을까? 이유는 간단합니다. 그래야만 ‘생존경쟁’논리가 공공연히 조장되는 사회구조 속에서 살아남아 승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얼마나 혹독한 훈련을 거쳐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숨쉴 틈조차 없는 치열한 경쟁사회인가요. 우리 한번 살펴봅시다. 인간은 스스로 생각하는 것처럼 그리 훌륭하고 완벽하지 않다고 합니다. 시기심과 질투심 그리고 나약하기 그지없는 사람들이 자신의 한계를 인식하고 넘어서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선, 바로 그 선에서 모진 고난을 이겨낸 사람들이 한 말이 하루가 힘겨운 이들을 도울 수 있다고 봅니다. 하지만 그 글들이 ‘생존경쟁’을 중심으로 운영되는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 패배를 모르는 전사가 될 것을 글쓴이 자신도 모르게 강요한다면 나는 진정 그 글들이 내세우는 삶의 태도에 냉정할 것입니다.


나는 사람들이 그 글들을 읽으면서 자신의 마음속에 담고 있을 못난 감정을 다독이기보다는 억누르며 사회가 요구하는 선한 사람이 되기 위해 하지 않아도 될 애틋한 노력을 하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웬만해서는 도달하기 힘든 그 높은 가치들을 접하면서 자기 자신을 형편없는 사람이라고 얼마나 자책할까 걱정하게 됩니다. 힘든 환경을 애써 살아가보려는 사람들이 안고 있는 ‘내안의 못난 감정’을 어루만져 주기에는 그 명언들이 요구하는, 아니 이 사회가 요구하는 강인함과 도덕적 삶은 시기하기도 하고 질투하기도 하고 투정부리기도 하며 살아가는 우리들 삶의 방식과는 너무나 거리가 멉니다.


용기를 배우지 못하고 획일화된 윤리를 자기의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에 실패한 사람들 마음속에 폭력이 자라지 않을까 염려가 됩니다. 용기가 없어도, 높은 윤리의식과 도덕적 가치를 깨닫지 못했어도 ‘당신은 존중받을 수 있는 사람이야’라고 다독여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최고가 돼야 할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승리자만 살아 갈 수 있는 자본주의적 경쟁 질서를 끊임없이 요구하는 각박한 사회질서에 도전이라도 하듯 ‘모자라지만 괜찮다’는 따사로운 글이 역사마다 걸린다면 정말 좋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고단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공감하며 위로 받고 격려 받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인간예수

권력자와 장사꾼의 요새가 돼 버린 예루살렘의 성전을 파괴한 예수가 현대 교회를 보게 된다면 어떤 행동을 하게 될까? 또 자신만의 행복과 안위를 위해 기도하는, 또 이슬람 근본주의에 맞선답시고 21세기 ‘십자군 전쟁’을 벌인 조지 부시와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에게 무엇이라 말할까? 내가 아는 예수라면 그는 반드시 다음과 같이 성토하고 행동했을 것이다.


   “당장 기도하기를 멈춰라”

   “휘항 찬란한 네온사인 뒤편에는 고달픈 노동과 고단한 삶,

    비통한 눈물이 있는 곳이 있다. 지금 당장 기도하기를

    멈추고 나와 함께 그런 곳을 찾아가지 않겠는가?”


예수의 신성은 동정녀 수태나 부활로써 입증되는 것이 아니다. 나병환자의 움막에 들어가 그의 몸을 손수 닦아 주고, 열병에 걸려 죽어가는 아이의 마지막 순간을 고통에 찬 얼굴로 지켜보는 예수의 모습에서 험난한 길을 마다하지 걸어갔던 위대한 인간의 모습을 본다. 신이 있다면 그와 같은 모습은 아닐까. 부활하는 것은 육체가 아니라 ‘사랑의 관념’이라는 것이 내가 본 예수의 핵심이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