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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연] 7/28 빈민운동사;노점상 운동의 현황과 노점상정책의 주요 쟁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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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빈민열전_노점상, 거리에서 생존을 외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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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오래된 쪽방에서 살고 있어요!

가장 오래된 쪽방에서 살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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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동네 가장 오래된 쪽방건물이 어디에 있는지 아십니까? 서울역에서 숙대입구역의 중간쯤에 갑을 빌딩이 있고 그 옆에 빨간색 벽돌의 쪽방건물이 있다. 이 건물은 일제시대 때 지어지어 졌는데, 당시 일본인 소유의 고무공장 이었다가 6.25전쟁 이후 쪽방이 되어 지금까지 사람들이 살고 있다.


해방과 함께 일본 건물주인은 떠난 자리에 한국 사람이 들어와 관공소에 등기를 내었고, 전쟁이 끝난 후, 사람들이 조금씩 조금씩 들어와 살기 시작했다. 가장 많이 살 때는 80가구가 넘었다고 한다. 그 당시에는 다들 방세도 내지 않고 그냥 들어와 살았다고 한다.


그 후 관공소에서 화재위험이 있다며 시멘트로 벽 공사를 해서 살아라 하여 지금의 쪽방의 형태가 되었다고 한다. 그 당시 이 건물은 폭탄이 맞아 건물 중앙이 부서져 텅 비어 있었는데 시멘트 공사로 이곳도 벽을 만들어 쪽방이 되었다. 그리고 주민들은 건물이 오래 되다 보니 비가 많이 세서 무척 힘들었다고 한다. "여름에 비오면 힘들어서 다락에 박스 갔다 놓고. 냄새가 나가지고 말도 못혀. 방에서 막 세니까 물이 죽죽 흐르는데."  그런데 주민들의 얘기로는 지난해 이 건물에 화재가 발생했는데 그때 지붕은 더욱 엉망이 되었다고 한다. "불이 나니까 소방관들이 지붕 위에 올라가서 팍팍 다 밟아서 해쳐 놓았어." 하지만 그 때 받은 보상금으로 지붕을  다시 이어 지금은 물이 세지 않는다고 한다.


현재 이 건물은 E등급의 건물로 노후도가 심각한 상태라고 한다. 그런데 구청에서는 주민에 대한 아무런 대책도 없이 그냥 이사 가기를 종용하고 만 있는 실정이었다. "가끔씩 구청에서 편지가 날라 와요. 여기가 위험한 지대니까 될 수 있으면 나가라 뜻으로 쓰여 있어요. 건물이 오래되었어도 사람이 살면 어그러지지 않아요. 사람이 없으면 다 어개지지만. 그리고 나가라면 나 잡아먹어라 그래야지. 돈도 없고 갈 때도 없는데." 그렇지만 여기 사시는 분들은 여기 삶에 정 들었기도 하지만 떠날 수조차 없는 형편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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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1


60년 이상 거주하고 계신 할머니와 그 분의 따님을 만나다
 

이 건물에는 625전쟁 이후에 들어와서 지금까지 살고 계신 할머니(92)와 그 분의 딸(72)이 아직도 살고 있다. 이 두 분을 만나 이 곳 쪽방에서 60년 이상 살아온 삶에 대해 들어 보았다.

 

어떻게 여기서 사시게 되었나요?
 

할머니_ 처음에는 가족들이랑 살았지. 이북에서 내려와서 거제도에 살다가 부산으로 가고 다시 서울로 왔지. 그 당시에는 여기가 비어 있으니 돈도 없었는데 방세도 안내고 무조건 들어와 살았지. 그래도 살만 했어. 그 때는 사람들이 많았어요.


돈 없이 살았다면 쫓아내려는 사람은 없었나요?

 

할머니_ 그 때 관공소에서 자꾸 나가라 나가라 하더라고. 그런데 나가면 갈 때가 없으니. 그러더니 다시 있어라 해서 지금까지 여기서 살고 있는 거야. 우리 딸은 이북에서 낳았고 손주들을 이 집에서 낳았지.

 

지금은 두 분이 사시는데, 예전에는 몇 분이 같이 사셨나요?

 

딸_ 과거에는 7식구가 여기에서 살았어요. 친정아버지 계실 때, 우리 애들까지 해서 7명이 살았어요.

애들은 다락에서도 자고 그랬지. 근데 그때는 힘든 것도 없었어요.

 

그 당시 무슨 일을 하셨나요?
 

할머니_ 무슨 일이든 돈이 나온다면 다 했었지. 집 짓는데 가서 일하기도 하고 국회의사당 지을 때 거기서도 일했어. 그래도 적은 돈으로 먹고 살고 애들 다 가르치고 그랬지. 고생은 끝나게 했어.
딸_ 아버님은 페인트 일을 하셨고 어머니는 후암 시장에서 야채장사도 하고 그랬어요.

 

여기서 오래 사신 만큼, 정도 많이 들었을 것 같은데요.

 

딸_ 멀리서 이 집을 보면서 생각한 게, 아이고 쓰러져 가는 집이라도 내가 잠자는 곳이 낫겠구나. 그렇게 생각이 든 적이 있어요. 아들네 집 가도 잠이 잘 안 와요. 여기 오면 잠이 잘 와요. 왜 그런 거죠? 흐흐흐. 교통도 좋고. 이제는 좋은 사람들도 많이 떠나갔지만.

 

이사하는 건 생각해 본적 없으세요.

 

딸_ 작년에 임대아파트 신청하라고 나와서 주민들과 함께 한 곳으로 갈려고. 독립문 쪽에 있는 (영구)임대아파트로 갈려고 신청을 했거든요. 한 동네 사람들이 다 가면 좋잖아요. 그리고 한 달 뒤에 전화 해 봤더니 하나도 안됐더라고요. 그래서 주민들끼리 얼마나 웃었는지 몰라요. 정말 예전에는 불편한 것도 모르고 살았는데. 요 근래는 좀 따뜻하고 보일러도 잘 나오는 집에서 살았으면 원이 없겠다는 생각을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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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2

 

20년동안 살아온 나의 쪽방

 

언제부터 여기에 사셨어요?

여기서 산지가 20년이 넘었어요. 여기가 옛날에는 다 판자촌에 달동네였어요.


장애를 입게 된 배경은?
2007년도에 걸음을 걸으면 꼐속 아파서 허리 수술을 했는데, 수술이 잘못되어 장애인이 되었어.

수술한 이후로 서지도 못해. 다치기 전에는 여기 살면서 일도 다니고 그랬지. 청소도 하고 노가다도 하고 별거 다했지.


쪽방에서 살기 힘들지 않으세요?
수급비로 생활을 하려니까 힘이 들어. 물가가 많이 올라서 . 하지만 여기는 월 15만 원 씩만 방세 주면 평생 살 수 있잖아. 그리고 쪽방이라고 쌀도 나오고 라면도 나오고 그러니까. 그런 거 받아서 먹고 사니까 어디라도 이사를 안 가지. 웬만한 사람들은 다 이사를 갔어. 과거에 임대아파트를 신청해서 나왔는데. 그때 마침 수술을 하기 위해 병원에 입원하게 된거지. 한 20일이면 나올 줄 알았지. 그런데 중환자실에서 2년 있다가 나오니까 그 곳에 들어 갈 수 있겠어?
 

쪽방에 살면서 기억에 남는 일은?

지난해 건물 옆 모델하우스에서 불이 나가지고 죽는 줄 알았어. 걸음을 못 걸으니까. 사람들이 나를 엎으려고 했는데 엎질 못하는 거야. 그래서 계단으로 기어 내려가다가 다리에 피가 나가지고. 그냥 가만히 있었으면 119가 와서 실어다줄 건데. 어서 나가라고 그러고 겁이 나니까 그렇게 했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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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지 수급비로 한달동안 생활하기

기초생활 수급자가 말하는
'복지 수급비로 한달동안 생활하기'

 

 기초생활보장 수급을 받으시는
쪽방주민 17명에게 물었습니다.
 

쪽방에는 한 달에 40만 원 이하로 살아가시는 복지수급자가 전체 주민 수의 50%이상을 차지합니다.

동자동, 남대문 쪽방지역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모습을 단적으로 보여 주는 것이 수급을 받는

날인 매달 20일이 되면 동네가 좀 더 활기차고 분주해지는 모습을 통해 확연하게 느낄 수 있을 정도

입니다.

 

그래서 기초생활보장 수급을 받으시는 쪽방 주민 17명에게 기초생활보장 수급에 대한 여러 가지 생각

들을 물어보았습니다. 첫 번째로 지난 한 달 동안 수급비를 어디에 사용했는지를 물어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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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명의 쪽방주민이 수급비를 받아 한 달 동안 사용한 출처에 대한 도표입니다.

 

수급이 들어오면 주민들이 가장 먼저 사용하는 곳은 '방세'였습니다. 그리고 쌀, 반찬 같은 부식비용,

 케이블 방송 비용, 전화비용도 매우 높게 나타났습니다. 그 다음으로 높게 나타난 것이 병원비,

담뱃값, 교통비였습니다. 이 비용들은 최소한의 생존과 생활을 위해 꼭 필요한 것들입니다. 하지만

문제는 이것에 사용하고 나면 돈이 남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수급비를 한 달에 43만원을 받는다고 가정 했을 때 쪽방에서의 방세 17-20만원을 내고 부식비,

통신비, 담배 값 그리고 병원비까지. 아껴 쓰더라도 거의 10만 원 이상 남기는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고 나면 저축이나 사회활동을 위해 사용하는 비용은 거의 전무할 수 밖에 없게 됩니다.

이처럼 쪽방 주민들에게 있어 현재의 복지 수급비는 인간다운 삶을 위한 비용으로는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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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수급비에 대한 만족도 또한 만족하는 경우는 단 한 명도 없으며 81.2%(13명)가 수급비에

대한 불만족으로 응답하였습니다. 그리고 불만족의 이유로는 대부분 기본적인 생활을 위해 드는

비용이 부족하다며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습니다.

 

"사람이 이 돈으로 살 수는 있지만 다른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목구멍이 열려야 귀 구멍이 열리는 법인데 목구멍이 열리기 힘들기 때문에"

"생활비가 터무니없이 부족하다."

 

그래서 자신의 현재 수급비에서 5-10만원이 더 증가 되면 어디에 사용할 것이냐라는 질문에도

많은 경우, 식생활 비용으로 사용 할 것(8명)이라고 하였으며 더불어 저축을 하겠다고 응답한

분들(4명)도 있었습니다.

 

이처럼 기초생활 수급, 까다로운 선정 기준으로 간신히 수급자가 되어도 문제가 끝난 것이 아닙

니다. 수급을 받더라도 사실 여러 가지로 부족하고 불만족스러운 것 사실입니다. 하지만 스스로

목소리 내지 않으면 누구도 자신의 권리를 지켜주지 않는 게 현실입니다. 국민으로서 정당하게

받을 복지 수급의 권리들을 보장 받기 위해 수급자 한 사람 한 사람이 목소리가 절실한 때 입니다.

 

 

[쪽방주민 좌담회]

 

기초생활 수급비로 살아 간다는 것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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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급비로는 자기 생활을 못 한다는 거지.
수급비는 사람을 집에 가두어 놓는 다라고 보면 되는 거지."

  

기초생활 수급을 받고 계신 쪽방지역 주민들과 함께 복지 수급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야기는

올 초에 있었던 안타까운 사건에 대해 여러 가지 생각을 나누며 시작하였다.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2011년 1월 4일, 정아무개 씨(66세,남)와 김아무개 씨(60세,여) 부부가 서울 성북구 하월곡동 지하

방에서 나란히 누워 숨진 채 발견됐다. 노부부의 5평 지하 방에는 연탄이 다 탄 상태의 화로가 놓여

있었고, 지난해 12월 31일에 '수급비 가지고는 생활이 안 돼 죽음을 선택한다. 5개월이 넘도록 어떻

게 살고 있는지 물어보는 자식이 있느냐'라고 쓴 유서도 발견됐다. 이 부부는 한 달에 43만원이 채

되지 못하는 수급비로 월세 30만원을 내며 살았다고 한다.


이 이야기를 수급자 분들은 공감하며 안타까워하셨다.


주민1_ 오죽했으면 그러겠어. 예를 들어 수급자들이 방세 내고 뭐 내고 나면 10만원 남는데, 부부

끼리 받는다고 했을 때는 이걸로 어떻게 한 달을 살아. 혼자서도 살기 힘들어.

 

그럼 수급비로 살아간다는 것의 의미는 뭘까요?

 

주민2_ 수급비 자체는 집구석에서 만 딱 먹고 살기에 좋아. 그런데 수급비로는 자기 생활을 못한다는

거지. 수급비는 사람을 집에 가두어 놓는 다라고 보면 되는 거지. 집 외의 세상을 구경 할 수 가 없어.

전혀 안되지. 돈이 없는데. 가고 싶은데 못 가고 놀고 싶은데 못 놀고. 그리고 나가서 일을 하려 해도

일을 찾아 볼 수 없는 거지.


주민3_ 요즘에 물가가 얼마나 많이 올랐어요. 뭐하나 사고 나면 끝이여. 물가들이 너무 비싸. 그래서

나는 난방비를 줄 일 생각이야. 하여튼 차갑게 살더라도 돈이 안 들어가게 살아야 하는 거야. 그래야지

 내가 하고 싶은 목표를 얻을 수 있지 그렇지 않으면 수급비로는 아무것도 못하는 거야. 막말로 친구들

 만나서 술이라도 한 잔같이 먹고 싶어도 돈 때문에 못하는 거야. 그러니 누굴 만나도 '야, 밥이라도

한 그릇 먹자' 이 말을 못하는 거야.
 

그럼 외출을 잘 안 하세요?

 
주민1,2,3_ (이구동성으로) 안 하지.


주민1_ 뭐가 있어? 돈이 있어야 나가지.

 

일하고 싶어도 못해!


주민1_ 우리 같은 사람은 일도 못해 일을 하면 수급비가 끊겨 버려. 수급비가 5-60만원만 되어도

여유가 있을 건데 40만 원 정도 받아서 방세 내고 뭐 내고 나면 끝인 거지.


주민2_ 수급을 받으려면 일을 할 수가 없어. 이달에 내가 일을 해서 15만 원을 벌었다고 하면 수급비

에서 15만원이 제하고 나오는 거야. 아프더라도 일을 하고 싶어. 30만 원 정도라도 일을 해도 수급비

에서 제하여지지 않으면 좋겠어. 그럼 아프더라도 3, 4일이라도 노가다를 해서 돈을 벌지. 그러니까

수급자가 어느 정도 돈을 벌더라도 수급비에서 제하지 않는 제도가 필요하다는 거지. 이런 제도가

없으며 수급자는 그 위치에서 도저히 벗어날 수가 없다는 거지. 아무리 수급에서 탈출하고 싶어도

못하지. 그래서 결국 자기 병을 키우는 거야. 자기 병을 키워서 돈을 더 받을 수밖에 없는 거야.

장애 2급이라도 나와야 돈을 더 받을 수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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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처음'은 ...

  

2005년 여름,

 

대학원 논문을 쓰기위해 부산에서 서울로 출퇴근하듯 자주 올라 왔습니다. 논문은 경기도 고양지역에서 있었던 철거민운동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서울, 경기지역 중심으로 철거민 운동을 하던 한 단체와 만나 철거민운동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자 서울까지 주구장창 올라왔었습니다. 그 당시 저는 서울의 화려함에 가려져 보이지 않는, 아니 이 도시의 부끄러움이라도 되는 듯 숨기고픈 도시의 어두운 면, 재개발 지역을 돌아다니며 그곳에서 자신의 주거권, 생존권을 위해 싸우는 철거민들을 처음 만났습니다. 저는 세상에 서울 하늘에 이런 곳이 다 있나 하며 놀랐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처한 힘든 상황들과 그들의 삶 그리고 그들의 용기에 더욱 놀랐던 것 같습니다. 일명 ‘철거민운동’ 이라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오히려 무모해 보이기까지 합니다. 철거민들의 요구가 아무리 정당하다 하더라도 대부분 법적으로는 보장받기 힘든 것들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주거의 권리, 생존의 권리를 위해 싸워야 하는 이들은 거대한 건설자본과 그들이 고용한 용역깡패, 지자체와 경찰들입니다. 사방에 그들의 편은 없습니다. 그래서 철거민 운동은 어떤 운동보다도 거칠고 힘든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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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당시 저로서는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특히 강한 자, 권력 앞에서 아무런 두려움 없이 자기 목소리를 내고 있다는 것이 그랬습니다. 자기주장이 아무리 옳다 하더라도 권력 앞에서 권력에 반하는 목소리를 낸다는 것은 그 당시 제 생각으로 현명하지 않은 짓이라 생각하고 있어 그들의 용기가 두려우면서도 존경스러웠던 것 같습니다. 어디서 저런 용기가 나오지... 아무리 간절하더라도 그런 목소리를 낸다는 건 저 로서는 사실 잘 믿겨지지 않았습니다. 제 자신이 너무 부끄럽다는 생각도 들었고 나도 여기 있으면 사람이 좀 될 수 있을까, 나도 여기 있으면 사람답게 산다는 게 뭔지 배울 수 있을까라는 고민까지 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해 겨울에 저는 서울로 상경해 빈민 운동이라는 것을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4년이 지났습니다.

4년 동안 빈곤 관련 단체들에서 정신없이 활동한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저는 지쳐 있었습니다. 그러자 제가 하고 있는 일에 회의감이 밀려왔고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방향을 잃었습니다. 아마도 (뜨거운 감정으로 운동을 시작했지만 운동이 열정만으로 되는 일이 아니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니면) 과거 처음 빈민운동을 시작할 때의 마음, 조금은 가볍지만 즐겁고 기대에 찬... 그런 맘보다는 이미 머리가 굵어져 버리고 ‘척하면 척’이라는 듯, 문제가 발생하면 사람들을 어떻게 모으고 보도자료, 성명서 쓰고 기자회견, 토론회 그리고 집회, 이것 저것 해도 안 되면 농성. 이 과정들이 쉬운 건 아니지만 이미 머리 속에 메뉴얼 책자 넘기듯 운동을 기계적으로 처리하고 있는 내 모습에 회의감과 ‘즐겁지 않음’, ‘행복하지 않음’을 느꼈던 것 같습니다. 빈민운동단체에서의 활동을 그만 두었습니다.

 

그리고 많은 고민들을 한 것 같습니다. 그리고 처음 서울에 올라왔을 때가 다시 떠올랐습니다. 내가 왜 운동을 시작 했지? 사람답게 살고 싶다는 생각, 사람 냄새나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 그 때 가졌던 그 마음은 다시금 퇴색되어 버린 제자신이 정말 부끄러운 듯 합니다. 

 

이런 고민들 끝에 저는 지난해 5월 서울역 맞은편에 있는 월세 16만원에 내 몸 하나 누이면 가득 차는 쪽방으로 이사를 했습니다. 매우 조그만 지역이지만 남대문 경찰서 뒤와 그 길 건너에까지 적게는 1500명에서 많게는 2000명 정도의 사람이 쪽방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공동 화장실, 공동 세면장에 당연히 주방은 없습니다. 여름에 난방 잘 되고 겨울에 냉방 잘되는 곳이 있다더니 여기가 그 곳입니다. 제가 사는 집은 온수가 나오지 않아 겨울 내내 제대로 씻지도 않고 산 것 같습니다. 여기 주민들은 과반수가 기초생활보장 수급자이며 그렇지 않더라도 비슷한 소득, 즉 40만원-70만 원 정도의 소득으로 한 달을 살아갑니다. 쪽방촌. 이곳은 서울 한복판에 있는데도 ‘촌’이라는 말을 붙이는 게 전혀 어색하지 않은 곳인 것 같습니다.

 

이곳에 처음 들어 올 때, 여러 가지 고민과 여기서 무엇을 할 수 있을지 많은 생각들을 했던 것 같습니다. 차츰 차츰 주민들과 사귀어가며 주민이 되어가자. 주민들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여기서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찾자. 그런데 한 달 두 달 지나가면서 나의 생각들이 얼마나 거만하고 어리석었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이곳에 대해 아무 것도 몰랐습니다. 그냥 저는 이곳에 갖 이사 온 사람일 뿐이었습니다. 쪽방주민들이 하루 종일 뭘 하시는지? 매달 20일이 되면 왜 그리 새벽까지 노래를 부르고 술을 마시는지? 앞집 형은 왜 그렇게 술을 좋아하는지? 저 사람은 왜 이렇게 잘 삐지는지? 등. 저는 아는 게 없었을 뿐 아니라 더욱이 여기서 정말 이질적인 사람이었습니다. 나이가 어리다는 것도 그렇고 주민과 절대 동화될 수 없는 ‘가방끈 긴 놈’이라는 것도 그렇습니다. 그리고는 저는 그냥 여기서의 삶을 조용히 배우기로 결심했습니다. 어떻게 살아가시는지? 40만원으로 어떻게 살아가고 여기서의 행복은 무엇인지? 하지만 배운 게 도둑질이라 여기서의 생활도 7-8개월이 넘어 가자 몸이 근질 근질거려서 뭔가 해야 겠다는 생각이 다시 들었습니다. 주민들에게 민폐와 내가 거만 떨지 않으면서 주민들과 함께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을까? 그래서 시작한 것이 ‘쪽방신문’입니다. 배운 게 잘못도 아니고 배운 거 거만하지 않게 써먹으면 되지 않을까라는 생각에 그리고 주민들과 소통하고 이야기 하고 싶다는 생각으로, 쪽방지역 주민들의 이야기와 필요한 정보들을 담은 마을 신문을 내기로 한 것입니다. 일명 ‘쪽방신문’. 그래서 한 달에 한 번이지만 신문을 발행하기위해 쪽방주민들을 포함해 지역에 쪽방관련 사회단체들과 함께 쪽방신문을 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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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방신문을 계속 발행하고는 있지만 여전히 부끄럽다는 생각이 듭니다. 신문을 신문답게 잘 만들지 못해서가 아닙니다. 애초에 ‘신문답게’라는 건 저를 포함해 누구도 기대하고 있지는 않으니까요. 오히려 저의 부끄러움은 주민들 모두가 주체가 될 수 없는 것이 신문이기 때문입니다. 신문이라는 것이 주민들과 논의들을 거치고 주민들 몇 분이 글을 써주시지만 취재를 하거나 글 쓰는 과정, 편집하는 과정들이 주민 모두 주체가 되는 방식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난 여기에 뭔가를 가르치러 왔는가? 배우러 왔는가? 배우겠다는 생각으로 시작했지만 거드름 떨면서 지금 뭔가를 쓸데없이 가르치려 들고 있는 건 아닐까? 모두 함께 행복했으면 하고 시작했는데, 막상 나만 행복한 건 아닐까? 이런 고민들로 저는 최근에 많이 부끄러움을 느낍니다. 하지만 이제 막 시작한 마을신문을 멈추진 않을 것입니다. 가가호호 방문해 신문을 드리면 기뻐하시는 분들이 계시고 처음에 어설프더라도 일단 이런 일은 시작하면 취지가 어찌되었든 어떤 신선하고 새로운 것들이 만들어 질지 예측하기 힘들기 때문에 기대도 되기에 일단 가 볼만큼 가볼 생각입니다

 

누구에게나 처음은 있습니다. 저에게는 2005년이 처음인 것 같습니다. 처음에 가졌던 부푼 기대와 설레임들. ‘해야 되서 한다’기 보다는 ‘하고 싶어서 한다’는 맘. ‘가르치려는 맘’보다는 ‘배우려는 맘’이 컸던 그 처음은 저에게 끊임없이 고여서 썩어버리지 않게 하는, 계속 흐르게 하는 힘 입니다.

 

* 한백교회 '삶의 고백'에 적었던 글을 다시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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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빈곤운동사 세미나 '도시빈민열전'에 초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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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방 동료의 죽음을 함께 애도하며...

쪽방 동료의 죽음을 함께 애도하며... 
 
 쪽방주민 분들 중에는 여러 가지 이유로 가족이나 친척과 연락을 끊고 살거나 아무런 연고 없이 홀로 살아가시는 분들이 많이 있다. 그
런 처지를 서로 아는 것일까? 종종 쪽방에서 오래 사셨던 분들이 돌아가시는 경우, 가족이나 친척들이 아무도 장례를 치루지 않는 데도
돌아가신 분들의 이웃들, 쪽방에서 고인과 -좋은 인연이든 나쁜 인연이든-인연이 있었든 쪽방주민들이 함께 모여 장례를 치루고 함께
모여 고인의 명복을 빌어 주는 훈훈한 모습을 종종 볼 수 있다. 
 
 1월 5일, 쪽방에서 생활하시던 <마귀>라는 별명을 가지신 분이 집에서 돌아가셨다. 장례는 쪽방에 살던 가까운 지인들 몇 분이 상주 역
할을 자청하였다. 친혈육은 아니지만 쪽방에서 동거동락한 정이 있기에 주민들이 상주 역할을 하고 많은 주민들이 참여하여 애도를 표했
다. (이후 1월8일, 마귀님은 용미리 추모공원에 안장되심.) 마귀님을 아시는 분들이 고인이 되신 마귀님을 추모하며 그 분에 대한 기억들
과 장례식 때의 인상들을 적어 주셨다.
  
 
 
 
어이! 목사아저씨, 난 마귀인데 1000원만 줘바라!
 
 언제 처음 만났는지 정확하게 생각은 잘 나지 않지만 처음에 나를 보고 했던 말이다. 형은 집도 없이 성남교회 아래 천막으로 덮힌 집 연
탄창고에서 잠을 자면서 생활을 했다. 추운 겨울인데도 전기도 들어오지 않고 문도 제대로 달려있지 않은 곳에서 생활 한다는 사실은 너
무 큰 충격이었다.
 
 부랴부랴 가스와 가스 렌지를 창고 옆에 설치했다. 형하고 남진이 형이 같이 생활했는데 한겨울동안 가스비 나온다며 LPG 가스통 하나
를 다 사용하지 않고 남기신 일이 생각이 난다. 그때 이후로 아버지 산소를 찾아 두 번이나 용미리 갔던 일 그리고 쪽방을 얻어서 이사를
하던 일 등이 가장 가슴에 남아있다. 
 
/ 동자동사랑방 엄병천 대표
 
 
애국가를 부르면서 떠나간 마귀 형님의 명복을 빕니다.
 
 생애 단 한번의 인연을 소리 없이 웃으며 보내드리고자 소중한 인연을 기억하기위해 영안실을 찾은 동자동 쪽방촌 주민들, 형님 조금만
이라도 더 있다가 가지, 왜 웃으면서 가지, 힘들게 갔냐며 아픔의 눈물을 흘리던 쪽방촌 이웃사람들.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 대한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 부르면
서 “마귀야, 먼저 가서 내 자리도 만들어 놓고 기다려라. 나는 좀 있다 가려 한다. 마귀야 잘가라”하며 눈물 담긴 목소리로 애국가를 부르
시던 마귀형님의 가장 친한 친구 <아가니>님의 노래 소리가 흐린 눈 내린 하늘위로 날려 가서 마귀형님을 부르며 편안한 배웅을 했으리
라고 본다.
 
 마귀 형님과의 생애 단 한번의 인연을 맺은 쪽방촌 이웃들의 소중한 만남이 그때그때 단 한번의 만남으로가 아닌 영원한 만남으로 소중
히 간직 될 수 있도록 지금, 지금 주어진 시간에 단 한번 서로에게 사랑을 나눠야 한다고 봅니다. 이렇게 마지막까지도 이웃들에게 마음
속으로 사랑나눔을 가져다준 마귀 형님에게 깊은 명복을 빕니다.              
 
/ 최순규
 
이제 이 좁은 쪽방을 떠나셨지만 더 좋은 세상으로 가셨을거라 생각합니다.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쪽방 동료의 죽음을 함께 애도하며... 쪽방 동료의 죽음을 함께 애도하며... 
 
 쪽방주민 분들 중에는 여러 가지 이유로 가족이나 친척과 연락을 끊고 살거나 아무런 연고
없이 홀로 살아가시는 분들이 많이 있다. 그런 처지를 서로 아는 것일까? 종종 쪽방에서
오래 사셨던 분들이 돌아가시는 경우, 가족이나 친척들이 아무도 장례를 치루지 않는 데도
돌아가신 분들의 이웃들, 쪽방에서 고인과 -좋은 인연이든 나쁜 인연이든-인연이 있었든
쪽방주민들이 함께 모여 장례를 치루고 함께 모여 고인의 명복을 빌어 주는 훈훈한 모습을
종종 볼 수 있다. 
 
 1월 5일, 쪽방에서 생활하시던 <마귀>라는 별명을 가지신 분이 돌아가셨다. 장례는 쪽방에
살던 가까운 지인들 몇 분이 상주 역할을 자청하였다. 친혈육은 아니지만 쪽방에서 동거동락
한 정이 있기에 주민들이 상주 역할을 하고 많은 주민들이 참여하여 애도를 표했다. (이후
1월8일, 마귀님은 용미리 추모공원에 안장되심.) 마귀님을 아시는 분들이 고인이 되신 마귀
님을 추모하며 그 분에 대한 기억들과 장례식 때의 인상들을 적어 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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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이! 목사아저씨, 난 마귀인데 1000원만 줘바라!
 
 언제 처음 만났는지 정확하게 생각은 잘 나지 않지만 처음에 나를 보고 했던 말이다. 형은
집도 없이 성남교회 아래 천막으로 덮힌 집 연탄창고에서 잠을 자면서 생활을 했다. 추운
겨울인데도 전기도 들어오지 않고 문도 제대로 달려있지 않은 곳에서 생활 한다는 사실은
너무 큰 충격이었다.
 
 부랴부랴 가스와 가스 렌지를 창고 옆에 설치했다. 형하고 남진이 형이 같이 생활했는데
한겨울동안 가스비 나온다며 LPG 가스통 하나를 다 사용하지 않고 남기신 일이 생각이
난다. 그때 이후로 아버지 산소를 찾아 두 번이나 용미리 갔던 일 그리고 쪽방을 얻어서
이사를 하던 일 등이 가장 가슴에 남아있다. 
/ 엄병천
 
애국가를 부르면서 떠나간 마귀 형님의 명복을 빕니다.
 
 생애 단 한번의 인연을 소리 없이 웃으며 보내드리고자 소중한 인연을 기억하기위해
영안실을 찾은 동자동 쪽방촌 주민들, 형님 조금만 이라도 더 있다가 가지, 왜 웃으면서
가지, 힘들게 갔냐며 아픔의 눈물을 흘리던 쪽방촌 이웃사람들.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 대한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 부르면서 “마귀야, 먼저 가서 내 자리도
만들어 놓고 기다려라. 나는 좀 있다 가려 한다. 마귀야 잘가라”하며 눈물 담긴 목소리
로 애국가를 부르시던 마귀형님의 가장 친한 친구 <아가니>님의 노래 소리가 흐린 눈
내린 하늘위로 날려 가서 마귀형님을 부르며 편안한 배웅을 했으리라고 본다.
 
 마귀 형님과의 생애 단 한번의 인연을 맺은 쪽방촌 이웃들의 소중한 만남이 그때그때
단 한번의 만남으로가 아닌 영원한 만남으로 소중히 간직 될 수 있도록 지금, 지금 주어
진 시간에 단 한번 서로에게 사랑을 나눠야 한다고 봅니다. 이렇게 마지막까지도 이웃
들에게 마음속으로 사랑나눔을 가져다준 마귀 형님에게 깊은 명복을 빕니다.              
/ 최순규
 
이제 이 좁은 쪽방을 떠나셨지만 더 좋은 세상으로 가셨을거라 생각합니다.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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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귀님에 대한 주민들의 기억1

마귀라는 별명에 대해 주민 분께 물었더니, (사실인지는 모르겠지만) 당구를 1000을 치신

다고 엄청난 고수라는 뜻에서 '마귀'라는 별명이 붙혀 졌다고 얘기해 주신다. 마귀님은 이 

동네에 오래 사신 분이라고 한다. 처음에는 근처에서 계속 노숙을 하셨고 몇년 전부터 쪽방

에서 사셨다고 한다. 동네에서 그렇게 평판이 좋았던 분은 아니었다. 그래서 그런지 오히려 

동네에 많은 사람들이 마귀님을 알고 계셨다.

 

* 마귀님에 대한 주민들의 기억2

술먹고 욕하고 시끄럽게 해서 싸움도 잦았다고 한다. 매일 술을 드셨고 동네에서도 무언가 

사고를 치고 시끄럽게 떠들석 했던 분이라 동네에서도 마귀님은 유명했다고 한다. 그런데 

최근 몇년은 알콜릭으로 인한 후유증인지 나이와 병세로 인한 것인지 많이 조용해 지셨다고

한다. 그러다가 이렇게 돌아 가신거라고 얘기해 주신다.

* 마귀님에 대한 주민들의 기억1

마귀라는 별명에 대해 주민 분께 물었더니, (사실인지는 모르겠지만) 당구를 1000을 치신

다고 엄청난 고수라는 뜻에서 '마귀'라는 별명이 붙혀 졌다고 얘기해 주신다. 마귀님은 이 

동네에 오래 사신 분이라고 한다. 처음에는 근처에서 계속 노숙을 하셨고 몇년 전부터 쪽방

에서 사셨다고 한다. 동네에서 그렇게 평판이 좋았던 분은 아니었다. 그래서 그런지 오히려 

동네에 많은 사람들이 마귀님을 알고 계셨다.

 

* 마귀님에 대한 주민들의 기억2

술먹고 욕하고 시끄럽게 해서 싸움도 잦았다고 한다. 매일 술을 드셨고 동네에서도 무언가 

사고를 치고 시끄럽게 떠들석 했던 분이라 동네에서도 마귀님은 유명했다고 한다. 그런데 

최근 몇년은 알콜릭으로 인한 후유증인지 나이와 병세로 인한 것인지 많이 조용해 지셨다고

한다. 그러다가 이렇게 돌아 가신거라고 얘기해 주신다.

이제 이 좁은 쪽방을 떠나셨지만 더 좋은 세상으로 가셨을거라 생각합니다.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이제 이 좁은 쪽방을 떠나셨지만 더 좋은 세상으로 가셨을거라 생각합니다.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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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방상담센터, 어디까지 이용해 보셨나요?

 

쪽방상담센터, 어디까지 이용해 보셨나요?

 

- 용산, 남대문 쪽방상담센터 중심으로-

 

쪽방상담센터를 얼마나 알고 얼마나 이용해 보셨나요? 후원물품 지원 받을 때, 듣게 되는

이름이지만 후원 물품 지원뿐만 아니라 쪽방주민을 위한 다양한 복지서비스를 지원하고

있습니다.  

 

 서울역 맞은 편 쪽방촌에는 남대문 쪽방상담센터와 용산구 쪽방상담센터가 있습니다.

남대문·용산구 쪽방상담센터는 쪽방 주민들의 생활을 돕기 위해 밑반찬 지원을 비롯한

급식 사업, 목욕실 및 세탁실을 운영하고 무료 이미용, 도서대여, 생필품 지원을 하고 있

으며 상담을 통해 파산상담, 자활 및 취업, 임대주택 지원, 주민등록 복원 등 쪽방주민들

의 편의를 위한 다양한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남대문과 용산구 쪽방상담센터 직원을 직접 만나 구체적으로 쪽방상담센터 이야기를

들어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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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대문 쪽방상담센터는 화재피해로 인해 운영에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화재가

난 건물을 사용하지 못해 중구 회현동 주민센터와 쪽방촌 인근 경로당 앞에서 천막을
치고 임시 사무실을 두어 업무를 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상담센터에서 3년 6개월째
일하고 있는 전익형(39) 실장에게 쪽방주민의 임대주택 지원과 주민자조모임에 대해
들을 수 있었다.   
 
임대 주택 지원 사업에 대해서?
 
 임대주택 사업은 중구에서도 하고 용산에서도 오세요. 저희가 현재 16명 입주를
한 상태에 있고요. 쪽방 주민이면 누구나 신청 가능하고 저희가 하는 것은 접수를
받아서 서류를 만들어주고, 그걸 보건복지부와 주택공사가 결정하는 거죠. 
 
 남대문 쪽방 주민 중에 폐가 안 좋은 분이 계세요. 임대주택 마련해 보겠다고
자기가 노동현장에 나가셔 가지고 100만원을 만든다고 갔는데, 일하다가 폐가
터졌어요. 일을 못하시게 됐어요. 이 분이 더이상 임대주택 못 가는 상황인데,
독지가가 100만원 후원해 줘서 그래서 50만원 지원받아 올 해 1월에 임대주택
들어 가셨어요.
 
남대문 지역 쪽방주민들의 모임에 대해서?
 
 한 달에 한번 주민 조직화 모임 <내꿈사>라는 모임을 가지고 있어요. <내일을
꿈꾸는 사람들>이라는 말을 줄인 거죠. 저희가 작년 여름에 태안에 여행을 갔었
어요. 그 이후 주민 분들이 우리도 주민들의 (자조)모임을 가졌으면 좋겠다고 하
셨죠. 잘됐다. 그럼 다음 달부터 하자라고 제안이 되어, 작년 7월 초부터 계속
진행하고 있어요.  
 
 주민들이 15명, 20명 이렇게 모이죠. 우리가 살아온 이야기, 쪽방에 살면서 불편한
점, 예를 들어 쓰레기 문제, 우리가 버리는 쓰레기 아닌데, 딴 지역쓰레기들 어떻게
처리할까 고민하기도 하고. 지금은 매달 한번 정기적 모이고 있어요. 
남대문 쪽방상담센터는 화재피해로 인해 운영에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화재가
난 건물을 사용하지 못해 중구 회현동 주민센터와 쪽방촌 인근 경로당에서 일을 하
고 있는 실정입니다. 상담센터에서 3년 6개월째 일하고 있는 전익형(39) 실장에게
쪽방주민의 임대주택 지원과 주민자조모임에 대해 들을 수 있었다.   
 
임대 주택 지원 사업에 대해서?
 
 임대주택 사업은 중구에서도 하고 용산에서도 오세요. 저희가 현재 16명 입주를
한 상태에 있고요. 쪽방 주민이면 누구나 신청 가능하고 저희가 하는 것은 접수를
받아서 서류를 만들어주고, 그걸 보건복지부와 주택공사가 결정하는 거죠. 
 
 남대문 쪽방 주민 중에 폐가 안 좋은 분이 계세요. 임대주택 마련해 보겠다고
자기가 노동현장에 나가셔 가지고 100만원을 만든다고 갔는데, 일하다가 폐가
터졌어요. 일을 못하시게 됐어요. 이 분이 더이상 임대주택 못 가는 상황인데,
독지가가 100만원 후원해 줘서 그래서 50만원 지원받아 올 해 1월에 임대주택
들어 가셨어요.
 
남대문 지역 쪽방주민들의 모임에 대해서?
 
 한 달에 한번 주민 조직화 모임 <내꿈사>라는 모임을 가지고 있어요. <내일을
꿈꾸는 사람들>이라는 말을 줄인 거죠. 저희가 작년 여름에 태안에 여행을 갔었
어요. 그 이후 주민 분들이 우리도 주민들의 (자조)모임을 가졌으면 좋겠다고 하
셨죠. 잘됐다. 그럼 다음 달부터 하자라고 제안이 되어, 작년 7월 초부터 계속
진행하고 있어요.  
 
 주민들이 15명, 20명 이렇게 모이죠. 우리가 살아온 이야기, 쪽방에 살면서 불편한
점, 예를 들어 쓰레기 문제, 우리가 버리는 쓰레기 아닌데, 딴 지역쓰레기들 어떻게
처리할까 고민하기도 하고. 지금은 매달 한번 정기적 모이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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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구 쪽방상담센터는 
 
 오후 시간에 찾아간 용산구 쪽방상담센터는 밑반찬 지원을 신청 받는 날이라 
쪽방주민들로 매우 북적 거렸습니다. 이 곳에서 2년 정도 근무하신 이광우(사회
복지사)씨에게 방문 간호와 푸른나눔터에 대해 얘기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방문간호사및 진료사업에 대해서?
 
 쪽방 상담소에는 방문간호사님 파견 나와 계세요.수급 받으시는 분들 중에 보건
소에 명단이 들어와 있어요. 그 명단을 보고 가가호호 방문해서 의료지원을 해 
주고 있어요.
 쪽방주민 중 암에 걸려 고생하시는 분이 한 분 계세요. 병원비며 수술할 병원을 
찾지 못해 고생하셨어요. 그분이 저희와 함께 일하시는 방문간호사님과 상담을 
진행하셨어요. 그 이후 방문 간호사님의 노력으로 병원비도 구하고 수술할 병원도 
찾아서 지난 해 10월 수술을 받으셨어요.  그리고 한 달에 한번 의사분들이 오셔서 
진료서비스를 해주고 계세요.
 
푸른 나눔터는 어떤 곳인가요?
 
 쪽방 주민들의 건강관리를 위한 편의 시설, 무료 헬스장이라고 보면 된다. 운동
기구나 물품들을 기증받아 이번에 열게 되었는데, 운동기 뿐만아니라 컴퓨터도 
사용할 수 있고 책도 1,000여권 정도 두어서 <우리동네책방>이라고 해서 북카페
도 함께 하고 있어요. 그리고 이곳에서 매달 둘째주 일요일에는 의료진료도 진행
하고 있어요.

 

용산구 쪽방상담센터는 
 
 오후 시간에 찾아간 용산구 쪽방상담센터는 밑반찬 지원을 신청 받는 날이라 
쪽방주민들로 매우 북적 거렸습니다. 이 곳에서 2년 정도 근무하신 이광우(사회
복지사)씨에게 방문 간호와 푸른나눔터에 대해 얘기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방문간호사및 진료사업에 대해서?
 
 쪽방 상담소에는 방문간호사님 파견 나와 계세요.수급 받으시는 분들 중에 보건
소에 명단이 들어와 있어요. 그 명단을 보고 가가호호 방문해서 의료지원을 해 
주고 있어요.
 쪽방주민 중 암에 걸려 고생하시는 분이 한 분 계세요. 병원비며 수술할 병원을 
찾지 못해 고생하셨어요. 그분이 저희와 함께 일하시는 방문간호사님과 상담을 
진행하셨어요. 그 이후 방문 간호사님의 노력으로 병원비도 구하고 수술할 병원도 
찾아서 지난 해 10월 수술을 받으셨어요.  그리고 한 달에 한번 의사분들이 오셔서 
진료서비스를 해주고 계세요.
 
푸른 나눔터는 어떤 곳인가요?
 
 쪽방 주민들의 건강관리를 위한 편의 시설, 무료 헬스장이라고 보면 된다. 운동
기구나 물품들을 기증받아 이번에 열게 되었는데, 운동기 뿐만아니라 컴퓨터도 
사용할 수 있고 책도 1,000여권 정도 두어서 <우리동네책방>이라고 해서 북카페
도 함께 하고 있어요. 그리고 이곳에서 매달 둘째주 일요일에는 의료진료도 진행
하고 있어요.

 

                                   [ 푸름 나눔터 안내 ]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이용시간_ 월-목 (금요일 휴관) 오전 10시~오후 3시 까지.

이용대상_ 용산,남대문 상담센터에서 접수한 후 이용 가능.

위치_ 용산구쪽방상담소 건물에서 직진,미니마트를 끼고 

         골목으로 올라가다보면 20미터지점에 청원고시원건물 지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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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구 쪽방상담센터는 

 

 오후 시간에 찾아간 용산구 쪽방상담센터는 밑반찬 지원을 신청 받는 날이라 

쪽방주민들로 매우 북적 거렸습니다. 이 곳에서 2년 정도 근무하신 이광우(사회

복지사)씨에게 방문 간호와 푸른나눔터에 대해 얘기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방문간호사및 진료사업에 대해서?

 

 쪽방 상담소에는 방문간호사님 파견 나와 계세요.수급 받으시는 분들 중에 보건

소에 명단이 들어와 있어요. 그 명단을 보고 가가호호 방문해서 의료지원을 해 

주고 있어요.

 쪽방주민 중 암에 걸려 고생하시는 분이 한 분 계세요. 병원비며 수술할 병원을 

찾지 못해 고생하셨어요. 그분이 저희와 함께 일하시는 방문간호사님과 상담을 

진행하셨어요. 그 이후 방문 간호사님의 노력으로 병원비도 구하고 수술할 병원도 

찾아서 지난 해 10월 수술을 받으셨어요.  그리고 한 달에 한번 의사분들이 오셔서 

진료서비스를 해주고 계세요.

 

푸른 나눔터는 어떤 곳인가요?

 

 쪽방 주민들의 건강관리를 위한 편의 시설, 무료 헬스장이라고 보면 된다. 운동

기구나 물품들을 기증받아 이번에 열게 되었는데, 운동기 뿐만아니라 컴퓨터도 

사용할 수 있고 책도 1,000여권 정도 두어서 <우리동네책방>이라고 해서 북카페

도 함께 하고 있어요. 그리고 이곳에서 매달 둘째주 일요일에는 의료진료도 진행

하고 있어요.

 

                                   [ 푸름 나눔터 안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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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시간_ 월-목 (금요일 휴관) 오전 10시~오후 3시 까지.

이용대상_ 용산,남대문 상담센터에서 접수한 후 이용 가능.

위치_ 용산구쪽방상담소 건물에서 직진,미니마트를 끼고 

         골목으로 올라가다보면 20미터지점에 청원고시원건물 지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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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광-아스트랄프로젝트 : 나의 진실이 다른 사람에게도 진실인 것은 아니다

내가 믿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이 진실인가? 눈에 보이는 현실과 경험들은 지금까지 내가 알고 있던 지식들에 의해 만들어 진 것은 아닐까? '진실'이라는 것은 항상 가려져 있는 것. 그냥 나의 시야에 바로 들어오지는 않는 것, 그래서 매우 조밀하게 보지 않으면, 상대 편의 입장이 되지 않으면, 진실은 쉽사리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생각이 든다. 서울역에 수만명이 지나쳐도 유령 취급당하는 노숙인처럼, 큰 빌딩들 사이에 가려진 쪽방촌들 처럼 말이다.    

 

보고싶은 것만 보기

'월광-아스트랄프로젝트(marginal 글/타케야 슈지 그림)'라는 만화책에 보면 한 원주민의 눈에 비친 문명인의 모습이 나온다. 어느날 파피뉴기아에 한 원주민 마을에 문명인이 찾아왔다. 문명인은 원주민들이 모두 모인 자리에서 추장을 만났다. 그리고 문명인은 자기의 가슴 소매에서 담배 하나를 꺼내었다. 그리고는 담배에 불을 붙히고 담배연기 한모금을 깊이 들이마시고는 내뿜었다. 문명인은 호의와 우정의 표시로 담배하나를 추장에게 건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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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 광경을 지켜 보던 원주민은 이 광경을 매우 다르게 보고 있다. 그 당시 5살이였던 한 원주민 아이가 청년이 된 후 이렇게 고백한다. 원주민에게 있어 옷이란 것을 상상해 본적도 없기에, 문명인이 가슴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는 모습은 원주민에게 매우 기묘하게 보였다고 한다. 원주민의 눈에는 살 속에서 손을 쑤셔 넣어 담배를 꺼내는 모습으로 보였고 그자리에 있던 모든 원주민들은 담배를 꺼내는 이 과정에 대해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고 얘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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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옷이 존재하지 않는 문화 속에 옷은 피부의 일부처럼 보일 지 모르겠다. 이처럼 나는 과거의 지식이나 경험에 대해 너무 맹신한 나머지 새로운 것에 대한 상상 자체를 하지 못하게 되거나 나의 고정관념이나 상식이라는 게 보편적일 것이라는 착각을 종종한다. 옷이 없는 사회에서 옷을 상상하지 못하듯. 나는 내가 알고 있는 지식이나 경험으로 너무나 다양한 세상과 다양한 사람들을 쉽게 규정/해석하려는 오류를 범하거나 '등잔 밑이 어둡다'는 속담처럼 보고 싶은 것만 바라보게 되고 이로 인해 정작 실질적이고 본질적인 것을 쉽게 놓치기도 한다.

 

보고 싶은 것을 넘어 바라보기 

나는 나의 좋은 모습이든 나쁜 모습이든 잘 변하지 않는 나를 자주 발견하게 된다. 이게 '일관성'이라고 하면 좋은 말이 겠지만 이게 터무니 없는 그리고 전혀 유연함 없는 '똥고집', '꼴통'이라 부를수 있는 것 이라면 다른 말이 된다. 나의 일관성과 똥고집이 사실 정확하게 분리 하기 어렵더라도, 이 똥고집이 많은 의심과 유연한 고민 속에 탄생한 똥고집이라면 내가 이런 말을 하지는 않을 것이다. 오히려 나도 모르게 많은 편견들과 전혀 과거에서 멈춰버린 지식들에서 가지게 되는 '이것은 당연하다'는 생각에서 비롯된 똥고집. 이런 '편견 가득한 똥고집'이 분명히 내 안에 있다.

 

어떻게 내가 보고 싶은 것 너머에 있는 것을 바라 볼 수 있을까?  나와 너가 다르다는 걸, 그러기에 생각도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어떻게 이기적인 내가 전적으로 -생각이 아닌 습관적으로- 이해 할 수 있을까? 내가 상식이라고 생각하는게 다른 사람에게는 전혀 상식이 되지 못한다는 걸 나의 일상에서 어떻게 받아 들 일 수 있을까? 문명인이 원주민의 사고를 동시에 가지는 것은 분명 어려운 일 일 것이다. 하지만 사고가 다를 수 있음을, 내가 생각하는 것이 보편적이지 않다는 것을 인정하는 노력은 지속적으로 - 실패하더라도- 나를 다른 사람에게 이해시키기 위해서라도, 소통이라는 것을 위해서라도 필요한 덕목이라는 생각이 든다.

 

# 나이가 들면 들수록 자꾸 전혀 유연하지 않고 매우 경직된 고집들이 불쑥 불쑥나와 걱정이다. 결국 '꼰대'라고 부르는 사람이 되어가는구나 라는 생각과 함께. 우울해 진다.          

 

# '당신의 진실이 나의 진실이 될 수 없는 부분'에서 나의 운동이 시작된다는 생각이 든다. 그만큼 나의 진실이 다른이에게 진실이 되지 못함 또한 긴장감 있게 고민해야 할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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씻는 게 무서운 쪽방의 겨울_참세상

 

씻는 게 무서운 쪽방의 겨울

[기고] 쪽방 생활 8개월, “춥고 외롭지만 여기서 살아야 한다”

슈아 (초보 쪽방생활자) 2011.01.18 17:39

전국이 꽁꽁 얼었다. 서울도 영하 10도 아래로 내려가기 일쑤다. 아무리 두꺼운 옷을 켜켜이 입더라도 이 한파를 이기기는 힘들 것 같다. 나는 서울의 한 쪽방에서 산 지 이제 8개월이 넘어선 초보 쪽방생활자다. 당연히 이번 겨울은 내가 쪽방에서 맞는 첫 겨울이다. 쪽방에서 겪은 여름은 무척이나 힘겨웠다. 무더위 속에서 너무나 뜨거운, 꼭 찜질방이 되어버린 나의 작은 쪽방에서 속옷 바람으로 힘겹게 여름을 넘겼다. 그러고 나니 겨울도 ‘별게 있겠냐’ 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것은 오산이었다. 이제 이 겨울의 절반을 보낸 듯 한데, 쪽방의 겨울은 정말 익숙해지기 힘들다는 생각이 매일 든다. 

쪽방의 기나긴 겨울밤

 

쪽방에서의 겨울밤. 처음에는 쉽게 생각했다가 추위가 더 매서워 지자 서서히 방안에도 한기가 찾아와 나의 잠자리를 괴롭혔다. 내가 아는 형이 사는 쪽방은 난방이 되지 않아 전기장판을 깔고 자고 있다. 그에 비하면 나는 난방은 돼니 나은 편에 속한다. 하지만 방안에 흐르는 차가운 공기는 좀처럼 데워지지 않는다. 이불 아래 방바닥에는 그나마 따뜻한 기운이 흐르는데, 이불을 넘어선 피부는 찢어 질듯 차갑다. 이불 속에 온몸을 숨겨도 보지만 이내 잠들면 숨이 막힌 지 손 하나, 얼굴이라도 내밀게 되고. 그리고 두 시간 후면, 대기와 접한 내 피부는 얼음같이 차가워진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잠을 깬다. 한기로 인해 차가워진 피부를 다시 이불에 집어넣어도 보지만 다시 몸이 따뜻해지려면 시간이 필요하다. 어떤 날은 그렇게 자고 깨고를 세 번 이상 반복 한 적도 있다. 그러고 나서 드는 생각은 '아, 이것이 쪽방의 겨울이구나'였다.

 


씻는 게 무섭다
 

내가 사는 건물에는 온수가 나오지 않는다. 그냥 찬물이 아니다. '냉동'찬물이라 해야 적당 할 만큼의 찬물이다. 얼음장 같은 물에 세수하기, 설거지, 쌀 씻기를 하고 나면 손이 찢어질 거 같은 고통이 찾아온다. 나는 커피포터에 물을 끊여서 세수를 한다. 그렇지만 커피포터에 한 번에 끊일 수 있는 물의 양은 매우 적다. 처음엔 여러 번 물을 끊여서 세수도 하고 머리도 감았지만 이것도 계속하니까 짜증이 났다. 그래서 커피포터에 단 한번 물 끊여 세수도 양치도 대충하게 되어 버렸다. 차가운 세면장의 물을 몇 번 접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되도록 세면장에는 가지말자’라는 메시지가 온몸으로 전해지게 된다. 그래서 그냥 대충 산다. 말 그대로 잘 씻지 않게 되어 버렸다. 

 

샤워는 당연히 엄두도 못 낸다. 난 아는 사람들 집을 전전하며 샤워를 했다. 다들 내가 샤워를 하기 위해 놀러 간다는 걸 알고는 있을까? 그러다 가끔 가는 목욕탕은 정말 살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누가 그런다 “와, 얼굴이 좋아 졌다” 그래서 “목욕탕 갔다 왔다”고 말하니까 하는 말. “목욕탕 가기전과 후가 이렇게 다르면 뭔가 문제 있는 거 아냐” “그래요 저 문제 많아요” 
 

온수가 되는 쪽방건물이라도 세면이나 설거지정도는 가능하겠지만 샤워는 하기 힘든 것은 마찬가지이다. 너무 추워진 날씨 때문이기도 하지만 적은 월세를 내는 쪽방생활에서 집 주인의 눈치가 보이기 때문이다. (대게 쪽방은 월세에 전기세가 포함된다.) 그래서 몇몇 쪽방주민들은 쪽방 상담센터에 있는 공동샤워시설을 이용하거나 목욕탕을 자주 가는 방식으로 씻는 문제를 해결하고 있다.
 

시멘트 벽, 여름엔 지하수가 흐르고 겨울엔 고드름이 핀다
 

내가 사는 쪽방건물은 40년이 훨씬 넘어버린 낡은 건물로 그냥 보기만 해도 언제 무너질지 모를 정도의 위태로운 모습이다. 벽의 시멘트는 다 벗겨져 있으며 건물 곳곳에서는 물이 샌다. 여름에 건물 안쪽의 한 벽면에서 물이 줄줄 새어 나오는 걸 보았다. 시멘트 벽에 무슨 지하수라도 있는 듯이 말이다. 그리고 찾아온 겨울, 이곳에 고드름이 자라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작았는데 이제는 벽면에서 축 늘어져 바닥까지 고드름이 흘러 내려왔다. 이 얼음이 녹는 봄이 되면 꼭 이 건물까지 함께 녹을 것 같아 약간 겁이 난다. 그래도 이 건물이 40년을 버텨왔었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이곳에서 살 수 밖에 없는 이들을 위해 아무리 열악해도 10년은 더 버텨줘야 되지 않냐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쪽방에 살다보면, 쪽방촌의 분위기가 겨울이 여름보다 매우 조용하다는 걸 바로 느낄 수 있다. 여름철에 시끌벅적 했던 골목들도, 취객들도, 삼삼오오 모여 얘기 꽃을 피우던 주민들도 겨울에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사람들이 더욱 방안에서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쪽방촌에는 병이 중하거나 나이가 많은 분들도 많이 계시고, 추위로 인해 다들 되도록 방안에서 나오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쪽방촌 주민들의 삶은 쪽방의 크기만큼 혼자에 익숙한 삶들이라는 생각도 들지만 여름에 비해 겨울은 이상하게도 쪽방이라는 공간이 더욱 외롭고 춥다는 생각이 든다. 아직은 초보 쪽방생활자로 겪는 첫 겨울, 매섭고 외롭다는 생각도 많이 들지만 작은 내 쪽방에 익숙해지려고 노력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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