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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스테릭의 기전

그다지 크게 신경쓰지 않던 것들이

최근에서야 문제시 되어서 뇌에 각인되어 버렸다.

 

문제 - 화를 내는 방법을 모른다.

 

거참, 말하자면 웃기지 않을 수 없다.

 

화를 내는 방법을 모른다고? 이 세상 어느 사람이 화낼 줄을 몰라?

 

그러니까 내 말은,

'신경질'이라는 감정기전과 구분하여 진정한 '화'.

진정한- 이라는 수식어를 붙여도 되는지 모르겠지만

내가 의미하는 건 내가 부당한 입장에 놓여 있고 부당한 대접을 받고 있고

내 소중한 인격체가 상처를 입었을 땐 일어나야 할 감정기전이라는 것이다.

 

여기 다시 의문점.

 

화 안내는 게 더 좋지 않나? 다들 화내지 않는게 오래 사는 비결이라던데?

 

굳이 비유하자면 신경질이라는 것은

꼭, 가득 차 버린 아이스크림 통을 뚜껑으로 닫았을 때 삐질거리며 삐져나오는 아이스크림들 같아서

썩 괜찮지 않다는 거다.

 

삐져나온 아이스크림은, 겉으로 보기에도, 나중에 아이스크림 통을 잡을 때도 좋지 않다는 것.

그 끈적거림이 히스테릭이라는 것이다.

만지면 끈적하여 불쾌한 그것이-.

 

그러니까 아예 전자렌지용 팝콘처럼 열 받으면 바로 바로 폭발하는 게 오히려 낫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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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성숙한 어린아이의 수준에 머문 여성작가라.

이를테면, 공지영, 은희경, 신경숙.

이들의 작품을 읽어보지는 않았더라도, 이름 정도는 한번 이상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나 역시 이들의 작품을 몇 개 읽어 보았고 그 때마다 그들의 작품에 대한

내 나름의 평을 한 적도 있었다.

 

그런데, 이런 기사를 읽었다.

 

[통속과 자기연민, 미성숙한 자아]

조숙한 여자아이 수준의 인식에 머무르는 대한민국 여성작가

 

그 기사를 읽으면서 한 편으로는 공감하면서도

왜인지 모를 거부감이 들었다.

어설픈 페미니즘적 본능이 발동했을 수도 있고,

아니면 그 여성작가가 누가 됐건 내가 좋아라 했던 작품을

내팽개친 것에 대한 분노 일수도 있겠다.

 

'조숙한 여자아이의 수준'

 

그들의 글을 읽으면서 적절한 말은 떠오르진 않았지만

어딘가 모르게 불안정한 심리상태를 느낄 수는 있었다.

생각해보면 그 불안정함이란 내가 책을 읽었던 그 당시의 나이에 겪었던

흔들림과 비슷했는데 말이다.

 

하기야, 그들의 글을 읽고 나면 한동안 염세주의에 빠져

우울해 했던 적도 있었다.

 

거부감이라니. 어디로부터 나타난 거부감이었을까.

 

'대한민국 여성 작가'

 

안타깝다. 이렇게 싸그리 한 무리에 묶여 표현되어져야 한다는 것이.

'대한민국 남성 작가'와 구분되어 분류되어져야 한다는 것이 안타깝다.

 

남성작가기 때문에 그들은 미성숙한 글을 쓰지 않는다는 것일까.

사실적이고 강한 문체에, 역동적이다 못해, 글을 읽다가 지쳐버리는 글을 쓰는

남성작가들은 얼마나 대한민국에서 지지를 받고 있다는 것인가.

  

잠깐 딴 이야기를 하자면,

한 인격체로 존중되어지는 사람에게는 '하나'의 자아만 존재하는 게 아니라

몇몇의 자아로 나누어진다고 한다.

거기에는 이성적인 어른도 존재하지만

그러니까 우리가 흔히'어른' 이라고 분류하는 그들도 어린아이적 자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직장 상사로서 딱딱하기 그지 없고 과연 웃기는 할까, 하던 사람이

집에 돌아가기만 하면 아내에게 있는 없는 애교 떠는 사람들 같이.

작가들은 자신들의 작품을 통해 그걸 표현하고 있는 게 아닐까.

 

그것이 비난의 대상이 될 수는 없지.

 

…하지만 글을 쓰다보니 그 기사의 가자가 뭘 얘기하는 줄 알겠다.

좀 더 발전할 필요가 있다는 거겠지.

좀 더 진보할 필요가 있다는 거겠지.

http://zine.media.daum.net/mega/h21/200704/24/hani21/v16488889.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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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할 놈의 건망증!

이놈의 건망증은 언제 치료될런지.

계속해서 물건 잊어먹는 것 때문에 아주 미치겠다.

아니, 기억나기는 나는데 그 시간이 비효율적인 interval이 있어서

그게 짜증난단 말이지.

 

언제였지, 수욜인가 목욜인가(9일인가 10일 인가) 때 도시락 벤치에 홀라당 내버려 놓고

버스에 올라타서야 생각이 나두고는 그 Surprising한 상황을 겪었으면서 어째 이리 멍청한지.

 

  

금욜인가(11일인가) Pine center의  "삐삐삐'라고 하는 곳에 가서 옷을 사려고 하는데 버스시간이 됐길래

서둘러 움직였다.  

그런데 얼씨구, 파일을 두고 와버렸다. 이것저것 어마어마한 것들이 들어있는.

 

다행인지 불행인지 버스 문 바로 앞에서 뒤늦게서야 기억이 나고 다시 되돌아 갔더란 말이지.

 

어째 어디에 뒀는지 기억날 듯도 해서 가보니 없어서 점원에서 물어 봤더랬다.

 

"에… I forgot to bring my file."

 

사실, 이 문장 하나 말하려고 엄청 고민한 건데, 그걸 알리 없는 점원은 이랬다.

 

"What? I don`t understand what you say."

 

그래서 조금 상처받았다.



LEAVE

 

1. If you leave a place or person, you go away from that palce or person.

 

2. If you leave an institution, group, or job, you permanently stop attending that institution, being a member of that group, or doing that job.

 

3. If you leave your husband, wife, or some other person with whom you have had a clse relationship, you stop living with them or you finish the relationship.

 

4. If you leave somthing or someone in a particular place, you let them remain there when you go away. If you leave somthing or someone with a person, yoy iet them remain with that person so they are safe while you are aw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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싫지만, 익숙해져야 할

 

필요할 때만 내 이름을 부르며 다가오는 싫은 사람들.

 

정말, 정말, 싫지만 익숙해야 할 것들.

정말, 정말, 나에겐 필요없지만 그냥 두고 지켜봐야 할 것들.

역겹고, 더럽고 경멸하지만

그래도 익숙해야 할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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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다시 찾아온

달갑지 않다.

정말, 정말, 지긋지긋하게도 달갑지 않다.

앞으로 몇번이 남았을지 알 수 없는 내 배란일처럼,

몇번이고 찾아온 이 거지같은 자괴감이 정말 정말 몸서리 처진다.

 

하지만-.

 

결국 허우적거리고 만다.

결국엔 헤어나오지 못한다.

스스로에 대한 역겨움과, 실망감과 허무함과 경멸이 목까지 차올라

질식할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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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버스 안에서...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많이 쓸데없는 공상을 많이 한다는 걸,

너무나 잘 알고 있다.

 

버스를 타고 유난히도 맑은 하늘에 멍한 시선을 두다가

신호를 받아 같이 멈춰선 버스 옆의 자동차에 시선이 갔다.

아니, 정확히는 운전석의 사람에게.

뭔가 공상이 시작될 듯 할 때 신호는 초록불로 바뀌었고.

내 공상은 또 [[비누방울]]이 터지듯 사라졌다.

 



'부모를 때리는 자식에게만 죄가 있는 것일까.' 하는 거였다.

 

물론 내가 본 그 운전석의 운전자가 폭력적 성향을 가지고 있고

그 성향을 부모에게 보인다는, 그러한 말이 아니라.

그냥, 그 분은 내게 '아, 저 사람도 어떤 한 부모의 자식이겠구나.' 하는,

생각을 통해 연상 작용에 의해 든 하나의 매개(媒介)였다.

 

요즘은 정말 그런 기사나 뉴스를 많이 보게 된다.

'저런 미친 놈.' 혹은 '저는 안 늙을 줄 아나. 제 자식에게 어떤 대접받으려고.' 등등등등의

생각이 드는.

아니면, 또한 서글픈 얘기지만 자식의 폭력에 견디다 못한 노부가 자식을 죽였다는 뉴스도.

서글프다. 맘도 아프고 머리도 아프다.

옛말에 자식은 전생의 부모의 원수였다는 근거없는, 그러나 주억거릴 만한 얘기가 있다지만

그건 이번 살아 있는 생에서 마저 끝내지 못한 연을 제대로 풀으라는,

그런 의미가 있었을 텐데도-.

 

세상은 왜 이렇게 지독한 곳이 되어버렸을까. 왜 이렇게 끔찍한 곳이 되어버렸을까.

  

그럼 다시 쓸데없는 내 공상으로 돌아와서.

정말, 정말, 부모를 때리는 자식만 나쁜걸까. 정말, 정말로?

 

물론 폭력을 행사한 자식 놈은 욕먹어도 싸고, 쇠고랑 차도 싸고, 맞아죽어도 싸지만.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내가 생각하는 부모폭력 책임의 비중을 따져 보자면

자식(자녀)........................................68%

부모.................................................27%

(경제적 사회적 등의) 기타 이유.............5%

이정도 랄까.

 

부모는. 자식들에게 부모라는 존재는. 정말 절대적인 불가변의 울타리같은 존재다.

타인이랑은, 나와 경계가 분명한 타인과는

언제든지 헤어질 수 있고 언제든지 배신당할 수 있고 언제든지 내게 해를 가할 수 있지만

나의 모체인 부모는 그렇지 않다.

죽어도 내 편이라는. 그 든든함이. 그 믿음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에, 부모가 자식의 그런 든든함과, 믿음을 저버렸었다면?

그런데 만약에, 부모가 자식에게 견딜 수 없는 상처와 고통을 제공했었다면?

그런데 만약에, 부모가 자식의 마음속에 있던 그 귀중한 것을 처참하게 부숴버렸다면?

 

이제 세상은 제 부모를 때리고 죽이고, 그에 이기지 못해 부모가 자식을 죽이는-

그런 지독하고 끔찍한 곳이 되었다.

 

더,더,더, 많은 얘기가 가슴속에 묻혀 나오지를 못하고 있다.

그냥 단어들만 서로들 엉겨들어 풀래야 풀수가 없다.

나중에 더 공부해서 이런 주제로 더 말할 수 있겠지.

지금은 아닌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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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타고 공상하기

 

정말 공상하기를 좋아하는 나는,

시간이 날때마다 공부를 한다거나, 책을 읽는다거나 그러지 않고

공상을 해버린다.

공상하기 좋은 장소는 역시 [[버스]] 안.

적당한 소음에, 적당한 시선변화가 저절로 이뤄지니.

그래서 어김없이 오늘도 공상을 했다.



'이제껏 수없이 자살을 생각해왔는데, 어째서 죽지 않고 살아 있는 것인가' 라는 것이었다.

 

제일 먼저 자살을 생각했던 것은 초등학교 5학년이었나,

아무튼 그때는 항상 깨끗한 새 커터칼을 필통에 넣어두고 다녔었다.

누군가가 나에게 "죽을래!" 하는 소리를 하면 어김없이 그 칼을 꺼내 손목을 그었다.

물론 치명상입을 정도는 아니었지만 그렇게 하면 왠지 내가 약하지 않았던 것처럼 느꼈었다.

 

더, 나이를 먹었을 때 그러니까 중학생이 되었을 땐 커터칼보다는

예리한 듯한 검은 머리핀을 호주머니에 넣어다니며

이상하게 울음이 날 것 같을 때마다 여러번, 여러번 그었다.

져버린 해 덕분에 붉게 물든 보며 학원차를 기다릴 때도 그었고,

집에서 잠을 자다가 새벽에 깨었을 때도 핀을 찾아 그어댔다.

그래서 그런지 오른쪽에 비해 왼쪽 정맥이 더 두드러져 있다.

 

고등학생 때는, 항상 죽음을 생각했다.

어떻게 죽을까.

무엇을 하고 죽을까.

죽을 땐 나라는 존재는 없었던 것처럼 마치 그랬던 것처럼 죽어야지.

 

아마도 내 어머니는, '공부는 안하고 잡생각을 했었니.' 라고 말하겠지만

자살에 대한 열망이라고 해야할지, 아니면 의무감이라고 해야할지,

그러한 내 갈망을 나 스스로도 어쩌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최근.

눈물을 주체하지 못했다.

아무것도 아니었는데 울었다. 누군가가 필요했다.

나를 죽여줄, 아니면 나를 말려줄.

누군가의 이름을 불려야 했다. 하지만 그 이름은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고.

다만 그때 나는 '살려줘, 살려줘. 제발.'

그렇게 중얼거리며 이불을 뒤집어 쓰고 울었다.

 

이상하다. 사실은.

그렇게까지 자살을 생각하고 갈망했는데

나는 왜 아직까지 살아 있는 걸까.

정말 그때는 죽어야 했을 것 같았는데. 죽어야 했는데.

어째서 나는 살아 있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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