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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혹한 식탁"

소개글>

"잔혹한 식탁"의 장르는 한마디로 코믹 잔혹 뮤지컬 정치극이다.
코믹한 캐릭터들이 술술 읊어대는 대사는 자뭇 진지하고 처절하다.
"잔혹한 식탁"은 '만일 FTA가 체결된다면?'이란 다소 무거운 질문에,
FTA 시대를 지배할 잔혹한 생존의 법칙을 한 가족의 일상을 통해 풀어낸다.
이 가족이 외치는 '큰 것은 공중화장실을 이용하라, 내가 아픈 것을 가족에게 알리지 마라...' 등의 FTA 시대 생활수칙은 호들갑스럽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곱씹어보면
바로 우리 앞에 닥친 비극적인 현실이 아닐 수 없다.
배우들의 범상치 않은 노래와 랩을 듣는 재미가 쏠쏠하다.

"잔혹한 식탁"은 연극모임<빵과 장미>가 공연했고
이현정, 이마리오 감독이 촬영, 편집을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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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칙한 반:찬』

 

<<발칙한 반:찬은...>>>

FTA 때문에 밥맛이 뚝 떨어진 사람들이 모여 기획한 《프로젝트 반:찬(반FTA 찬인권)》

거리 퍼포먼스를 영상으로 제작한 것이다. 거리 게릴라 퍼포먼스로 많은 사람들의 발길을

멈추게 했던 《반:찬》은 이번 영상을 통해 온라인에서 더 많은 사람들과의 소통을

시도하고 있다.

비록 아마추어들의 연기는 어색하기 그지없고 구성도 헐겁지만 그 촌스러움이 밉기보다는

따뜻하다. 무엇보다 FTA와 인권이라는 무거운 주제를 쉽게 풀어내려고 애쓴 흔적이 보인다.
『발칙한 반:찬』은 노동자의 스패너, 농민의 곡식과 씨앗, 아픈 사람의 약과 물에서 인권을

발견하도록 우릴 이끈다. 그리고 민중으로부터 그것을 송두리째 앗아갈 잔인한 존재로서

FTA와 전략적 유연성을 그려내고 있다. 하지만 『발칙한 반:찬』은 제목에서 느껴지듯이

그리 어둡지만은 않다.

반전의 통쾌함을 맛볼 수 있으며 그 통쾌함 뒤에는 묵직한 메시지가 있다.
이 영상은 이현정, 이마리오 감독이 촬영과 편집을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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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행 털고 싶은 날'에 초대합니다.

안녕하세요. 인권운동사랑방입니다.

유례없이 비를 기다리는 가을입니다.  

자연도, 사람도, 가을로 가는 길목에서 단비를 기다리는 듯합니다.

길가의 은행나무도 지난 주 내린 비로 겨우 물이 들기 시작하네요.

이 가을, 노랗게 물들어가는 ‘은행’을 사랑방에서 털어보려 합니다...^^

다름 아닌 ‘후원의 밤- 은행 털고 싶은 날'을 하게 됐습니다.

여러분이 인권운동사랑방의 ‘단비’가 되어 주세요.

 

인권운동사랑방 월세 탈출을 위한 후원의 밤 - 은행 털고 싶은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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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젝트반찬] 인권은 방울방울, 그 속으로 고고~

반찬편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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웰컴 투 : 빈곤의 발견!

웰컴 투 : 빈곤의 발견!

네~ 만나서 반갑습니다. 인권운동 내의 새바람! 인권운동사랑방 반빈곤프로젝트팀입니다.
이번에 저희가 갖고 나온 것은, 그렇습니다. 바로 <빈곤의 발견> 입니다.
<빈곤의 발견>이 다른 홈페이지랑 무엇이 다르냐!
바로 누리꾼들과 함께, 빈곤에 대해 이야기 나누고자 만들었다는 거지요!
더불어, ‘누군가’가 처한 상황 안에서 빈곤의 조각을 찾아보자는 거지요~ 물론, 정답은 없다는 거!
알아두셔야 합니다~ 밑줄 별표 하나!

그렇다면 ‘그 누군가’가 누구냐!
때로는 우리를 달뜨게 하고, 때로는 눈물도 웃음도 나게 했던, 영화 드라마 주인공들이라는 거지요.
하지만 옆집에 사는 그녀랑 뒷집에 사는 그와 다르지 않다는 거!
바로 나의 모습이며 우리의 이웃이라는 거지요.




그러면 그(녀)의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그(녀)들의 속에서 ‘어떤 부분을 빈곤?!’이라고 있을지, 숨어있는 빈곤을 찾아보는 거지요.
물론, 금방 찾지 못할 수도 있겠지요. 그럴 아래 버튼을 살짝 눌러주세요. 그러면, 인권운동사랑방 반빈곤프로젝트팀 활동가들이 찾은, 그(녀)들의 빈곤 조각을 엿볼 있답니다.
아! 잊어서는 됩니다~ 펼쳐진 내용은 정답도 아니고 그대의 생각과 다를 수도 있다는 사실을요.

빈곤? 도대체 무엇을 빈곤이라 있으며, 그럴까요?
우리가 끊임없이 소통하는 과정에서 빈곤을 만들어내는 구조가 무엇인지 투명해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누리꾼 그대들과 알콩달콩 이야기꽃 활짝 피우길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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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오아시스'의 공주

공주는 손과 발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중증 뇌성마비 여성 장애인이다. 임대아파트 입주권을 가졌지만 가족들에게 빼앗기고 자신은 가족들이 살던 낡은 집에서 혼자 산다. 옆집에 사는 여성이 가족으로부터 돈을 받고 가사도우미로 집에 들르지만, 공주에게 밥상만 차려 주는 정도이다. 공주는 주로 방 안에서 깨진 거울을 보는 것으로 시간을 보낸다. 옆집 여성은 공주의 집으로 종종 낯선 이들을 데려와 지내곤 해서 공주를 늘 불안하게 만든다. 어느 날 공주는 아버지를 뺑소니 교통사고로 숨지게 한 범인 대신 실형을 살다 나온 종두를 만나고, 그에게 성폭행을 당하지만, 점차 그와 사랑에 빠지게 된다.

공주가 빈곤하다고 할 수 있어?


                                                         


그 정도면... 뭐... 살만한 거지..
낡아빠지긴 했어도 집 있겠다, 물, 전기 다 들어오겠다, 끼니 꼬박꼬박 챙겨 먹겠다, 안 그래?

라고 말한다면, 이 말이 목구멍을 간지럽힐 것 같아.
너 그렇게 살 수 있어?

걘 아무 일도 안 하잖아. 돈 쓸 데도 없고
라고 맞받아친다면, 그땐 우리 어디 조용한 데로 가서 차분히 얘기 좀 할까?


공주는 일을 안 하는 게 아니라 못 하는 거라고. 한국에서 공주에게 돈 벌게 해 줄 일자리가 얼마나 있을까? 아무 교육도 받지 못한 공주가 일할 수 있는 곳. 더구나 장애인 이동권의 열악한 현실을 감안할 때, 그 일자리는 공주 집 근처여야 할 텐데? 아무래도 힘들겠지? 공주는 억울하지 않을까? 일 할 수 없는 사람한테 ‘당신은 일을 안 하니 기본 의식주 선에서 만족하고 사시오’ 하니까.

그녀는 그림을 그리고 싶을 지도 모르고, 책을 읽고 싶을 지도 모르고, 대학에 가서 공부를
해 보고 싶을 지도 모르고, 여행을 떠나고 싶을 지도 모르는데. 장애인이라는 것이, 돈을 못 번다는 것이 그런 욕구들을 모두 죽이며 살아야 하는 정당한 이유는 아무래도 아니지 싶어.

빈곤의 경계는 어디에 있을까? 생명을 이어가는데 필요한 식량, 물, 추위를 피할 수 있는 집 같은 것을 공급받고 있다면 빈곤의 경계 너머에 있다고 할 수 있나? 뭔가 비인간적이야.
적어도 모든 인간은 자신의 삶의 형태를 선택할 수 있는 자유를 누려야 하지 않을까? 물론 환경파괴나 자원 남용처럼 다른 사람들과의 공동의 삶을 해치지 않는다는 전제를 깔고 말이야. 난 그 자유의 부당한 박탈, 그러니까 장애나 재산 같은 것들에 따른 차별로 인한 박탈이 빈곤인 것 같아.

이를 테면, 공주가 옆집 아줌마가 데려오는 낯선 사람들의 침입을 불안해하면서, 사생활도 없이 사는 것을 ‘빈곤하다’고 말할 수 있다는 거야. 공주에겐 분명 불안에 떨지 않고, 사생활을 보장 받으면서 살 자유가 있는데, 맘 편하게 히 살 수 있는 집이 없고, 믿을 수 있는 활동보조인이 없는 셈이니까.

분명 누구나 여행을 갈 자유가 있는데 공주는 바깥세상의 높은 계단과 턱 때문에 이동할 수가 없다면, 그것이 바로 빈곤하다는 증거라고 생각해.

누구나 배워서 사회생활을 할 자유가 있는데 교육을 제공받지 못한다면, 그것도 역시 빈곤한 증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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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미안하다 사랑한다’의 갈치

갈치의 어머니는 정신 질환을 앓고 있다. 지능 수준이 갈치보다 어려서 갈치가 돌보아 주어야 한다. 아버지가 누구인지 모르고 어머니는 예전의 쇼크로 인한 것인지 사고력이 어린 아이 수준이라 현재 갈치는 호적이 없다. 호적이 없는 갈치는 초등학교에 입학하지 못하고 어머니를 보살피며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갈치가 현재 거주하고 있는 집도 전직 신문 기자인 한 할아버지의 집으로, 할아버지는 갈치의 어머니와 삼촌의 이야기를 소설로 팔려고 그들과 같이 살고 있다. 최근에 갈치에게는 삼촌이 생겼다. 전혀 친척이 없는 줄 알았던 갈치에게는 기쁜 일이지만 삼촌은 시한부 생명을 살고 있다.
                                                                


갈치! 갈치는 아이의 애칭이자 이름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이름과 애칭이 다르죠. 갈치의 삼촌 이름은 무혁이지만 여자친구는 그를 '아저씨'라는 애칭으로 부릅니다. 여자 친구 이름은 '은채'이지만 애칭은 '돌팅이'입니다. 그러나 갈치는 이름이 없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호적이 없는 무적자입니다. 이름도 없고, 호적도 없는... 한국에 공식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 갈치입니다.

오늘도 갈치는 어린아이 수준의 지능을 가진 어머니와 함께 하루를 보내고 있습니다. 호적이 없는 갈치는 학교를 갈 수도 없고 어머니를 혼자 둘 수 없기에 늘 어머니와 함께 있습니다. 아침에는 지하철 역에서 어머니와 함께 김밥을 팔고 이후에는 달동네 집에서 하루를 소일하며 보냅니다. 학교를 다니지 못하는 갈치가 또래 집단에서 소외될 수밖에 없고 더 나아가 그 나이에 필요한 지식을 얻지 못함으로써 점점 사회생활과 취직에 어려움을 겪게 되지 않을까 걱정입니다.

어린 갈치에게 또하나 문제가 되는 것은 곁에서 돌봐주고 지켜봐줄 사람이 적다는 것입니다. 현재 갈치의 곁에 있는 사람은 갈치의 어머니, 삼촌, 그리고 전직 신문 기자입니다. 항상 곁에 있고 의지할 수 있는 어머니는 예전의 쇼크로 인한 것인지 어린 아이 수준의 사고밖에 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어머니가 곁에 있어 좋지만 곁에 있어줄 다른 누군가도 필요한 나이입니다. 그외에 갈치를 도와줄 수 있는 삼촌도 시한부 생명을 살고 있고 전직 신문기자는 이들을 이용하려고만 하고 있습니다. 결국 갈치는 삼촌이 죽고 전직 기자마저 손을 뗀다면 당장 하루하루의 생계를 걱정해야 하는 처지에 놓이게 됩니다. 갈치의 어머니는 생활능력이 없고 갈치의 나이로는 마땅한 생계 수단을 가지기 어렵습니다.

이렇게 주변에 도와줄 사람이 적은 갈치는 어려운 일을 당해도 혼자서 모든 걸 감내해야 합니다. 당장 가장 친했던 삼촌이 죽어도 갈치의 마음을 다독여줄 사람이 곁에 없습니다. 이런 정신적 공황이 갈치에게 너무 큰 상처가 되지 않아야 할텐데요.

거주하고 있는 달동네의 집도 그들 모자를 이용하려는 전직 기자가 얻어준 집(?)으로 안정된 주거 공간이라 말하기 힘듭니다. 또한 달동네의 환경상 지리적으로 학교, 도서관, 보건소 등 다양한 사회적 자원에 대한 접근권에서 제약을 받을 수 있습니다. 해당 시설들의 위치가 달동네에서 먼 경우가 많고 연계할 교통편이 부족한 상황은 공적 자원을 이용하는 데 불편함을 가져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특별한 수입원이나 재산이 없는 상황에서 갈치가 새로운 안정되고 쾌적한 주거 공간을 마련하기는 힘들 듯 보입니다. 만약 그 전직 기자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은 뒤 이들 모자를 쫓아낸다면 당장 갈치는 살 곳이 없게 됩니다.

아직은 많은 사람들의 관심어린 시선과 보살핌이 필요한 갈치, 그러나 갈치는 주변 상황에 맞추어 스스로 어른스럽게 행동합니다. 그러나 그런 모습이 더 마음이 아픕니다. 갈치가 빈곤한 상황을 벗어날 가능성은 과연 얼마나 될 지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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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주먹이 운다'의 상환

패싸움에 휘말려 합의금이 필요하게 된 상환은 동네 유지의 돈을 노린 강도 사고를 벌이게 된다. 이 사건으로 소년원에 수감된 상환은 주먹질로 복싱부 코치의 눈에 띄게 되고 복싱부에 가입한다. 그러던 어느 날, 공사장에서 일하던 아버지가 갑작스런 사고로 돌아가시고 할머니마저 쓰러졌다는 소식이 전해져온다. 상환은 아버지를 잃은 슬픔을 잊고 할머니의 병원비를 마련하기 위해 신인왕전 우승의 꿈을 불태운다.
상환의 삶에서 빈곤의 모습을 찾아보세요.


                                                                                           


어려운 시간들을 헤쳐나가고 있는 상환의 삶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쉽지는 않네. 하지만 상환의 삶 구석구석에서 빈곤의 모습들을 찾아볼 수 있을 것 같지 않아?

상환이 소년원에 들어갈 수밖에 없었던 것은 어때? 하루벌어 하루 먹고 산다는 아버지와 적당한 일자리를 구할 수 없었던 할머니, 그리고 가족에 의해 모든 것을 해결해야 하는 한국사회에서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던 상환. 돈을 훔친 행위를 덮으려는 게 아냐. 다만 우연의 연속으로 보이는 사건들 속에서도 빈곤을 만들어내는 구조를 찾아볼 수 있지 않냐는 거지.

소년원에서 보내는 시간 동안 삶을 가꿔나가기 위한 충분한 기회를 보장받지 못하는 것도 빈곤을 만들어내지 않아? 여전한 차별과 편견의 시선들이 ‘전과자’들을 괴롭히기도 하고 수감기간이 끝난 이후에 적절한 일자리를 찾지 못해 빈곤의 늪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사람들도 많잖아.

할머니의 병원비를 마련하기 위해, 어쩌면 목숨을 걸어야 하는 신인왕전에 도전한 것도... 워낙 건강보험제도가 휴지조각만도 못하다는 비판을 받아온 지 오래되기는 했지. 혼자 살아가야 할 할머니에게 재활은 너무나 중요한 것이었는데 필요한 의료서비스를 충분히 보장해줄 수 있는 제도가 있었다면... 상환은 권투경기에 도전하는 대신 공부를 하거나 다른 기술을 익힐 수도 있지 않았을까?

물론 권투가 다른 것에 비해 가치없는 일은 아니지. 누구에게나 자신이 원하는 일이 가장 소중한 것이고 할머니가 쓰러지지 않았더라도 상환은 권투를 선택했을 지도 몰라. 하지만 소년원에서 나온 이후 권투를 계속해야겠다는 꿈을 키워가면서 신인왕전에 나갔던 것은 아니잖아. 그게 안타까워. 한창 이런저런 일들을 꿈꿔볼 수 있는 시기에 소년원에 들어가야 했고 그 안에서 선택할 수 있는 좁은 기회에 갇혔다는 사실 말야. 또래의 아이들이 그림을 배우거나 춤을 배우거나 자동차 정비기술을 익히면서 미래를 설계할 때 상환에게는 자신만의 삶을 실현할 수 있는 기회가 별로 주어지지 않았다는 거. 그게 빈곤인 것 아닐까?

누군가의 삶을 한 단어로 설명하는 건 주제넘은 일이겠지. 상환의 삶 역시 빈곤이라는 단어로만 설명될 수는 없을 꺼야. 하지만 빈곤이라는 단어를 빼놓고 상환의 삶을 이해할 수 없다는 점도 분명해보여. 우리에게 주어진 삶의 기회들을 지금도 빼앗기고 있는 것은 아닌지, 우리의 조건이나 처지와 상관없이 삶에 기본적인 권리들이 보장되고 있는지 함께 생각해보자구. 그리고 정말 우리가 싸워야 할 것이 무엇인지 같이 고민해보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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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오아시스'의 종두

 

 

종두는 뺑소니 교통사고를 낸 친형을 대신해 교도소에서 2년 6개월 동안 살아야 했다. 형이 뺑소니 사고를 냈을 때, 가족들은 별다른 벌이도 없는 눈엣가시 종두가 형을 대신해서 교도소로 가길 암묵적으로 원했던 것이다. 하지만 가족들은 종두가 교도소에 있는 종두 몰래 이사를 갔고 출소 후 어렵게 가족들을 찾은 종두를 달가워하지 않았다. 종두는 지금 형이 운영하는 카센터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숙식을 해결하고 한달에 30만원 정도를 용돈 식으로 받는다. 어느 날 뺑소니 교통사고 희생자의 집에 찾아간 종두는 중증 뇌성마비 장애인인 피해자의 딸이 혼자 있는 것을 보고 결혼까지 생각하게 되지만, 이러한 종두의 생각을 가족들은 받아들이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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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두의 가족은 형이 카센터를 운영하면서 부족하지 않게 살아가는 편입니다. 하지만 가족이 부유하다고 해서, 종두도 빈곤하지 않다고 얘기할 수 있을까요? 종두가 가족의 구성원으로 살아가기를 원하는지 아닌지가 중요하지 않을까요? 또한 종두가 원하더라도 가족으로부터의 지원이 적절히 보장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가족들이 종두를 눈엣가시처럼 여기는 상황에서 적절한 지원이 보장되기는 만무할 테니까요. 꼭 가족이 지원해야 하는 것은 더욱 아닐 테구요. 그러니까 종두라는 개인의 삶에서 빈곤을 찾아보자구요~

종두는 형이 운영하는 카센터에 살고 있지만 카센터는 통풍과 난방 등의 기본설비조차 제대로 갖추지 못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가족들의 냉대로 언제 쫓겨날지 모릅니다. 주거권의 중요한 요소인 점유의 안정성이 보장되지 않는 것이죠. 그 곳에서 사생활의 자유를 기대하기도 힘들죠. 독립적인 주거공간을 마련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카센터에서 아르바이트로 받는 월 30만원이 전부다 보니 고시원에 들어가기도 어려운 지경입니다.

게다가 종두는 ‘전과자’입니다. 그 낙인이 이력서에 항상 따라다니는 한, 안정적인 일자리를 구하기는 힘들 것입니다. 종두가 적절하고 안정된 노동을 하기 힘들다는 것은 실업이나 저임금의 불안정한 생활을 하게 된다는 의미만이 아닙니다. 우리는 모두 각자가 하고 싶은, 그리고 의미 있는 노동을 통해 공동체 구성원들과 관계를 맺어가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종두에게는 그런 기회조차 박탈되기 쉽습니다. 이런 기회의 박탈은 다시 종두를 항상적인 빈곤의 경계에 머무르도록 할 것입니다. 사회가 빈곤을 강제하는 것이죠.

전과자에 대한 낙인이 왜 생겼을까요?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임금노동으로 자신의 생계를 해결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비정상이라고 몰아갑니다. 전과자 역시 자본주의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는 인간이라 이윤을 높이는 데에 도움되지 않는 부산물 정도로 여겨집니다. 임금노동을 통해 상품을 만들어내고 소비할 수 있는 사람들만 걸러내게 되죠. 모든 생산물이 이윤을 창출하기 위한 ‘상품’으로 팔리는 사회에서는 노동력마저도 상품으로 취급됩니다. 한때, 가난하다는 것은 게으름의 증거일 뿐이라며, 심지어 범죄자로 취급되기도 했었죠. 노동력을 팔지 못하는 사람은 인간답게 살기 위해 기본적으로 필요한 것들을 충족할 수 없는 배제의 삶, 빈곤의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전과자라는 낙인과 자본주의 사회의 상품생산 논리가 종두를 빈곤한 상황으로 내몰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억압의 사회구조와 이데올로기가 변하지 않는다면, 안정화된 물질적 생활 조건에서 자신이 원하는 삶을 선택하고 행동할 종두의 자유 의지가 빈곤의 늪에서 녹아내리는 악순환의 반복을 피할 수 없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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