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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언론의 전사 '외피소드 외전1'-(뉴스메이커 삼만호)

아~ 안녕하세요. 뉴스메이커 30000호입니다. 뉴스메이커 22(투투)를 보면서 아, 그렇구나 나도 그러면 30000(삼만)으로 해야겠구나 생각이 들었어요. 저, 사실 블로그라는 곳에 공식적인 문건들 말고 이런 글은 처음이랍니다. 좀 재미없더라도 첨 쓰는 글이니만큼 여러 블로거들의 응원부탁합니다. 아자~

투투님이 에피소드 2를 써주셨는데, 아마 이 글은 에피소드 1에 해당 할 수도 있겠지만 정확히 말하면 참세상 방송국 설립이전 이야기이기 때문에 참세상 '외전(外傳)' 이라고 보는 게 더 정확할 것 같습니다. 아무튼 이야기 시작해 볼까요!



이야기의 출발은 그러니까 1996년 크리스마스 다음날인 12월 26일 새벽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그 때 신한국당으로 기억하는데 여당에서 새벽에 무슨 비밀작전 하듯이 국회에 모여서 단 몇 초만에 노동법, 안기부법을 비롯해 수백개 법안을 날치기 처리해 버린 것이었습니다. 이게 그 악명높은 노동법, 안기부법 날치기 사건이었지요. 아~ 충격적인 일이었습니다. 12월 18일 민주노총에서 최종적으로 총파업 철회를 선언하고 나서 모두가 손을 놓고 있었죠. 저도 머리도 아프고 해서 쉴 겸 시골에 내려가 있었는데 아침에 그 뉴스를 보고야 말았습니다. 설마하고 있다가 덜컥하면서 당한 것이지요.

뉴스보고서 너무 황당하기도 하고 어이없기도 해서 한동안 멍하니 있다가 아침밥 먹고 바로 서울로 올라왔습니다. 그리고 당시 같이 활동하던 정보통신연대 사람들하고 연락하다가 그날 저녁에 어느 단체 사무실에 모두 모였죠. 다들 흥분해 있었습니다. 노동자들도 총파업하는데 우리도 뭐라도 해야하지 않느냐, 이대로 있으면 우리는 인간도 아니다...뭐 이런 이야기들을 나누며 '그래 좋았어, 한번 해보자!'며 만든 것이 '총파업 통신지원단'이었습니다.

대부분 통신인들이었던 통신지원단 사람들은 가장 잘 할 수 있는 일들을 찾아서 했습니다. (여기서 전부가 아니라 '대부분 통신인'이라고 한 이유는 이 글을 쓰고 있는 뉴스메이커 30000호 때문에 그렇습니다. 30000호도 참여했는데 당시에 이메일이 뭔지도 몰랐고 게시판에 글을 어떻게 올리는지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거의 컴맹이었거든요..^^)
암튼, 이 사람들 제일 잘하는 일이 홈페이지 만들고, 온라인으로 지지서명받고 파업지지 여론형성하고 파업소식 알리는 것이었죠. 인터넷과 당시 하이텔, 나우누리, 천리안이라는 정보통신망을 잘 아는 네티즌들이 많았으니까 수백개 동호회 대문이랑 홈페이지 첫 화면에 블랙리본도 달고, 한국투쟁 소식을 영어로 번역해서 여기저기 메일링리스트로 뿌리니까 해외에서도 연대 메시지들도 쏟아지기 시작했습니다.

통신지원단 했던 사람들, 지나치게 헌신적이었습니다. 12월26일부터 시작해서 수요파업으로 전환한 1월 중순까지 서로 집에 안가기, 잠 안자기, 안씻기 경쟁을 하면서 사무실에서 벌레처럼 살았드랬습니다. 12월31일과 1월1일에도 집에도 안 가고 밤새워 속보 만들고 지지성명 조직하고 외국에 한국의 총파업 상황을 알렸습니다. 그리고 이것저것 마음속으로 해보고 싶었던 건 다 해봤는데, 당시 참세상(나중에 진보네트워크센터가 됩니다)이라는 독립적인 정보통신망에 대화방을 개설하고 최초로 온라인 토론회까지 개최했지요

아무튼 할 때는 쫌 힘들었는데 해놓고 보니까 재밋기도 하고 뭔가 온라인으로 새로운 실험들을 계속해보고 싶었어요. 그래서 시간이 쫌 지난 후에 그 때의 주역들이 다시 뭉쳤습니다. 이번 미션은 오디오 생중계방송이었습니다. 민주노총에서 98년 7월에 총파업을 한다고 했는데, 이 때를 맞춰 총파업 집회를 인터넷 생중계하고 해외에는 영어로 동시통역해서 전송하는 실시간 중계 방송을 기획했지요. 뭐 오디오 중계방송가지고 호들갑떨고 그러냐는 분들 계시겠지만 당시 컴퓨터, 386이면 거의 최고수준이었습니다. 동영상 꿈꾸려면 아직 몇 년은 더 기다려야 할 형편이었으니까, 오디오 중계방송, 당시 최신 기술이었습니다.

준비도 열심히 했습니다. 리얼서버 설치해서 돌려도 보고, 최대 동시접속수도 확인해보고, 리허설도 다 했죠. 남은 것은...민주노총 총파업 선언이었습니다. 해외에도 동네방네 소문다 내놨죠. 영국 레이버넷에서는 탑 화면에까지 올려서 한국 총파업 들으라고 광고까지 한 상태였습니다.

정부와 민주노총의 최종협상이 어떻게 될까 지켜보면서 그날이 왔습니다. 이른 아침 민주노총 위원장이 긴급기자회견을 연다고 합니다. 우리는 파업선언만 해라 해라하며 고사를 지냈는데, 글쎄 파업을 철회한다지 뭡니까?! 아~ 지금 생각해도 열 받는 일입니다. 며칠 밤새운 것은 둘째치고 외국에다가 온갖 설레발 다쳐놨는데 이거 원 민망해서리... 암튼 파업철회소식에다가 살짝껴서 '중계방송도 취소합니다'고 써서 올려놨지요.

그러나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고 식칼로 노동자 때려잡던 재벌회장이 책을 낸지도 어언 1년이 다 가던 무렵 결국 성공하고 말았습니다. 98년 11월, 서울 국제민중대회 총결산과 민중대회 실황을 인터넷 오디오로 생중계했습니다. 이게 운동진영에서는 최초로 진행된 실시간 오디오 중계방송이었다고 하더군요.

당시 스튜디오에서 사회자와 게스트가 나와 국제민중대회 총결산을 진행하고, 중간에 민중대회 현장을 불러서 민중대회 실황중계를 했는데요, 자 여기서 잠시 그 때 사회자와 현장PD를 맡았던 두 사람이 출연한 진보넷 광고를 듣겠습니다.(클릭하고 3초만 기다려주세요)



현장중계방송에서 가장 어려운 점은 회선 문제였습니다. 당시 회선용량이나 속도도 크지 않아서 14400bps가 최신형 핸드폰이었거든요. 거 왜 아시는 분들은 아실텐데 한 글자 입력하면 모니터에 글자들이 처음부터 차례대로 주루룩 달라붙으면서 글 쓸 때마다 그렇게 달라붙고 심지어 어떨 때는 반응도 안하고 그냥 멈춰서 가만히 서 있는 바로 그 회선속도. 사람 인내를 시험하는 한계 속도지요.

물론 돈 들여서 한국통신에 전용선 신청해서 집회장까지 끌고 들어오면 되지만 어디 돈이 있었습니까? 어차피 다 노가다로 하는 일인데요. 설령 전용선이 들어왔다고 해도 행진을 하게 되면 그 전용선 끌고 다니면서 중계 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서 무지하게 고민 많이 했습니다. 현장중계하고 싶은데 어찌하면 될까~ OTL

다들 머리를 맞대고 며칠을 고민했어요. 뭐 좋은 방법 없을까... 그랬는데 한가지 아이디어가 번쩍하면서 눈에 들어 왔습니다. 당시 인터넷폰이라는 게 생겨나서 음성을 컴퓨터로 바로 입력시키는 방법들이 나왔거든요. 그걸 보니까 현장에서 핸드폰으로 사무실 서버 컴퓨터에 연결된 전화에 전화를 걸면 음성 입력이 될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기술팀에서 새로 장비 몇 개 사서 실험을 해봤죠..그러니까..되더라고요!! 물론 지금 생각해 보면 그게 별건가 할 수도 있지만 당시로서는 기발한 발상이었죠.

날은 밝았습니다. 오늘은 중계방송이 있는 날. 필자는 리포터와 함께 일찌감치 집회장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최종 리허설을 했지요. 진보넷으로 전화를 걸었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어찌된 일인지 연습할 때는 되던 전화입력이 되질 않는 거예요. 몇 번을 시도하고 컴퓨터 다시 끄고켜도 말을 안듣더라고요. 집회시작은 시시각각 다가오고 이번에는 무조건 될 것 같아서 대대적으로 홍보도 해놨는데 또 안되면 이거 무슨 개망신!
그러나 결국은 해 냈습니다. 전화입력이 됐냐고요? 그건 실패했어요. 그런데 어떻게 했냐고요? 수화기에 엠프 마이크를 대고 엠프로 증폭시켜서 이 소리를 컴퓨터로 입력시켰지요...ㅎㅎ 암튼 당시 기술팀 정말 고생 많이 했다고 합니다.

스튜디오에서 국제민중회의 총결산을 마치고 사회자가 현장을 불렀습니다. 이렇게.. "네, 노동절 집회가 시작되었나 본데요, 집회현장 연결해 보겠습니다. 오**리포터..." 당시 현장 리포터를 맡았던 오모씨의 첫 멘트 "네, 여기는 노동절 집회가 열리고 있는 종묘공원입니다. 지금 종묘공원에는..." 이었고요, 마지막 멘트는 "지금까지 노동절 행진을 마친 광화문에서 진보네트워크센터 오**이었습니다". 마지막 멘트 나가고서 얼마나 기뻣던지...

진보넷의 처음이자 마지막 리포터였던 오모씨는 당시 공로를 인정받아 지금까지 진보넷 사무국장을 하고 있다지요 아마. 그리고 스튜디오 사회자가 오** 리포터를 불렀는데, 그 이름한번 불러보고 계속 부르고 싶었나 봅니다. 사회자와 리포터는 지금 한 지붕아래에서 한 이불 덮고 같이 산다고 합니다.

한번 성공하자 기술은 날로 발전했어요. 공공연맹 파업때는 파업대오가 명동성당과 서울대로 분리되었는데 양쪽 파업대오 모습을 플래쉬로 담아서 야간 파업집회 때 상영을 하기도 하고 집회가 열리면 실시간 중계는 아주 쉽게 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99년 9월 "참세상방송국"이라는 이름으로 웹사이트를 열고 첫 시험방송을 내보내면서 참세상 방송국이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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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장 오타님의 [그 길을 지켜보며....]는 에피소드 4 로. ㅎㅎ

* 이 글은 간장 오타맨...님의 [그 길을 지켜보며....] 에 관련된 글입니다.

오오 간장님이 저보다 더 많은 이야기를 기억하고 계시는 군요.

에피소드4 정도에서 공공 3사 파업에 대해 이야기해 생각이었습니다.

어찌나 고생도 많이 하고 우여곡절 많던 3사 파업이었던지.

 

당시 발전 38일 파업투쟁을 이끌었던 이호동 전 발전노조 위원장님은 이번 민중언론의 제안자로 나서기도 하셨답니다.

 

무엇보다 진보넷 갈월동 숙대역 출구 앞에 생긴 훼밀리 마트에서 새벽 5시까지 마셨던 기억이 새록새록해 진다는 부분이 참 감명깊게 다가온다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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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참세상의 전사(前史)를 기록하며 -뉴스메이커 22호

 

아 안녕하십니까? 저는 뉴스메이커 22호 - ‘투투’라고 해요. 블로거인 뉴스메이커가 각 디렉토리마다 분열을 시도하면서 22호 ‘투투‘가 탄생했어요. 뉴스메이커 22호 ‘투투’의 역할은 미디어참세상의 지난 역사를 기억나는 데로 정리하는 일이랍니다.  민중언론의 전사 디레크토리의 주인이라고 하겠지요.


 



 22호는 미디어참세상이라는 민중언론이 진보넷에서 독립함과 더불어 새로운 민중언론을 만들기 위해서는 미디어참세상의 지난 일을 돌아보는 일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어찌나 22호는 생각도 잘 하는지 ^^


문제는 22호가 미디어참세상의 전신인 참세상뉴스와 참세상방송국을 처음 만들 당시부터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22호는 그래서 주위사람들에게 물어보기로 했습니다. 그러나 다들 처음 어케 만들었는지 긴가민가하더군요.(사실 귀찮아서 제대로 물어보지도 않았어요. 어딘가 정리된 자료가 있을 텐데 그런 연혁 궁금하시면 노동미디어 행사자료나 진보넷 총회자료등을 찾아보면 되겠죠) 아무튼 들었던거 생각나는 대로 두서없이 풀어볼까합니다.


미디어참세상의 전신은 참세상방송국과 참세상뉴스입니다. 사실 아직도 참세상뉴스, 참세상방송국으로 부르는 분들이 많지요? 처음에는 지금처럼 본격적인 뉴스를 생산하지는 않았답니다. 98년 9월경 처음 시도 되었던 참세상뉴스는 그야 말로 진보진영의 카인즈(kinds, 뉴스데이터 베이스)라는 개념으로 진보적인 매체들을 네트워크에 모아보자는 취지였다고 합니다. 물론 보도자료 요약 정도의 수준에서 간단한 뉴스가 제공되기는 했지만 뉴스생산을 위한 역량투여는 거의 없는 상태 였지요. 또한 오마이뉴스보다도 먼저 ‘모든 민중이 기자다’라는 모토로 민중기자석을 운영했습니다. 당시 민중기자석에 쓰인 기사를 보면 지금의 참세상 속보와 뉴스의 중간형태의 기사를 현장 노동자들이 직접 작성해 보내준 것이 있습니다.


아참 여기서 잠깐 주먹구구식 기억에 의존하다보니 이보다 더 전사가 있군요. 참세상뉴스와 참세상방송국의 시작보다도 먼저 미디어적 시도가 되었는데요. 바로 96-97 총파업기간에 시도되었다더군요. 일명 총파업 통신중계단이라고 다들 들어 보셨죠? 22호는 그때 열심히 노동법개악저지를 위해 거리를 뛰어다니던 때라 다른 뉴스 메이커에게 통신지원단 얘기는 넘겼습니다. 그래서 이글은 에피소드2입니다.  하지만 통신지원단 이야기(에피소드1)를 해줄 뉴스메이커가 지금 분열중에 있습니다. 조만간 나타날 겁니다.


오늘은 민중언론의 탄생설화를 시로 소개해드리겠습니다. 22호가 직접 지었 답니다. 22호는 언론이 만들어지고 나면 시인으로 다시 태어날지도 모르겠습니다. 아 시상이 막 떠오르는군요.

 

'나는'


나는 98년에 태어났다.

나는 태어날때부터 빨갛게 태어났다.

나는 빨갛다고 탄압도 많이 받았다.

나는 언론이 뭐 그러냐는 말도 많이 들었다.

나는 수많은 자본의 네트워크 안에서 버그로 인식되며 자랐다.

나는 외로웠다. 나 한참을 울었다. 사랑받고 싶었다.

그래도 나는 꿋꿋했다.

그러다 나는 민중들이 탄압받고 생존을 위해 싸울 때 더 이상 버그가 아니었다.

나는 민중들에게 인식되기 시작했다.

나는 투쟁의 현장에서 맞아가며 컸다.

나는 수많은 카메라를 깨먹었다.

나는 굶기를 밥 먹듯이 했다.

그래도 나는 민중언론의 길을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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