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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태, 솔/까/말 프로젝트 -⑦ 임신중지를 둘러싼 우리 얘기

 


낙태, '솔/까/말' 프로젝트*** 낙태를 범죄화 하려는 움직임들에 반대하며, 낙태는 여성의 삶과 건강에 관한 문제라는 것을 솔직히 까놓고 말해보기 위한 릴레이 글쓰기 액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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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태, 솔/까/말 프로젝트 -⑦ 임신중지를 둘러싼 우리 얘기


명숙(여성주의 수다모임 살롱, 인권운동사랑방 활동가)


* 이 글은 여성주의 수다모임에서 오갔던 임신중지(낙태)에 대한 이야기를 바탕으로 제 생각을 정리한 것입니다.


# 수다로 푸는...


여성주의로 생활을 돌아보자는 ‘여성주의수다모임 살롱’에서는 한 주제로 이것저것 수다를 떤다. 아직은 미숙하지만 여성주의의 삶을 꿈꾸며 매달 모여 이야기를 나눈다. 수다가 주는 맛이란 다양한 측면을 요리조리 본다는 것, 내 생활을 솔직하게 비추어본다는 것이다. 물론 자주 삼천포로 빠질 때가 많다는 흠이 있지만...6월 주제는 ‘임신중지(낙태)’였다. 낙태라는 용어 자체가 태아를 떨어뜨리다라는 뜻이어서 태아를 중심으로 한 시각에 갇혀있기도 하고, 결국 태아의 생명권 논쟁으로 이어지게 되는 시각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또 임신한 여성이 자기 몸에 대한 결정권이라는 측면에서, 임신중지가 더 나은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수다모임의 성원은 다양하다. 성적지향도, 성별도...


# 실천윤리학자 피터 싱어가 본 낙태... 생명권과의 오래된 논쟁


철학을 전공하는 한 사람이 낙태에 관한 피터싱어의 입장을 요약 발제했다. 피터싱어는 임신중지에 대한 윤리적 논란은 인간존재의 생성이 점진적인 과정임을 간과하기 때문에 생긴다고 보았다. 원하지 않는 수정란의 자의적인 제거가 문제가 되는 이유는 인간-생명에 대한 고전적 정의(인간이라는 종에 대한 집착)때문이라고 했다. 수정란을 잠재적 인간으로 보고, 수정란 제거는 죄 없는 인간을 죽이는 것과 같다는 등식이 우리에게 있다고 했다. 이어서 그는 수정란-태아와 성인을 구별할 명확한 경계선이 있지 않기 때문이며, ‘어디서부터 인간이냐’ 라는 질문에 답한다. 그는 태아를 인간으로 보는 것은 단지 인간 종에 속하느냐가 아니라 사회적 관계에서 인격체 유지여부로 보아야 한다고 했다. 그는 인간생명임은 쾌락과 고통을 느끼는 정도에 따라 결정될 수도 있으며 나아가 배아는 고통을 느낄 수 없으므로 생명이 아니라고까지 말한다. 

그는 ‘생사판단의 도덕적 기준’이라는 글에서 “다른 것들이 동등하다면, 한 존재가 자신이 생명을 갖고 있음을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사실로 인해 그 생명을 끝내는 것이 진정으로 나쁜 일이 되는 것이다. ..중략... 가령 신생아들에게는 그런 능력이 없다. 똑같은 이유에서 나는, 인간 태아가 모든 확률에 있어서 유일무이하고 합리적이며 자의식적인 존재가 될 것이라는 사실이 낙태에 반대할 이유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더구나 그는 미숙아로 태어난 태아가 체외 생존가능성이 낮고, 장애인으로 태어났을 때 불행한 가능성이 높은 사회현실에서 낙태를 불법시해서는 안 된다며 낙태를 인정해야 한다고 했다.


# 임신한 여성은 사라진 윤리학


“ 인간이냐, 아니냐, 생명이냐, 아니냐라는 논쟁으로 낙태를 인정하냐, 마냐로 이어질 수 없다” 
“ 임신한 여성의 시각이 전혀 없어”
“ 여성을 부수적 도구로 보는 시각 아니야”


잠깐 목소리들이 커졌다. 발제한 사람이 놀랄 정도로...... 참가한 사람들은 피터싱어의 논리구도를 동의하기 어렵다고 했다. 피터싱어가 낙태를 동의하는 입장이다 하더라도 말이다. 피터싱어의 논리에는 여성은 거의 보이지 않기 때문이었다. 누구 입장에서 임신중지를 바라보아야 하는지, 주체가 빠졌다. 임신이 여성의 몸에서 일어나는 현상이기에 출산이든 임신중지이든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여전히 임신중지의 주체인 여성은 사라지고 태아만을 주체로 사고하고 있다. 임신의 전 과정-수정란부터 체외수정까지 다 다뤄지지만 임신한 여성이 어떤 마음이고, 어떤 상황에서 낙태를 결심하는지는 제대로 다뤄지지 않은 채, ‘생명이냐, 아니냐라는 구도’를 중심으로 할 때 빠지는 함정은 여전히 존재한다. 초점이 여성이 아닌 태아에 맞춰진 상태에서 임신중지권에 대한 논의는 한계적일 수밖에 없지 않을까. 보수주의자들이 말하듯이 여성을 ‘태아를 낳을 몸으로 대상화’하며, 이는 ‘생명권’논쟁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으니까.


더구나 어느 누구도 어디까지의 생명은 인간이고, 어디까지의 생명은 인간으로 볼 수 있다고 정할 수 없다. 더구나 생명권에 대한 논의가 인간이 아닌 자연-생태계로 확장되고 있는 현시점에서 더욱 그렇다. 피터싱어의 말처럼 체외수정이나 칠삭둥이의 생존가능성만으로 인간여부를 판단한다면, 과학의 발전에 의존하는 생명에 대한 논의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더구나 장애아에 대한 낙태허용은 장애인의 재생산권을 제한하는 것으로 차별이다. 임신중지권은 여성이 자기 몸에 대한 결정권을 인정해달라는 것이고, 원치 않는 임신을 중지할 권리를 인정해달라는 것이다. 또한 이러한 접근은 임신중지와 여성의 건강권이라는 측면은 건드리기도 어렵다.


# 임신중지가 여성들에게 남기는 피해


“원치 않는 임신은 과실 치상 아닐까?”
“임신중지를 하는 여성들이 고통을 겪으면서도 결정하는 이유를 생각해봐야해.”
“낙태를 처벌하려는 논리는 임신(한 여성의 몸)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는 거랑 같아.”


임신중지를 하는 여성들이 고민 없이, 판단능력이 없어 임신중지를 결정하는 것일까? 아니다. 이 사회는 임신중지를 하는 여성 중 기혼여성의 비율이 높은 현실은 외면한 채, 여전히 임시중지를 한 여성들은 쾌락에 빠진 무책임한 여성으로 묘사하고 취급한다. 여성은 성욕이 없는 존재여야 한다는 논리에도 반대하지만 여성의 성욕을 안전하게 하기 어렵게 하는 지금의 ‘남성중심적 성규범’이 판치는 세상이라서, 콘돔을 비롯한 피임기구를 제대로 사용하기도 어렵다. 누가 챙겨주지 않아도 본인이 챙겨야 할 피임기구들을 쉽게 들고 다니기도 어렵다. 여성이건 남성이건 항상 콘돔을 상비하는 습관을 들이는 것은 말로는 권장할 일이지만 여성이 가방에 콘돔을 상비하고 다니면 ‘넘 밝히는 거 아니냐’라는 식으로 치부되는, 창피한 일이 되기 일쑤인 현실이다. 가방에서 피임약이 떨어지자 어머니가 매우 놀라며 다그쳤던 경험 등은 여성들이 한번쯤 겪었을 일들이다. 이런 현실을 고려한다면, 낙태는 처벌하면서 피임 실패에 대한 책임을 묻지 않는 것은 균형감조차 없는 거 아닌가라고. 그런 식으로 따지면 원치 않는 임신은 과실치상 아니냐고. 그런데 왜 그에 대한 논의는 없냐고 말이다.


이로 인해, 여성은 원치 않는 임신으로 자기 몸에서 일어나는 변화에 놀라고 걱정하며 고통에 시달린다. 더구나 임신중절 수술을 하게 될 때 신체 손상을 겪는다. 현행 법에서 임신중절이 가능한 경우는 “본인(임부)이나 배우자가 우생학적 또는 유전학적 정신장애나 신체질환이 있는 경우나 전염성 질환이 있는 경우”로 한정되어 있어서, 그렇지 않은 경우는 불법수술이란 딱지가 붙으면 더욱 병원에 가기 힘들다. 아이를 키울 수 없어 임신중지를 해야 하는 사회경제적 임신중지를 인정하지 않고 있으니 역설적으로 사회경제적 약자의 비용부담은 더욱 크다. 주변의 시선도 걱정이고, 수술 후 제대로 된 몸조리조차 어렵다. 게다가 사회적 편견으로 인해 죄책감에 시달리기도 한다. 사회적 편견이 보이지 않더라도 고통-자책감으로 힘들어한다. 이렇게 고통과 피해에 시달리면서도 여성이 임신중지를 할 수밖에 없는 상황-현실과 그로 인한 피해-고통을 사람들은 외면하고, 깊이 이해하려 들지 않는다. 지금처럼 임신중절-낙태 수술만을 부각시키는 지금의 논의는 임신중절후의 여성의 삶과 신체적 정신적 변화를 전혀 다룰 수 없다.


# 임신중지로 달라지는 관계들


“ 낙태를 경험한 연애가 더 기억에 남아.”
“ 그 경험이 그 파트너에 대한 자꾸 집착을 이어지는 이유는 뭘까?”


남성이든, 여성이든 낙태를 경험한 연애관계는 무책임한 일을 한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이나 피해의식과 실망, 파트너에 대한 집착 등이 마음에 남았다고 한다. 여성이 임신중절 수술로 인해 겪게 되는 손상들을 생각한다면 파트너 남성이 그에 대해 미안함을 느끼는 것은 당연할 수 있다. 수술 당사자인 여성이 피해감을 느끼는 것도 당연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파트너에 대한 집착으로 이어지는 건 조금 다를지 않을까?


대부분 여성들에게 강요하는 순결이데올로기는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임신중지경험을 쉽게 말할 수 없는 상황이기 때문에 자기만의 기억에 대한 불안감이 ‘집착’으로 나타나는 것일 수 있다. 지금은 새로운 관계-만남에서 임신중지의 경험을 말하는 게 쉽지 않은 현실이다. 남성의 경우도 ‘관계’, ‘섹스’가 삶의 문제와 동떨어져 있다가 삶의 문제가 되면서 고통스런 문제를 회피하는 경우도 있다. 그리고 그 회피의 방식중 하나가 결혼인 경우도 많다. 그 고리에 남성은 ‘책임감’이라는 가부장적 감수성, 다시 말해 관계에 대한 책임감을 넘어선, 태아의 아버지라는 책임감을 걸려 있는 것은 아닌지, 여성은 ‘아이가 주는 모성성’이라는 이름으로 아이를 낳고 가정을 이루는 것으로 이어지는, 남성파트너에 대한 종속을 일으킨 건 아닌지는 따져보아야 하지 않을까. 둘의 관계가 특별해서가 아니라 ‘임신과 임신 중지’를 했기에 특별한 관계로 여겨지거나 집착이 일어난다면 흔쾌한 일은 아닐 것이다. 임신이라는 여성의 몸에 일어나는 변화가 주는 새로운 경험이라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그것이 관계에 대한 집착으로 이어진다면 결국 여성을 재생산의 도구쯤으로 여기는 가부장사회의 시각에 갇히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임신한 여성은 모두 결혼해야 하는 것으로 여겨진다면 비혼 여성의 재생산권은 발디딜 틈이 없을 것이다.


임신이 어느 한 사람에 의해서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니 임신중지를 경험한 남녀사이에서도 변화를 주는 건 당연할 수 있다. 더구나 그 감정이 이 사회에서 임신 중지를 죄악시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 아닐 수 있으면 좋겠다. 물론 우발적 상태 임신이 생기지 않도록 연애도, 섹스도 조심해야겠지만 말이다.


# 성에 대한 권리와 피임


“섹스가 좋기는 한데, 임신할까봐 무서워 못 하겠어”


원하지 않는 임신의 공포는 섹스에 대한 기피로 이어지기 쉽다. 정말 운 없이 한 번의 관계가 임신으로 이어진다면 섹스는 안정적인 관계에서만 할 수밖에 없고, 서로를 책임질 수 있는 관계에서만 할 수밖에 없다면, 여성에게 사실상 성에 대한 권리는 제한되는 거나 마찬가지가 아닐까? 그런 점에서 피임은 매우 중요하다. 피임기구를 사용했지만 임신이 되는 경우도 있으니 이를 위한 섹스 후 72시간 내에 복용하는 ‘응급피임약’의 접근성도 높아져야 할 것이다. 인공수정 등 임신가능성을 높이는 기술이 발전하는 것만큼 피임기구 및 피임약이 발전한다면 ‘임신중지’에 대한 논란도 많이 사그라들지 않을까. 물론 우선적인 것은 섹스를 하면서도 함부로 상대 남성에게 피임기구 사용을 적극적으로 말하기 어려운 문화, 콘돔 사용을 ‘성적 쾌감의 반감’으로 여기며 남성들의 사고가 바뀌어야 하겠지만....적어도 임신과 임신중지가 여성의 삶을 선택하는데 장애물로 등장하지 않기 위한 예방책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그래서 여성들이 원하고 행복한 선택으로서 임신, 출산이 이루어졌으면 한다. 동시에 임신중지의 선택권이 얼른 우리에게 주어지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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