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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스를 꼼꼼히 읽으면 훈고적?

[맑스 오해하기] 댓글이 길어져 새로 올리는 글.
존재가 의식을 규정한다 라는 화두와 거기서 나온 여러 의견을 가지고 변혁을 모색한다는 취지에 동감해요. 진보 담론 포함해서 많은 경우에 어떤 책에 대한 해설을 읽고 그에 대해 다시 해설을 붙이는 경우가 많지요. 그리고 본문 내용 중 눈에 확 띄는 한 구절만 발췌해서 여기에 해설을 붙이고 여기에 다시 해설이 붙는 경우도 많지요. 모든 책을 다 읽을 수 없는 물리적 제한이 있기에 이것도 의미있는 일이지요. 그래서,


가끔 해설서나 발췌문은 도대체 어떤 맥락에서 씌였나 알아보고 싶을 때가 있지요. 시간의 제한 때문에 물론 이것도 다 가능한 것이 아니지요. 그래도 존재가 의식을 규정한다 라는 저 유명한 말은 원전을 살펴보게 만들더군요. 존재가 의식을 규정한다 라는 말에는 그 의식이 바람직한 의식인지 바람직 하지 못한 의식인지에 대한 가치판단이 없지요. 그런데 이것을 "모든 노동가는 저항의식을 갖는다" 로 바꾸는 순간에는 "모든 노동가는 억압을 깨려는 바람직한 저항의식을 갖는다" 라는 가치판단이 들어간 가설로 비약하지요. 너부리님, 리우스님, 몇 해 전 홍세화님 같은 분들이 말한 것은 바로 이 가치판단이 들어간 가설에 대한 비판이지요. 당연히 그런 비판과 취지는 타당해요. 그러나 이 가설을 맑스의 테제로 이해하는 것은 곤란하다고 생각해요. 맑스를 발췌 해설한 사람들의 테제는 될 수 있어도 맑스의 테제는 아니거든요. 이러면 어떻고 저러면 어떠하리 하고 말하면 할 말 없지많요. 맑스의 "존재가 의식을 규정한다" 라는 테제는 "의식이 존재를 규정한다" 라는 관념론 테제에 대한 유물론적 반격이지요. 풀어말하면 "의식, 언어, 생각 등이 먼저 있고 그것들이 사람들의 삶을 만들어 나간다" 라는 관념론 주장에 맑스는 "아니다, 사람들이 살아가는 과정에서 의식, 언어, 생각 등이 생긴다" 라고 말하고 있죠. 맑스의 테제를 비판하려면 유물론의 오류를 지적하고 관념론을 타당성을 논증하거나 아예 폭을 넓혀 서양철학의 관념/물질, 본질/현상, 의식/존재 등에 대한 비판, 혹은 유물론, 관념론 2분법에 대한 비판으로 나아갈 수도 있지요. 맑스의 텍스트를 우리 상황에서 재해석하고 비판하고 변혁의 도구로 써야하지 텍스트를 우상화 하면 안 된다는 논지에는 모두 동감할 거에요.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텍스트를 꼼꼼히 읽는 것도 중요하지 않을까요? 물론 다 읽을 수는 없지만 적어도 중요한 테제가 나오는 부분만이라도요. 텍스트를 꼼꼼히 읽는 일이 그 텍스트를 무비판적으로 신봉하는 일과 같은 건가요? 맑스 해설, 발췌문에 대해 의문을 갖고 문맥을 꼼꼼히 살펴 보는 일이 훈고학적이고 교조적이고 망해가는 방식이고 독선적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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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家 노동者

아무 생각없이 쓰다 보니 참 이상하다. 왜 자본 가진 사람은 자본가(家)라고 하고 노동 하는 사람은 노동자(者)라고 하는지. 공평하게 자본가, 노동가 또는 자본자, 노동자 하던지 아니면 아예 자본자, 노동가 하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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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스 오해하기: 존재가 의식를 어떻게 규정하는가?

너부리님의 [존재가 의식을 결정한다?] 에 관련된 글.
사회적 존재가 사회적 의식을 규정한다 이 유명한 맑스 이야기는 사실 상당히 오해의 소지가 있지요.


이 이야기가 나온 맑스의 원본은 독일 이데올로기 1부 1장 (관념론과 유물론) 4번째 주제인 역사를 유물론적으로 이해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사회적 존재와 사회적 의식. 원본의 핵심은 관념론 비판과 유물론 주장이지요. 관념론에서는 어떤 생각이 먼저 있고 (예를 들어 플라톤의 이데아론) 그 다음에 구체적 삶의 모습이 나온다고 보지만 유물론에서는 사람들의 구체적이 삶이 먼저 있고 그 삶 속에서 생각이 나온다고 보지요. 따라서 관념론에서는 자본, 노동이라는 생각이 먼저 있고 그 다음에 자본, 노동이라는 삶의 모습이 나온다고 보지만 유물론에서는 분업화가 진행되면서 자본, 노동으로 나뉘어진 삶을 살다보니 자본, 노동이라는 생각이 만들어진다는 것이죠. neoburi님, leeus님이 문제 제기한신 내용은 물론 타당하지요. 가부장 / 자본주의 / 식민지 사회의 억압적 관계를 던져버리지 못하고 그 속에서 고통받으나 저항하지 못하고, 심지어 어떤 경우에는 오히려 충실히 받아들이는 여성 / 노동자 /피식민 인민 (파농). 두 분의 주장은 사실 관념론적 논리에 가깝습니다. 억압 상태의 여성 / 노동자 / 피식민 인민은 저항적이어야 한다 (의식 / 이데아) 정말 그렇다 (존재 1 - 이데아에 충실한 삶) 그렇지 않다 (존재 2 - 이데아를 배반하는 삶) 이런 관념론에 의하면 댓글에서도 비슷한 이야기가 나왔듯이 다음과 같은 말도 가능하죠. 부르주아는 자본에 저항할 필요가 없다 (의식 / 이데아) 정말 그렇다 (존재 1 - 이데아에 충실한 삶) 그렇지 않다 (존재 2 - 이데아를 배반하는 삶) 유물론을 통해 해석하면 이렇게 되지 않을까요? 여성 / 노동자 / 피식민지 인민이 억압받는 구체적 삶 (존재) 그 억압적 삶이 괴로우니까 그것을 깨부수려는 의식을 고취한 상태 (의식 1 ) 고통스럽지만 그 구체적 삶을 바꾸려는 의식도 노력도 없고 심지어 억압 관계를 내면화한 상태 (의식 2) 문제 제기나 현실 인식이 날카로왔음에도 불구하고 두 분의 맑스 인용과 해석은 인용구절의 전체 문맥을 읽지 않으셨던가 아니면 오해라고 생각해요. 억압받는 여성 / 노동자 / 피식민지 인민이 의식 1을 갖지 못하고 왜 의식 2를 갖느냐 하는 문제에는 많은 논쟁이 있었죠. 두 분의 지적도 여기에 해당되겠죠. 그 이유는 제도화된 교육, 언론, 관습의 기계들 때문이지만, 이 기계들의 작동에 회의하고 저항하는 사람들이 있기에 의식1은 없어지지 않겠죠. 억압받는 여성 / 노동자 / 피식민지 인민이 자동적으로 로보트처럼 의식 1을 갖도록 유전자 코드가 짜진 것은 아니겠죠. 각종 지배 장치 속에서 오히려 의식 2를 더 많이 가질 수도 있고요. 그래서 홍세화 선생은 자본 이데올로기를 내면화한 노동자를 이야기하면서 "사회적 존재가 사회적 의식을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의식이 사회적 존재를 배반한다"라는 말을 했지요. 억압 받는 사람들이 의식 1을 갖는 것은 억압자 입장에서는 불온하고 위험한 것이었고 현재도 그렇죠. 독일 이데올로기 영어 번역본: http://www.marxists.org/archive/marx/works/1845/german-ideology/ch01a.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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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tray = 드러내다

달군님의 [상어가 사람이라면] 에 관련된 글. 좋은 글이네요. 웹에 떠도는 영어 번역을 보니


"저속하고 유물론적이고 이기적이며 맑스적인 경향을 드러내면 즉시 상어들에게 신고해야 한다고 배울 거야" The little fish had to beware of all base, materialist, egotistical and Marxist inclinations, and if one of their number betrayed such inclinations they had to report it to the sharks immediately. 좀 의아하죠? 보통 betray = 배반하다. 그런데 betray = 무심코 드러내다. 이런 뜻도 있네요. 생각지도 않게 (결국 자기 생각을 배반한 셈이네요) 드러내다. 어떤 면에서는 betray라는 단어가지고 역설적으로 말하고 있는 지도 모르겠어요. 쉽게 읽으면 "맑스적인 경향을 배반하면 신고해"가 되지만 (맑스적인 것을 공포로 묘사) 꼼꼼히 읽으면 "맑스적인 경향을 드러내면 신고해"가 되니까요 (맑스적인 것을 때려잡는 공포 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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