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게시물에서 찾기2006/05/25

2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6/05/25
    자본家 노동者(2)
    노나매기
  2. 2006/05/25
    맑스 오해하기: 존재가 의식를 어떻게 규정하는가?(10)
    노나매기

자본家 노동者

아무 생각없이 쓰다 보니 참 이상하다. 왜 자본 가진 사람은 자본가(家)라고 하고 노동 하는 사람은 노동자(者)라고 하는지. 공평하게 자본가, 노동가 또는 자본자, 노동자 하던지 아니면 아예 자본자, 노동가 하던지.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맑스 오해하기: 존재가 의식를 어떻게 규정하는가?

너부리님의 [존재가 의식을 결정한다?] 에 관련된 글.
사회적 존재가 사회적 의식을 규정한다 이 유명한 맑스 이야기는 사실 상당히 오해의 소지가 있지요.


이 이야기가 나온 맑스의 원본은 독일 이데올로기 1부 1장 (관념론과 유물론) 4번째 주제인 역사를 유물론적으로 이해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사회적 존재와 사회적 의식. 원본의 핵심은 관념론 비판과 유물론 주장이지요. 관념론에서는 어떤 생각이 먼저 있고 (예를 들어 플라톤의 이데아론) 그 다음에 구체적 삶의 모습이 나온다고 보지만 유물론에서는 사람들의 구체적이 삶이 먼저 있고 그 삶 속에서 생각이 나온다고 보지요. 따라서 관념론에서는 자본, 노동이라는 생각이 먼저 있고 그 다음에 자본, 노동이라는 삶의 모습이 나온다고 보지만 유물론에서는 분업화가 진행되면서 자본, 노동으로 나뉘어진 삶을 살다보니 자본, 노동이라는 생각이 만들어진다는 것이죠. neoburi님, leeus님이 문제 제기한신 내용은 물론 타당하지요. 가부장 / 자본주의 / 식민지 사회의 억압적 관계를 던져버리지 못하고 그 속에서 고통받으나 저항하지 못하고, 심지어 어떤 경우에는 오히려 충실히 받아들이는 여성 / 노동자 /피식민 인민 (파농). 두 분의 주장은 사실 관념론적 논리에 가깝습니다. 억압 상태의 여성 / 노동자 / 피식민 인민은 저항적이어야 한다 (의식 / 이데아) 정말 그렇다 (존재 1 - 이데아에 충실한 삶) 그렇지 않다 (존재 2 - 이데아를 배반하는 삶) 이런 관념론에 의하면 댓글에서도 비슷한 이야기가 나왔듯이 다음과 같은 말도 가능하죠. 부르주아는 자본에 저항할 필요가 없다 (의식 / 이데아) 정말 그렇다 (존재 1 - 이데아에 충실한 삶) 그렇지 않다 (존재 2 - 이데아를 배반하는 삶) 유물론을 통해 해석하면 이렇게 되지 않을까요? 여성 / 노동자 / 피식민지 인민이 억압받는 구체적 삶 (존재) 그 억압적 삶이 괴로우니까 그것을 깨부수려는 의식을 고취한 상태 (의식 1 ) 고통스럽지만 그 구체적 삶을 바꾸려는 의식도 노력도 없고 심지어 억압 관계를 내면화한 상태 (의식 2) 문제 제기나 현실 인식이 날카로왔음에도 불구하고 두 분의 맑스 인용과 해석은 인용구절의 전체 문맥을 읽지 않으셨던가 아니면 오해라고 생각해요. 억압받는 여성 / 노동자 / 피식민지 인민이 의식 1을 갖지 못하고 왜 의식 2를 갖느냐 하는 문제에는 많은 논쟁이 있었죠. 두 분의 지적도 여기에 해당되겠죠. 그 이유는 제도화된 교육, 언론, 관습의 기계들 때문이지만, 이 기계들의 작동에 회의하고 저항하는 사람들이 있기에 의식1은 없어지지 않겠죠. 억압받는 여성 / 노동자 / 피식민지 인민이 자동적으로 로보트처럼 의식 1을 갖도록 유전자 코드가 짜진 것은 아니겠죠. 각종 지배 장치 속에서 오히려 의식 2를 더 많이 가질 수도 있고요. 그래서 홍세화 선생은 자본 이데올로기를 내면화한 노동자를 이야기하면서 "사회적 존재가 사회적 의식을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의식이 사회적 존재를 배반한다"라는 말을 했지요. 억압 받는 사람들이 의식 1을 갖는 것은 억압자 입장에서는 불온하고 위험한 것이었고 현재도 그렇죠. 독일 이데올로기 영어 번역본: http://www.marxists.org/archive/marx/works/1845/german-ideology/ch01a.htm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