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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놀 5권-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사유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맞닥트리는 문제를 ‘합리적’으로 판다하는 것이 사유하는 것인가? 우리는 접하는 사건에 대해 기계적으로 판단하고 사유한다. 우리는 주어진 방식에 따라 평가하고 생각한다. 생각에도 습관이 있다. 우리가 생각한다고 여기지만 사실 그것은 기계적 반복이다. 일종의 업의 지속이다. 니체가 맞닥트린 거대한 침묵도 이런 것이 아닐까? 어떠한 사건도 일어나지 않고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고 애써 회피하는 공간. 우리는 보지 않고, 듣지 않으려 한다. 왜냐? 보지 않고 듣지 않은 것이 편하니까. 사유한다는 것은 익숙한 것들(習)을 깨트리고 한 발 나가는 것, 미지의 지대로 몸을 쑥 밀어 넣는 것이다.


니체는 이 경악의 순간을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아 점점 더 조용해진다. 그리고 다시 한번 내 가슴은 부푼다. 그것은 새로운 진리 앞에서 경악을 금치 못한다. 내 가슴도 말을 할 수 없게 된다. 입이 이 아름다움 속으로 무엇인가를 외칠 때 내 가슴은 함께 비웃고 스스로 침묵의 달콤한 악의를 즐긴다. 말하는 것뿐 아니라 사유하는 것이 내게는 가증스러운 것이 된다. 나는 모든 말의 배후에서 오류와 상상, 광기가 웃는 것을 듣지 않는가? ……오, 바다여! 오, 저녁이여! 그대들은 나쁜 교사들이다! 그대들은 인간에게 인간이기를 그칠 것을 가르친다. 인간이 그 자신을 그대들에게 바쳐야 하는가? 인간이, 그대들 자신이 지금 그런 것처럼 창백하고 빛을 발하며 말이 없고 거대하며 자기 자신 위에서 쉬어야 하는가? 자기 자신을 넘어서 숭고해져야 하는가?”


인간의 말과 사유가 끝나는 지점. 그 공간은 조용하다. 왜냐하면 더 이상 사유할 수도 들을 수도 없기 때문이다. 인간은 그 지점에서 한 번 더 생각하고, 한 발 더 앞으로 전진해야 한다. ‘진화’란 말이 가능하다면 이것이 인간의 진화다. 그 순간, 거대한 침묵에 직면하고, 그 침묵을 맞닥트려 그 것에 대결하고 벗어나려는 찰라, 우리는 ‘오류와 상상, 광기’가 웃는 것들 듣게 되고 ‘경악’하게 된다. 지나온 나를 비웃는 그 소리에. 벗어버린 허물의 형체에 대해. 이때의 정서. 니체는 이 정서를 ‘숭고’라는 감정과는 구별한다. 외부에 대한 경외감은 존재하지만 그 경외감 때문에 우리는 사유를 중단해 버린다. 가령 거대한 자연, 악의에 찬 자연을 숭고한 대상으로 만드는 순간, 나와 자연이 연결될 가능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자연 앞에서 숭고해질 필요는 없다. 이 감정을 냉정하고 메마르게 바라봐야 한다.


이 도약의 순간은 선택의 순간이기도 하다. 우리는 혼자서 무소의 뿔처럼 걸어가야 한다. 그러나 마지막 순간에 선택하지 않으려는 이들이 있다. 자신이 만들어온 ‘도덕’ 때문에 괴로워하는 이들. 자신을 ‘너무 선하고 너무 중요한 존재’로 여기기에 이 세상에 머물러야 할 것처럼 느끼는 존재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그들. 어쩌면 이들이야말로 구원할 수 없는 ‘최후의 인간’일지 모른다. 삶을 거부하는 이들. 니체는 쇼펜하우어를 다음과 같이 평가한 바 있다. 쇼펜하우어는 탁월한 지성의 소유자다. 그는 칸트보다도 인간들의 증오, 욕망, 허영심, 불신을 그 사유 안에 갖고 있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발전’이 결여되어 있다. 그의 사상은 어떠한 ‘역사’도 갖지 않는다. 즉 이 최후의 인간은 역사의 종말이다. 그는 자신의 역사를 반복할 것이다. 그는 진화의 사다리를 끊어버렸다. 아니, 애써 그 사다리를 회색으로 물들이고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생각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앞으로 나갈 수 있을까? 어떻게 비약할 수 있을까? 그러나 이 비약을 ‘인생 한방’과 구별하자. 우리는 니체가 얼마나 성실한 인간인지를 알고 있다. 그는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에서 모든 ‘인간적인 것’에 달라붙어 그것들을 철저하게 회의한 바 있다. 그는 사람들은 자신이 경험하거나 지나온 바만을 말할 수 있다고 말한다. 사유 역시 마찬가지다.


“[병에 걸린 몸을]가능한 한 깊숙이 변화시키려면 우리는 약을 극소량으로 그러나 장기간에 걸쳐 지속적으로 복용해야 한다! 어떤 위대한 일이 단번에 성취될 수 있겠는가!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길들이 있는 도덕의 상태를 성급하게 그리고 폭력적으로 사물들에 대한 새로운 가치 평가와 바꾸지 않도록 주의하려 한다.”


“모든 치료는 서서히 그리고 미세하게 행해진다. 자신의 여혼을 치유하려는 사람조차 가장 사소한 습관드를 고쳐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매일 열 번씩 자기 주위의 사람들에게 악의에 가득 찬 차가운 말을 퍼부으면서도 거의 그것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다. 특히 몇 년 후에 그는 자신이 매일 열 번 주위 사람들을 기분 나쁘게 하도록 그를 강제하는 습관의 법칙 하나를 만들어냈다는 사실을 생가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는 주위 사람들을 매일 열 번씩 기분 좋게 만드는 습관을 들일 수도 있다.”


오히려 ‘비약’은 초월적인 것과 쉽게 혼동될 수 있다. 뭔가 다른 것에 발생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다른 것에 대한 지나친 열망은 초월적인 무엇인가가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처럼 생각될 수 있고 이 오지 않음인, 내 몸에 강신하지 않음이 사람을 초조하고 위험하게 만들 수 있다. 우리는 이 함정을 조심하자. 비약의 순간이 존재할 수 있다. 그러나 비약은 내가 닦아온 일상적 수행의 결과물이지 신이 내리는 은총이 아니다. 인생 한 방 노리다 우리 인생이 한 방에 나갈 수 있다.

우리는 소박한 사물들을 대변하면서 시작하자. 그것은 우리를 둘러싼 것들, 가령 자연의 법칙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다. 대상을 어떤 법칙에 따라 설명하는 것은 사유가 아니다. 그것은 습속일 뿐이다. 습속을 벗어나는 것은 현재에서 낯선 것을 발명해내는 것이다. 니체는 과학의 질서 정연한 언어가 아니라 ‘야생적이고 추한’부분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한다. 우리는 코와 눈을 예민하게 해두자. 사실 어떤 것을 우리가 꿰뚫어 볼 수 있게 되었다 해서 그것을 곧바로 뚫고 나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습속의 힘은 이렇게 강하다.


삶과 행위의 법칙을 새롭게 건설하는 과제를 수행하기 위해 생리학, 의학, 사회학 그리고 고독학을 새롭게 익혀야 한다. 우리의 신체의 반응 메커니즘은 무엇인지, 우리의 신체가 어떻게 병들 수 있으며 또 치유는 어떻게 이루어져야 하는지, 우리를 둘러싼 타자들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고 맺어야 하는지를 배워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어떻게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앞으로 나갈 수 있는지, 고독을 견뎌내야 하는지, 파멸의 고통에 함몰되지 않고 인식할 수 있는지를 배워야 한다. 우리는 배움을 통해서 “자기자신에게 재능을 부여하게 된다.” 문제는 배움이 그렇게 쉽지 않다는 것이다. 그것은 자신을 극복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배우는 것은 그렇게 쉬운 것이 아니며 단지 선한 의지의 문제만이 아니다. 사람들은 배울 수 있어야 한다. 흔히 예술가들의 경우에는 시기심, 혹은 낯선 것을 느낄 때 곧 자신의 가시를 세우면서 자신도 모르게, 배우려는 자세 대신 방어 자세를 취하게 하는 자존심이 그러한 배움에 저항한다.”(540절)


예술가뿐이겠는가? 우리의 자기 보존의 욕구는 낯선 것에 대해 불안함을 느끼면 이에 저항한다. 이런 태도는 그나마 낫다. 아무 것도, 왜 문제인지도 인식하지 못할 때도 비일비재하다. 습은 이렇게 무섭다. 우리는 위대한 학습자들에게서 배워야 한다. 어떻게 배워야 하는지를.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쉽게 화석화된다. 아무리 우리가 위대한 일을 했다고 하더라도 그 일에 집착하고 고정되어 있는 한 우리의 모든 공덕은 한 줌의 모래처럼 사라져 버린다. 나는 배우는 것을 사유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루쉰 식으로 말하면 사유하지 않는 것은 늙은 것이다. 스스로 늙었다고 인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배우지 않아도 될 만큼 늙은 사람은 없다. 스스로 늙었다고 자인하면서 안락한 상태에 머무는 것은 사상의 타락이다. 니체는 붇는다. ‘사유할 것이냐 아니면 타락할 것이냐.’ 둘 이외의 선택지는 존재하지 않는다. 다른 버전으로 말하면 ‘사유할 것이나 윤회할 것이냐’.

사실 자신을 고정시키지 않는 것, 변화의 바다에 몸을 던지도록 하는 것은 결코 가볍지 않다. 자신 속에 최상의 것을 담은 것은 세계 전체와 싸우는 것과 같은 무게를 지닌다. 오히려 이것이 내 몸에 일어난 것이라는 점에서 더 절실한 문제다. 이 절실한 문제, 미지의 것, 신비한 것 앞에서 우리는 일종의 공포를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이 두려움은 낯선 것에 대한 생리적인 반응일 뿐이다. 우리는 모두 이런 낯선 설레임을 느낀다. 그것을 공포의 감정으로 치환하지 말자. 공포는 미지의 만남을 가로 막곤 한다. 우리의 여행이 끝나는 지점에는 항상 공포가 자리 잡고 있다. 그러나 그 길은 우리의 무수한 친구들은 지나쳐 갔다. 우리는 그 공포 때문에 눈을 돌려서는 안 된다. 그 공포는 그렇게 대단한 것이 아니다. 어쩌면 존재하지 않는 것인지도 모른다. 지나가는 이들에게 지나온 것은 문제가 아니다. 밑바닥으로 내려가자.

������아침놀������의 니체는 ‘환멸’의 축제를 즐기고 있다. 존재한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 다는 사실. 이것은 우리를 환멸에 직면하게 한다. 그러나 이것은 오히려 축하해야 할 일이다. 인류의 모든 열정은 이러한 무를 향한 열정이다. 물론 무를 직면하는 순간 여행을 끝마치는 위험이 있지만.

그렇지만 영원한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영원의 공간 속으로 진입하게 위해 ‘결단’을 내릴 필요가 없다. 우리는 사멸한다.


“방황하고 실험할 수 있는 용기와 어떤 사실을 잠정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용기를 다시 획득했다. 모든 것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그리고 바로 이 때문에 개인과 세대는 이전 시대에는 광기로, 그리고 천국과 지옥을 상대로 한 놀이로 나타났을 위대한 과제를 주시할 수 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실험해도 된다! 가장 큰 희생이 아직 인식에 바쳐지지 않았다. 아니 예전에는 지금 우리의 행위를 규정하는 것과 같은 사상을 단지 예감하는 것만으로도 신성 모독이자 구원의 영원한 포기였을 것이다.”


영원에 대한 욕망에서 벗어나야 한다. 우리는 사멸하는 영혼이다. 사멸하기에 우리는 다시 한 발 더 나갈 수 있다. 이것이 용기의 원천이다. 니체에 의하면 낯선 것에 대한 두려움은 영혼성에 대한 욕망과 결부되어 있다. ‘지금은 불가능하지만 나는 영혼하고 싶다. 지금 영혼의 무대로 오르기 위해 나는 결단을 내려야 한다는 사고.’ 이 지속의 사고 속에서 우리는 해체에 대한 두려움을 갖는다. 니체는 사멸에 대한 사유 속에서 다시 한 번 더 몸을 던진다. 이것은 뱀이 허물을 벗는 것과 마찬가지가 아닐까. 허물을 벗지 않으면 뱀이 파멸하듯 우리 역시 파멸할 것이다. 정확하게는 영원한 반복 속에서 살아가게 된다. 우리의 사유는 사유이기를 그친다. 허물을 벗자. 그리고 이런 ‘무’의 축제를 즐겨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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