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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쉰-생생하게 보는 자.

친구들과 함께 읽고 있는 루쉰의 글.

우리의 주제는 루쉰의 미소와 루쉰의 검이다.
그것은 루쉰과  함께 웃고,  함께 검을 벼리고 겨루기 위해서라고 생각한다.
그의 글은 그가 어떻게 웃고, 어떻게 검을 벼리는지를 알기 위한 무수한 통로의 하나다. 그렇데 막상 우리는 통로를 발견하기 보다는 글 속의 환상 혹은 미로 속에 빠져들고 만다. 엄밀하게 말하면 우리가 그 환상과 미로를 만들어내는 것이겠지만.

그렇다면 '통로'를 찾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하는가?
방법은 간단하다(말하긴 쉽다^^).  먼저 잘 보면 된다!! 그런데 잘 본다는 것이 그렇게 쉽지만은 않다.
왜냐하면 우리의 언어는 무수한 망상을 만들어내기 때문에.

가령 우리는 루쉰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나? 우리는 그를 '위대하고 탁월하며 창작력이 풍부한 정신'이라고 생각하고 있지 않았나? 물론 루쉰의 글은 강렬하다. 그러나 루쉰을 그렇게 '위대한 정신'으로 숭배하는 건 나 자신의 특별한 욕망의 표현이 아닐까?

예술가, 천재에 대한 망상이 어디에서 기인하는가에 대해 니체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사람들은 분명 위대한 지성이 끼치는 영향이 가장 기분 좋게 느껴져서 자신이 질투를 느끼지 않을 만한 곳에서만 천재에 대하여 말하게 된다. 누군가를 '신과 같다'고 하는 것은 여기에서는 우리가 경쟁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만들어진 모든 것, 완전한 것은 경탄의 대상이며, 생성 중인 모든 것은 경시된다."

'위대한' 루쉰이라는 표상은 우리가 더 이상 그와 경쟁하지 않겠다는 것, 그와 칼을 벼리고 겨루는 친구가 되기를 포기하겠다는 것을 선언하는 것이다. 그러나 루쉰의 활동이나 글만이 뭔가 '특별한'인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 또한 놀랄 만큼 복잡하고 생생한 것이 아닌가? 물론 우리 자신만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지만. 그 어느 것도 기적이 아니라 '生生'한 것이다.

루쉰 역시 삶의 주춧돌을 놓고, 그 다음에 무엇인가를 세우는 것을 배웠을 것이며 부단히 소재를 구하고, 이리저리 만들어 보는 일을 했을 터이다. 즉 그 역시 자신을 둘러싼 조건들을 '선명'하고 '가감' 없이 보고자 하지 않았을까. '있는 그대로' '생성하는 그대로' 보고 그것을 가감 없이 드러내는 것.

이런 글쓰기는 오히려 사람들에게 쉽게 간과된다. 가령 예리하고 명확한 글을 우리는 너무 평범하다고 간주해 그것을 이해하려고 아무런 노력도 기울이지 않기 때문이다.  

사실 생사의 경계, 복수-포옹의 경계, 얼음과 불꽃의 경계, 원수와 친구, 산 자와 죽은 자 등 충돌하는 양상들은  접근 못할 부분이 아니었다. 그런데 <가을밤>이나 <아름다운 사연>과 같이 부분은 매우 난감했다.  뭐지 이건. 가까이 있지만 그래서 잘 보이지 않는 것이라고 할까. 시각의 사각지대 같은 부분.

이에 대해 곰숙씨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자연을 다루는 부분. 이 부분은 루쉰이 바란 본 세계가 아닐까. 인간들만의 세계가 아니라 천지인의 세계. 하늘과 인간은 상관 관계를 갖고 있다. 즉 천지와 인간은 함께 살아간다. 우리 존재 안에 그런 모든 것이 들어 있다. 루쉰이 그것을 포착해 드러낸 것은 전혀 은유가 아니다. 그가 실감하고 있는 시공간을 드러내고 있다고 본다. 우리가 수사나 표상을 통해서 만들어내는 세계가 아니라, 그 표상들을 걷어내는 순간, 보게 되는 자연과 인간 사이의 소용돌이를 본다는 느낌이다."

그래서 일까. 루쉰은 인간의 사멸이나 부후에 대해서 허황함 없이 바라보고 있는 듯 하다. 우리가 폐허 위에 또 폐허를 어떻게 쌓아가는지를. 우리에게 한 조각 '고철'에 불과한 것을 그는 숨겨진 보고의 열쇠로 만들어내고 있다.

다시 한 번더 처음으로 돌아가 보자. 위대한 루쉰이 존재하지는 않았지만 루쉰이 훌륭해지 것은 있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그 과정은 어떤 것인가? 사실 우리는 그의 글을 통해서 알고 있지 않나?

그의 방법은 지극히 간단했다. 언어나 표상으로 눈코입을 가로막는 대신, 눈으로 '그대로 보고' 코로 생생하게 냄새 맡고, 입으로 가감 없이 드러냈을 뿐이다.그것은 그가 우리가 범접하지 못할 재능과 능력을 타고난 것 때문이 아닌 것이다. 말하자면 위대한 루쉰은 존재하지 않는다. '성실함'과 집요함 속에서 언어의 표상과 그물을 비켜나가는 루쉰만이 존재했었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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