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게시물에서 찾기2008/07/02

1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8/07/02
    사카이 다카시, [폭력의 철학] 에 대해
    유마

사카이 다카시, [폭력의 철학] 에 대해

신부님들이 서울광장을 가로질러 갈 때

그들의 하얀 미사복에서

나는 전사들의 몸에 밴 화약 냄새를 살짝 맡을 수 있었다.

그들이 전하는 비폭력의 외침.

그 파동은 다른 누군가에게 무엇보다도 강력한 물리적 힘으로 다가갔으리라.

'존재 한다는 것'만으로 물질적 폭력 이상을 만들어내는 이들.

비폭력이 '힘의 부재'가 아님을 이들이 보여주고 있다.

이들은 폭력 내부에 어떤 구분의 선을 귿고 있다.

 

사카이 다카시는 폭력과 비폭력의 구분 불가능성이라는 전제 하에서  글을 시작한다.

폭력은 안 된다는 막연한 '도덕 감정'이 폭력을 용인하며, 폭력의 압도적 비대칭성 속에

폭력에 대한 무감감을 확대시키는 하나의 동력이라는 것이다.

가령 비폭력에 동의하는 이들이 갖고 있는 경찰 폭력에 대한 수용 같은 것이다.

동시에 폭력은 안 된다는 말이 폭력에 대한 사람들의 반감이나 거부감을 반영한 것이 아니다.

비폭력은 하나의 역설을 잉태하고 있다.

폭력은 안된다-그러니까 폭력을 증오한다-폭력을 행사하는 자를 증오한다-폭력을 행사하는 자에게 폭력을. 사실 폭력을 행사하는 권력은 언제나 비폭력을 전제로 행사되고 있다.

 

그렇다면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폭력이나 비폭력이 아니라 새로운 지대를 만들고 생성해내는 것,

폭력 내부를 가로질러 새로운 생성의 공간을 구성하는 문제다.

 

사카이 다카시는 폭력과 비폭력을 둘러싼 일종의 계보학을 그려낸다. 킹 목사의 비폭력 노선, 말컴X, 파농등의 자기 증오로부터 해방을 위한 폭력 등등. 그는 이들의 논의가 포력과 비폭력의 이분법에 갇히기 보다는 새로운 적대성의 형성이었음에 주목한다. 중요한 것은 새로운 시간과 공간을 창조해내는 것이다.

 

그러면 지금의 폭력은 이전의 폭력의 문제와 어떻게 구분되는가?

근대국가를 규정하는 요소는 주권, 폭력, 안정의 특이한 배치였다. 말하자면 국가는 폭력을 배타적으로 독덤하는 한편, 그 내부에 살고 있는 국민들의 안전을 보장해주는 체제.

그런데, 신자유주의 확산과 함께 국가는 더 이상 자국민들의 삶을 보장해주지 않는다.

비정규직법의 확산, 농민의 배제와 같은 정책은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는 논리가 만들어내는

대중의 배제를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

'난민'이라고 표현되는 배제된 대중의 삶.

 

사센은 자본이 글로벌 시티를 중심으로 재편되고 있고

글로벌 시티는소수의 엘리트와 다수의 배제된 자들로 분해된다고 말한다.

마크 데이비스 식으로 말하면 초고층 빌딩과 슬럼으로의 분해라고 할까.

사카이 다카시 역시 '난민'은 이제 사람들이 필할 수 없는 운명으로 다가왔다고 말한다.

이들의 삶을 지배하는 정조는 '불안'이다. 불안한 만큼, 안정장치(security, 보장 보험)에 더더욱 매달리게 된다.

 

그러난 사실 신자유주의 체제에서 국가는 안정장치로 작동할 수 없다. 오히려 국가는 배제의 장치가 아닐까. 말하자면 신자유주의 체제의 국민국가는 경찰국가에 가까워지고 있지 않은가. 내부에서 발생하는 난민들을 관리하는 자. 성의 문턱을 관리하는 자로 전환하고 있다. 그렇다면 사람들의 삶은 폭력에 노골적으로 내몰리고 있다는 것.

 

더욱이 신자유주의 체제는 대중들의 고립을 부축기고, 자신의 삶을 자신 스스로 돌봐야 한다는 생각을 부추기고 있다. 우리는 우리의 안전을 위해 쏟아지는 무수히 많은 '보장보험'에 눈길을 돌린다.

 

일종의 폭력에 노출된 상황. 이에 대해 사카이는  '고립과 복종'이라는 나쁜 안전 대신

"이동과 유동성'을 전재로 각각의 특이성을 서로 승인하는 일종의 집단성의 형성에 주목한다.

물론 이동의 흐름을 어떻게 전유할 것인가에 대한 해답은 아직 과제로 남아 있기는 하지만.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