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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8/11/02
    아침놀 중에서
    유마
  2. 2008/11/02
    니체가 부여잡은 투창
    유마

아침놀 중에서

"아직 어떠한 사상가도 사회와 개인의 건강을, 그것이 얼만큼 많은 기생동물들을 견딜 수 있는지에 따라 평가하려는 용기를 갖지 못했다. 그리고 쟁기의 날을 저 관대하고 부드러운 연설 속에서 담긴 정신으로 이끌었던 국가 건립자는 아직 한 사람도 없다."

 

>>>우리는 건강한가?  흔히 우리는 우리 신체에 다른 존재들, 가령 병균이나 바이러스가 없는 상태를 건강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실제로 우리의 신체는 무수히 많은 존재들로 구성되어 있지 않은가. 우리가 도저히 파악할 수 없는 것들. 수 많은 기생동물이 우리 신체들 채우고 있다. 그렇다면 건강하지 않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 신체의 균형이 무너진 것, 기생동물들과 우리의 균형이 무너진 것이지만, 동시에 다른 존재들에 대한 맹목적인 공격으로 표현되는 것은 건강함이 무너진 것이다.  건강은 어떠한 상태가 아니라 능력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우리가 우리 안의 존재들을 얼마나 잘 포용할 수 있는지 말이다.

사회도 마찬가지 아닐까? 우리 사회의 건강함이란? 다른 것들, 심지어 기생하는 존재들이 그 공간에서 얼마나 즐겁게 살아가느냐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 아닐까?

 

 

"상류 사회 사람 중 4분의 3이 합법적인 사기에 몰두하고 주식 거래와 투기로 인한 양심의 가책 때문에 괴로워해야 할 때, 그들을 부추키는 것은 무엇인가? 이는 그들이 실제로 궁핍하기 때문은 아니다. 그들은 그렇게 심하게 형편이 나쁘지 않으며 아마 음식에 대한 걱정도 없을 것이다. 그들을 그렇게 부추키는 것은 돈이 쌓이는 속도가 너무 느리다는 초조함과 축적된 돈에 대한 끔찍한 욕망과 애정이 밤이든 낮이든 그들을 몰아대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초조감과 애정 속에서의 힘에 대한 저 열광적인 욕망이 다시 나타난다. 힘에 대한 이러한 열광적인 욕망은 옛날에는 진리를 소유하고 있다는 신념에 의해 불붙었고 너무나 아름다운 이름으로 자신을 가정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떳떳한 양심으로 비인간적인 일을 감행할 수 있을 정도였다."

 

>>>힘에 대한 욕망. 초조함과 집착은 누군가를  희생시키기를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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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가 부여잡은 투창

 

삶을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보는 것.

니체는 <아침놀> 3권에서 투키디데스를 다음과 같이 평가한다,

“인간에 대한 사색가인 투키디데스에게서

가장 편견 없는 세계 인식의 문화가 화려하게 개화”하고 있다.

예를 들어 그리스 시대의 건축은 아주 적은 양으로 숭고한 것을 표현할 수 있으며

표현하기를 좋아했다. 반면 우리는 삶을 아주 복잡하고 미로처럼 만들어 버린다.

우리들은 우리 자신에 대해 단순한 관념을 가질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니체의 말처럼 삶은 그렇게 단순한 것일까?

사실 삶은 복잡하다. 살아가면서 우리가 고려해야 할 것들이 많다.

그러나 삶이 복잡하다고해서 판단과 사유를 미궁 속으로 끌어들여서는 안 된다.

판단은 명료하고 행위는 간단해야 하지 않을까.

우리가 혼란스러워하는 것은 문제를 분명하게 파악하고 있지 않은 것일 뿐이다.

그것은 오히려 우리가 잘못된 관념 속에서, 적합하지 않은 식으로 문제를 구성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혼란스러울 때가 우리가 문제를 제대로 던지고 있는지에 대해 다시 질문해야 할 때이다. 즉 이 순간이 문제를 새롭게 고안해야할 순간이다.

 

그런데 삶의 고안해야 할 순간에 우리는 매일 사용되어 닳아간다.

우리들에게는 인격도, 재능도, 근면함도 부족하지 않다.

그러나 우리들 자신에게 방향을 부여할 수 있는 시간이 허용되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는 어떤 방향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도록 길들여진다.

‘노동’하는 자로서 우리는 매일 사용되어 닳아지도록 교육받고 있다.

니체는 노동에 대한 찬민 속에서 ‘모든 개인적인 것에 대한 공포’를 본다고 말한다.

우리는 일하기 위해서 삶을 방기한다. 우리는 고민하고 사유하고 살아가는 대신에,

답을 암기하고, 스펙을 갖추기 위해서 몸부림친다. 그리고 그 공간에 들러붙기 위해서 우리의 욕망, 삶에 대한 고민을 거세한다. 즉 우리는 자신을 거세하는 방식으로 노동한다.

그 경우 노동은 ‘최고의 경찰’이 된다. “그것이 모든 사람을 억제하고 이성, 열망, 독립욕의 발전을 강력히 저지할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안전’을 위해 우리는 ‘삶’을 내버려 두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한편에서 안전한 공간에서 좋은 행위란 타인에 대한 ‘동정’으로 표현된다.

말하자면 ‘너는 왜 그렇게 사니?’라는 질문.

‘왜 정해진 직장도, 가족도, 집도 절도 없이 살아가니?’

그러나 이 동정의 말 속에서 우리는 위험에 대한 공포를 볼 수 있다.

‘안전’에 위협적인 것을 제거하기.

이때의 “공공의 안전과 사회의 안정감을 목표로 하는 행위들만 ‘선한’ 행위로 평가된다.”

라이히 식으로 말하면 이러한 시선은 타자에 대한 감시의 시선이자 억압의 욕망을 내면화하는 것이다. 우리 시대의 사유는 ‘수요와 공급’ 이라는 평가기준과 결부되어 있다.

즉 우리는 화폐가 순환하는 규칙에 맞도록 삶을 조직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니체는 ‘노동하는 사람’ 속에서 하나의 ‘위험’을 발견한다.

“이 안전이 현재는 최고의 신성으로서 숭배되고 있다. 그러나 지금! 가공할 일이다.

바로 ‘노동자’가 위험한 존재가 된 것이다! ‘위험한 개인’들이 우글거리고 있다.

그리고 그것들의 배후에는 위험 중의 위험, 즉 개인이 있다.”

자본이나 권력에 기가 질리거나 압도되거나 부끄러워하거나 숨이 막히지 않은 삶의 가능성.

자기 본위의 삶. 예외적인 시간과 불복종의 시간.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항상 우리를 가로지르고 있는 삶의 양식들을 넘어 우리 자신을 고양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삶에 대한 고양은 어디에서 만들어질 수 있을까?

니체는 아주 작은 것에서부터 출발한다. 자신들이 지금 이 ‘비루한 일상’에 느끼는 소소한 불만족에. 바로 지금 이 현장에서 이루어지는 ‘소소하고 반관습적인 행위’들. 그러나 사실  ‘소소’한 행위가 우리의 삶 전체를 관통하는 習을 깨트린다는 점에서 그것은 집합적으로 작용하는 힘이다.

니체는 권력에 대해 아주 구체적으로 저항한다. 그가 잠언처럼 자신의 사유를 전개하는 것도 구체적인 저항과 관련되어 있다고 본다. 니체에게 삶의 문제로 다가오지 않는 것, 삶의 전환으로 다가오지 않는 것은 모두 망상이 아닐까. 그리고 니체가 부여잡은 투창은 이런 망상을 향해 던져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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