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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시 30분쯤이면 1차로 보낼 우편물 분류가 대충 끝난다. 점심을 먹고 들어온 직원들이 커피를 한 잔 하고 오후 업무를 시작하는 2시가 가까워오면 박 과장이 나에게 5천원을 준다. 만 원짜리를 주면서 5천원을 남겨오라고 하는 경우도 있다. 그런 식으로 점심 값을 받을 때마다 이상해지는 기분은 1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하다. 마치 얻어먹는 듯한 기분이 든다. 박 과장의 태도가 그러해서인지 아니면 직원들과 알바생인 나의 점심시간대가 달라서인지 그것도 아니면 정말 얻어먹는 것이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나는 5천 원짜리 지폐를 받아드는 그 순간이 어쩐지 민망하다.


나 말고도 격일로 나오는 대학생 알바가 있다. 나와 똑같은 방식으로 5천원을 받지만 그 애는 그 순간을 민망해하지 않는다. 가끔 박 과장에게 밥값을 올려달라는 농담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 애와 같이 밥을 먹은 적은 거의 없다. 그 애는 5천원을 받으면 우체국 근처 커피전문점에 가기 때문이다. 그 애는 점심으로 크림치즈 베이글과 아메리카노 한 잔이면 충분하다고 했다. 나도 가끔 그 정도면 충분할 것 같은 기분을 느끼기도 하지만, 박 과장이 주는 5천원은 크림치즈 베이글과 아메리카노 한 잔을 사기에 충분하지 않은 돈이다. 800원이 모자란다. 그 애가 밥을 먹겠다고 따라나서는 경우를 제외하면 나는 대부분 점심을 먹으러 샘터분식에 간다.


처음부터 샘터분식에 간 것은 아니었다. 우체국에서 가깝고 싸기는 했지만 맛이 썩 좋은 것도 아니고 아줌마가 친절한 것도 아니었다. 처음 알바를 할 때 며칠 갔었고, 그 다음부터는 큰 길 쪽에 있는 김밥천국에 자주 갔었다. 그런데 작년 겨울 이맘 때 쯤, 손을 주머니에 넣고 잔뜩 움츠린 채 샘터분식 앞을 지나 큰 길 김밥천국으로 가다가 샘터분식 아줌마를 보았다. 아줌마는 가게의 문 뒤에 서서 멍하니 밖을 보고 있었다. 나를 보고 있나 해서 눈인사라도 하려는데 아줌마는 미동도 없었다. 그러더니 갑자기 문 유리에 입김을 후우우- 불었다. 가늘고 긴 호흡으로.


 

아줌마의 입김이 차가운 유리문에 부딪혀 하얗고 동그란 원이 만들어졌다. 아줌마는 그 원을 가만히 쳐다보고 있었다. 그 표정이 너무 진지해서 나도 아줌마의 얼굴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그 후로도 그런 광경을 몇 번 보았다. 손님이 없고 거리를 지나가는 사람도 드물 때, 그렇게 가늘고 긴 호흡을 내뿜는 것 같았다. 그런 아줌마의 모습을 몇 차례 보게 되면서부터, 정확히 말하자면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에서 입김을 부는 아줌마의 그 진지하고 깊은 표정이 생각이 나면서부터, 나는 매일 박 과장에게 받은 5천원을 그 아줌마에게 내밀게 되었다. 그러면 아줌마는 라면값이나 김밥 값을 제하고 2천원이나 천5백 원 정도를 5천 원짜리 영수증과 함께 주었다. 그런 순간 아줌마 표정은 무덤덤하거나 형식적이었다. 그 얼굴에서 진지하고 깊음을 상상해내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봄이 되고 곧 여름이 되었다. 날씨가 더워지면서 아줌마의 작고 동그란 원은 더 이상 볼 수 없었다. 나는 취업을 할 때까지 3-4개월 정도만 하자고 했던 우체국 알바를 그 때까지도 계속 하고 있었다. 새로운 아줌마가 들어오면서 샘터분식 음식 맛도 조금씩 나아지는 것 같고 아줌마와 조금 친해지기도 하여서 계속 샘터분식에서 점심을 해결하고 있었다. 김밥과 라면, 떡볶이 이런 것들이 지겹긴 하지만, 우편물 분류 알바를 하는 나에게 맛있는 점심을 먹으려고 이곳저곳 돌아다니는 행위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이상한 생각을 하여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알바 생활의 불안함을 조금이나마 해소하기 위한 무엇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매일 정해진 돈을 가지고 같은 분식점에 들어가서 같은 메뉴를 먹는 규칙적인 생활 혹은 안정적인 생활. 사실은 지긋지긋한 생활.



또다시 말할 때마다 입김이 나는 계절이 되었다. 겨울. 오늘도 작은 안정감을 맛보기 위해 2시쯤 우체국을 나왔다. 옆구리에 지갑을 끼고 추위에 어깨를 움츠리고 종종 걸음으로 샘터분식으로 가고 있다. 골목을 돌아서자 오랜만에 아줌마의 진지하고 깊은 표정이 보인다. 작년 겨울보다 훨씬 더 깊어져서 이젠 숭고해보이기까지 한 표정이다. 아줌마의 입술 앞에 생겨난 작고 동그란 원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 문을 열고 샘터분식에 들어간다.


"아줌마, 저 김밥 두 줄이요."

“추운데 라면 안 먹고?”

“네. 밥 먹고 싶어요. 대신 오뎅 국물 좀 주세요.”


아줌마는 다시 일상적인 표정으로 그러나 나를 반기는 표정으로 김밥을 싼다. 김밥을 싸다 말고 오뎅 국물을 떠서 갖다 주시더니 대뜸 물어본다.


“일본에 가 봤어?”

“일본이요? 아뇨. 왜요?”


주걱으로 김이 나는 하얀 밥을 덜어 까만 김 위에 올려놓고 편편하게 문지르면서, 약간 상기된 표정으로 말한다.


“아니 우리 딸이 일본에 여행 갔잖아. 학교에서 캠프로...”

“아줌마 딸 중학생 아니에요? 요즘엔 중학교도 일본으로 캠프가요?”

“요즘엔 다 해외로 가. 뭐 형편이 안 되면 못가는 경우도 있지만, 그렇게 비싸진 않더라고.”

“그래도 일본이면...”

“좀 전에 우리 딸이 전화 왔는데 지금 일본엔 눈이 그렇게 많이 온다네. 그게 그렇게 예쁜가봐. 초밥도 그렇게 맛있다네.”


말하는 동안 김밥 두 줄이 다 썰어졌다. 아줌마는 김밥을 내 앞에 내려놓으면서 말을 잇는다.


“나보고 초밥 가게를 하라는데, 자주 먹어보지도 않은 초밥을 내가 만들 수 있을까 몰라. 근데 이 가게에서 초밥 팔면 안 팔리겠지?”


그럴 거라는 내 대답을 듣기도 전에 돌아선 아줌마는 친구에게 전화를 해서 나에게 했던 딸의 일본여행 이야기며 초밥 이야기를 하기 시작한다. 손님이라고는 나 밖에 없는데 뭐가 그리 기분이 좋은지 아줌마의 웃음소리가 좁은 분식집 가득 울려 퍼진다. 전화를 끊고 흥얼거리면서 설거지를 하고 있는 아줌마에게 박 과장에게서 받은 천 원짜리 두 장을 건넸다.


“아줌마, 근데 아까 왜 문에 입김 불었어요?”


고개도 들지 않고 그녀가 대답한다.


“살아있나 보려고 불어봤지.”


 

집으로 가는 버스가 보인다. 뒤에서 두 번째 창가자리에 앉는다. 창문너머로 홍대거리가 보인다. 둘씩 셋씩 짝지은 사람들이 어딘가로 가고 있다. 카페엔 사람들이 가득 앉아있고, 크고 작은 옷가게들은 내 또래의 젊은 여자들로 붐빈다. 뭐가 그리 즐거운지 깔깔대며 웃고 있는 교복 입은 여학생들도 보이고, 전철 입구에 서서 누군가를 기다리는 한 무리의 사람들도 보인다. 마지막으로 취업을 못하여서 1년 넘게 우편물 분류 알바를 하고 있는 한 여자의 얼굴이 버스 창문에 비쳐 보인다. 무덤덤하다. 버스 창문을 형식적으로 대하는 표정이다. 그 표정마저 얕다. 나인가보다. 가만히 입술을 내밀어 가늘고 긴 호흡을 내뿜어본다. 후우. 따뜻한 입김이 차가운 창문에 부딪혀 하얗고 작은 원을 만들어낸다. 나도 살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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