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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조 권력 해체와 교육

구조주의를 통한 교육의 진단 상담이론(펌)

2004/11/25 22:01

 

http://blog.naver.com/kyl2080/60007904014

제3장 구조주의를 통한 교육의 진단

  1.구조주의 학문의 실천성
   일반적으로, 한 학문의 과학성은 그 학문의 고유한 탐구 대상, 목적, 방법, 내용, 형식에 따라서 여러가지 측면에서 주장되어질 수 있다. 또한 학문의 이론적 측면에 대한 정확한 역사적 근거와 평가를 요청하며, 동시에  그 학문이 학문화하기 위하여 필수적으로 요청되는 실천적 요소를 반드시 필요로 한다.
 만약, 현재의 학문이 인간이나 사회에 대하여 공헌하지 못하고 있다면, 비판과 반성에 따른 대안을 내어놓는 학문을 등장시켜야 할 것이다.
 20세기 중반, 본격적 구조주의는 미국식 과학 중심의 인간 과학-기능주의, 과학주의, 실증주의, 행태주의-과 유럽식 인간 중심의 인간 과학-실존주의, 현상학, 해석학-에 반대하여 등장하게 된다.
 이러한 구조주의의 표현은 시대적 위기의 도래와 학문적 반성이라는 두가지 형태를 가진다. 즉, 그 당시의 시대적 상황은 유럽전역에 걸쳐 각종 시위가 발생하고 특히 프랑스에서는 독제체제가 굳어가던 때였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에 대해서 좌,우익 모두는 속수무책이었고 특히 마르크스계열과 보수주의 계역이 그들의 무능을 드러냈다. 이때의 변혁주체는 물론 학생과 지식인이었다. 이러한 일연의 사태는 새로운 철학과 인식론을 요구했다. 즉, 이전의 실존주의적 사고나 행태주의적 연구태도는 이들의 요구를 충족시켜주지 못한 것이다. 두번째 도전은 역시 학문적인 것이었다. 시대적 변혁은 학문적 반성을 수반하기 마련이지만, 특히 지식인과 학생을 중심으로한 당시의 변혁은 더욱 학문적 성찰을 요구했다. 이들은 인간중심적인 실존주의, 해석학, 현상학의 한계를 직시하고 고학중심적인 실증주의, 기능주의 , 행태주의, 경험주의 방법론적 오류성도 지적하였다. 또한 좌파나 신좌파의 이론적 반성을 촉구하면서 특히 동방세계의 현실적 모순을 발견하였다. 이러한 학문적 반성에 뒤따른 것은 새로운
학문의 등장이었으며, 곧 구조주의였다.
 그렇다면, 구조주의는 이러한 시대적, 학문적으로 기존의 학문이 해결해 주지 못했던 사회 혼란을 얼마나 소화해 줄수 있었을까. 하지만 이에 대해 구조주의는 명확한 해결책을 제시해 주고 있지 못하다. 왜냐하면 구조주의 그 자체는 기호가 무슨 지시대상(le referent)을 가르키진 않는다. 다시 말해, 기호가 무슨 뜻을 갖는 것, 곧 기표가 기의로 귀속되는 것은 다른
기호와의 차이 때문이지 그 기호가 무슨 현실을 지시하기 때문이 아니라고 한다. 기호밖의 현실 지시성, 텍스트 바깥의 현실, 곧 언어 바깥의(extra-linguistigue)현실을 부인하게 된다. 이러한 성격때문에 구조주의자들은 그 시대의 사회적 혼란-text-를 읽고 분석,해석할 수 있는 일차적인 기능에서 사회참여부분, 즉 직접적인 탈출구를 제시하지 못하는데 그것은 비정치적 현상이라는 구조주의 성격때문이었다.
 그러나, 전기 구조주의의 비정치적이라는 성격은 후기 구조주의자, 알뛰세나 바르트를 통해 권력과 이데올로기가 발견되면서 구조주의는 실천적 모습을 띄게된다. 예를들어, 구체적 현실 세계를 염두해 둔 학문을 주장하는 롤랑 바르트는 구조주의 기호론의 실천성의 범위를 이데올로기 비판까지 넓히고 있다. 그것은 어떤 기표와 기의는 사회적 약속에 의해서 생겨나며 그것은 사회 관계에서 나온 권력관계가 들어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어떤 기표에서 기의를 찾는 해석을 하지 않고 그 기표가 기의로 귀착하는 것은 사회 권력 관계 비판, 이데올로기 비판까지 연결된 수 있다고 본다.(24)
 이러한 사회학적 구조주의는 현실적으로 인간이 처해있는 구조를 가늠할 수 있게 한다. 세계를 객관적으로 반영하거나, 인간의 욕구를 충족시키지는 못하나 사회적 실제에 의문을 제기하고 이러한 실제는 자연적인 것이 아니라, 이미 구조화 된 것임을 이해하는 것이 구조주의의 텍스트이며, 그것을 적용하고  실행하는 것은 다른 실천적 학문분야로 보아야 한다. 그러한 인접학문중 교육은 특히나 시대적 구조를 반영하고 있을 뿐 아니라, 교육행위는 구조적 모순들을 개선시키는 도구로서 사용되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다음은 구조와 교육과의 상관성을 통해 구조적 교육의 형태와 구조해체를 통한 새로운 교육방법을 제시하였다.

  2.구조와 교육
  “구조적”이라는 말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가.
어떤식으로든 마르크스, 프로이드, 소쉬르는 오늘날 말하는 구조주의의 주창자라고 볼수도 있다. 프로이드, 소쉬르, 맑스가 공통적으로 오늘날의 구조주의자들과 공유하고 있는 것은 현상과 표면적 사건의 전말이 표피밑에 깔려있는 현상, 자료, 구조들에 의해서만이 설명될 수 있다는 확신이다. 따라서 구조주의란 “원일을 깔고 있는” 무의식적 동기, 심층적 구조를 규명하는 노력인 것이다. 교육적 상황에서 보았을때 이러한 심층적, 무의식적 구조 분석은 교육 자체의 문제점들을 지적해 줄수 있다.
 교육이 왜 그렇게 혐오의 대상이 되는지를 설명하는 이유는 바로 학교 교육 그자체의 문제, 즉 교육 과정속에 명시된 대부분의 과목들이 부적절한 방식으로 가르쳐지는데 있다는 점이다.
 한마디로, 학교 지식은 중립적인 것, 모든 사람이 “합의한 것”로 간주된다. 학교 교과 내용은 무정치적(apolotical), 무역사적(ahistorlcal)인 식으로 가르쳐진다. 교육 과정의 조직이나 취사 선택뒤에 깔려 있는 복잡다단한 정치적, 경제적 연관성은 침잠되어진다. 게다가 지식은 더욱 더 개별적인, 분파적인, 경쟁적인 학문 분야로 지나치게 세분된다. 왜소한 사고의
틀이나 형식들이 장려된다. 사실 대 가치, 원인과 결과, 자유와 필요, 자연과 문화, 이성과 정서와 같은 개념들은 상호 변증법적으로 연결된 개념이 아니라, 상호 절대적인 반대 개념으로 간주된다.(25)
 그렇다면, 인간의 학교 교육은 어떻게 가르쳐져야만 하는가?
이에 알뛰세를 비롯하여 여러 구조주의자들은 학교를 이념적 국가 기구로 간주한다
 구조주의자 알뛰세는 이데올로기가 인간을 결정하는 물질적 본체(실행기구)를 갖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데올로기는 인간 존재를 생성시키는 하나의 실천 행위이며, 사회 구성에 있어서 물질적 실체를 갖는다. 이데올로기는 관념의 단순한 소속이 아니라 복잡한 실천의 연합제로써 군림한다. 이데올로기는 정신의 반영물뿐만 아니라, 실체적인 작용체이다. 실제로 인간의 실질적 행동을 능동적으로 구조화시키는 동인이 바로 이데올로기이다. 즉, 이데올로기는 구조권력의 결과이다.(28)
 알뛰세에 따르면, 고도의 자본주의 사회 체제에서 중요한 부분을 담당하기위해 등장한 이데올로기 국가 기구가 바로 교육적 이데올로기 국가 기구이다. 이데올로기 국가 기구중 어던 기구도 어떤 아동들을 일일 8시간, 주 5일동안 씩이나 강제적으로 자본주의 사회 체제 아래 속박해 두지는 못한다. 단지 그것은 학교기구만이 가능하다. 과연 아동들은 학교에서 무엇을 배우는가 그들은 기술(know-how)을 배운다. 그런 기술이나, 지식을 익히는 것 이외에도 아동들은 학습이라는 이름아래, 인내해야하는 행동의 규칙을 배운다. 즉 사회 기술적인 지배에 의해 정립된 질서 복종, 수준의 미덕도 배운다. 그런데도 학교는  언제든지 정치적으로 중립적인 장소라고 제시되기를 기대하고 있다.
 이런 경로를 통해서 모든 계급의 모든 아동들은 계급 사회를 위해 충당할 수 있는 역학에 합당한 이데올로기를 실제적으로 주입받는다. 물론 이데올로기가 이데올로기 국가 기구의 기능을 관장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해서 완전히 순수한 이데올로기 기구 같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이러한 국가 기구들은‘ 억압’의 원칙에 따라 제 기능을 발휘한다.(27)
 여기서 우리는 억압의 개념에 대하여 집고 넘어가고자 한다.
 첫째, 억압은 권력 관계에서 나온다.
 둘째, 억압은 인간에 대한 업압뿐만 아니라, 모든 사물의 상호 관계에서부터 나오는 힘의
원리이다. 기표와 기의가 있다. 그것이 하나의 의미를 가지는 단어가 되기 위하여 둘은 서로 귀착되어야하며 그것은 사회적 약속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기표에 기의가 귀착되는 것은 기표에 권력을 부여해 주는 것이 된다. 즉, 하나의 단어는 절대성을 내포하게 된다. 그러나 하나의 기표는 반드시 하나의 기의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이 구조가 가지는 권력이며,  일대일 대응이라는 관계에서 나타나는 억압이다.
 셋째, 억압은 이데올로기가 존재함으로 가능하다. 권력관계는 이데올로기를 이끌어 내며, 이데올로기는 구조의 결과이다.
 따라서, 권력 관계 속에서 이데올로기의 억압은 학교가 중립적 위치임을 기대하기 어렵게 만든다. 왜냐하면, 구조는 선택 여부에 관계없이 모든 것을 포함하며 구조속의 모든 것은 구조 안에서만 존재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3.구조 권력 해체와 교육
 영어의 "poststructuralism"을 놓고 탈구조주의로 번역하 것인지 후기 구조주의로 번역할 것인지는 재론의 여지가 많다. 즉, 시대적인 흐름에 착안한다면, 후기 구조주의로 부르는 것이 적합할 것이고 이전의 구조주의적 이론과 대조된다는 의미에서는 탈구조주의로 부르는 것
이 나을것이다. 그러나, 어떻게 부르든 그것이 구조주의의 연장임에는 틀림이 없고 시대적으로 구조주의와 그것을 구분지을 공통된 사건이 애매하기 때문에 후기 구조주의로 보겠다.(26)
 학교의 교육과정은 구조주의의 통찰력과 기호학의 관점을 활용함으로써, 하나의 의미 체계 덩어리인 작품이나 교재로 분석되어져야 할 것이다. 이것을 학교에 적용하는 일은 현재의 교수 활도으로부터의 많은 변화를 의미하는 것이다.
 학교 지식의 상당량은 이미 바르트가 흥미있게 지적한 읽혀주는 작품-즉 폐쇄적-과 쓰여질 수 있는 작품이라고 지적했던 것처럼 상품화되고 폐쇄된 그런 류의 텍스트나 작품으로 만들
어지고 있다. 따라서 학생들도 텍스트나 작픔이 넓리 공개, 해석되어지게 하는 방법을 이해하면서 지식 생산 과정에 참여해야 될 활용성이 있는 것이다.(29)
 그것으로서 구조 해체는 새로운 지식 생산 작업이며, 후기 구조주의는 구조주의가 가지는 교육과정에서 더욱 더 발전된 교육 내용을 제시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구조는 원문속에 내제된 논점이나 전제들이 일단의 개념 체제이기 때문에 구조해체는 구조가 갖고 있는 문제점을 지적하여 체계에서 새롭게 발전된 원문을 제시하고자 한다.
 교육 속에 이원화된 구조-즉, 하나의 기표는 하나의 기의와 귀결한다는것과 하나의 반대 개념이 있다는 것-는 곧 권력과 억압을 가져다 준다. 그러므로 데리다는 이원구조르 통하여 우리사고가 이원 구조로 인해 얼마나 방해받는지를 말해준다. 다시 말해 데리다에 있어서 물질 대 정신, 주체 대 객체, 신체 대 영혼, 텍스트 대 의미, 내연 대 외연, 표피 대 본질과 같은 양분법은 합리적으로 설정된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단지 어느 한쪽을 선호하기위해 활용될 뿐이다. 데리다는 어떤 작품이든 작품의 본문은 이항대립이라는 반대로써 구조화될 뿐만 아니라 두개념 중 그 어느 하나만이 뚜렷하게 부각되어 다른 하나를 장악하게 된다는 점을 밝히고 있다.
 즉 구조해체는 대립과 반대되는 것이 의도적으로 부가됨으로써 어느 한쪽에 특권을 주기위한 행위이며 이러한 방법을 통해서 교재 속에 내제된 가정과 전제의 구조를 밝혀낼 수 있다. 한마디로 구조해체란 구조 속의 잘못된 요소들, 관습이나 제도를 개선하고 향상시키는 도구로써 상용될 수 있고 동시에 그런 관습이나 제도에 만연되어 있는 권력의 구조를 해체시기 위해서도 체계적으로 동원될 수 있다.
 구조속의 권력을 해체시킨다는 것은 억압하는 주체와 억압당하는 개체를 해체시킨다는 것이며 구조 속의 이데올로기를 분산시키는 것. 즉 교육이 정치적으로 중립적 위치를 갖게되는 것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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