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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호로서의 예술작품과 관객의 역할:

기호로서의 예술작품과 관객의 역할:
김용철의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김주환(64년 서울 출생, 서울대 정치학과와 동대학원 졸업, 이탈리아 볼로냐대학 기호학 박사과정 수료)


관객은 결코 피동적으로 작가가 작품을 통해 제시하려는 것을 단순히 받아들이는 존재가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관객이 작품을 받아들이고 해석하는데 있어 무한한 자유를 누리는 것도 아니다. 이러한 관객의 역할을 올바르게 평가하려면 우리는 하나의 기호로서의 미술작품이 어떻게 지각되고, 기호화되고, 해석되는가 하는 과정을 살펴보아야만 한다. 기호생산이론에 따르면, 하나의 작품을 감상하기까지 관객은 세 단계의 행위를 성취해야만 한다. 첫째는 물질적 대상을 지각하여 지각편린을 생산하는 단계이며, 둘째는 그 지각편린을 기호화하여 작품으로 받아들이는 단계이고, 셋째는 작품을 감상하여 그 의미를 파악하고 미적 감흥을 얻는 단계이다. 다시 말해서 관객은 지각하기, 기호화하기, 감상하기라는 세 가지 "작업"을 해야 하며 작가는 이러한 관객의 "작업"이 성공적으로 수행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만 한다. 이 글의 목적은 미술 작품의 의미가 관객과 작품 그리고 작가 사이의 밀고 당기는 역동적인 관계 속에서 어떻게 생산되는가 하는 것을 기호생산이론과 김용철의 작품을 중심으로 살펴보는데 있다.


I. 기호생산의 삼중삼각형 모델

일반적인 기호 생산의 세 단계 과정은 삼중 삼각형 모델을 통해 보다 분명히 이해될 수 있다.1 미술작품 역시 하나의 기호임에 분명함으로 우리는 미술작품이 생산되고 감상되는 과정 역시 동일한 형태의 삼중 삼각형 모델을 통해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도표 1> 일반적 기호 생산의 삼중삼각형 모델

<도표 1>에 나타난 모델의 기본적 가정은 기호가 물질적 대상, 그 대상에 대한 인간 행위, 그리고 그 행위에 의한 생산물'이라는 세 가지 구성 요소의 `삼각 관계'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이다. 움베르토 에코의 기호생산이론에 따르면, 모든 기호는 두 가지 요소로 이루어진다.2 사회적 의미와 물질성, 곧 물질과 의미의 결합이 기호이다. 그런데 여기서 물질이라 함은 지각의 대상을 의미한다. 인간에게 지각되지 않는 것--들리지 않는 소리나 가시광선을 벗어나는 빛 등--은 그 자체로서는 결코 기호가 될 수 없다. 왜 컴퓨터에는 반드시 모니터나 스피커가 달려 있는가? 디지털 정보 그 자체는 결코 지각될 수 없으며 따라서 기호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디지털 정보는 반드시 모니터나 스피커를 통해서 인간의 몸에 의해 지각되어질 수 있는 가시광선이나 소리로 전환되어야만 한다.

이처럼 미술 작품을 포함한 모든 기호는 물질적 기초를 갖고 있다. 예컨대 유화는 캔버스와 물감으로 구성되어 있고 책에 쓰여진 글은 종이와 잉크로 이루어져 있으며 도로 표지판은 철판과 페인트로 되어 있다. 기호 생산의 출발점인 물질적 대상을 우리는 `기호 원료'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기호 생산은 물질적이며 외부적인 대상인 `기호 원료'에 인간의 행위가 가해지면서 시작한다. 이러한 행위가 `지각하기'이다. 여기서 굳이 `지각perception'보다도 `지각하기perceiving'라는 말을 쓰는 이유는 후자가 더 적절하게 역동적인 과정 중에 있는 인간의 행위를 표현하는 것처럼 여겨지기 때문이다. 필자는 이 `지각하기'라는 용어로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그러나 서로 구별되는 두 가지 행위를 모두 지칭하고자 한다. 하나는 다른 이들을 위한 지각의 대상을 생산하는 것이고 (작가의 경우), 또 다른 하나는 이미 생산된 대상을 지각하는 것이다 (관객의 경우). 다른 이의 지각 대상을 생산하기 위해서는 나 자신이 우선 그 대상을 반드시 지각해야하기 때문에 후자는 전자를 포괄하는 개념이기도 하다.3 지각하기는 일종의 물질적 노동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지각하기와 물질적 노동 모두 다 (1) 인간이 자신의 몸으로 (2) 자연과 대면하여 (3) 무엇인가 생산해내는 행위라는 점에서 본질적으로 동일하다. 우리는 대상을 지각함으로써 지각편린, 즉 지각된 것percept을 생산해낸다. 따라서 기호생산의 첫 번째 삼자관계는 `물질(기호원료)--지각하기--지각편린'으로 이루어진다.

하나의 작품이 진정한 예술적 가치를 지니려면 어떠한 형태로든 작가 이외의 다른 사람들에 의해 지각되고 평가되어야만 한다. 즉 하나의 기호는 반드시 `사회적 지각편린'을 생산해낼 수 있어야만 한다. 주관적이고도 개별적인 지각편린은 `기호화하기signifying' 라는 인간의 행위에 의해서 비로소 `기호'가 된다. 그리하여 기호현상의 두 번째 삼자관계는 `지각편린--기호화하기--기호'로 이루어진다. 그리고 기호는 `해석하기'에 의해 그 의미, 즉 `해석체interpretant'를 실현해 낸다.4 따라서 기호현상의 세 번째 삼자관계는 `기호--해석하기--해석체'이다. 기호현상의 세 가지 삼자관계도 모두 상품생산의 경우처럼 `물질적 대상--인간의 행위--생산된 것'이라는 동일한 구조를 갖는다.

여기서 첫 번째, 두 번째 하는 것은 설명의 편의를 위한 구분일 따름이지 기호현상이 꼭 그러한 순서에 따라 차례차례 일어난다는 뜻은 아니다. 일반적으로 미술을 포함한 일반적인 기호 생산 과정은 오히려 세 번째 관계인 `기호--해석하기--해석체'부터 수행된다. 다른 사람들(관객)에 의해 어떻게 해석될 것인가 하는 것을 해석하는 과정을 거친 다음에, 기호화하기에 의해 기호로 생산될 수 있는 지각의 대상을 만드는 것이다. 강의실에서 칠판에 글을 쓰는 것도 이와 마찬가지의 과정을 거친다. 선생이 어떤 단어를 써야 학생들이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까를 생각하고 나서, 그 단어를 어떤 크기와 형태로 써야 강의실에 있는 학생 모두가 읽을 수 있을까를 결정한 후, 실제로 손과 팔을 움직여서 글을 쓰는 경우, 기호생산은 세 번째, 두 번째, 첫 번째의 삼자관계를 각각 거쳐서 이루어진다.

교통 신호등을 예로 들자면, 빨간 불을 지각하는 것이 첫 번째 단계에 해당하고, 그것을 신호등으로 파악하는 것이 두 번째 단계이며, 그것으로부터 `멈춤'이라는 의미를 알게되는 것이 세 번째 단계이다. 여기서 우리는 빨간 불을 보고 그것을 파란 불과 관련시켜 (사물과 사물 사이의 관계) 그 사이의 일정한 인과 관계를 수립할 수도 있고, 또 빨간 불을 자신의 특정한 경험과 결부시켜 새로운 메타포를 창조할 수도 있다. 즉 자기 자신만의 개인적인 지각편린(경험)을 사회적인 지각편린으로, 즉 남을 위한 지각편린으로, 말하자면 교환 가능한 지각편린으로 재생산해내는 것이 곧 기호화하기이며, 문학이나 예술은 모두 본질적으로 이러한 기호화하기의 속성을 갖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기호화하기, 즉 "sign-ifying"은 무엇인가를 기호sign로 만들어내는 행위를 가리킨다. 언어라는 재료를 가지고 그것을 일상적 언어맥락과는 전혀 다른 기호체계에 편입시켜 새로운 기호로서 재생산하는 것이 문학이며, 마찬가지로 우리 주위에 있는 일정한 재료(매체)를 일정한 기호체계에 편입시켜 새로운 의미를 갖게 하는 행위가 곧 미술이다. 이러한 "기호화하기"야말로 렘브란트에서 뒤샹에 이르기까지 모든 형태의 미술창작행위에서 발견되는 공통적인 속성이다.


II. 미술 작품 생산의 삼중삼각형 모델과 현대 미술의 의의

이제 미술 작품 생산 과정을 위한 삼중삼각형 모델을 살펴보도록 하자. 일반적인 기호와 마찬가지로 대부분의 미술 작품의 생산 역시 세 번째 단계부터 이루어진다. 작가는 어떤 형태와 색이 다른 사람들에게 어떻게 `해석'되어 어떠한 의미 (미적 감흥)를 불러일으킬 것인지를 생각한 후, 그러한 의미를 생산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작품이어야 하는지를 결정하여, 그러한 작품을 만들어낼 수 있는 미술 원료를 구해다가 생산하는 것은 전형적인 작품활동 과정이라 할 수 있다.


<도표 2> 미술 작품 생산의 삼중삼각형 모델

관객은 물론 첫 번째 단계부터 시작한다. 전시장을 찾아가 작품을 마주하는 순간, 관객은 일단 작품이라는 대상을 "지각"하여야만 한다. 그리하여 관객은 자신이 지각한 것(지각편린)을 하나의 작품으로 받아들여 기호화한다. (이때, 작품 이외의 것, 예컨대 마루바닥, 전시장의 천장이나 벽, 가구, 집기, 조명기구 등은 기호화의 대상에서 제외되어야만 한다. 즉 작품이외의 것들은 비록 지각되기는 하지만 작품으로 기호화되지는 않는다.) 그 다음에 감상하기appreciating라는 행위가 뒤따르며, 그 결과 일정한 미적 감흥Aesthetic Satisfaction을 얻게 된다.

<도표 2>에서 보는 바와 같이 관객은 작품을 감상하기 전에 지각하기와 기호화하기라는 과정을 거쳐야만 한다. 앞사람의 머리에 가려 작품이 안 보인다든지 (지각하기의 실패), 개념 미술적 작품의 하나로 전시된 의자를 작품으로 파악하지 못하거나 아니면 거꾸로 작품이 아닌 전시장의 가구들이나 벽에 얼룩진 것들을 작품으로 받아들인다든지 하게되면 (기호화하기의 실패) 제대로 된 감상은 이루어질 수 없다. 현대 미술 이전의 시기에 관객과 작가 사이에는 지각하기와 기호화하기라는 행위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자는 일종의 암묵적인 계약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뒤집어서 말하자면, 관객이 아무 불편 없이 작품을 지각하고 기호화할 수 있도록 작품을 만들어 주는 것이 작가의 의무로 간주되었다. 예컨대 회화의 경우는 일정한 프레임 안에 작품을 가두어 놓아 작품을 둘러싼 주의의 환경 (벽이나 가구 등)으로부터 작품을 뚜렷이 구별함으로써 관객들이 아무 불편 없이 쉽게 작품을 작품으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기호화할 수 있도록) 하였고, 조각 작품은 흔히 단상 위에 올려놓아 다른 물적 대상들과 뚜렷이 구별시킴으로써 작품임을 금방 알아볼 수 있도록 하였다. 이 시기의 관객의 능동적 역할은 감상하기 (기호생산의 세 번째 단계)에 한정되었다고 볼 수 있다.

20세기에 들어서면서 현대 미술은 관객에 보다 많은 것을 요구하기 시작하였다. 관객에게 감상하기(세 번째 단계)에 머물 것이 아니라 기호화하기의 과정 (두 번째 단계)에도 적극 참여해줄 것을 요구하기 시작한 것이다. 미니말리즘이나 슈퍼마티즘, 구성주의, 레디메이드, 개념미술, 옵틱 그리고 최근 실내외의 환경조각에 이르기까지 현대 미술의 여러 흐름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것은 "이러 저러한 것이 예술작품이다"라는 기존의 고정관념에 끊임없이 도전한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관객은 항상 새로운 것, 지금까지는 미술작품이라 여겨지지 않았던 것들을 기호화하여 작품으로 받아들일 것을 끊임없이 요구받고 있다. 예컨대 레디메이드 작품으로 전시된 변기는 그것을 일상생활 속에서의 변기와는 다른 어떤 것으로, 즉 하나의 예술작품으로 기호화할 것을 요구한다. 작가는 그것을 기호화할 수 있도록 하는데 최소한의 도움 (변기를 전시장에 옮겨 놓는 것)만을 관객에게 줄뿐이다. 이처럼 모더니즘 계열의 많은 작품들은 관객에게 감상하기뿐만 아니라 기호화하기라는 이중의 역할을 요구하고 있다. 이러한 요구는 물론 관객에 대한 신뢰를 기반으로 한다. 작품을 작품으로 뚜렷이 기호화해주지 않아도 관객들 스스로가 이를 작품으로 기호화할 능력이 있다는 신뢰가 있어야만 작가들은 관객에게 이러한 요구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III. 지각하기: 관객에 대한 최대한의 요구와 신뢰

지금까지 대부분의 현대 미술은 관객에게 기호생산의 두 번째 단계인 기호화하기의 노력까지는 요구하였지만, 가장 기본적인 지각하기(첫 번째 단계)를 적극적으로 요구하지는 않았다. 다시 말해서 쉽게 지각될 수 있는 것을 관객에게 제공하는 것은 작가의 기본적인 의무로 여겨져 온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최근 미국의 몇몇 작가들의 작품은 (의도하였던 의도하지 않았던 간에) 관객의 보다 적극적인 지각하기의 노력을 요구하고 있는 듯 하다.


예컨대 풍선껌을 약 6미터 가량 길게 늘여서 한쪽 끝은 천장에 붙이고 다른 한쪽은 바닥에 붙여둔 톰 프리드만의 작품(무제, 1995)을 보자. 천장과 바닥에 붙어있는 껌 덩어리는 겨우 보이지만 그 중간에 가느다란 실처럼 보이는 부분은 하도 얇아서 거의 보이지 않는다. 관객의 입장에서 보자면 일단 감상하기와 기호화하기는커녕 첫 단계인 지각하기조차 쉽지 않은 그러한 작품이다. 관객은 이 작품의 감상과 기호화하기에 앞서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 일단 지각하기에 성공할 것을 요구받는다. 흔히 미니말리즘의 패러디로 일컬어지는 프리드만의 작고도 미세한 다른 작품들 (어린이용 장난감 찰흙인 "플레이-도"로 빚은 파리나 캡슐에 든 감기약 모형 등) 역시 너무 작고 섬세해서 관객의 적극적인 지각하기의 노력을 요구한다. (그러나 톰 프리드만은 일상생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잡동사니를 이용해서 작품을 만드는 작가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즉 그의 작품이 일정한 기호화하기를 요구하고 있다는 사실에 주로 논의의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것이다.) 사실 그가 장난감 진흙으로 만든 검은 파리 한 마리는 하얀 석고의 모퉁이에 앉아 있어서 쉽게 "발견"된다. 다만 그것은 크기나 생김새가 너무도 진짜 파리 같아서 관객이 그것을 작품으로 기호화하기 어렵다는 정도이다. 이런 점에서 톰 프리드만은 관객의 지각하기에 적극적으로 도전하고 있다고는 보기 힘들다. 지금은 환경조각작가로 더 잘 알려진 로버트 어윈Robert Irwin의 1970년대 작품들 ("표현할 수 없는 것the unrepresentable"의 표현을 시도했다고 일컬어지는) 또한 관객들 스스로 지각하기의 과정을 깨닫게 해주는 측면이 있으며, 로버트 라이만Robert Ryman의 백색 모노크롬 계열의 작품들도 관객의 보다 적극적인 지각하기를 요구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들의 작품들 역시 관객의 지각하기 과정에 대한 구체적인 문제의식을 가지고 생산된 것들이라 보기는 어렵다.


과문한 탓이겠으나, 필자가 아는한 지금까지 관객의 적극적인 지각하기의 노력을 의도적으로 요구하는 일련의 작품을 발표하는 작가는 국내외를 막론하고 단 한 사람뿐이다. 그는 우리 나라의 젊은 작가인 김용철이다. 필자가 보기에 김용철은 기호생산의 첫 번째 단계인 지각하기의 과정을 화두로 삼아 관객에게 지각하기-기호화하기-감상하기의 세 단계의 "작업"을 동시에 요구하고 있는 유일한 작가이다. 김용철은 이미 국내외의 몇몇 평론가들로부터 그 가능성을 높게 평가받은 바 있는 30대의 젊은 작가이다.5 <아트인 아메리카>의 칼럼니스트 일리노어 하트니Eleanor Hertney는 김용철을 톰 프리드만, 리차드 터틀, 아그네스 마틴 등과 유사하다고 평했지만, 김용철의 작품은 처음부터 계획적으로 관객의 지각하기에 도전한다는 점에서 근본적인 차이점을 지니고 있다.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그의 변신은 놀라운 데가 있다. 1994년 미국 펜실베니아 대학으로 유학 가기 이전의 김용철의 작품은 대부분 대리석과 청동, 석고, 철 용접 등을 이용한 대규모의 웅장한(?) 것들이었다. 특히 뛰어난 묘사력을 보여주는 커다란 소묘와 함께 제시되는 거친 석고와 철골로 이루어진 대규모의 작품들이 이 시기 김용철 조각의 특징이라 할 수 있다. 그 느낌은 한마디로 우렁차다. 크고 자신감 있는 목소리로 자신의 메시지를 강하게 전달하려 한다는 점에서 그것은 웅변이다. 최근에 "속삭이는 듯 조용한" 작품들과 비교해 본다면, 이 시절의 김용철의 작품들은, 남대문 시장의 장사꾼의 이미지를 갖고 있다. "골라 골라"하면서 큰 소리로 자신을 팔려한다는 점에서, 독특하고 커다란 음성으로 주의를 끌려한다는 점에서, 그냥 지나치려는 손님(관객)을 현란한 몸짓(리듬 있는 박수와 발구름)으로 반강제로 끌어당기려 한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다시 말해서 이 시기의 김용철은 지각하기와 기호화하기는 전적으로 작가의 몫이라는 신념 아래 관객에게는 단지 "감상만 할 것"만을 요구했다고 할 수 있다.


미국과 영국에서의 유학 생활을 마치고 귀국한 후 처음 갖는 올해의 일련의 개인전에서 김용철은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우선 그는 더 이상 큰 소리로 외치지 않는다. 오히려 들릴락 말락 하는 작은 목소리로 속삭인다. 아주 가냘픈 목소리로 속삭이기 때문에 관객은 스스로의 숨소리마저 죽이고 작가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 자발적으로 노력해야만 한다. 이런 점에서 김용철의 이번 작품들은 감상하기와 기호화하기뿐만 아니라 기호생산의 첫 단계인 지각하기의 과정에도 관객이 적극적으로 개입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피동적이며 내심 외면하고 싶어하는 관객을 막무가내로 붙들려 하거나 커다란 목소리로 작가의 주관을 일방적으로 강요하는 "거창한" 현대 미술에 길들여진 요즈음의 관객들에게 김용철의 작품은 신선한 충격이다. 그의 작품들은 겨우 지각된다. "보일락 말락"하는 것들이다. 무엇이 보이고 무엇이 보이지 않는가 하는 것은 전적으로 관객이 얼마만큼 자발적으로 지각하고자 노력하는데 달려 있다.


IV. 김용철의 작품: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6

김용철 작품이 설치된 전시장에 들어서는 순간 관객들은 우선 당황하게 된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무언인가 새로운 것, 일상 생활에서 볼 수 없는 예술적인 어떤 것을 만나리라는 기대와 설렘은 허망하게 무너져 버리고 만다. 하지만, "이게 뭐야? 아무것도 없네... 뭐가 잘못 됐지?"라는 회의, 절망, 좌절, 실망이 바로 작가가 일차적으로 의도하는 바다. 이러한 의문과 당혹감을 관객 스스로가 극복하기를 김용철은 기대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그의 작품은 관객에 대한 대단한 신뢰를 바탕으로 한다. 관객 스스로가 자신의 좌절을 극복하고, 피동적인 자세에서 탈피하여 능동적으로 무엇인가 찾아 나서는 적극성을 회복할 수 있으리라는 믿음이 바로 그의 작업의 출발점이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지만, 그래도 분명 무엇인가 있으리라는 막연한 믿음으로 좀 더 주의력을 집중시키는 관객에게 김용철의 작품은 서서히 그 모습을 드러낸다. 그리하여 적극적인 지각하기의 노력을 기울이는 관객은 하얀 벽에 수직으로 꽂혀 있는 젓가락 크기 정도의 가냘픈 대나무 조각을 발견하게 된다. 좀 더 주위를 둘러본다면 그는 전시장 벽에 한 두 개씩 꽂혀 있는 얇은 대나무 젓가락(?)들을 몇 개 더 발견하게 될 것이다. 우선은 대나무만이 보일 뿐이다. 그러나 여기서 멈춰서는 안된다. 보다 더 주의 깊은 관객이라면 그 가냘픈 대나무 끝에 하늘하늘 매달려 있는 자그마한 정육면체를 또한 발견할 수 있다. 투명한 낚싯줄을 꼬아서 만든 자그마한 이 입체는 공기의 흐름에 따라 항상 섬세하게 흔들리고 있다. 마치 풀잎 끝에 매달린 아침이슬처럼 금방이라도 사라져버릴 것 같은 애처로움마저 지니고 있다. 필자는 이 작품들을 감상, 아니 발견해내는 관객들의 얼굴을 유심히 살펴본 적이 있다. 이 투명한 입체를 발견하는 순간 모든 관객들의 얼굴에는 항상 잔잔한 미소가 어리게 마련이다. 아마도 무엇인가를 발견하고 성취한 자의 만족스런 표정이며 또 무엇인가를 깨달은 자의 미소이기도 하리라.

김용철의 이 작품은 "지각이란 능동적 행위다"라는 메를로 퐁티의 <지각의 현상학>7의 기본 명제를 직접 보여준다. 불란서 철학자이자 미학자인 메를로 퐁티에 따르면, 커뮤니케이션이란 서로의 지각편린을 기호로서 생산해내고 이것을 교환함으로써 서로를 이해하는 과정이다. 그는 모든 예술작품이 생산-교환-소비되는 과정 역시 일종의 커뮤니케이션이라 보았다. 그런데 예술을 포함한 모든 커뮤니케이션의 출발점은 "지각하기"이다. 타인에 의해 지각될 어떤 것을 생산하는 것이 곧 기호의 생산이며, 그렇게 생산된 기호의 교환이 곧 커뮤니케이션 과정이며, 그렇게 교환된 기호를 지각하여 그 의미를 파악하는 하는 것인 곧 해석의 과정이다.

예술의 모든 재료 (매체)는 따라서 인간의 몸에 의해 지각될 수 있는 물질로 이루어져 있으며 또 그래야만 한다. 그런데 이러한 예술의 가장 기본적 전제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것이 바로 김용철의 작품들이다. 그는 처음부터 눈에 잘 안 띄는 재료로 무엇인가 기호를 만들겠다는 의지를 갖고 있다. 이는 분명 예술과 커뮤니케이션 과정의 기본적 전제에 대한 도전이라 할 수 있다. 실제로 대부분의 관객들은 김용철의 작품의 일부만을 보고 많은 부분을 그냥 지나치고 만다.

김용철의 다른 작품은 보다 쉽게 눈에 띈다. 그것은 커다란 검은 종이 한 장이다. 아니 한 장의 검은 종이처럼 보인다. 능동적으로 무엇인가 발견해보려는 관객은 그러나 검은 종이 위에 무언가 한 두개의 자국이 난 것을 발견하게 된다. 자세히 보면 그것은 자그마한 정육면체의 기하학적 모양들이다. 검은 종이에 철필로 자국을 내어 논 것이다. 한 두 개의 정육면체를 발견한 관객이 거기서 만족하지 않고 "탐구"를 계속한다면 그는 곧 검은 종이가 수만 개의 자그마한 정육면체들을 뒤덮여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아무리 주의 깊은 관객이라도 그 수만 개의 정육면체를 모두 다 "지각"한다는 것은 애초부터 불가능해 보인다. 그보다 더 주의 깊은 관객라면 그 검은 종이가 원래부터 검은 것이 아니라 하얀 종이를 연필로 색칠한 것이라는 사실 또한 발견할 수 있을는지도 모른다.8

메를로 퐁티는 인간이 사물을 지각한다는 것은 세계에 대해 능동적으로 "일"을 하여 무엇인가를 생산해내는 과정이라 보았다. 내가 지금 붉은 꽃을 보고 그것을 장미라 지각했다고 하자. 이때 나는 눈을 통해 받아들인 감각자료 (붉은 꽃)를 그저 단순히 피동적이고도 받아들여 자동적으로 "장미"라고 반응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내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겪었던 모든 경험과 이 사회가 내게 주는 문화의 총체성에 기반하여 내 눈이 받아들인 감각자료에 능동적으로 일을 함으로써 "장미"라는 지각편린(percept)을 생산해내는 것이다. 김용철의 "검은 종이"는 관객의 지각하기가 작품에 대해 능동적으로 하는 "일"을 하여 일정한 지각편린을 생산해내는 과정이라는 메를로 퐁티의 명제를 그대로 체화한 것이라 볼 수 있다. 관객들은 각기 얼마만큼 성공적으로 지각하기를 수행했느냐에 따라 서로 다른 것을 보게 된다. 어느 관객은 커다란 검은 종이만을 볼뿐이며, 다른 관객은 검은 종이 위의 이상한 자국 몇 개만을 볼뿐이고, 또 다른 관객은 검은 종이와 무수히 많은 정육면체를 볼 수 있을 것이다. 아마도 가장 주의 깊은 관객 몇 몇은 검은 종이의 검은 색이 사실은 하얀 종이 위에 연필로 칠해진 것이라는 사실마저 발견해낼른지도 모른다.

관객이 얼마만큼 적극적으로 작품에 주의력을 기울이냐에 따라 각각의 관객들은 각기 서로 다른 것을 보게 된다. 즉 동일한 대상 (오브제)로부터 각기 다른 지각편린을 생산해 내는 것이다. 관객들은 자신이 생산해 낸 지각편린에 따라 전혀 다른 방식으로 그 대상을 기호화하고 감상하게 될 것이 분명하다. 즉 김용철의 작품은 관객의 참여의 정도에 따라 전혀 다른 의미를 지닌 것이 되고 만다. 이런 점에서 김용철의 작품은 관객과 작품 사이의 상호작용에 기반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감상을 위한 세 단계 기호생산의 모든 과정이 작품과 관객의 상호작용에 의해서 결정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은 작품의 상호작용성이 단지 컴퓨터나 비디오 등의 인위적인 전자 장치의 도움에 받은 작품(예컨대 게리 힐의 1995년 베니스 비엔날레 수상작 위더쉰Withershins 등)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점을 극명하게 보여 준다는 점에서 또 다른 의의를 지닌다. 하얀 종이를 연필로 색칠하여 검은 종이처럼 보이게 만들고 있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김용철의 작품은 노동 집약적이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엄청나게 많은 시간과 노동을 들여 눈에 잘 띄지도 않는 작품을 만들어낸다는 점에서 그의 작업은 상당히 노동비효율적이며, 비(非)자본주의 적이다. 생산되어 나오는 것들은 "미니멀"해보이지만, 그것을 위해 드는 시간과 노동은 "맥시멀"하다는 것이 그의 작업의 특징이다. 수천 장이 넘는 종이를 한 장 한 장 풀칠하여 붙여서 하나의 기둥처럼 쌓아 올라가는 작품에서도 이러한 "노동비효율성"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그의 노동비효율성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작품은 굵은 통나무의 한 쪽을 계속해서 얇게 깎아내어 실처럼 얇게 만들어낸 작품들이다. 직경 20 cm가 넘고 길이는 2미터 가량 되는 통나무나 두께 10cm 이상에 역시 길이 2미터 정도의 나무판의 한 쪽을 점차 얇게 깎아서 젓가락 굵기, 이쑤시개 굵기에서 마침내 머리카락처럼 얇아지는 작품들이다. 수 없이 많은 끌질과 칼질이 필요하지만, 단 한번의 실수로 얇은 부분을 부러뜨리기라도 한다면 다시 새 통나무와 마주 앉아 처음부터 작업을 다시 시작하여야 한다. 하얀 종이 위에 검은 연필로 색칠하기나 통나무 한쪽을 얇게 깎아나가기 등의 작업은 대단히 자기 부정적이며 역설적인 작업이다. 작업할수록 자신이 해 놓은 작업은 눈에 안 보이고, 작아지고, 나약해지고, 섬세해지고, 미세해진다. 장엄하고 웅장한 노력이 가냘프고 섬세한 결과를 낳는다. 이러한 작품을 마주하고 있자면, 우리의 시선은 자연히 가장 얇은 끝에 머물게 된다. 그 극단의 미세한 "머리카락 끝"같은 부분이야말로 김용철의 또 다른 형태의 속삭임이다. 하늘하늘 대는, 금방이라도 부러져버릴 것 같은, 점차 미세함의 극치 속으로 사라져가고 있는 나무의 그 끝은 있음과 없음이, 물질과 비물질이, 노동과 정신이, (들뢰즈와 가따리가 말하는) "연속과 절단"9이, (메를로 퐁티가 말하는)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이 만나서 화해하는 접점인 것이다.

김용철의 작품의 또 하나의 특징은 처음부터 전시장 그 자체를 작품의 일부로 삼고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그는 관객에게 지각하기뿐만 아니라 많은 기호화하기의 노력도 요구하고 있다.) 지각이 곧 참여라는 것, 지각을 통해 인간은 세계와 관계를 맺으며 나아가 세계의 일부가 된다는 메를로 퐁티의 철학을 우리는 김용철의 작품을 통해 어느 정도나마 직접 경험할 수 있다. 관객과 단순히 대면하기보다는 관객과 작품을 하나의 공간으로 묶어 내려는 시도를 담고 있다는 점에서 김용철의 일련의 작품은 환경주의 조각과도 공통점을 지닌다. 하얗게 칠해진 4면의 벽과 천장, 그리고 바닥은 바로 작가와 관객이 교감을 이루는 육면체의 공간인데 이 육면체는 대나무 끝에 매달린 작고 투명한 정육면체에, 검은 종이 위에 흔적으로 남아있는 육면체에, 그리고 점차 녹아가면서 그 모습을 상실하는 거울 위의 바셀린 덩어리에 투영되어 있다. 필자는 대나무 끝에 매달린 이 투명한 입체를 바라보며 우리 어깨 위에 조용히 내려앉는 눈송이를 떠올렸다. 가볍고 섬세한 눈송이. 언뜻 보면 그저 하얀 덩어리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섬세하고 기하학적인 무늬를 간직하고 있는 눈송이. 후 불면 가볍게 날아가 버리든지 아니면 그 자리에서 투명하게 녹아 없어지는 눈송이. 그런데 김용철의 어떤 작품들은 실제로 녹아 없어진다. 형체를 만들어내기 대단히 어려운 바셀린 덩어리로 만들어진 기하학적인 형체들은 (역시 대부분 정육면체이다) 시간이 지나감에 따라 천천히 스스로 녹아 없어진다. 스스로를 파괴함으로써 비물질화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김용철의 바셀린은 장 틴겔리Jean Tinguely의 작품 "뉴욕시에 경의를" 이나 "세상의 마지막에 관한 연구"와 같은 맥락에 서 있다. 그러나 김용철과 틴겔리의 근본적인 차이는 틴겔리의 작품들은 거대하게, 큰 소리를 내며, 와장창 무너져 내리거나 일순간에 폭발해버리는데 반해서, 김용철의 작품은 소리 없이, 조용히, 그리고 천천히 녹아 내리듯 소멸된다는 점에서 다르다.

미니말리즘은 단순함을 통해서 많은 것을 말하려 했지만, 김용철의 작품들은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려 하고, 표현할 수 없는 것을 표현하려하며, 비물질적인 것을 물질을 통해 나타내려 한다. 침묵을 이야기하려 한다. 아니, 침묵을 그저 중얼거리듯 속삭인다. 이러한 속삭임을 통해 김용철은 관객에게 감상하기와 기호화하기 뿐만아니라 지각하기라는 세 가지 "작업"을 모두 충실히 수행해줄 것을 요구한다. 이런 점에서 김용철의 작품은 관객에게 새로운 (어쩌면 가장 중요한) 역할을 부여하고 나아가 관객-작품-작가의 관계를 새로 정립하려는 시도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최대의 시간과 노력을 투자해서 최소의 것을 얻으려는 역설적이고도 고통스런 작업을 이 젊은 작가가 얼마나 계속 감당해낼 수 있을지를 우리는 지켜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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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삼중삼각형 모델은 기호현상의 "꼬리에 꼬리를 물고 계속되는 무한성"과 그 삼자 관계를 강조하는 기호학자 퍼어스의 논의와 움베르토 에코의 기호학이론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자세한 것은 졸고 "From commodity production to sign production: A triple triangle model for Marx's semiotics and Peirce's economics," Presented at the annual conference of Speech Communication Association, Miami, FL, 1993 참조. 기호생산과정에 대해서는 졸고 「`내일의 신화'를 오늘 이야기하는 즐거움」, 『문학과 사회』, 문학과 지성사, 1996년 참조.

2) Eco, Umberto. A Theory of Semiotics. Bloomington: Indiana University. Press, 1976.

3) 다시 말해서 기호생산자는 기호를 생산하는 과정 속에서 자신의 기호의 의미를 그 어느 누구보다도 먼저 해석하기 마련이며, 작가는 자신이 생산하는 작품의 가장 첫 번째의 관객일 수밖에 없다.

4) "해석체"는 기호학자 퍼어스의 독창적인 개념인데, "기호가 인간의 정신에 대해 생산해내는 어떤 것"이라 할 수 있다. 해석체의 의미에 대해서는 『논리와 추리의 기호학』, 움베르토 에코 외 지음, (인간사랑, 1994), 45-47쪽 참조.

5) 김용철은 홍익대학교 조각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한 후 미국으로 건너 가 펜실베니아대학 미술대학원에서 조각으로 MFA를 취득했으며, 그 후 영국문화원 장학생으로 선발되어 개념미술경향이 강한 런던 골드스미스 스쿨에서 인간의 욕망과 비물질화(Dematerialization)에 대해 관심이 많은 것으로 알려진 닉 드빌과 크레이그 마틴에게서 사사하였다. 1992년이래 인데코와 갤러리 2000 등에서 6회의 개인전을 가졌으며, 특히 1993년에는 프랑스문화원 초청 특별 개인전을 가진바 있다.

6) 사실 김용철의 작품들에는 어떠한 제목도 없다. 단지 논의의 편의상 일정한 경향을 보여주는 그의 최근 작품들을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이라 부르기로 하자.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은 <지각의 현상학>의 저자 메를로 퐁티의 또 다른 책제목에서 따온 것임을 아울러 밝혀둔다.

7) Merleau-Ponty, M. Phenomenology of Perception. Trans. by Colin Smith. London: Routledge & Kegan Paul, 1962.

8) 연필로 커다란 하얀 종이를 가득 매웠다는 점에서 김용철의 "검은 종이"는 수 없이 반복되는 선 그리기를 보여주는 솔 르윗Sol LeWitt의 작품들을 연상시킨다. 그러나 계속 반복되는 선 그리기를 통해 스스로 그린 선들을 모두 부정하고 결국에는 검은 종이 하나를 생산해고 있다는 점에서 김용철은 솔 르윗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9) 『앙띠 오이디푸스』, 쥘즈 들뢰즈와 펠릭스 가따리 지음, 최명관 옮김, 민음사,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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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기호학1

문화기호학

송효섭 / 아르케

 

제1장 배경과 범주

 

1 문화기호학의 배경

문화에 대한 학문적인 정의는 타일러에 의해 처음으로 시도되었다.

문화 혹은 문명은 사회의 한 성원으로서 인간에 의해 획득된 지식, 신념, 예술, 법칙, 도덕, 관습,

그밖의 다른 능력이나 습관을 포함하는 복합적인 전체이다.

이와 같은 정의에서 문화기호학의 존재 영역을 찾아낼 수 있다. 1)문화는 집단적인 성격을 갖고 있기 때문에 의사소통, 정보교환을 통한 창조의 과정을 수반하게 되는데 그러한 과정 속에 기호가 개입한다. 2)문화는 인간에 의해 획득된 것으로, 문화기호학은 동물들 사이에 존재하는 기호양식에 대한 연구를 배제한, 인간 중심적인 연구이다. 3)문화는 복합적인 체계라는 점에서 다양한 개체들이 어떠한 관계 혹은 규칙을 형성하고 있는 것이 특징인데, 이러한 관계들이 기호학의 연구 대상이 된다. 문화는 ‘무언가’를 통해 드러나고 소통하는데 이 ‘무엇’이 바로 기호이다.

 

제2장 기본개념

학문으로서의 기호학의 가능성이 제시된 것은 19세기 말 스위스의 언어학자 소쉬르와 미국의 철학자 퍼스에 의해서였다. 문화기호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일반기호학적 개념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하므로 먼저 소쉬르와 퍼스에 의해 제시된 기호학의 기본개념들을 살펴보아야 한다.

 

1. 소쉬르 기호학의 기본개념

 

1.1 기호학의 위상

소쉬르 기호학의 이해는 랑그와 파롤이라는 두 개념에 관한 것으로부터 출발한다. 랑그란 언어활동의 본질적인 특정부분으로서, 언어활동 능력의 사회적 산물인 동시에 개인들이 그 능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하는, 사회집단에 의해 채택된 필요한 관습들의 총체이다. 파롤은 한 개인에 의해 이루어진 개별인 발화로, 파롤은 랑그를 통해 실현가능한 것이 된다. 랑그는 사회적인 것이기 때문에 개인이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반면 파롤은 개인적인 것이므로 의지적이고 개인적 행위로 나타난다. 소쉬르가 말한 언어학의 연구대상은 랑그였는데, 그에게 랑그는 본질적인 것이었고 반면 파롤은 부수적이고 다소 우연적인 것으로 간주되었다. 여기서 랑그가 기호의 체계이며, 이때 기호는 청각영상과 같은 정신적 개념을 내포하고 있다.

 

1.2 기호의 개념과 특성

(1) 기표와 기의

기호는 기표sigifiant와 기의signifé라는 두 개의 정신적 요소의 결합에 의해 이루어진다.

기호

기의

개념

<꽃>

기표

청각영상

<꽃>이라고 말했을 때 이것은 파롤의 영역에 속한다. 각기 다른 사람들이 <꽃>이라고 말하고 그 속에서 <꽃>이라고 받아들여지는 평균치를 찾을 수 있는데 이것이 청각영상이다. 기표는 이러한 청각영상으로 그것의 정신적인 각인, 우리의 감각에서 만들어진 표상이다. 반면 기의는 개념을 뜻하는 것으로 인간의 정신 속에서 분절된 어떤 것이다. <꽃>이라는 개념은 화분에 피어있는 꽃이 아닌 어떤 언어집단에서 그것을 <꽃>이라고 인식하는 어떤 평균치이고 이것이 기의에 속한다. 이들 두 요소는 밀접하게 결합되어 있으며 서로가 서로를 불러일으킨다.

 

기표 - 정신적인 각인, 우리의 감각에서 만들어진 표상, / ‘꽃’이라는 단어 자체

기의 - 개념, 인간의 정신 속에서 분절된 어떤 것 / (개념) 꽃식물의 유성 생식기관

 

기호는 기표와 기의를 모두 가지고 있어야 하며 완전히 무의미한 기표도 없으며, 아무런 형태가 없는 기의도 없다. 기호란 기표와 기의가 결합된 인식 가능한 결합물이다. 참고로 기표와 기의의 구분 개념을 기호체계 전체에 적용하면 다음과 같다.

랑그

체계

구조

코드

파롤

활용

개별 사건

메시지

(2) 자의성

소쉬르는 기표와 기의의 결합관계가 자의적이라고 했다. 다시 말해, 기표와 기의 사이에 어떠한 내적 관계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소쉬르는 언어가 기표와 기의의 자의적 결합에 바탕을 둔 기호체계의 가장 전형적인 형식으로 보았고, 따라서 랑그를 가장 특징적인 기호 체계로 이해했다.

자의성은 다시 절대적 자의성과 상대적 자의성으로 구분된다. 기호들 중 절대적으로 자의적인 기호는 일부분에 불과하며 여러 기호들이 상대적 자의성을 갖고 있다. <나무>라는 말 자체는 자의적인 것이지만 <소나무>, <밤나무>, <잣나무>는 그 기표에 있어서 어떤 일관성을 찾아낼 수 있으며, 그 기표의 일관성은 <나무>라는 개념이 포함된 기의의 일관성에서 비롯된 것으로 유연성을 갖고 있다.

자의성은 필연적 관계가 아니기 때문에 언제든지 다른 관계로 대체될 수 있는 가능성을 안고 있다. (언어기호의 가변성) 그런데 기호의 자의적 특성이 랑그를 변화시키고자 하는 시도로부터 그것을 보호해주기도 한다. 기표와 기의 사이가 자의적이므로 역설적이고 논란의 여지가 없게 되고, 의도적으로 언어기호를 변화시킨다 해도 그것이 그리 나을 것 없는 <자의적>인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밖에 언어기호의 수가 많고 복잡하며 언어혁신에 대한 집단적인 무기력을 이유로 소쉬르는 언어기호의 불변성을 설명한다. 이것은 언어가 개인적 국면의 것이 아닌 사회적 국면과 연관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1.3 공시성과 통시성

소쉬르는 공시적인 방법론으로 언어를 연구했다. 그 이유는 랑그가 동시성에 의해서만 파악될 수 있기 때문이다. 언어학은 불가피하게 공시언어학과 통시언어학으로 구분되는데 소쉬르는 공시

 

C

 

A-B 동시성의 축 : 공존하는 사항들 간의 관계, 어떠한 시간의 개입도 배제 - 공시성

C-D 연속성의 축 : 한 번에 한 사항만을 고려, 동시성의 모든 사항들이 그 변화 요소들과 함께 놓일 수 있다. - 통시성

A

 

 

B

 

 

 

D

 

언어학을 더 우월한 것으로 단정했다. 왜냐하면 통시언어학에서 밝혀지는 통시적 현상들은 변화 그 자체의 문제일 뿐이지, 어떠한 체계에 대한 변화를 야기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통시적 국면에서 언어가 변하는 것은 랑그의 체계 밖에서 고립된 생태에서 이루어진 것, 파롤에서부터 비롯된 것이라 말할 수 있다.

물론 소쉬르는 언어의 변화적 측면에 대해 언어의 가변성, 상대적 자의성을 언급하여 통시적인 언어 연구에 대한 출구를 열어 놓기는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쉬르가 언어의 공시적 연구 속에서만 랑그의 체계가 찾아진다고 보고, 통시적 변화를 우연하고 부수적인 것으로 간주한 것은 사실인데, 이점에서 후대 연구자들에게 많은 비판을 받게 되었다.

 

1.4 체계와 가치

소쉬르는 <개념이 그것의 내용에 의해 적극적으로 정의되지 않고, 체계 내의 다른 항목들과의 관계에 의해 소극적으로 정의된다>고 말한다. 이와 같은 기의의 체계와 마찬가지로 기표의 체계역시 마찬가지다. 랑그에는 오로지 차이(“언어에서 기호를 기호로 만들어 주는 것은 다른 기호들과의 차이다”)만이 존재한다. 분절된 어떤 개념(기의)과 분절된 어떤 청각영상(기표)이 결합하여 하나의 언어 기호를 이루고 이들이 연결되어 체계를 이룬다. 기호는 지극히 상대적 가치를 지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소쉬르는 랑그는 실체가 아닌 형식이라고 단정했으며 언어기호는 닫혀 있는 체계라고 했다. 여기서 소뤼르가 말한 ‘기호관계의 정체성’은 구조주의 이론의 핵심이다.

 

1.5 병렬적과 계기적

소쉬르는 관계를 두 개의 대립되는 가치질서로 파악한다.

언술 안의 <계기체> ⇒ A - B - C - D

오늘도 형권이는 무국을 끓인다

언술 밖의 <병렬체> ⇓ A1 B1 C1 - D1

B2 C2

A-B-C-D가 계기체이며 각각은 계기체적 관계를 형성한다. 그리고 B-B1-B2-B3가 병렬체이며 병렬체적 관계를 형성한다. 하나의 문장은 하나의 계기체이다. 그리고 각 문장 성분으로 선택될 수 있는 언어들이 병렬체이다. 예를 들어 형권이가 미역국, 된장국, 계란국 중에서 하필 무국을 끓이는지를 파악하는 것은 병렬체적 관계를 고려한 것이다. 그리고 왜 하필 무국을 ‘형권’이가 끓이는지, 그리고 왜 형권이는 무국을 ‘끓였는지’등의 병렬체로의 선택이 이루어진 후 그 선택들의 연결이 우리 삶에서 실현되는 것이 계기체이다.

 

1.6 소쉬르와 문화기호학

소쉬르는 언어가 가장 중요한 기호체계이며 단지 기호학의 한 분야 이상의 의미를 가질 수 있다고 했다. 언어가 문화의 한 분야이기도 하지만 언어는 다른 분야를 기술할 수 있는 틀이 될 수 있다. 롤랑 바르트는 기호학적인 모든 현상에 언어적인 것이 편재되어 있다는 말로 소쉬르를 지지했다. 왜냐하면 우리는 모든 것을 언어화하려는 경향을 갖고 있고 비언어적인 것도 언어화될 수 있기 때문이다. 언어는 언어 아닌 다른 것을 설명하는 메타적인 기능을 갖고 있으며 문화에 대한 이해도 언어를 통해 이루어지지 않으면 안 된다. 소쉬르의 언어학 이론을 통해 문화의 기호학적 설명이 가능한 것도 이 때문이다.

소쉬르가 기호를 파악한 몇 가지 방법들은 여타 학문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그중 하나가 소쉬르의 공시적인 방법론으로 기호 자체의 내용보다는 체계 내에서 기호의 차이를 통해 그 가치를 발견해내는 구조주의적 방법론이다. 문화를 양항대립의 체계로 보고 그 대체와 교환의 관계를 밝힌 레비스트로스의 시각은 구조주의의 전형이다. 문화를 체계로 본다는 것은 문화를 언어기호와 같은 것으로 본다는 뜻이다.

그러나 소쉬르의 이론을 문화기호학에 적용하는 데는 몇 가지 문제가 있다. 소쉬르는 기호의 구체적, 물질적, 역동적 측면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는데 이러한 것은 문화기호학에서는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요소들이다. 또한 문화가 언어로 환원될 수 있는가, 문화를 하나의 완결된 체계로 보는 것이 가능한가 라는 질문을 던질 수 있다. 파롤과 무관한 랑그만의 연구란 불가능한 것처럼 가변적이고, 역동적이고, 물질적인 것과 무관한 추상적, 정신적, 정태적 체계―구조만의 연구란 불가능한 것이다.

문화는 움직이며 변하는 것이고, 그것의 역사성과 통시론적 측면을 고찰하는 것이 중요하다. 완전한 공시론이란 가능한가? 라는 비판 하에 후대학자들은 통시론적 국면에서 기호체계를 파악하는 작업을 시도했다.

 

2. 퍼스 기호학의 기본개념

 

2.1 기호학의 위상

퍼스와 소쉬르의 교류는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언어학을 기반으로 하고 있었던 소쉬르와는 달리 퍼스는 철학을 기반으로 기호학의 정립을 시도했다. 또한 그의 이론은 논리학과 깊은 관련을 갖고 있다.

 

2.2 삼항성의 범주

1차성 - 다른 어떤 것과도 무관하게 그 자체로 있는 존재 양식 (자질)

2차성 - 능동자와 피동자, 노력과 반작용, 능동적 노력과 금지 등의 이중성을 통해 일어나는 의지, 1차성과 1차성의 관계에서 비롯되는, 어떠한 것에 대한 대항에 대한 경험 (존재나 행위)

3차성 - 1차성과 2차성을 관계짓는 어떤 것으로, 기호도 이러한 일종의 3차성으로 존재 (종합)

 

2.3 기호와 기호작용

퍼스는 소쉬르의 이원 기호모델과는 다른 삼원 기호모델을 제시했다.

S(기호)

 

O(대상)

 

 

 

 

 

 

                                                I (해석소)

1. 기호 : 기호가 취하는 형태(반드시 물리적인 필요는 없다.) / 교차로에 설치된 붉은 등

2. 해석소 : 해석자가 아닌 기호에 의해 만들어지는 관념. / 붉은 등이 켜지면 멈춰야 한다는 생각

3. 대상 : 기호가 지시하는 것 / 멈추는 자동차들

퍼스는 형태소와 대상 그리고 해석소의 상호 작용을 ‘기호작용’이라 부르고 있다. 여기서 해석소란 본래의 기호에 의해 마음속에 동일한 기호로 혹은 더 발전된 형태의 기호로 나타난 기호를 뜻한다. 퍼스의 모델에서 ‘대상’은 소쉬르의 모델에서는 직접적으로 다루어 지지 않는 요소이며 기호는 기표와 유사하고 해석소는 기의와 유사하다. 그러나 둘의 차이점은 기의가 인간의 정신속에서 분절된 개념인 반면 해석소는 해석자의 마음속에 투사되는 또 하나의 기호라는 점이다. 퍼스의 기호는 그것의 대상을 지시하면서 그것의 해석소를 결정한다. 그리고 그 해석소는 다시 그것의 대상을 지시하면서 새로운 해석소를 결정한다. 퍼스의 모델은 기호의 끊임없는 연쇄작용을 설명하고 있다.

예)나는 이용악의 <낡은 집>(기호1)이 어떤 객관적 내용(기호2)을 담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때 객관적 내용은 시라는 기호에 대한 기호, 즉 해석소이다. 이때 기호1을 <역동적 대상>이라고 한다. <역동적 대상>은 표상으로부터 독립적이지만 표상으로서의 기호를 결정하는 대상이다. 나는 <낡은 집>에서 보다 궁극적인 해석을 전제한 또 다른 해석(기호3)을 할 수 있다. 여기서 기호2와 기호3은 기호1의 해석소들이다. 그리고 기호1의 대상은 기호 2와 기호 3의 대상이기도 하다. 퍼스는 이러한 기호작용이 이어져 궁극에 이를 때 <최종적 해석소>가 나타난다고 가정했다. 최종적 해석소가 표상하는 대상은 기호1이 나타내는 객관적 내용에 가장 가깝다고 할 수 있다.

퍼스의 기호작용은 어떤 최종적 지향점을 가정하고 있으며 일종의 목적론을 함축하고 있다.

 

2.4 기호의 분류

1) 자질 / 실재 / 법칙 기호

자질기호 - 기호가 바로 자질인 경우, 그것이 체현되기 전까지 실제로 기호로서 활동 불가

실재기호 - 기호가 실재로 존재하는 사물이거나 사건, 자질기호를 통해 실현할 수 있으며 자질기호를 포함하고 있다.

법칙기호 - 기호가 바로 법칙, 그 적용의 예를 통해 의미작용을 하게 되고, 모든 법칙기호는 실재기호를 요구한다. 예) 정관사 ‘the’에 포함된 수많은 자질기호들, 그리고 문법으로 관습화되어 있는 법칙기호로서의 ‘the’ (문법속에 있는), 단어 앞에서 실현되는 실재기호 'the'

2) 도상 / 지표 / 상징

도상기호 - 기호가 그것의 자질과 유사한 자질을 가짐으로써 그 대상을 나타내는 기호

지표기호 - 기호가 나타내는 대상에 의해 실제적으로 영향을 받음으로써, 그 대상을 나타내는 기호, 도상기호와의 차이는 대상에 의해 그 기호가 수정되어야 한다는 점.

상징기호 - 기호가 나타내는 대상을 법칙에 의해 나타낼 때의 그 대상을 가리키는 기호, 이때 법칙은 그 대상을 지시하는 것으로 해석되게 하는 어떤 일반적 관념의 연합

예) 횡단보도 표지판은 횡단보도와 유사하게 표상되었으므로 도상기호, 횡단보도가 표지판에 실제적인 영향을 미쳐서 횡단보도 표지판이 만들어졌다고 본다면 지표기호, 이러한 표지판이 횡단보도 마다 필요하여 어디든지 같은 모양으로 서 있다면 이는 법칙에 의한 약속이며 따라서 상징기호의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음.

3) 잠재 / 사실 / 논항

잠재기호 - 그것의 해석소가 자질적 가능성의 기호인 기호, 즉 그러그러한 종류의 가능한 대상을 표상하는 것으로 이해되는 기호

사실기호 - 그것의 해석소가 실제적 존재의 기호인 기호

논항기호 - 그것의 해석소가 법칙의 기호인 기호

 

2.5 퍼스와 문화기호학

피스의 기호이론의 특징은 기호가 기호-대상-해석소의 관계를 통해 기호작용을 한다는 점이다. 이러한 시각은 기호에 대한 해석이 해석자의 맥락에 따라 얼마든지 다르게 해석될 수 있다는 점을 시사한다. 이것은 텍스트의 해석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하나의 텍스트도 어떤 대상에 대한 해석소, 즉 메타 텍스트로 끊임없는 생산과정 속에 존재하는 것이다. 이러한 삼항간의 역동적인 관계 속에서 의미는 언제나 불확정적인 것으로 남게 되고 이러한 시각에서 문화 역시 고정된 산물이 아니라 생성되어 가는 과정 속의 산물로 이해될 수 있다. 끊임없이 변화하는 문화, 갈등과 조정의 과정, 인식과 해석 활동의 보편적 특성을 퍼스의 삼항성으로 설명할 수 있다.

퍼스 기호학은 문화 속에서 해석하는 ‘나’의 정신적인 참여를 중시하여 기호작용의 연쇄를 설명했으며 이에 따라 문화의 체계가 닫힌 체계가 아닌 열린 체계라는 점을 보여준다.

 

3. 소쉬르와 퍼스 - 이론의 비교와 통합 가능성

소쉬르 기호학의 중심은 언어학이다. 그의 기호학은 문화를 체계를 갖춘 텍스트로 보게 했고 그로부터 문화의 코드(코드)를 찾아낼 수 있게 한다. 이를 통해 문화에 대한 구조적인 분석이 가능하게 되었다. 반면 퍼스 기호학의 중심은 언어가 아니다. 그의 기호학은 언어를 초월하며 논리학의 한 지류의 성격을 갖고 있다. 소쉬르와 달리 퍼스는 기호를 하나의 텍스트처럼 한정된 체계로 보지 않았다. 그에게 기호는 무한한 생성 가능성을 가진 잠재성을 가지고 있는 체계이다.

소쉬르는 랑그에 초점을 맞추어 기호의 ‘전달작용’을 중시한 반면 퍼스는 해석소를 통해 기호의 ‘의미작용’을 중시한다. 소쉬르의 ‘기의’와 퍼스의 ‘해석소’가 어떤 개념을 지칭한다는 점에서 유사하면서도 분명한 차이가 있다. 기의는 개인의 마음속에서 창조된 것이 아닌 집단에 의해 분절된 관념의 한 단위인 반면 ‘해석소’는 개인에 의해 역동적으로 창조될 수 있는 것이다. 소쉬르의 기호가 랑그라는 정태적 개념에서 비롯된다면, 퍼스의 기호는 보다 역동적인 과정과 움직임 속에서 포착된다.

둘은 자의성에 관한 문제에서 큰 차이를 보인다. 퍼스가 말한 도상기호나 지표기호는 기호와 대상간의 관계가 자의적이지 않기 때문에 소쉬르의 기호 영역에 들지 못한다. 이 지점에서 소쉬르는 <상대적 자의성>이라는 개념을, 퍼스는 <상징기호>라는 개념을 남겨놓아 통합의 가능성을 남겨놓았다.

 

제3장 학파와 이론

 

문화에 대한 본격적인 기호학적 관심은 1960년대에 이르러 모스크바 타르투 학파로 불리우는 소비에트 기호학자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문화기호학이라는 용어가 정립된 것도 이들에 의해서였다. 이 시기의 대표적인 기호학자로는 프라그 학파의 로만 야콥슨과 타르투 학파의 유리 로트만이 있다.

 

1. 로만 야콥슨과 프라그 학파

야콥슨은 언어체계가 갖는 기호학적 성격을 드러내고 이를 다양한 문화현상과 연관시키고자 했던 학자로, 언어학과 문화기호학의 가교 역할을 한 인물이다. 그는 소쉬르 언어학의 양분론을 재해석하려고 했고 퍼스의 기호 개념을 언어학 속에서 통합하려고 했다. 언어의 다양한 기능에 관심을 가졌으며 문화현상 일반에서 찾아지는 기호학적 원리를 분석하는데 많은 성과를 올렸다.

 

1.1 기호학의 위상

야콥슨은 오늘날 인문학들 사이의 상호관계의 문제가 언어학으로 수렴되는 듯한 징후를 읽어내고 언어학을 인문학의 기본적인 모형을 제공하는 가장 중요한 특권적인 지위를 갖는 학문으로 보았다. 그의 기호학은 언어학에 바탕을 둔 소쉬르의 기호학의 연장선상에 있으면서 퍼스의 일반기호학적 개념을 도입하여, 그 영역을 넓힌 것으로 볼 수 있다. 언어학을 기호학의 중심에 두면서도 언어적 특성을 일반적 기호현상에 섣불리 적용하는 것을 경계함으로써 그의 기호학은 보다 포괄적이고 종합적인 이론을 추구하게 되었다. 사회나 문화 속에 존재하는 의사소통의 여러 양상들에 대한 탐색을 위해서도 그는 언어학적 구조 분석이 동원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으로 보았다. 사회와 문화일반은 근본적으로 의사소통에 바탕을 두고 있으며, 여기에는 언어가 근본적인 역할을 한다고 보았다. 야콥슨에게 언어는 분명히 문화의 한 구성요소이지만, 총체적인 문화적 현상들 안에서, 그들의 하부구조, 밑바탕, 그리고 보편적 매개로서의 기능을 수행한다.

 

1.2 기호의 개념과 범주

야콥슨은 기호의 특성을 기표와 기의 사이의 지칭관계에서 찾는다. 그는 소쉬르의 자의성 개념을 비판하고, 퍼스가 말한 지표기호와 도상기호의 개념을 기호의 영역으로 끌어들였다. 그는 퍼스가 제시한 기호의 삼분법을 언어기호의 이론에 도입하여 표상하는 것과 표상되는 것 사이의 복잡하고 다양한 관계를 설명하려고 하였다. 그는 <인접성/유사성> <사실성/귀여성>이라는 두 개의 양항대립에 따라 기호를 새롭게 분류한다.

 

사실적 인접성 = 지표기호 (현재)

사실적 유사성 = 도상기호 (과거)

귀여적 인접성 = 상징기호 (미래)

귀여적 유사성 = 기예 (무시간적) 예)은유

 

그의 기호개념은 언어기호에만 머물지 않는다. 기호는 문화 일반의 모든 현상 속에서 발견되는 메시지와 코드의 상관관계 속에서 찾아질 수 있는 것이다.

 

1.3 언어학적 개념의 문화기호학적 활용

1.3.1 변절적 자질

 

변별적 자질 - 음소 - 형태소 - 단어 - 구 - 문 - 발화 혹은 텍스트

← ← ← 약 ← ← ← 코드의 구속력 → → → 강 → → →

 

이러한 단위들의 결합은 각 단계마다 다르게 나타나는데 이러한 결합을 지배하는 원리를 코드-코드라 말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언어 단위의 결합, 즉 코드의 구속력은 앞 단계에서 뒷 단계로 갈수록, 약해지며 반대 방향으로는 강해진다. 따라서 변별적 자질들의 결합에 작용하는 코드는 다른 어떤 단계보다도 구속력이 강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야콥슨의 음운론의 핵심은 코드의 구속력이 가장 강한 변별적 자질의 분석에 있다.

프라그 학파는 음소가 보다 더 작은 단위로 쪼개질 수 있다고 주장했고 야콥슨은 이를 기반으로 <변별적 자질>을 설명했다. 쉽게 말해 변절적 자질은 단어의 의미를 구별케 하는 음성의 최소 단위를 말하는 것이다. /p/와 /b/, /t/와 /d/는 무성/유성의 구분을 갖고 있고 /m/과 /b/, /n/과 /d/는 비음의 유무에 따른 구분을 갖고 있는데 이때 유성성, 비음성과 같은 자질들이 곧 변별적 자질들이 된다.

이와 같이 음운론에서 활용된 징표의 유무에 따른 분석은 의미론적 단위들이나 다양한 문화일반의 현상들에서 찾아지는 유추적 질서의 원형이 된다.

 

1.3.2 양항대립

양항대립은 구조주의에서 가장 핵심적인 개념 중의 하나이다. 소쉬르는 “그것의 실체에 의해 적극적으로 정의되기보다는 체계 내의 다른 사항들과의 관계에서 소극적으로 정의된다”라고 말했다. 이러한 상대적 관계에서 비롯된 양항대립의 개념은 구조주의 이론가들에 의해 언어를 넘어서 다양한 문화현상을 해명하는 데 활용된다. 야콥슨은 한발 더 나아가 대립항들 사이의 반대관계뿐 아니라 그 통합관계에도 관심을 가졌다. 그에게 대립이란 하나의 항목이 <단의적이고 가역적이며 필연적으로> 또 다른 항목을 불러일으키는 양학적 관계이다.

대립관계에 있는 <선>과 <악>을 살펴보면, <선>이 <악>을 불러일으키듯, <악>도 <선>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점에서 이들 관계는 가역적이며 이들의 관계는 반드시 다른 항목을 불러일으키는 필연성을 수반한다. <빛>과 <어둠>도 마찬가지 인데 이 둘은 내용적으로 서로 배척되는 항목이지만 의식에 ‘함께’ 주어지는 것이고 시각의 측면에서 본다면 <빛>은 <어둠>을 함축하는 것이기 때문에 통합적인 성격을 갖고 있다.

야콥슨은 이와 같은 대립의 통합이라는 시각에서 소쉬르의 양항대립적 정의를 비판했다. 1)그는 음운론이 다른 언어학적 층위로 기계적으로 전이되는 것을 반대했다. 's'와 같은 복수적 형태소를 결정하는 요소는 그 자체가 복수성을 나타내는 적극적 의미에서 나타나는 것을 예로 모든 음소가 소극적 가치를 갖다는 점을 비판했다. 2)그는 대립적 관계가 음소들 사이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음소들의 변별적 자질들 사이에서만 존재한다고 보았다.

 

1.3.3 유표성과 무표성

언어적 체계의 모든 단일 구성체는 두 개의 논리적으로 모순되는 것들 사이의 대립을 바탕으로 세워진다. 여기서 대립이란 어떠한 특징이 있느냐(유표성)와 없느냐(무표성) 사이의 대립이다.이 때 둘의 대립은 단순한 대칭이 아니다.

 

상관적 대립의 두 항목(유성음/무성음)은 등가적인 것이 아니다. 하나는 문제되는 징표를 가지며, 다른 것은 그것을 갖지 않는다. 우리는 전자를 유표적이라 부르고 후자를 무표적이라 부른다.

 

집합(배경)

무표적(예:무성음)

하위집합(형상)

유표적(예:유성음)

양항대립의 한 형식인 유표성과 무표성은 서로 대등한, 등가적인 관계가 아니라 비대칭적이고 위계적인 관계이다. 무표항은 유표항에 비해 비결정성, 단순성, 제한되지 않은 분포, 적정성을 갖고 있으며 사회적 문화적 맥락에 의해 좌우된다. 예를 통해 살펴보자.

한 장의 사진을 찍을 때 사람들은 보통 웃는데, 이때 한 사람만이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있다면 그 무표정은 유표적인 것이 된다. 그러나 길거리에서는 웃고 있는 것이 유표적인 것이 된다. 문화 체계속에서 유표항은 대개 더 특수하고 제한된 것으로, 일부다처(일부일처), 왼손잡이(오른손잡이), 동성애(이성애), 외가(삼촌), 악(선), 여성 직업인 등이 유표적이다.

양항대립의 두 대립항은 어떠한 가치관(예:가부장)에 의해 위계적 관계를 갖게 된다. 이러한 가치관이 나오는 것은 대상이 되는 현상 그 자체의 차원이 아니라, 그것을 넘어선 메타차원에서이다. 문화기호학을 통해 밝혀야 할 것은 이러한 메타적 관련을 맺는 여러 차원들 사이의 관계이다.

 

1.3.4 언어의 두 축

야콥슨은 인간이 언어기호를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일어날 수 있는 두 가지 행위의 양식을 제시했다. 하나는 1)결합의 축이고 다른 하나는 2)선택의 축이다. 이것은 소쉬르가 말한 1)계기적 관계와 2)병렬적 관계에 해당한다. 결합의 축에서는 언어학적 단위들이 결합하는 ‘맥락’이 중시되며 선택의 축에서는 ‘코드’가 중시된다. 우리가 기호를 해석할 때 ‘맥락’과 ‘코드’라는 두 개의 참조항을 이용할 수 있다. 맥락을 참조할 때 기호가 다른 기호와 일렬화의 관계를 갖는 것을 분석할 수 있고, 코드를 참조할 때는 기호의 교체 관계를 분석할 수 있다.

 

1.3.5 언어의 기능

야콥슨은 언어의 다양한 기능들을 찾기 위해, 언어전달에서 필수적인 여섯 가지 요소들을 다음과 같이 도식화 한다.

맥락

메시지

발신자 수신자

접촉

코드

지시기능

시적 기능

감정표시 기능 욕구적 기능

친교적 기능

메타언어적 기능

가령 A(발신자)가 B(수신자)에게 “밥은 먹었니?”라는 메시지를 보낸다. 수신자는 이를 포착하기 위한 맥락으로 현재 시간, A나 B의 상황 따위를 생각한다. 이때 A가 B에게 “밥은 먹었니?”라는 메시지를 보내는 것이 평소 A가 B에게 친근함을 나타내기 위한 버릇이나 관습에서 비롯된 것이고 B도 이것을 알고 적당히 화답한다면 A와 B사이에 “밥은 먹었니?”가 친근함의 코드로 작동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둘이 메시지를 주고받기 위해서는 같은 공간에 있거나 전화를 하거나 심리적 친분이 있어야 하는 접촉이 있어야 한다.

 

1.4 야콥슨과 레비스트로스

야콥슨의 언어학 이론을 적극적으로 끌어 들여 인류학에 활용한 예로 레비스트로스를 들 수 있다. 레비스트로스는 구조주의 언어학의 기본 개념들을 통해 문화현상에 내재한 기본적 구조와 무의식적 랑그를 탐구하고자 한다. 구조주의는 그를 통해 문화 일반의 의미를 밝혀내는 시각과 방법으로 정립된다.

구조주의적 시각과 방법론에 언어학적 모형이 결정적 역할을 한다. 레비스트로스는 언어를 하나의 사회현상으로 보면서, 그것이 과학적 연구에 알맞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고 보았다. 그 특성 중의 하나는 많은 언어행위가 무의식적 사고의 층위에 놓여 있다는 것이다. 특히 음운론에 관심을 가졌는데 그는 음운론이 밝혀내려 하는 무의식적이고 초역사적 의미 속에서 문화의 과학적 해석에 대한 단서를 찾아내려고 했다. 그리하여 음운론에서 일어난 체계적 구조주의를 인류학에도 그대로 도입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친족의 구조가 형제, 자매, 아버지, 아들의 네 항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 항은 긍정적 관계와 부정적 관계로 상관적 대립에 의해 결합한다고 분석했다. 이러한 구조야말로 친족이 존재할 수 있는 가장 기본적 형태이며, 친족의 단위이다. 그리고 이러한 친족단위의 본원적이고도 환원불가능한 성격을 그는 보편적으로 존재하는 근친상간의 금기에 따른 결과로 설명했다. 그는 친족체계 속에서 중요한 것은 고립된 항목이 아니라 이들 사이의 관계이며, 이들이 하나의 상징적 체계를 이룬다고 보았다. 인류학적 대상을 상징으로 보는 것은 언어학과 상통하는 것이다.

레비스트로스는 친족과 결혼의 규칙은 집단 사이의 여성의 교류를, 경제적 규칙은 재화와 노동력의 교류를, 언어학적 규칙은 메시지의 교류를 확실히 하는 것이라고 했다. 각각은 친족의 사회학, 경제학, 언어학이라 할 수 있는데 이들 모두 기호와 상징 및 이들의 규칙을 다루고 있는 것으로 레비스트로스의 시각은 기호학의 범주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1.5 프라그 학파의 문화기호학이 갖는 의의

1)문화를 공시론뿐만 아니라 통시론의 시각에서 체계화시키고 문화가 갖는 다양한 층위 간의 상관관계를 밝히려고 했다. 소쉬르가 말한 공시론과 통시론의 양항대립이 갖고 있는 시간관념과 달리 야콥슨은 현재를 과거와 미래의 상관관계 속에서 역동적으로 파악했다. 시간 속에서 구조의 변화는 곧 <위계>의 변화를 의미한다는 점에 주목하면서 통합적인 시각에서 문화를 분석했다.

2)야콥슨은 대립항들 사이의 관계에서 유표성이라는 중요한 개념을 제시했다. 각 대립항들이 가치중립적 대칭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위계적 비대칭으로 이루어진다는 점을 설명했다. 양항대립의 비대칭적 특성은, 이들 양항에 대해 인간의 가치판단이 개입하여 유표성을 결정한다. 이러한 시각은 유표성을 결정하는 문화의 맥락과 관습이 지배하는 코드들을 인식하게 하여 문화가 어떤 기호로써 해석되며 어떠한 방향으로 해석된다는 점을 시사했다.

3)야콥슨은 소쉬르가 제시한 자의성의 한계를 넘어서기 위해 퍼스가 말한 도상기호와 지표기호를 기호의 범주에 포함시켰다. 이것은 모든 형태의 메시지 교환이 이루어지는 영역을 정립한 시도이며 문화영역의 핵심 부분을 다룬 것이기도 하다. 야콥슨의 기호학은 문화에서 드러나는 구체적 메시지와 이를 만들어내는 추상적 코드의 다양한 관계를 밝힐 단초를 마련했다.

4)야콥슨은 기표의 구조뿐만 아니라, 기표가 나타내는 내용의 세계에 대한 구조도 함께 연구했다. 이는 퍼스의 해석소 개념을 수용한 것으로 문화의 의미해석을 지향하게 되었다.

 

2. 유리로트만과 모스크바 타르투 학파

 

2.1 기호학의 개념

로트만이 정의하고 있는 기호학은 다음과 같다. 1)기호학은 과학적 학문이다. 기호학적 의사소통의 영역을 그 대상으로 하는 지식의 한 분야로 언어의 개념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2)기호학은 인문학의 한 방법이다. 다양한 분야들과 관계를 맺고 있으며 대상을 분석하는 수단에 보다 깊이 관련되어 있다 3)기호학은 탐구자가 갖는 과학적 심리학적인 어떤 특별한 자질, 즉 그의 인식적인 의식이 만들어지는 방식으로 정의될 수 있다. 다시 말해 기호학적 탐구자가 관심을 기울이는 모든 것은 기호화된다.

로트만의 기호학은 소쉬르, 퍼스, 야콥슨의 전통 위에서 성립된 것이다. 소쉬르가 제시한 랑그와 파롤, 공시론과 통시론을 바탕으로 역동적 상관성을 밝히려고 했으며(야콥슨) 기호해석자의 시각과 인식의 측면에 관심(퍼스)을 갖고 있었다. 그의 이러한 연구는 메타체계, 언어에 대한 메타언어로서의 문화를 향하고 있다.

 

2.2 문화와 텍스트

 

2.2.1 문화에 대한 시각

문화에 대한 로트만의 가설은 다음과 같다

 

1) 정보를 산출하고 교환하고 유지하는 인간적 활동의 전체로 정의되는 문화는 개별적 체계들로 이루어진 통합체로 간주되어야 한다. 2) 이러한 개별적 체계들은 이들의 위계적 질서 안에서, 이들 사이의 상관관계, 그리고 그것과 전체와의 관계 속에서 연구되어야 한다. 3) 문화는 구조 속에서 그것에 상응하는 비문화와의 대립관계를 통해 연구되어야 한다.4) 문화는 그것의 진행적 역동성을 통해 연구되어야 한다.

 

타르투 학파는 문화의 개념에 대한 시각을 문화 그 자체의 시각과 문화를 기술하는 과학적 메타체계의 시각으로 구분한다. 문화 그 자체의 시각에서 볼 때 문화는 그것의 대립항인 비문화와 불가분의 관계를 맺게 되며 이는 문화의 유형 문제와 직결된다. 문화와 비문화는 서로가 서로를 조건지우고 필요로 한다. 문화는 외부적인 <혼돈>과 투쟁할 뿐 아니라 그것을 필요로 하며, 그것을 파괴할 뿐만 아니라 끊임없이 그것을 생산하기도 한다. 이와 같은 <문화/문화 외적 공간>의 양항대립은 어떤 주어진 층위에서 문화 기제의 최소한의 단위이다. 문화는 정태적이고 공시론적으로 조화된 기제가 아닌 규칙성의 비규칙성의 영역에 대한 공격과, 비규칙성의 규칙성에 대한 침투로 실현될 수 있는 양항대립적 체계를 표상하는 것이고, 문화의 발전도 이와 같은 역동적 과정을 통해 이루어진다.

문화에 대한 이들의 기본적인 가설은 문화는 결국 체계들의 체계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문화의 언어들은 구조적이며 위계적으로 관계되어 있으며, 그런 의미에서 문화는 일종의 메타언어이기 때문이다. 이들의 문화기호학적 시각은 양항대립을 기본으로 하고 있으며 시각과 맥락에 따라 문화의 다양한 유형화가 가능함을 제시하고 있다.

 

2.2.2 텍스트의 개념과 유형

텍스트는 문화의 기본 단위로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문화는 텍스트들의 축적, 이들과 상관된 기능들의 집합, 혹은 이들 텍스트들을 발생시키는 어떤 기제로 간주된다. 로트만 등은 텍스트를 1)텍스트/기호 및 2) 발신자/수신자의 문제와 관련시켜 논의한다.

 

2.2.3 문화텍스트 culture text, 문화적 텍스트 cultural text, 문화적 모형 cultural model

문화가 어떠한 메시지로 인식될 때, 이것은 문화텍스트가 된다. 이러한 문화텍스트로부터 그것의 추상적이며 내용적인 문화적 텍스트가 추출된다 문화적 텍스트란 그 문화의 입장에서 현실의 가장 추상적인 모형이며 이 때문에 그 문화의 세계관으로 정의된다. 즉, 문화적 텍스트는 문화텍스트의 모형이 된다. 이러한 문화적 텍스트가 공간적 모형화의 방법을 통해 기술되면 문화적 모형이 된다. 이러한 공간적 특성은 문화적 모형의 내용이 된다.

문화적 모형은 1) 보편적 공간의 분할 2) 보편적 공간의 차원 3) 방향, 이라는 세가지 기본적인 특성을 갖고 있다.

1) 문화적 공간은 어떠한 경계에 의해 분할된다. 가장 단순한 분할은 <안/밖>의 2차원적 분할에서 찾아진다. 여기에 텍스트 참여자의 시점이 겹쳐지면 방향이 제시된다.

시점이 내부 공간에 놓이면 안에서 밖으로 방향이 제시되고 시점이 외부 공간에 놓이면 밖에 서 안으로 방향이 제시된다. 이러한 양상에 따라 <우리/그들>의 관계도 이중적 해석이 가능하다. 우리가 내부에 있으면 그들은 외부에 있으며, 그들이 내부에 있으면 우리는 외부에 있게 된다. 내부공간은 닫힌 공간, 외부공간은 열린 공간이라 할 때 문화적 텍스트들에 존재하는 양항대립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안                    밖

조직화된           비조직화된

우리 나라(민족) 다른 나라(민족)

     문화                 야만

     질서                 혼란

 

문화적 텍스트 안에서는 이러한 경계에 의해 세원진 구조를 깨뜨리고자 하는 움직임이 나타난다. 내적 공간을 깨뜨리려는 외부 공간의 힘과 이를 지키려는 내부공간의 힘이 갈등과 대립을 빚는다. 그리고 이러한 움직임이 문화적 텍스트의 플롯을 구성한다.

 

2.2.4 텍스트의 기능

메시지는 코드화를 통해 텍스트로 만들어지고, 텍스트는 해호화의 과정을 통해 메시지로 받아들여진다. 발신자화 수신자는 코드를 통해 텍스트 속의 메시지를 받아들이며 이때 둘이 같은 코드를 갖고 있다면 전달된 텍스트와 수용된 텍스트가 일치하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코드의 일치는 상대적인 것이며 전달된 텍스트와 수용된 텍스트 사이의 관계도 언제나 상대적이다. 텍스트가 갖는 기능은 1)창조적 기능 2)코드의 구축 3)기억의 기능이다.

1)창조적 기능 : 기호학적 가능성이 전 영역에서 실현되는 모든 체계는 기성의 메시지를 전달할 뿐 아니라, 새로운 메시지를 산출하기도 한다. 아래 그림의 경우 발신자와 수신자는 같은 코

 

 

 

 

 

Text1

 

Code

 

Text2

 

 

 

 

 

드 C를 갖는다. 이때 양자의 관계는 대칭적이다. 그러나 실재는 그렇지 않다. 시의 경우 하나의 텍스트는 다른 코드를 가진 수신자에 의해 얼마든지 다르게 해석된다. 발신자가 C1을 사용했다면 수신자는 C2 사용하게 되고 제3의 텍스트 T3가 생겨나게 된다. 이러한 비대칭의 관계, 즉 지속적인 선택이 해석을 새로운 정보를 산출하는 행위로 만들고, 이를 통해 언어와 텍스트가 갖는 창조적 기능이 드러난다.

2)코드의 구축 : 우리는 언어 속의 메시지뿐만 아니라, 언어 그 자체에 관심을 집중시키는 메시지도 다룬다. 메시지를 통해 그 메시지를 코드화한 언어를 찾아내는 것이다. 의사소통에는 다수의 참여자가 개입하게 되고 이러한 과정 속에서 다양한 코드가 작동하게 되는 반면, 예술적 텍스트(예:詩)는 메타언어적 구조를 갖고 있기 때문에 다양하게 작동할 수 있는 코드들을 메타적 차원에서 통일시키려는 기능을 갖고 있다. 이는 텍스트 1)기능과 대척되는 기능으로 둘은 대립과 통합의 과정을 겪는다.

3)기억의 기능 : 텍스트는 새로운 의미의 산출자일 뿐 아니라 문화적 기억의 응축자이기도 하다. 텍스트는 그 이전의 맥락들의 기억을 보유하는 능력을 갖는다.

 

2.2.5 텍스트의 의미 산출

텍스트의 의미 산출 양상은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층위에서 살펴볼 수 있다.

 

2.2.5.1 자체 전달

로트만은 텍스트가 전달되는 두 가지 상황을 제시한다. 1)전달의 주체가 <나>이며 대상이 <그>인 경우인 <나-그>전달, 2)메시지를 전달하는 주체가 이미 그 메시지를 알고 있는 그 자신에게 전달하는 <나-나>전달, 이 두 가지 상황이 있다. <나-그>전달은 정보가 공간 속에서 전이된다면 <나-나>전달은 시간 안에서 전달된다. <나-그>전달에서 정보의 발신자와 수신자는 변할 수 있어도 코드와 메시지는 변하지 않는다. 반면 <나-나>전달에서는 정보의 발신자와 수신자는 변할 수 없지만 코드와 메시지는 재형식화되고 새로운 의미를 획득한다. 본래의 메시지는 그 구조의 요소로 재코드화되고 이에 따라 새로운 메시지의 자질을 획득한다. <나-나>전달은 외부로부터의 코드와 자극을 수용하여 이루어지는 열린 과정으로 간주된다.

자체 전달은 문화의 구성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문화의 기호는 항상 하나의 문화에 대한 메타논평이라 할 수 있는데, 이때 <나-나>전달에는 강한 자기반성성이 내포되어 있다. 자기반성은 자기 존재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며, 이러한 해석은 의미의 확충으로 나아가며 이것은 곧 질적 증가를 뜻한다.

메시지 전달을 지향하는 문화는 유동적이고 역동적이며 텍스트의 수를 증가시키고 지식의 급속한 증가를 양산한다. 그러나 발신자와 수신자가 분리되고 수신자는 수동적으로 정보를 받아들일 뿐이기 때문에 외부로부터 정보를 받아들이는 데는 인색하다. 반면 자체 전달을 지향하는 문화는 덜 역동적이지만 강한 의미산출 능력을 갖는다. 양자는 문화 속에서 서로 충돌하며 문화의 전개는 이러한 충돌의 양상으로 기술될 수 있다.

 

 

[출처] <문화기호학> 요약발제 1 (맥놀이) |작성자 날틀

 

 2.2.5.2 수사

 텍스트와 메시지들 사이에는 지속적인 교류가 이루어진다. 이러한 교류는 1차 텍스트와 2차 텍스트(1차 텍스트의 메타 텍스트) 사이에서도 일어난다. 텍스트와 메시지, 1차 텍스트와 2차 텍스트 사이에 정확한 해석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둘이 등가적인 관계를 이루어야 하지만 이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둘의 체계를 공통적인 문화나 심리학적, 기호학적 맥락을 통해 해석한다면 어느 정도의 등가에 근접한 해석이 가능해진다. 따라서 어느 정도 불합리하고 부정확하고, 근접한 해석이 창조적 사고를 불러일으키고 새로운 텍스트를 생산하게 된다.

 수사어구는 같은 맥락에 존재하면서도 서로 병치될 수 없는 한 쌍의 요소들로 이루어진다. 수사어구들은 서로 모순되는 의미요소들이 충돌하지만, 이들이 의식적으로 또 다른 메타층위에서 결합됨으로써 수사적 형상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이는 단지 외부적 장식이 아니라 창조적 사고의 본질을 이루는 것이며, 이들의 기능은 예술 넘어서까지 확대된다. 이와 같은 층위에서 수사적 형상은 윤색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언어만으로 구축될 수 없는 내용을 구축하기 위한 기제가 된다. <시/산문> <수/반수사>의 대립항들은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한 항의 기호학적 활동은 다른 항의 기호학적 활동을 불러일으킨다. 수사학적 구조의 특징은 낯선 외부적 구조를 포용해야 하기 때문에 긴장과 갈등이 일어난다는 것에 있다.

 

 2.2.5.3 문체론, 수사학, 의미론 (생략)

 

 2.2.5.4 발신자와 수신자

 로트만에 따르면 상징은 문화 기억의 중요한 기제로서 텍스트와 플롯을 산출하는 기반이 되고, 문화의 여러 층위들을 연결시키고 통합하는 기능을 한다.

 

기호유형

 

상징적

도상적

연속적

공간적

최초의 상징              예비적 자료

 

언어적

서사적

비연속적

시간적

 

           계획                               텍스트

 

 

 

 문학텍스트의 발생은 비문학적인<주제>로부터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문학적이며, 많은 이미지와 해석을 전개시킬 상징으로부터 시작된다고 한다. 그리고 상징은 작가가 이미 생각하고 계획했던 플롯을 점화시켜서 하나의 이야기를 탄생시킨다. 많은 것을 담고 있던 상징이 여러 가지 에피소드의 전개로 대체되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로트만을 위와 같은 그림으로 나타내고 있는데, 이와 같이 텍스트의 산출과정은 다양한 기호학적 변형을 함축하고 있다. 텍스트의 산출과정은 두 영역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해석의 과정을 보여 준다.

 반면 텍스트 읽기(독자)는 이와 반대방향으로 진행된다(텍스트→상징). 이때 독자와 텍스트 간에 동일한 코드와 체계가 있어야 이해가 가능한데 실재로는 이것이 다른 코드와 체계를 갖고 있을 수 있으므로 비이해의 상황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 로트만은 텍스트의 의미산출에서 완전한 이해를 전제로 한 일방적인 전달이 아닌 상호간의 해석장애가 일어나는 대화적 상황(여기서 양산되는 창조적 기능)을 강조하였다.

 

 2.2.5.5 상징

 상징은 문화적 기억과 결합되며, 창조적 과정을 위한 축약된 프로그램의 역할을 한다. 상징은 개별적인 텍스트 이전의 집단적인 문화의 어떤 내용을 담는다. 상징은 문화 안에 축적된 텍스트들을 축약시켜 저장하는 능력을 갖고 있기 때문에 의미론적이고 구조적인 독자성을 갖고 있다. 문화적 기억의 중요한 기제로서 상징은 문화의 흐름 속에서 통시적으로 반복되는 과정에서 이중적인 역할을 수행한다. 그것을 불변성과 가변성이다. 상징은 위계의 층위에서 문화를 통합(불변성)하면서도 문화적 맥락 속에서 변형되기도 한다.

 로트만은 기본적인 표현만을 갖는 상징이 보다 복합적인 상징보다 더 큰 능력을 갖는다고 보았다. 원, 십자가, 별 등과 같은 단순한 상징은 해석 장애의 골이 깊고 그로 인해 의미론적 잠재성도 크다. 따라서 이러한 단순한 상징이 문화의 상징적 핵을 이룬다.

 2.3 기호계 (생략)

 

 2.4 문화 유형론과 문화사

 

 2.4.1 문화의 유형

 타루트 학파의 논의가 문화 유형론으로 수렴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문화 유형론은 이들 기호학의 가장 중추적인 테마이다. 로트만은 어떤 특수한 현상은 유형의 체계 안에서 포착되며, 이러한 유형은 보다 포괄적이고 추상적인 문화적 보편소에서 비롯된다고 하였다. 문화는 1)정보(메시지)와 2)사회적 코드라는 두 가지 시각에서 볼 수 있는데 문화 유형론에서 중요한 것은 코드적 시각이다. 문화적 코드는 복합적인 구조로 나타나는데 이를 세 가지 점으로 설명하고 있다.

 1)모든 문화적 텍스트는 단일한 코드를 가진 단일한 텍스트인 동시에 복수의 코드들을 가진 복수의 텍스트이다.

 2)문화의 모든 유형들은 코드들의 복합적인 위계를 보여준다. 같은 텍스트라고 하더라도 다양한 수신자들에게 다른 정보를 제공할 수 있으며 역시 다양한 코드가 작동할 수 있기 때문에 복합적이다.

 3)실제적인 화행의 층위에서 모든 문화적 텍스트는 어느 한 약호의 실현이 아닌 상이한 체계들의 통합을 나타낸다. 하나의 텍스트안에 다양한 코드가 존재하지만, 화행의 층위에서는 이 코드들의 개별적인 실현이 문제가 아니라 이 코드들의 체계적 통합이 중요한 것이 된다.

 

 2.4.2 역사기호학과 문화사의 기술

 기호학적 관점에서 역사는 하나의 텍스트로 존재한다. 역사에 대한 기술은 하나의 체계를 파악하는 것이고, 체계를 통해 사실들을 재해석하는 것이다. 역사가에게 중요한 문제는 과거에 만들어진 텍스트를 오늘날의 시각에서 어떻게 해석하느냐는 점에 있다. 텍스트 창조자의 코드와 텍스트 해석자의 코드가 같을 수 없기 때문에 해석자는 창조자의 코드를 재구성해야 과거를 읽을 수 있다. 이러한 과정에서 해석자에게 의미있는 텍스트와 그렇지 않은 텍스트가 구분된다. 따라서 역사적 사실이란 탐구의 과정에서 언제나 창조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역사 기술의 구조적 의미 : 사건을 하나의 텍스트로 변형시키는 것은 사건을 특수한 언어의 체계로 서술하는 것이다. 이것은 사건이 이미 주어진 구조적 조직화에 종속되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것이 역사의 기술이다. 사건 자체는 비조직적이고 혼란스러운 것일지라도 언어로 기술될 때는 필연적으로 구조적 통일성을 획득한다(형식 뿐만 아니라 내용상으로도).

 ▯구조와 우연성 : 역사가의 시각은 현재에서 과거를 향하고 있기 때문에 과거의 어떤 사건이 <가능한 유일한 것>이라는 시각을 갖게 된다. 그러나 로트만은 역사적 사건은 많은 가능성들 중의 하나가 실현된 것이고, 같은 조건이 항상 같은 결과를 낳지 않기 때문에 역사에 보다 구조적으로 접근하기 위해서는 사건을 둘러싼 실현되지 않은 가능성의 다발에 유념해야한다고 했다. 따라서 로트만에게 우연성이란 인과성의 결여가 아닌, 또 다른 인과적 연결로부터 비롯된 현상으로 이해된다. 우연성과 결정성은 하나의 그리고 같은 대상에 대한 두 개의 가능한 상태라고 볼 수 있다.

 ▯구조와 개별성 : 로트만에게 역사는 <생각하는 존재의 개입>으로 일어나는 과정이다. 그는 역사의 어느 한 분기점에서 선택의 주체인 인간 개인 세계를 어떻게 바라보는가를 분석하는 것이 역사기호학의 당면과제로 보았다. 역사의 분기점은 전체의 체계가 평형을 잃어버린 순간으로 이때 개인과 대중의 행동은 비예측적인 상황에 놓이게 된다. 이때의 선택은 우연한 환경보다는 그에 관련된 사람들의 자기인식에 좌우된다. 선택은 기존의 체계의 결정성과는 다른 결정성을 만들어내고 이는 역사의 새로운 법칙과 결합된다. 로트만은 인간 존재의 개별성은 코드화의 방법(자기인식, 앞에서 설명한 ‘자체 생산’을 상기할 것)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고 보았으며 역사적 법칙은 인간의 의식적 행동에 대한 고려없이는 이해될 수 없다고 보았다.

 ▯비결정성과 역사텍스트 : 어떤 일을 예측해야 할 때는 <만약 네가~한다면 ~이 일어날 것이다>의 두 단계 과정을 바탕으로 하게 되나. 그런데 과거에 대한 예측자인 역사가에게는 이 두 단계 과정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 이유는 일어나지 않은 것은 일어날 수 없었던 것으로 간주하여 역사속의 비결정성을 제거해버리기 때문이다. 텍스트에 의존하는 역사가는 사건을 서사로 바꾸는 과정에서 사건들을 반대의 방향으로 재구성해야 하기 때문에 불가피하게 사건을 왜곡하게 된다.

 ▯서사구조와 역사텍스트 : 서사구조가 역사적 텍스트의 체계로 작동할 때 두 가지 왜곡이 발생한다. 1)텍스트가 서사 구조에 종속되면 <줄거리>에 도덕적, 철학적, 문학적 반향이 주어진다. 2)역사의 시대 구분은 역속적인 현실의 자료를 과학의 비연속적 메타언어로 재기술하기 위한 것인데, 이때 구분된 각 시대에 <시작>과 <끝>이 주어지면 역사가가 그 의미를 절대화시키는 경향이 나타난다. 역사가의 사고 과정이 역사를 구성하는 결과에 이르는 것이다.

 ▯결론 : 로트만이 역사기호학에 제시한 문제의 본질은 <언어의 문제>이다. 다시 말해 기술하는 메타언어(역사가의 언어)와 기술되는 언어(역사, 텍스트) 사이의 상호작용의 문제이다. 이 문제는 상대성의 차원에서 대상을 탐구하는 오늘날의 학문이 겪고 있는 일반적인 문제이다. 기존의 역사가가 과거와 현재의 간극을 매우 이를 동질화시키려는 작업을 했다면 기호학은 이들 사이의 차이점을 드러내는 작업을 한다. 역사와 역사가가 비대칭적이기 때문에 역사는 현재 문화의 기억이며 따라서 기억과 자기반성 사이의 끊임없는 대화가 이루어져야 한다.

 

 2.5 로트만과 바흐친

 바흐친을 문화기호학자라 말할 수는 없지만 타르투 학파의 문화기호학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2.5.1 바흐친 이론의 기호학적 특성

 바흐친은 소쉬르의 언어학 이론을 출발점으로 삼고, 이를 비판하고 극복하면서 언어 이론을 정립했다. 그는 소쉬르 언어학의 추상적 객관주의를 비판했다. 소쉬르의 언어학은 1)언어의 체계를 언어의 역사와 분리했다는 점, 2)개별적 화자의 존재가 배제되었다는 점, 3)표현의 문제, 사고의 언어적 생산, 주관적 심리 등의 문제에는 접근하지 않는 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다고 보았다. 그는 언어의 공시론적 체계가 구축되는 순간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지적했고 의사소통에 개입하는 다양한 요소들을 문제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바흐친에게 이해의 기본적 과제는 언어의 형식을 지각하는 것이 아닌, 그것을 특수하고 구체적인 맥락 안에서 파악하고 그것의 의미를 특수한 변화 안에서 밝히는 것이다. 언어는 그 수행과정에서 이념적이거나 행동적인 의미와 동떨어져 존재하지 않으며 추상적 객관주의는 이러한 진리를 간과한 잘못을 저질렀다고 볼 수 있다. 그는 이른바 <대화주의>를 주장한다. 타인의 발화를 이해한다는 것은 그것을 대응하는 맥락 속에 적절히 위치시키는 것을 말한다. 이해는 화자의 낱말을 그 대응낱말과 연결시키고자 하는 것으로 바흐친에게 ‘의미’는 낱말 그 자체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낱말이 화자 사이에서 갖는 어떤 위상 속에 존재하는 것이며, 따라서 단지 능동적이고 반응적인 이해를 통해서만 실현될 수 있는 것이다.

 바흐친은 의사소통에서 <발화>와 <대화>를 중시했다. 기존의 언어학에서 발화는 단순히 언어학적 체계의 실현으로 이해될 뿐이었다. 바흐친이 말하는 발화는 언어학적 요소들뿐만 아니라 언어학 외적 요소들 까지도 포함하는 개념이다. 발화는 문文과 달리 의사소통을 이루는 사람들의 반응이라는 요소가 포함된다. 형식상 무엇을 주장하는 문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발화로서 틀거리 잡히지 않으면 실제로 아무것도 주장할 수 없다. 또한 발화의 자질은 누군가로의 지향에 있으며, 이는 순수하게 언어학적인 요소에서는 찾아지지 않는다.(발주 - 가령 매우 절친한 두 사람의 대화를 녹음한 테이프를 제3자(둘을 모르는)가 들었을 때, 제3자는 정확한 의미를 해석할 수 없다.) 이는 발화가 언어학 외적 자질을 가짐으로써 언어학의 바깥에 존재함을 말한다.

 바흐친에 따르면 소설은 언어들의 이미지들, 문체들, 언어와 분리될 수 없는 구체적인 의식들의 대화화된 체계이다. 그는 도스토예프스키 소설이 갖는 대화적 특성을 논의하면서 그의 소설에서 개인적 사고들 혹은 그것의 내적 체계가 주변 인물들과 결코 분리될 수 없음을 지적했다.(발주 - 도선생의 소설에서 인물들의 세계관은 작가의 직접적 기술(서술이든 묘사든) 보다는 인물들간의 대화에서 더 상세하고 개성있게 표현된다.)

 

 2.5.2 바흐친과 모스크바 타르투 학파

 1)<대화> : 바흐친과 타르투 학파의 지속적인 관심사는 <대화>로 요약된다. 로트만이 말한 기호계의 의미산출 과정은 대화의 메커니즘을 통해 이루어지는데, 이는 바흐친의 개념에서 영향받은 것으로 생각된다. 화자와 청자의 코드 불일치, 비대칭성이 있을 때 양자가 능동적으로 참여하는 대화가 이루어지는 것이고 한 체계에서 다른 체계로의 해석이 가능하게 된다.

 2)<소설> : 바흐친은 소설의 특성을 즉각성, 이종성, 전재되어 가고 있는 자질, 미완성인 채 남아 있는 철학적 경향 등에서 찾는다. 특히 소설의 미결정성에 주목했는데 소설에서 과거는 완결되지 않았으며 미래는 예측될 수 없으므로 현재만이 모든 가능성을 수용할 수 있는 핵심이라고 했다. 이러한 시각은 문화를 자체생산적 기제로 본 것과 유사하다. 바흐친의 소설 이론은 문화에서의 닫힘보다는 열림, 구심적보다는 원심적 경향이 주도적인 것을 기반으로 하고 있는데 이는 언어의 이종성(화자 청자의 코드 불일치, 비대칭성)의 추구를 문화의 특징적 자질로 본 타르투 학파의 견해와 일치한다.

 

 2.6 모스크바 타르투 학파의 문화기호학이 갖는 의의

 타르투 학파에게 중요한 과업은 문화의 모형을 세우는 일이었다. 이들은 문화를 정보의 산출, 교환, 유지의 체계로 보고 이들 체계가 갖는 다양한 상관관계를 문화적 모형을 통해 탐색했다. 이들은 산출자와 수용자, 맥락, 역사적 변화 등의 모든 측면을 고려했고 문화기호학을 통해 다양한 양상들을 하나의 체계로 이해하고자 했다. 중심/주변, 발신자/수신자, 표현/내용 사이의 불균형 내지는 비대칭이야말로 기호계를 활성화하고 확장하며 갱신하는 것이며 문화에도 동일한 특성이 적용된다고 보았다.

 

 제4장 통합적 방법론

 

 <주체/대상>, <인식론/존재론>, <정신/물질>, <나/남> 등의 양항대립과 문화기호학의 관계는? 이들 양항대립들은 기호학적 사유를 통해 문화 속에서 자의적이고 대체 가능한 어떤 것이 됨으로써 단지 그 문화가 필요로 하는 허구로 존재할 수 있다. 문화기호학은 구체적 현실을 텍스트로 파악하는 데서 출발한다. 그런 점에서 문화기호학은 선험적으로 존재하는 의미나 가치를 거부한다. 문화기호학은 모든 과정이 기호라는 매개를 통해 이루어짐으로써 인간의 사유에 뿌리깊게 자리 잡은 관념과 현실 사이의 양항대립이 해결될 가능성을 드러낸다.

 

 1. 문화기호학적 텍스트 읽기

문학이론에서 형식주의와 구조주의는 텍스트에 대한 다음과 같은 생각을 갖고 있다.

텍스트는 <짜여진 것>이라는 뜻을 갖는다. 독자는 텍스트를 짜여진 것으로 본다. 짜여진 것으로 보는 것은 유기적이고 통일적인 것으로 보는 것이며, 그로부터 어떠한 중심적 의미를 차아낼 수 있는 것을 의미한다. 텍스트는 객관적 구조 속에서 통일되고 중심적인 의미를 갖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 이러한 시각은 심각한 도전을 받고 있다.

 내가 읽어낸 의미가 중심된 통일된 의미인가? 단지 <내>가 읽은 의미는 아닌지? 텍스트에 통일되고 중심적인 의미가 존재할 수 있는가?

 

 1.1 해체적 읽기의 도전

 텍스트를 통일성이나 중심을 갖는 것으로 보는 관점은 서구이성중심주의의 뿌리깊은 전통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시각이 대두되고 있다. 상대적인 위치에 있을 수밖에 없는 독자가 절대적 의미를 부여하려 한다는 것, 텍스트의 통일성을 설명하는 메타언어가 하나의 권위로 자리잡는다는 비판이다.

 1)롱랑 바르트의 <기표들의 놀이> : 바르트는 <작품>과 <텍스트>를 구분한다. <텍스트>는 행위 안에서 경험되며 독사doxa의 한계 뒤에 스스로를 위치시킨다. <텍스트>는 기의의 무한한 지연을 실천함으로써 기표들의 놀이가 되며, 항상 복수적이며, 어떠한 계통으로부터도 자유로운 상호텍스트이다. 텍스트를 읽는 일은 곧 텍스트를 쓰는 일이 되며 읽는 <주체>는 정신분석의 차원에서의 복수의 주체로 심리적이거나 사회적인 맥락 안에서 상대화된 주체이다. 따라서 작자와 독자의 고유성이나 권위가 인정되지 않는다. 텍스트는 다른 텍스트의 텍스트, 텍스트에 해석 또한 하나의 텍스트에 불과하다.

 2)데리다의 <차연différance>: 의사소통이 가능한 이유는 기호의 명징성 때문이 아니라 기호가 가지는 <차연> 때문이다. 차연은 차이difference와 지연deferment를 합성한 말. 먼저 차이는 대립(반대,모순,대치)이 아니라 그저 ‘다른 것’이다. 이 ‘다른 것’은 완전히 서로 다른 것도 아니라 그저 서로 다를 뿐이다. 그런데 기호와 기호 사이에는 뚜렷한 경계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항상 의미가 지연되기 때문에 ‘차이’들의 체계는 유동적인 것이 된다. 차이가 공시론속에서 체계들을 읽어낸 것이라면 지연은 통시론 속에서 변화를 읽어낸 것이고 자연은 이 둘을 통합한 것이다. 차연의 망 속에서는 텍스트에서 고정된 의미와 주제를 찾는 의미해석은 불가능하며 무의미한 일이다.

 ⇨ 해체주의는 의미중심의 결핍이나 기표의 자유로운 놀이라는 텍스트성에만 관심을 갖는 반면, 기호학은 기호의 의미작용이 가능하며, 그 의미작용은 어떠한 공동체 내에서 소통가능한 것임을 전제한다.

 

 1.2 문화기호학적 텍스트 읽기의 과정

 

텍스트 산출자 ➜

텍스트

➜텍스트 수용자

 

 

 

 

 

텍스트

산출자

텍스트

산출자

텍스트

텍스트

수용자

텍스트

수용자

 

 

 

 

 

 

 문제는 산출자의 의미가 수용자에게 그대로 전달되느냐이다. 산출자와 수용자 사이에 완벽하게 동일한 코드가 있다면 완벽한 의미 전달이 가능하다. 그러나 코드의 불일치가 일어나기 때문에 수용자가 텍스로부터 만들어내는 또 다른 텍스트로 해석소가 생성된다. 이러한 읽기가 반복될 경우 퍼스가 말한 최종석 해석소에 도달하게 되어 텍스트가 지시하는 궁극적 대상과 일치하는 것이 가능하게 된다. 이것이 텍스트 안에 고정적으로 존재하고 있었던 형이상학적 관념이 아니다. 유동적인 상황 속에서 가장 합당하게 창조된 새로운 기호의 형태가 최종적 해석소이다. 문화기호학은 텍스트와 메타텍스트 사이에 일어나는 역동적 기호 활동을 드러내 텍스트 읽기의 방법론을 제시해 준다.

 

 2 약호의 추론

 텍스트 읽기를 통한 메타텍스트의 산출은 텍스트를 지배하는 코드에 대한 탐색으로부터 시작된다. 1차 텍스트를 변별적 자질로 쪼개어 체계를 찾는 것으로 산출자와 수용자에 의해 공유되는 약호를 찾는 것이 중요하다.

문화기호학에서 텍스틀 읽기란 개별 텍스트의 분석을 통해 문화텍스트를 산출해 가는 것이다. 이때 텍스트 분절은 텍스트 혹은 텍스트 해석자의 시각에 따라 무한히 다양하게 이루어질 수 있다. 신화를 여러 단위로 쪼개서 신화가 내포하는 변별적 자질을 찾아내는 것이 신화가 갖고 있는 보편적 코드를 찾는 작업이라고 볼 수 있다. → 다른 기호학 응용 교재에서 더 쉽게 알 수 있음.

 

3. 체계의 전이를 통한 해석소의 산출

 

랑그

 

 

 

1기표

2기의

 

 

 

 

신화

 

 

 

3기호

Ⅰ기표

 

Ⅱ기의

 

 

 

 

 

 

Ⅲ 기호

 

 

<롱랑 바르트의 도식>

 

 왼쪽의 그림은 체계의 전이를 통한 해석소의 산출 과정을 도식화한 것이다. 기본적으로 1기표와 2기의가 결합하여 3기호를 형성한다. 퍼스의 이론에서 검토한 것처럼 생성된 3기호는 <대상-해석소-기호>의 작용에 따라 또 다른 해석소를 생성해낸다. 이때 3기호는 일종의Ⅰ기표가 되며 여기에 새로운 Ⅱ기의가 결합하여 Ⅲ기호가 된다. 기호들은 이와 같은 작용을 통해 무한한 해석소들, 기호들을 생산해낸다.

 예) 국기는 단순히 국가를 표상하는 기호이다. (이때의 기호는 퍼스의 분류에 따르면 도상적 기호, 상징적 기호에 해당한다.) 국기의 디자인, 색상등이 기표라면 그러한 것들을 의미하는 개념 덩어리들을 기의라 할 수 있다. 단순히 국가를 표상했던 기호는 근대 국민 국가의 출현과 제국주의 및 식민주의의 확산에 따라 좀 더 체계적이고 복합적인 의미를 갖게 된다. 이른바 이데올로기가 주입된다. 국가가 중세의 신의 자리를 대체하게 되고, 국가를 단위로 인간 개개인을 억압하고 통제하는 근대 국가가 정착되면서 국기는 과거 십자가와 같은 종교적 우상들이 갖고 있었던 신성성을 갖게 되었다. 이때의 국기는 더 이상 단순히 국가를 표상하는 기호가 아닌 근대 국가의 이데올로기가 함축된 신화적 Ⅲ기호라고 볼 수 있다. 이것을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1 현실세계

기표

기의

 

 

2 외연 : 메타언어

기표

기의

 

3 내포

기표 : 수사

기의=이데올로기

   

 3내포의 단계에서 기표는 수사적 성격을 띠게 된다. 다시 말해 형식화된 기호의 성격을 갖게 되고 새로운 내용(기의)와 결합하여 새로운 해석소가 되는 것이다. 예) 벤담의 일망감시망-파놉티콘은 가장 효율적으로 죄수들을 관리할 수 있는 상상속의 감옥이었다. 그러나 파놉티콘은 미셸푸코의 사유에 따라 19세기 시민들을 감시하고 처벌하고 분절시키고자 했던 근대적 시공간의 미시적 권력 메커니즘을 지칭하는 수사가 되었다.

 

 4. 문화의 반성성

 로트만에 따르면 문화는 스스로를 조직하여 기술하려는 경향인 <반성성reflexivity>을 갖고 있다. 반성성은 문화가 스스로 그 자체를 향하는 것이므로 메타적인 것이며 반성성의 실현은 메타텍스트의 산출로 나타난다.

 퍼스에 따르면 우리가 생각할 때마다 우리의 의식에 어떤 그림, 이미지, 개념 혹은 다른 표상이 떠오르는데, 그것이 하나의 기호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떠오른 모든 것이 우리 자신의 현상적인 외현이라는 사실은 바로 우리 자신의 현존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다. 우리가 어떤 것을 생각할 때, 그 어떤 것이 기호가 될 뿐만 아니라 생각하는 나 자신도 바로 기호가 되는 것이다. 나 자신이 기호이므로, 그 기호는 사고의 연쇄 안에 존재한다. 기호는 자아를 그 기호의 대상으로서 혹은 그 기호의 주체로서 혹은 양자 모두로서 지시할 수 있다. 자아는 단지 개인적 동일성의 차원에 머무르지 않고 다른 자아 및 대상, 해석소와 끊임없이 대화한다. 자아가 사회적이고 문화적인 의미를 획득하게 되는 것이 이 지점이며 기호학적 기각으로 문화를 이해했을 때 반성성을 갖을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제5장 의의와 전망

 

 (발제자 에세이) 기호학은 만능키가 아니다. 기호학적 사유가 효율적인 분야가 있고 그렇지 않은 분야가 있다. 그러므로 현재 우리가 다루고 있는 인권 문제를 기호학적 사유로 보는 것에도 장단점이 있을 것이다. 성 소수자 인권 문제를 기호학적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은 성 소수자들을 해석하는 일반인들의 ‘코드’를 문제시하는 것이며 그 코드를 생산해내고 있는 ‘미디어’들의 헤게모니를 문제시하는 것이다. 소수자들 중에서도 성 소수자들은 쉽게 만날 수 없고, 만나고 있어도 그 존재를 알 수 없는 우리 사회의 하위 주체들이다. 그들을 재현해내는 미디어들, 혹은 이데올로기들의 허구성을 폭로하여 성 소수자들에 대한 사유를 0으로 돌리는 것이 우리들의 기획이다. 동성애와 이성애는 쉽게 대립항으로 이해되지만, 기호학적 사유로 볼 때 동성애는 유표성에 해당하며 동성애와 이성애는 위계의 관계를 형성하고 있으며 이 둘은 충분히 통합될 수 있는 기호들이다. 이러한 전망을 바탕으로 우리는 현재 논문을 준비하고 있는 중이다. 다만 문제가 되는 것은 성 소수자 문제를 사유체계의 문제로 한정시킬 경우 현실성이 떨어지고, 뚜렷한 대안을 제시할 수 없다는 점이다. 성 소수자 문제에 복합적으로 작용하고 있는 여러 요소들을 기호학적 방법론으로 잘 끌어들이고, 전에 말한 바 있는 이성애자들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를 통해 현실성 있는 자료를 활용한다면 승산이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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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조 권력 해체와 교육

구조주의를 통한 교육의 진단 상담이론(펌)

2004/11/25 22:01

 

http://blog.naver.com/kyl2080/60007904014

제3장 구조주의를 통한 교육의 진단

  1.구조주의 학문의 실천성
   일반적으로, 한 학문의 과학성은 그 학문의 고유한 탐구 대상, 목적, 방법, 내용, 형식에 따라서 여러가지 측면에서 주장되어질 수 있다. 또한 학문의 이론적 측면에 대한 정확한 역사적 근거와 평가를 요청하며, 동시에  그 학문이 학문화하기 위하여 필수적으로 요청되는 실천적 요소를 반드시 필요로 한다.
 만약, 현재의 학문이 인간이나 사회에 대하여 공헌하지 못하고 있다면, 비판과 반성에 따른 대안을 내어놓는 학문을 등장시켜야 할 것이다.
 20세기 중반, 본격적 구조주의는 미국식 과학 중심의 인간 과학-기능주의, 과학주의, 실증주의, 행태주의-과 유럽식 인간 중심의 인간 과학-실존주의, 현상학, 해석학-에 반대하여 등장하게 된다.
 이러한 구조주의의 표현은 시대적 위기의 도래와 학문적 반성이라는 두가지 형태를 가진다. 즉, 그 당시의 시대적 상황은 유럽전역에 걸쳐 각종 시위가 발생하고 특히 프랑스에서는 독제체제가 굳어가던 때였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에 대해서 좌,우익 모두는 속수무책이었고 특히 마르크스계열과 보수주의 계역이 그들의 무능을 드러냈다. 이때의 변혁주체는 물론 학생과 지식인이었다. 이러한 일연의 사태는 새로운 철학과 인식론을 요구했다. 즉, 이전의 실존주의적 사고나 행태주의적 연구태도는 이들의 요구를 충족시켜주지 못한 것이다. 두번째 도전은 역시 학문적인 것이었다. 시대적 변혁은 학문적 반성을 수반하기 마련이지만, 특히 지식인과 학생을 중심으로한 당시의 변혁은 더욱 학문적 성찰을 요구했다. 이들은 인간중심적인 실존주의, 해석학, 현상학의 한계를 직시하고 고학중심적인 실증주의, 기능주의 , 행태주의, 경험주의 방법론적 오류성도 지적하였다. 또한 좌파나 신좌파의 이론적 반성을 촉구하면서 특히 동방세계의 현실적 모순을 발견하였다. 이러한 학문적 반성에 뒤따른 것은 새로운
학문의 등장이었으며, 곧 구조주의였다.
 그렇다면, 구조주의는 이러한 시대적, 학문적으로 기존의 학문이 해결해 주지 못했던 사회 혼란을 얼마나 소화해 줄수 있었을까. 하지만 이에 대해 구조주의는 명확한 해결책을 제시해 주고 있지 못하다. 왜냐하면 구조주의 그 자체는 기호가 무슨 지시대상(le referent)을 가르키진 않는다. 다시 말해, 기호가 무슨 뜻을 갖는 것, 곧 기표가 기의로 귀속되는 것은 다른
기호와의 차이 때문이지 그 기호가 무슨 현실을 지시하기 때문이 아니라고 한다. 기호밖의 현실 지시성, 텍스트 바깥의 현실, 곧 언어 바깥의(extra-linguistigue)현실을 부인하게 된다. 이러한 성격때문에 구조주의자들은 그 시대의 사회적 혼란-text-를 읽고 분석,해석할 수 있는 일차적인 기능에서 사회참여부분, 즉 직접적인 탈출구를 제시하지 못하는데 그것은 비정치적 현상이라는 구조주의 성격때문이었다.
 그러나, 전기 구조주의의 비정치적이라는 성격은 후기 구조주의자, 알뛰세나 바르트를 통해 권력과 이데올로기가 발견되면서 구조주의는 실천적 모습을 띄게된다. 예를들어, 구체적 현실 세계를 염두해 둔 학문을 주장하는 롤랑 바르트는 구조주의 기호론의 실천성의 범위를 이데올로기 비판까지 넓히고 있다. 그것은 어떤 기표와 기의는 사회적 약속에 의해서 생겨나며 그것은 사회 관계에서 나온 권력관계가 들어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어떤 기표에서 기의를 찾는 해석을 하지 않고 그 기표가 기의로 귀착하는 것은 사회 권력 관계 비판, 이데올로기 비판까지 연결된 수 있다고 본다.(24)
 이러한 사회학적 구조주의는 현실적으로 인간이 처해있는 구조를 가늠할 수 있게 한다. 세계를 객관적으로 반영하거나, 인간의 욕구를 충족시키지는 못하나 사회적 실제에 의문을 제기하고 이러한 실제는 자연적인 것이 아니라, 이미 구조화 된 것임을 이해하는 것이 구조주의의 텍스트이며, 그것을 적용하고  실행하는 것은 다른 실천적 학문분야로 보아야 한다. 그러한 인접학문중 교육은 특히나 시대적 구조를 반영하고 있을 뿐 아니라, 교육행위는 구조적 모순들을 개선시키는 도구로서 사용되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다음은 구조와 교육과의 상관성을 통해 구조적 교육의 형태와 구조해체를 통한 새로운 교육방법을 제시하였다.

  2.구조와 교육
  “구조적”이라는 말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가.
어떤식으로든 마르크스, 프로이드, 소쉬르는 오늘날 말하는 구조주의의 주창자라고 볼수도 있다. 프로이드, 소쉬르, 맑스가 공통적으로 오늘날의 구조주의자들과 공유하고 있는 것은 현상과 표면적 사건의 전말이 표피밑에 깔려있는 현상, 자료, 구조들에 의해서만이 설명될 수 있다는 확신이다. 따라서 구조주의란 “원일을 깔고 있는” 무의식적 동기, 심층적 구조를 규명하는 노력인 것이다. 교육적 상황에서 보았을때 이러한 심층적, 무의식적 구조 분석은 교육 자체의 문제점들을 지적해 줄수 있다.
 교육이 왜 그렇게 혐오의 대상이 되는지를 설명하는 이유는 바로 학교 교육 그자체의 문제, 즉 교육 과정속에 명시된 대부분의 과목들이 부적절한 방식으로 가르쳐지는데 있다는 점이다.
 한마디로, 학교 지식은 중립적인 것, 모든 사람이 “합의한 것”로 간주된다. 학교 교과 내용은 무정치적(apolotical), 무역사적(ahistorlcal)인 식으로 가르쳐진다. 교육 과정의 조직이나 취사 선택뒤에 깔려 있는 복잡다단한 정치적, 경제적 연관성은 침잠되어진다. 게다가 지식은 더욱 더 개별적인, 분파적인, 경쟁적인 학문 분야로 지나치게 세분된다. 왜소한 사고의
틀이나 형식들이 장려된다. 사실 대 가치, 원인과 결과, 자유와 필요, 자연과 문화, 이성과 정서와 같은 개념들은 상호 변증법적으로 연결된 개념이 아니라, 상호 절대적인 반대 개념으로 간주된다.(25)
 그렇다면, 인간의 학교 교육은 어떻게 가르쳐져야만 하는가?
이에 알뛰세를 비롯하여 여러 구조주의자들은 학교를 이념적 국가 기구로 간주한다
 구조주의자 알뛰세는 이데올로기가 인간을 결정하는 물질적 본체(실행기구)를 갖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데올로기는 인간 존재를 생성시키는 하나의 실천 행위이며, 사회 구성에 있어서 물질적 실체를 갖는다. 이데올로기는 관념의 단순한 소속이 아니라 복잡한 실천의 연합제로써 군림한다. 이데올로기는 정신의 반영물뿐만 아니라, 실체적인 작용체이다. 실제로 인간의 실질적 행동을 능동적으로 구조화시키는 동인이 바로 이데올로기이다. 즉, 이데올로기는 구조권력의 결과이다.(28)
 알뛰세에 따르면, 고도의 자본주의 사회 체제에서 중요한 부분을 담당하기위해 등장한 이데올로기 국가 기구가 바로 교육적 이데올로기 국가 기구이다. 이데올로기 국가 기구중 어던 기구도 어떤 아동들을 일일 8시간, 주 5일동안 씩이나 강제적으로 자본주의 사회 체제 아래 속박해 두지는 못한다. 단지 그것은 학교기구만이 가능하다. 과연 아동들은 학교에서 무엇을 배우는가 그들은 기술(know-how)을 배운다. 그런 기술이나, 지식을 익히는 것 이외에도 아동들은 학습이라는 이름아래, 인내해야하는 행동의 규칙을 배운다. 즉 사회 기술적인 지배에 의해 정립된 질서 복종, 수준의 미덕도 배운다. 그런데도 학교는  언제든지 정치적으로 중립적인 장소라고 제시되기를 기대하고 있다.
 이런 경로를 통해서 모든 계급의 모든 아동들은 계급 사회를 위해 충당할 수 있는 역학에 합당한 이데올로기를 실제적으로 주입받는다. 물론 이데올로기가 이데올로기 국가 기구의 기능을 관장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해서 완전히 순수한 이데올로기 기구 같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이러한 국가 기구들은‘ 억압’의 원칙에 따라 제 기능을 발휘한다.(27)
 여기서 우리는 억압의 개념에 대하여 집고 넘어가고자 한다.
 첫째, 억압은 권력 관계에서 나온다.
 둘째, 억압은 인간에 대한 업압뿐만 아니라, 모든 사물의 상호 관계에서부터 나오는 힘의
원리이다. 기표와 기의가 있다. 그것이 하나의 의미를 가지는 단어가 되기 위하여 둘은 서로 귀착되어야하며 그것은 사회적 약속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기표에 기의가 귀착되는 것은 기표에 권력을 부여해 주는 것이 된다. 즉, 하나의 단어는 절대성을 내포하게 된다. 그러나 하나의 기표는 반드시 하나의 기의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이 구조가 가지는 권력이며,  일대일 대응이라는 관계에서 나타나는 억압이다.
 셋째, 억압은 이데올로기가 존재함으로 가능하다. 권력관계는 이데올로기를 이끌어 내며, 이데올로기는 구조의 결과이다.
 따라서, 권력 관계 속에서 이데올로기의 억압은 학교가 중립적 위치임을 기대하기 어렵게 만든다. 왜냐하면, 구조는 선택 여부에 관계없이 모든 것을 포함하며 구조속의 모든 것은 구조 안에서만 존재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3.구조 권력 해체와 교육
 영어의 "poststructuralism"을 놓고 탈구조주의로 번역하 것인지 후기 구조주의로 번역할 것인지는 재론의 여지가 많다. 즉, 시대적인 흐름에 착안한다면, 후기 구조주의로 부르는 것이 적합할 것이고 이전의 구조주의적 이론과 대조된다는 의미에서는 탈구조주의로 부르는 것
이 나을것이다. 그러나, 어떻게 부르든 그것이 구조주의의 연장임에는 틀림이 없고 시대적으로 구조주의와 그것을 구분지을 공통된 사건이 애매하기 때문에 후기 구조주의로 보겠다.(26)
 학교의 교육과정은 구조주의의 통찰력과 기호학의 관점을 활용함으로써, 하나의 의미 체계 덩어리인 작품이나 교재로 분석되어져야 할 것이다. 이것을 학교에 적용하는 일은 현재의 교수 활도으로부터의 많은 변화를 의미하는 것이다.
 학교 지식의 상당량은 이미 바르트가 흥미있게 지적한 읽혀주는 작품-즉 폐쇄적-과 쓰여질 수 있는 작품이라고 지적했던 것처럼 상품화되고 폐쇄된 그런 류의 텍스트나 작품으로 만들
어지고 있다. 따라서 학생들도 텍스트나 작픔이 넓리 공개, 해석되어지게 하는 방법을 이해하면서 지식 생산 과정에 참여해야 될 활용성이 있는 것이다.(29)
 그것으로서 구조 해체는 새로운 지식 생산 작업이며, 후기 구조주의는 구조주의가 가지는 교육과정에서 더욱 더 발전된 교육 내용을 제시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구조는 원문속에 내제된 논점이나 전제들이 일단의 개념 체제이기 때문에 구조해체는 구조가 갖고 있는 문제점을 지적하여 체계에서 새롭게 발전된 원문을 제시하고자 한다.
 교육 속에 이원화된 구조-즉, 하나의 기표는 하나의 기의와 귀결한다는것과 하나의 반대 개념이 있다는 것-는 곧 권력과 억압을 가져다 준다. 그러므로 데리다는 이원구조르 통하여 우리사고가 이원 구조로 인해 얼마나 방해받는지를 말해준다. 다시 말해 데리다에 있어서 물질 대 정신, 주체 대 객체, 신체 대 영혼, 텍스트 대 의미, 내연 대 외연, 표피 대 본질과 같은 양분법은 합리적으로 설정된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단지 어느 한쪽을 선호하기위해 활용될 뿐이다. 데리다는 어떤 작품이든 작품의 본문은 이항대립이라는 반대로써 구조화될 뿐만 아니라 두개념 중 그 어느 하나만이 뚜렷하게 부각되어 다른 하나를 장악하게 된다는 점을 밝히고 있다.
 즉 구조해체는 대립과 반대되는 것이 의도적으로 부가됨으로써 어느 한쪽에 특권을 주기위한 행위이며 이러한 방법을 통해서 교재 속에 내제된 가정과 전제의 구조를 밝혀낼 수 있다. 한마디로 구조해체란 구조 속의 잘못된 요소들, 관습이나 제도를 개선하고 향상시키는 도구로써 상용될 수 있고 동시에 그런 관습이나 제도에 만연되어 있는 권력의 구조를 해체시기 위해서도 체계적으로 동원될 수 있다.
 구조속의 권력을 해체시킨다는 것은 억압하는 주체와 억압당하는 개체를 해체시킨다는 것이며 구조 속의 이데올로기를 분산시키는 것. 즉 교육이 정치적으로 중립적 위치를 갖게되는 것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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