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서사문 쓰기 과제로 낸 글인데.. 내가 써놓고 이런 말하면 웃기지만 좀 맘에 든다. ㅋㅋ. 물론 언제나 맘에 드는 글도 있고 안 그런 글도 있기 마련이지만.. 잘 쓴 거 같아서 맘에 든다는 게 아니라, 그건 내 눈으로는 판단할 수도 없는 문제고, 전체적인 분위기와 톤이 무겁거나 어둡지 않고 발랄해서 마음에 든다. 소설이든 뭐든 이야기를 쓰려고 하면, 이상하게 아주 평범한 장면도 무게감 있는 느낌이 되어버리는데 왜 그런 것일까? 흠..

 



  전혀 어려울 게 없는 일이다. 죄를 짓는 것도 아니고, 나도 그녀도 기분 나쁠 일이 아니요, 우리에겐 그저 자연스러운 행동이다. 그런데도 심장 박동이 남들 귀에까지 들릴 것 같이 빨라지고 온몸의 땀구멍이 있는 힘껏 오그라드는지 몸은 뜨겁고 팔다리가 굽어들고 마는 나는, 아, 참으로 등신 머저리이로소이다.

  문제가 생긴 것은 바로 12초 전이다. 아니, 두어 달 전 봄 학기가 시작하고서부터다. 아니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오 년 전부터다. 물론 오 년 전 당시, 내가 여태 수염도 드문드문한 새내기였던 그 시절에는 앞으로 이런 문제가 생길 줄 예상하지 못했다. 나는 신학기의 그저 그런 술자리에서 과 동기인 그녀를 만났을 테고, 초면인 사이에 으레 나누는 인사 몇 마디를 나누기도 했을 것이다. 많은 관계가 그렇듯 시간이 흐르고 어느새 우리는 얼굴을 마주치는 일조차 거의 없이 서로의 일상에서 지워졌다.

  군복무를 마치고 착잡한 마음으로 이 년 만에 복학한 첫 날, 에도 아마 나는 그녀를 보았던 것 같다. 하루하루 복학생의 시간이 정신없이 날아가는 와중에도 나는 왠지 낯익은 여자의 얼굴, 뿐만이 아니라 그녀의 뒷모습, 옆모습을 매일 여러 번 맞닥뜨린다는 것을 느꼈고, 어느 순간 그 여자가 바로 그녀라는 것을 깨달았다. 일 교시 수업에 늦지 않기 위해 뛰어가던 순간에, 담배 한 대 피우며 홀로 건물 앞에 서 있다가, 화장실을 나오다가, 학생식당에서 혼자 점심을 먹고 있을 때 등. 그녀는 어디에나 있었다.

  그녀가 그녀임을 알게 된 후, 그러니까 적어도 몇 년 전에는 우리가 스치며 인사 정도는 나누던 사이였음을 기억한 이후부터 고해의 시간이 시작되었다. 그녀가 어떤 옷을 입고 어떤 머리를 하고 있던지 멀리서 보이는 희미한 윤곽만으로도 그녀를 알아볼 수 있게 된 나는 그녀가 시야에 들어오면 몸이 살짝 굳고 호흡이 정지했다. 그녀 역시 나를 기억하는 것이 분명했다. 처음에는 시선을 참으로 깔끔하게 돌려주는 그녀의 세련됨에 열심히 감탄했다. 나이스 샷. 짝짝짝. 그런데 우리가 스치는 횟수가 쌓이고 기온이 올라갈수록 나는 매번 그녀의 눈에서 어색함과 당혹스러움과 지겨움과 초조함, 가끔은 짜증스러움까지 읽어낼 수 있게 되었다.

  우리는 친했던 적도 없지만 이제는 정말 아무 사이도 아니다. 그러나 내가 그녀를 의식하듯 그녀 역시 나를 의식한다. 그러나 우리는 수 년 동안 말 한마디 나눈 적이 없다. 그러나 우리는 너무 자주 마주친다. 그러나 인사를 한다면 그 다음에는 무슨 말을 할 것인가. 그러나 이대로 모른 척하는 것도 불편하다. 그러나……,

 

 

  그래서,

  나는 그녀에게 인사를 해야 하는가? 말아야 하는가?

 

 

  이것은 이 시대 많은 젊은이들의 고민이자 나의 고민이기도 한, 나는 대체 팔릴 수 있을 것인가라는 문제보다도 더 어렵게 느껴지는 문제로 복학 이후 내 최대의 골칫거리가 되었다. 내가 참으로 사소하고 쓸데없는 일에 기력을 낭비하는 사람으로 보여서 아니, 사내자식이 그렇게 할 짓이 없느냐, 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있대도 사실 별 수 없다. 그렇지만 이 세상에 사소한 일이란 하나도 없는 법이라고 소심한 인간인 나는 조용하게 되뇌어 본다. 어쨌든 어떤 교수도 책도 답을 알려주지 않는 어려운 문제와 늦봄의 뜨거운 햇살 덕분에 나는 바싹 말라가고 있으며, 그녀와의 거리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는 지금 누군가가 나를 건드린다면 아마 나는 희게 타들어간 담뱃재처럼 곧 바스러져 흩어질지도 모른다. 이제 2초 후면 나와 그녀는 서로의 존재를 확실히 확인하게 되고, 그로부터 또 1초가 지나고 나면 사람들이 아는 이를 만났을 때 인사를 하기 위해 손을 드는 거리만큼 가까워지게 된다. 잠깐만 참아 넘기면 되는데, 숨이 막힐 것 같이 가슴이 뜨겁다…… 덥구나…….

  "안녕."

  주머니에 든 담배를 꺼내기 위해 숙인 내 고개(변명을 하자면 나는 정말 담배가 간절했기 때문에 담배를 찾기 위해서 고개를 숙인 것이다, 그녀를 피하기 위해서가 아니라)에 달린, 바로 어젯밤 샛노랗게 묵은 귀지를 몇 수저 파낸 덕에 저 멀리 안드로메다에서 보내는 메시지까지 들을 수 있을 것같이 깨끗한 귓가에 그녀의 음성이 똑똑히 들려왔다. 나는 어떻게 몇 년간 들어본 적이 없는 그녀의 목소리를 구별할 수 있는 것일까.

  "어? 어어……."

  반사적으로 어리바리한 대답을 하며 고개를 드니 눈을 살짝 내리깐 그녀의 얼굴만이 시야에 들어온다. 그런데, 그녀, 이렇게 예뻤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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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3/09 23:34 2009/03/09 2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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