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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갈무리에서 나온 <빚의 마법>(리차드 디인스트 저, 권범철 옮김, 갈무리, 2015)은 일종의 판플렛이다. 대개의 이론서가 갖기 마련인, 기승전전의 구조 대신 명확하게 기승전결의 구조, 특히 행동의 규범으로서 실천전략을 구체적으로 고민한다는 점에서 전통적인 판플렛의 목적을 구현하고자 노력한다. 그럼에도 이 책은 읽기 쉬운 책은 아니다. 그것은 영미권의 문화연구자에게서 발견되는 평범한 것을 낯설게 하고, 익숙한 것을 뒤틀어 새로운 영토를 만들려는 문법 때문인데 그래서 그런 이론적 '건너뛰기'가 익숙치 않으면 글 속에서 길을 잃기 쉽상이기 때문이다(저자 스스로 한국어판 서문을 통해서 이 책은 첫번째로 "말에 대한 작업"임을 밝힌 바 있다). 단적으로 빚과 빚짐의 구분에서 드러나는 이중적 의미, 그리고 채권과 구속을 의미하는 bond의 용례가 그렇다. 솔직히 읽기가 쉽지 않았고, 읽는 내내 문맥과 다양한 단어의 용례 사이에서 번민 했었을 번역자의 노고를 떠올리며 위안을 삼았다. 그나마 정확한 번역이 애써 읽은 책의 전달한 바를 오독하지 않도록 한다는 점은, 이 책의 첫번째 장점으로 언급해도 무방하리라 생각한다.
1.
2014년 12월 말로 우리나라 가계부채는 1,000조를 넘어섰으며 올 해 상반기에만도 100조가 늘어나, 올해 1/4분기 가계부채 총액이 1,100조를 넘어섰다. 가처분 소득 대비 가계부채비율은 이미 2013년에 160%를 넘어섰다. 한국은행의 발표에 따르면 지난 1분기 가계부채 증가율은 7.3%로 가계소득증가율 2.6%보다 3배 정도 큰 것으로 나타났다. 사실상 소득보다 부채가 더 빨리 늘어나는 상태다. 정부의 정책도 한 몫을 했지만 그것보다는 정체되어있는 소득수준을 빚의 확대를 통해서 만회하는 상태가 일반화되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저자가 1장을 통해 현재의 신자유주의 체제가 가지고 있는 특징을 구별하기 위해 브레너, 아리기, 하비의 논의를 살펴보면서 보충하는 의견, 즉 "가장 기초적인 의미에서, 빚은 생산성이나 수익성의 가장 즉각적인 압박으로부터 현재의 자원들을 해방시킴으로써 경제 활동을 가능하게 한다"(57)는 이런 빚의 체계가 가지고 있는 의미를 가장 정확하게 드러낸다. 브레너가 말하는 과잉투자로 말미암은 자본간의 치명적인 경쟁체제, 서구의 성장주의를 대체하는 새로운 자본주의 체제의 등장에 대한 아리기의 해석, 사실상 강탈에 의한 축적 체계라 할 수 있는 신자유주의 체제의 본질을 언급하는 하비의 논의는 공통적으로 신자유주의 체제가 자본의 원치않는 상태라는 것을 암시한다. 그런 점에서 빚의 체제는 자본이 가지고 있는 곤란함을 해방시키는 역할을 한다. 실제로 21세기로 건너온 자본주의는 화폐를 찍어내는 힘에 대한 믿음으로 구성된 신앙체계와 흡사하다. 그리고 이런 체계는 수학적 체계로서 세계의 불평등을 확인하는 지표로서 PPP 환율체계, 지니계수, 빈곤선의 적용에서 드러나듯 부자와 가난한 자들을 드러내는 '메타포'(83)일 뿐 실제로 그런 상태를 극복할 수 있는 방안을 보여주진 않는다. 적어도 부자와 가난한 자의 존재 자체보다는 그 격차에만 초점을 맞추는 일련의 방식으로는 빚짐의 체제가 가지고 있는 본질을 제대로 보여주지 못한다는 것이다(저자는 신자유주의 체제에서 빚짐의 체제가 가지고 있는 특징을 비교적 구체적인 방식으로 보여준다, 103~109). 그렇기 때문에 신자유주의 체제에 대한 정확한 파악을 위해서는 "부자와 빈자라는 극적인 양극단에만 집중하는 대신, 우리는 소유한 자들과 빚진 자들 사이의 관계를 검토해야 한다."(110) 저자의 분석력이 돋보이는 부분은 그동안 자본주의, 특히 신자유주의적 축적의 특징을 분석해온 다양한 시각에서 누락된 부분으로 부채의 체계를 정확하게 드러내고 있다는 점이다.
2.
""화폐권력"이 군대나 동맹보다 더 의지할 수 있는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전쟁 수단"이라고 주장한" 칸트의 <영구평화론>을 현재적인 경제적 (전쟁) 상태를 해석하는 열쇳말로 삼는 3장은, 빚의 체제가 단순히 심리적이거나 혹은 최면에 의한 것이 아니라 물리적 강제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라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현대전이 가지고 있는 특징, 즉 보이지 않는 명령하는 자와 명령의 복종을 시민적 의무로 응답하는 구조를 보여준다. 그래서 칸트가 말한 영구평화를 위한 '환대의 구조'는 미국의 '국가안보전략'을 통해서 "세계를 안전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를 이용 가능하게 만드는 것"(144)으로 변했다. 그렇기 때문에 소위 경제적 위기를 둘러싼 정부의 대응은 곧 전쟁 시기에 강요되는 '위로부터의 관점'을 시민들에게 내면화되도록 강요한다. 이로서 "공공영역은 끝없는 전쟁을 위해 계획되어 왔으며, 이것이 지구화된 시장이라는 영구 평화에 다름 아님이 입증될 것이다."(155) 이런 상황에서 유엔을 통해 세계 빈국의 부채 탕감을 주장한 보노는 민주적인 대표의 체계와 과정을 우회한 방식(193)으로 부채 문제를 재상품화한다. 저자는 이 책 4장을 보노에게 보내는 편지라는 형식으로 작성했다. 보노가 미국의 이라크 침공을 알면서도 빈국의 부채 탕감에 미국이 나서도록 하기 위해 침묵하는 이중적인 모습은 탈정치화된 부채탕감의 전략이 가지고 있는 한계를 여실히 드러낸다.
실제로 이런 강자에 의한 시혜적인 방식으로서의 부채 탕감은 때때로 위기의 원인이 밝혀지기를 원하지 않는 정치권력에 의해 이용되어 왔다. 박근혜 대통령의 후보시절 주요 공약 중 하나가 바로 가계부채탕감이었고 이를 위해 국민행복기금을 통한 채무청산을 실시를 추진했다. 물론 중간에 성실 상환자와 형평성에 어긋난다는 일각의 반론에 부딪혀 축소되었지만 부채 탕감이라는 방식이 부채를 양산하는 구조에 대한 변화보다는 오히려 그런 체제의 안정성을 높이는 효과로 활용된다는 점은 흥미로운 부분이다. 그렇기 때문에 현재의 부채탕감 문제는 보노라는 대중적 인물을 통해서 회자될 수 있고, 빚짐의 체제를 근본적으로 바꾸는 대신 대규모 콘서트를 통해 도덕적 공감을 불러일으키고 부시와 같은 이의 알리바이가 되고 있다.
특히 그렉시트를 둘러싼 유럽 좌파의 분열과 논쟁은 소위 유로화라는 화폐체계가 가지고 있는 물리적 힘을 드러내는 계기가 되었다. 특히 저자가 말하는 영구평화의 수단으로서 화폐권력을 언급하면서 이를 현재의 상시적인 전쟁상태와 길항시키고 있는 면은 사실상 시리자의 등장 이후 유럽에서 벌어지고 있는 유로권에 대한 논쟁이 단순히 독일 패권에 의한 제국주의의 한 단면이라기 보다는 부채의 체계로 상호 구속된 유럽 국가들의 대안없음을 보여주는 상징과 같다고 할 수도 있겠다.
3.
사실 부채 문제를 드러내기 위한 저자의 노력은 4장까지 이어지고 5장부터는 이를 극복하기 위한 대안을 모색한다. 사실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곤란했던 부분이기도 한데, 특히 들뢰즈의 한 단장에서 시작한 5장은 빚짐의 체제를 벗어나기 위해 빚짐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방식이 아니라 빚짐 자체를 적극적으로 재전유하자고 제안한다. 이를테면 "창조적 선취의 고갈과 산 노동의 흡수를 위한 빚 기계는 시간의 완전한 역능을 최종적으로 움켜질 수 없다."(226) 그래서 오히려 "우리가 자본에서 벗어날 필요에 대한 신념을, 그리고 다른 유대들을 공통으로 구축하려는 욕망에 대한 신념을 유지할 수 있는 곳은 빚짐의 강요에 대한 경험에서뿐이다."(227)
그리고 6장에서는 맑스가 자신의 딸에게 했다는 "한스 로클"(230~231) 이야기가 다루어진다. 자세한 내용도 없이 마법사였고 돈 문제 때문에 자신이 가진 것을 팔아야 했지만 그럼에도 아주 많은 모험 끝에 이것들이 항상 한스 로클에게 되돌아 오는 이야기였다는 언급이 전부인 내용을 바탕으로 빚짐의 체제를 재전유하는 것에 대한 근거를 조망한다. 그리고 맑스의 주요 저작엣서 빚짐을 다루는 세 가지 방식을 분리하여 제시한다. 하나는 초기저작에서 나오는 철학적 접근법으로 "인간 사회성의 교환의 도구들로의 점진적 소외로서 신용 및 은행 체계의 진화"(247)에 대한 부분이다. 저자는 맑스가 신용을 본질적으로 "사회적 부의 소외"(248)로 이해하고 있다고 강조하면서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소외의 해소, 즉 노동의 소외를 극복하기 위한 방법으로 생산수단의 사회화를 주장했듯 신용체계로부터 야기되는 사회적 부의 소외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위해서는 이를 재사회화하는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 저자가 소개하는 맑스의 빚에 대한 두번째 견해는 좀 더 경제적 합리성이라는 이데올로기적 알리바이(251)에 근거하고 있다. 이를 맑스가 말하는 필연의 왕국을 넘어서는 것과 관련되는 것으로 신용과 구분되는 빚 혹은 빚짐이 가지고 있는 적극성을 끄집어 내려고 한다. "신용이, 자본이 과거와 미래의 이름으로 현재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는 맹렬한 몸짓으로 이해된다면, 빚은 비동기적인 것, 즉 경제적 지배에 저항하는 모든 완강한 주장의 표식으로 이해될 수도 있을 것이다"(252) 그러면서 마지막 요소로 자본론 3권에서 제시되는 "(고도 금융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집합적 자유의 왕국을 성취하기 위해 행사해야 할 일종의 마법의 일면을 보여 준다"(253)는 관점을 재차 강조한다. 즉, 왜 우리가 지금의 빚짐의 상태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빚짐의 상태에서 벗어나야 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빚짐의 상태를 구축해야 하는지를 지속적으로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저자의 지속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5장과 6장에서 들뢰즈와 맑스의 단편에서 시작한 이론적 탐색이 성공적으로 보이진 않는다. 몇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들뢰즈의 말이나 맑스의 말이 가지고 있는 권위가 어떤 실천적 함의를 가진다고 보긴 힘들기 때문이다. 즉, 학자로서 풀어보고 싶은 아포리아 일 수는 있으나 이런 아포리아의 풀이가 구체적인 빚짐의 상태에 속박되어 다른 사고를 할 수 없는 상태의 사람들에겐 와닿지 않는 작업일 수 있기 때문이다.
4.
이런 약점이 가장 극명하게 드러나는 장이 바로 7장이다. 나름 실천적인 대안의 모색이라는 차원에서 쓰여진 장으로 실제 다양한 방안들이 제시되고 있다. 저자는 "중층결정된 역사의 복합성을 향한 실천적 지향은, 우리의 공통적 힘들을 보존하고 증대하려는 계획적인 노력을 항상 이미 거기에 있는 체제에 대한 굴복의 단호한 거부와 결합하면서, 우리가 우리의 빚들을 결속시키는 법과 깨뜨리는 법 모두를 배울 것을 요구한다."(261)고 강조한다. 즉, 빚의 체계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빚으로부터의 이탈이 아니라 오히려 빚짐의 상태가 가지고 있는 다른 측면을 계발하고 강화하는 것이다. 그것이 저자가 이 책에서 일관되게 주장하는 빚의 양면성에 대한 것, 좀 더 구체적으로는 아직까지 정확하게 나타나지 않은 '우애'의 국면을 발견하는 맥락이다.
우리는 빚을 짐으로서 도덕적 책무에 연관된다. 실제 그것이 고리대에 의한 것이라 하더라도 일단 빚짐의 상태에 '스스로 들어갔다'는 알리바이는 고리대가 가지고 있는 범죄적 특징을 압도하는 도덕적 조건을 만든다. 일단 빚을 졌다는 구속이 절대적인 조건을 형성하는 것이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그렇게 상호간에 질 수 밖에 없는 빚짐의 상태를 적극적으로 구상하면 개인을 넘어선 집단적인 연대를 형성할 수 있도록 해준다. 내가 너와, 그리고 우리가 당신들이 서로 빚짐의 상태로 연관되어 상대방에 대한 의무감을 가진다는 것은 사회적 연대감의 중요한 공감각 중 하나라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저자가 7장과 8장을 통해서 제시하는 실천적인 전략의 방향은 충분히 설득력있고 효과적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아쉬운 부분은 이런 빚짐의 상태가 더 끈질기게 자본에 의해 포획되는 맥락을 지나치게 간과하고 있다는 점이며, 그래서 저자가 말하는 빚짐의 상태를 역전시키는 방법이 일종의 '정신적 해방'에만 머무르는 것이 아닐까하는 의구심이 든다. 좀 더 구체적으로 보자. 저자가 결론부분에서 제시하는 두 가지의 측면, 소액신용을 통한 기존 은행-대출 관행과는 다른 빚짐의 유대를 형성하는 방법과 희년 정신이 내포하는 "상징적인 명부에 있는 인간의 능력들과 힘들을 부패한 체계에 정의를 가져다 줄 수 있는 힘들로 이해"(304)하는 것이 가장 구체적인 방안이다. 이를 과소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저자 스스로 말했듯 유누스의 소액금융이 지속적으로 자본에 의해 포획되어 왔다는 점, 그리고 저자가 이미 지적했듯이 희년 역시도 보노가 말하는 캠페인을 통해서 지속적으로 나타났다는 점이다. 굳이 말하자면 자본주의적 빚짐의 체계를 체제 내에서 반체제적으로 전유하는 방식이 아니라 잠정적이나마 기존의 빚 체계를 단절할 수 있는 '이행의 과정'이 필요한 것이 아닌가 하는 점이 아쉽다.
5.
물론 마지막의 언급은 이 책이 말하는 바를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한 탓일 수도 있고 아니면 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범위를 무리하게 확대하여 요구하는 것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1,000조가 넘어서는 가계부채 시대에도 여전히 개인의 파산면책 조차 도덕적인 비판의 대상이 되는 기가 막힌 자본주의적 도덕률, 그리스 민중을 일시에 빈곤으로 밀어넣은 유로존에 대하여 끝끝내 하나의 유럽을 외치며 '그리스의 책임'을 말하는 유럽의 좌우 컨센서스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그래서 이 책은 이런 곤란함을 정확하게 직면하도록 한다는 점에서 매우 시의성있고 읽는 내내 최근까지 벌어진 상황을 되짚어 가며 생각하도록 한다. 그래서 오히려 이 책이 가지고 있는 문제의식을 좀 더 구체적인 방향으로 밀어붙여지기를 바랐는지도 모르겠다. 물론 앞서 언급한 아쉬움은 저자만을 향하는 것이 아니라 책을 읽으며 동참한 내 스스로도 함께 고민해야 되는 부분이라는 점 역시 강조할 필요가 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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