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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옮겨준 反抗的烙印반항적낙인

 

나에게 옮겨준 反抗的烙印반항적낙인

 

- 그리고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전혜린.

 



뮨헨 대학은 최근 매우 많은 외국 학생이 입학하는 것으로 유명해졌다. 뮨헨 대학생의 기질과 전통을 한마디로 반항적polenishche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 같다. 우선 뮨헨 대학 앞과 그 뒤의 광장의 이름부터가 그것을 말해 주고 있다.

[후우버 교수 광장](Prof-Huber-Platz)이라고 대학 앞 광장은 정식으로 명명되어 있으며 대학 뒤 광장은 [숄 형제 광장](Geschwister-Scholl-Platz)이라고 명명되어 있다.

그뿐 아니라 대학에서 얼마 안 떨어진 곳에 [국민 사회주의 희생자 광장](Platz der Opfer des Nationlsozialimus)이라고 이름 붙은 광장이 있다. 뮨헨 대학생의 대부분이 이차대준 중 또 그 이전부터 히틀러가 영도하는 나치주의의 독일에 반항을 품고 있었고, [학문의 자유](Akademische Freiheit)를 되찾기 위해 백장미(Weiss Rose)라는 저항 단체를 비밀로 조직하고 그들에게 반항하여 왔다.

이차 대전도 막바지길에 올랐던 1934년의 어느 날 뮨헨 대학생이었던 한스 숄과 누이 소피아 숄은 대담하게도 게슈타포 학생과 게슈타포 교수들로 들끓는 뮨헨 대학의 內庭내정에 백장미의 서명이 쓰인 반나치 삐라를 뿌리고 비합리적이고 범죄적인 전쟁을 그만두라고 부르짖었다.

그 결과 그 형제는 즉결심판에 회부되어 처형되고 말았으며 그 때 뮨헨 대학총장이었고 인격자로 이름 높았던 후우버 교수도 함께 처형되었다.

그래서 대학의 정문과 후문 두 광장은 그들의 이름을 달고 동상과 분수가 그들의 자유의식을 후세에 영원히 전해주고 있다. 이런 독재에 대한 반항의식과 학문의 자유, 정신적 자유를 지키려는 전통은 뮨헨 대학의 가장 큰 전통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뮨헨 대학생의 8할은 아르바이트 학생이거나 장학생이다. 자동차나 스쿠우터를 가진 학생도 극히 드물며 교수 이하 전부가 도보 아니면 전차를 이용하고 있다. 영화는 삼류 이하(학생극장이라고도 불리운다)의 영화관에서 관람하는 것이 원칙이며, 로오드쇼를 일류 영화관에서 본다는 것은 학생들로서 상상도 못할 수치스런 일로 되어 있다.

또 연극이나 음악회도 입석에서 보는 것이 유행이며, 그 입석권을 손에 넣기 위해 장사진을 치고 새벽부터 서 있는 일도 태연히 감수하는 그들이다.

미술관도 무료일만 택해서 가고 점심은 원칙적으로 생략하고 있다. 복장도 그에 준해서 형편없다. 미장원에 갔다 온 머리를 한 여학생을 본 일이 없으며(그래서 늘 모두가 머플러를 쓰고 있다) 이발이나 면도를 언제 했을까 싶게 텁수룩한 남학생들 뿐이다. 겨울에 외투없이 지내는 것, 여름에도 겨울에 입던 스웨터를 그저 입고 지내는 것(빨기야 하겠지만)....이런 것도 대학가에서는 당연한 광경으로 늘 보게 된다.

정말로 스토익하다고 평할 수 있을 만큼 물질 경멸과 극단적 빈곤을 감수하면서(즐기고 있는 것 같이도 보였다) [정신]만을 찾고 이념에 굶주리고 살고 있는 것이 그들인 것 같았다. 認識慾인식욕에만 탐욕하게 불타있는 그들도 젊으니만큼 오락의 시각이 없을 리는 없다. 아니 오히려 우리나라 학생보다 솔직하고 공개적인 것 같아서 과연 변증법의 나라로구나 하고 감탄한 일이 한 두번이 아니다. 공부할 때와 사랑할 때를 분명히 분간하고 긴 설명없이 사랑하지 않느냐고 의향을 묻고 그 대답이 노(Nein)인 경우에는 서슴없이 다시 認識인식에 몰두하거나 딴 대상을 찾는 그들.

그들이 내부에 쌓인 활력과 질풍노도(Sturm und Drang)를 터뜨리는 것은 대개 사육제 때가 아니면 한 달에 한 번쯤 있는 [아뜨리에(Atelierfest)](일명 다락방 잔치)에서이다. 말과 마음이 통하는 학우들이 한 다락방에 열 명쯤 모인다. 각자가 빵이나 소오세이지 또는 싸구려 포두주 병을 지참하고 모여서 기염을 토하는 잔치인 것이다.

끔찍한 그림이 붙여진 담벽, 비참한 자화상이 걸린 畵架화가, 벽에 못박아둔 기타아, 우중충한 낡은 건물 냄새가 나는 전기도 없는(있어도 사용 안한다-전기값 때문에) 창고 같은 방에 붉은 촛불을 단 한개 켜고 입추의 여지도 없이 빠듯이 둘러 앉거나 서서 떠벌리고, 고전 음악을 듣고, 어느 교수의 강의가 좋다 나쁘다 비판하고, 심각하게 릴케의 위대와 벤(Benn)의 위대를 비교하고....아뭏든 젊디 젊은 순수한 意識의식의 義式의식과도 같은 모임인 것이다.

대부분의 학생은 정치에 극히 흥미를 갖고 있다. 아데나워(지금은 은퇴했으나)의 욕설이 시작되면 끝이 없었다.

[반항적]이라는 전통이 그대로 지켜져 내려오고 있는 그들은 시민적 도덕이나 소시민 근성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매우 반항적이었다.

핵무기 도입이 한참 신문에서 말썽거리가 되고 있을 때 그것에 대한 반대 데모 행진에 뮨헨 대학생이 거의 전원 참가했었고 에리히 케스트너가 [후우버 교수 광장]에서 핵무기 반대 연설을 했을 때는 경관도 그의 警句경구와 아이러니에 넘친 멋있는 화술에는 빙그레 웃음짓고 있었다.

온갖 물질의 결핍과 가난과 노동, 식사부족, 수면 부족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그 하늘을 찌를듯한 패기, 오만한 젊음, 순수한 정신, 촌음을 아끼고 인식에 바쳐지는 정열과 성의, 조금도 외계나 속물과 타협하려고 들지 않는 자기 유지의 노력....정말로 이러한 모든 것들로 이루어진 팽팽한 세계가 뮨헨 대학생의 세계인 것 같았다.

반항을 위한 반항이 아니라 옳은 것을 끝까지 옳다고 주장할 수 밖에 없는 실존적 성질에서 우러 나온 반항이고, 자기를 외계의 卑俗化作用비속화작용으로부터 막으려는 그럼으로써 정신의 자유를 지키려는 데서 우러나온 빈곤의 감수요, 초연이며 자기 극복이다.

외계에 현혹되지 않고 근본적으로 타자(자기와 이념이 다른자)를 회의하고 지나치리만큼 솔직하고 아무런 주저도 없는 생활태도-이러한 것은 외계의 눈으로 볼 때는 [반항]으로 보인다-이야말로 뮨헨 대학생의 기질이 나에게 옮겨준 가장 강한 낙인이 아닐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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