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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여대의 불길한 스펙터클

 

 

이화여대의 불길한 스펙터클

첨단 인조 구덩이 ‘이화캠퍼스복합단지’ 완공, 신자유주의 트렌드라 불러야 하나

 

 2008년06월19일 한겨레21 제715호

▣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 사진 이종찬 기자rhee@hani.co.kr

 

 

 

기억은 언제나 공간의 이미지를 그림자처럼 끼고 간다. 좋든 싫든 사람들은 지난 시절 누빈 장소들을 뇌 속에 기억으로 집적시키고, 끊임없이 복기하며 살아가게 된다. 명화 속 배경을 순례한다거나, 연인들이 연애의 현장을 되돌아보는 것도 그 습성의 산물이다.

 


 

 

 

여성 권력의 산실이라는 서울 신촌 이화여대 캠퍼스는 이런 기억의 집적지로 손꼽을 만한 공간이다. 지하철 이대역에서 학교로 이어지는 내리막길 패션 점포들, 경의선 철로 위의 정문 앞 이화교, 다소곳하게 숲 속에서 나타나는 대강당과 대학원 별관, 본관의 석조전, 넓이보다 포근한 양감으로 다가왔던 운동장 등은 많은 이들에게 젊은 시절 추억의 발신지로 남았다.

하지만 이제 그런 공간의 기억을 새롭게 정리할 시점이 왔다. 지난 4월 말 완공되어 대학 공간에 지각변동을 몰고 온 첨단 리모델링 캠퍼스, ‘ECC’라는 약칭을 지닌 ‘이화캠퍼스복합단지’(Ewha Campus Complex)가 이대 교정의 모습을 통째로 바꿔놓았기 때문이다.

ECC는 땅속에 거대 건물을 통째로 묻어 만든 대학도시다. 각종 시설물이 입주한 대형 건물을 묻고 그 중간을 쪼갠 단면을 거대한 경사면의 구덩이 공간을 파내면서 드러낸 얼개다. 설계자는 프랑스 건축가 도미니크 페로(55). 2004년 2월 국내 대학 중 처음으로 연 국제설계공모전에서 당선된 그의 파격적 설계안을 3년여간의 공사 끝에 실현했다. 고갱이인 거대한 인공 구덩이는 이대의 공간축이던 숲 속 운동장을 그릇 단면처럼 수십m 깊이로 푹 파내고 만들었다. 그 진입로와 나가는 곳에 100여 개의 계단을 설치하고 지하 공간의 가운데에 중앙 광장을 닦았다. 이대 정문 앞 경의선 철도를 복개한 뒤 생긴 큰 터는 ECC의 들머리 광장이 됐다. 이대 앞 번화한 대학가 공간을 지하 인공계곡의 전망 속으로 끌어들이는 구도가 만들어진 것이다.

국내 최대의 지하 캠퍼스인 ECC는 파들어간 지하 6개층의 연면적만 2만 평을 넘는다. 안에는 교수가 칠판에 적은 내용을 컴퓨터 화상으로 저장하는 첨단 강의실과 열람실뿐 아니라, 피트니스실, 시네마 극장, 레스토랑, 편의점, 꽃 체인점 ‘소호앤노호’ 등의 상업시설이 대거 입주하고 있다. 20세기 초 프랑스 건축거장 르코르뷔지에가 꿈꾸었던, 고밀도 고층 아파트에 넓은 녹지공원이 있는 ‘빛나는 도시’의 콘셉트가 거꾸로 땅속에서 재현된 듯한 느낌이다.

프랑스 파리의 새 명물인 책 모양의 국립도서관 건물로 유명해진 페로는 리모델링의 대가다. 단순 기하학 형태에 바탕해 미니멀하면서도 기념비적인 건축 평면을 추구한다. 특히 지하에 묻히는 공간을 선호한다. ECC 또한 이런 그의 디자인 철학이 반영된 결과물이지만, 1935년 신촌으로 캠퍼스를 옮긴 이래 중심축이 없던 이대 캠퍼스의 여성적인 공간 질서는 완전히 깨졌다(30년대 초 미국 선교사 보리스가 설계한 원래 신촌 교정은 미국의 웨슬리언대학이 모델이었다). 그 명분이 대학 쪽이 내건 ‘열린 세계화’의 모토였음은 물론이다. 페로도 언론 인터뷰에서 “건물보다 풍경의 콘셉트가 중요하다”며 지하보다 새 캠퍼스 풍경을 빚는 지상 공원의 구실을 강조했다.

페로의 구상은 얼마나 실현됐을까. ECC의 핵심은 탈중심적이던 이대 캠퍼스에 권위적 중심축을 만든 데 있다. 하지만 주변 환경이 그 권위에 걸맞은 요소들인지는 모호하다. 캠퍼스 앞의 풍경은 몽환적이다. 한자리에 어울릴 수 없는 것들이 어울린다는 측면에서 그렇다는 말이다. 4월 말 완공식 이래, 지하 광장 들머리에서는 등록금 인상과 ECC 상업시설 대량 입주에 반대하는 학생회 간부들이 8.5m짜리 ‘아시바’ 철탑을 쌓고는 6월 초까지 농성을 벌였다. 5월31일에는 동문인 대통령 부인의 ‘자랑스런 이화인상’ 수상식장(대강당)에 접근하려던 이대생들과 경찰의 몸싸움이 부근에서 벌어졌다. 광장 들머리 앞에는 캠퍼스 완공을 축하해 마련한 설치작업들이 놓여 있었다. 굳은 표정의 흉상 아래 깨진 유리가 놓인 설치작업 너머 인공 계곡의 광장 안쪽 계단은 모델 자태를 취한 남녀 학생들이 기념사진을 찍는 장소다. 더 멀리 본관 쪽 계단에선 막걸리를 사다놓고 즉석 술자리가 벌어지곤 한다. 이런 이질적 상황들이 조합된 ECC 부근의 풍경과 교문 밖 삐죽삐죽한 상가 건물들의 조망까지 ECC는 모두 블랙홀처럼 빨아들인다.

마음에 걸리는 건 이대 교정이 스스로 전면의 몸을 갈라 만든 인공 계곡의 한가운데서 자기 속으로 끌어들인 가장 핵심적인 풍경이 문자 그대로 장사치들의 공간이라는 점이다. 꾀죄죄하거나 섹시하거나, 시선에 닳아 문드러진 상가 건물군들이 마구 육박해 들어온다. 온통 간판으로 뒤발한 상가 건물의 척박한 스펙터클이 이 첨단 캠퍼스의 장래에 대해 불길한 감상을 낳는다. 기실 페로의 첨단 인조 구덩이는 학교 앞 상가를 정면으로 세련되게 흡수하는 조망을 통해 신자유주의 트렌드에 빨리 적응할수록 좋다는 것을 은연중 강박한다. 학생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내부에 들어설 식당, 카페, 할인점, 극장 등의 상업자본 임대는 그런 상징성을 더욱 강화할 것임이 분명하다. 대형 건축물의 랜드스케이프(풍광)는 보는 이의 인식을 재구성하는 마력을 지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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