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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삶과 화해하려 애쓰는 ‘성장’ 그 자체

이 멋진 여자들을 찬양하라

가지 않은 길보다 지금의 길을 긍정하는 대중문화 속 30대 여성… 깨지고 다치면서 자신의 삶과 화해하려 애쓰는 ‘성장’ 그 자체

 

▣ 권김현영 이화여대 아시아여성학센터 연구원

 

2006년08월23일 한겨레21 제624호

 

결혼하지 않은 30대 여성들이 나오는 영화나 드라마, 시트콤에는 유난히 내레이션이 많다. <올드 미스 다이어리>의 미자, <싱글스>의 나난, <섹스 앤 더 시티>의 캐리, <결혼하고 싶은 여자>의 이신영과 브리짓 존스, 삼순이까지 그녀들은 모두 마음속으로 혼잣말들을 한다.


 

시인 최승자가 서른을 이대로 죽을 수도 이대로 살 수도 없는 나이라고 했던 말처럼, 이들은 “내 인생은 어디로 가는 걸까?” “이대로 죽을 순 없어!” 이렇게 끊임없이 스스로 묻고 다짐하기를 반복한다. 드라마 <돌아와요 순애씨>에서 20대의 몸으로 살게 된 순애씨는 그 몸에 만족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어쩐지 몸매 경쟁에서 뒤쪽으로 밀려났다는 게 절감되는 순간 “그 몸이 어때서 그래? 한때는 나도 잘나갔어”라며 입을 비죽거린다. 더 이상 10대, 20대의 젊음과 경쟁하기는 어렵고, 그렇다고 40대에 황신혜 같은 몸매를 유지하겠다고 의지를 불태우는 것도 쉽지 않다. 일단 일과 관계를 유지해나가면서 그 정도 몸을 유지할 수 있는 시간이 나기 쉬울 리 없다. 남자들에게 30대와 40대가 제 한 몸 건사할 수 있는지를 결정짓는 인생의 승부처인 것처럼, 여자들에게도 30대는 앞만 보고 달리는 전차처럼 삶의 쓴맛을 정면으로 마주쳐야 하는 시기인 것이다.

 

여성 자기계발서 붐의 장본인들

 

드라마와 영화에서 남들이 자신에게 원하는 바가 아니라 자기가 자신에게 원하는 바를 찾기 위해 애쓰는 이들의 모습을 보면서, 어째서 우리는 10대와 학교가 나와야 ‘성장영화’ ‘성장드라마’라는 용어를 쓰는지 의문이 들었다. 이들의 모습이야말로, 일과 관계로부터 깨지고 다치면서 자신의 삶과 화해하려 애쓰는 ‘성장’ 그 자체가 아닌가.


△ <결혼하고 싶은 여자>는 30대 여성의 성장드라마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30대 여성이 일과 사랑에서 깨지고 다치면서 자신과 화해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요즘 2030 세대들을 위한 30대 열혈 여성들의 멘토링 책이 서점가에 대유행하고 있다. 이들의 성장에서 분명히 많은 사람들이 배우고 있다는 증거일 터이다. 성장이라는 접두어는 그것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성장의 수혜를 나누는 데 있지, 성장하는 과정에서의 좌충우돌을 “그땐 그랬었지”라는 정중동의 자세로 관망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30대 여성들이 나오는 영화와 드라마들에 ‘성장’이라는 접두어를 붙여주는 것이 더 맞는 용법이 아닐까 싶다.

속으로는 육두문자를 날리면서도 표리부동하게 얼굴에는 미소를 가득 머금을 수도 있는 여유와 더불어 인생 피곤하게 살지 않는 수많은 노하우들도 쌓아놓고 있는 이들은 요즘 출판가의 여성 자기계발서 붐을 일으키고 있는 장본인들이기도 하다. 현실 속의 삼순이, 이신영, 미자들은 우아하고 세련된 커리어우먼, 화려한 싱글의 장벽을 걷고 우리에게 진짜 인생을 들려준다. 이런 연쇄적인 파급효과는 드라마와 영화들에 대거 등장한 30대 여성 캐릭터들이 실제의 사람들에게 공감과 감동을 던져주었다는 말이리라. 그런데 누가 30대를 위기라고 하나. 이렇게나 멋지고 다이내믹한 인생이 기다리고 있으며, 내숭과 애교로 승부를 걸지 않아도 되는 ‘진짜 여자’들의 세계가 펼쳐지는데 말이다. 천만의 말씀이다. 20대? 돌아보면 온통 낯뜨거운 기억들이 우글거린다. 으악. 절대로, 절대로, 절대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 (나만 그런가?)

 

내가 정말 원하는 삶은 무엇이었지?

 

그러나 여유 부리고만 있을 수 없는 순간도 있다. <섹스 앤 더 시티>에서 캐리 브래드쇼는 애인에게 “나는 다시 결혼해서 아이를 낳는 것은 원치 않지만, 만약 당신이 아이를 원한다면 여기서 헤어져야겠지. 당신은 이미 서른여덟이니까”라는 말을 듣고 이별을 고한다. 그녀는 그 말이 ‘마치 38구경 권총에 맞은 것 같았다’고 한다. 그 말을 들은 나 역시 좀 충격이었다. 그래, 아이는 언제든 낳을 수 있는 것은 아니지. 몰랐던 것도 아닌데 구체적인 숫자로 제시되니까 가슴 한쪽이 서늘해졌다. 경험해보지도 못한 모성애 때문이 아니라, 지금이 아니면 절대 할 수 없는 경험이기 때문이다. 첫사랑, 첫이별, 첫섹스… 처럼 ‘처음’으로 시작하는 보편적인 경험들이 아직 남았다는 것에 놀라고, 처음이 없으면 영영 그 다음도 없는 경험이 존재한다는 것에도 놀라는 것이다.

이렇게 30대는 결혼과 아이가 있는 삶을 과감히 남의 일로 제쳐둘 것이냐, 아니면 막차를 잡아 탈 것이냐의 갈림길에 서서, ‘내가 정말 원하는 삶은 무엇이었지?’라고 되돌아보게 되는 시간이기도 한 것 같다. 이미 부모님의 결혼하라는 독촉은 무섭지 않고, 결혼한 주변 친구들이 딱히 부러운 것도 아니며, 조카에게 애정을 쏟는 이모 노릇도 나쁘지 않지만, 그래도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진짜 안 낳을 거야?”라는 질문을 온전히 자신에게 던져본다. “나이가 들면 신중해지게 된다. 상처받을 수 있으니까…. 인생에서는 추락을 막아줄 안전장치도 없다. 언제부터 즐거움은 사라지고 두려움만 남은 걸까?”라고 말하는 <섹스 앤 더 시티>의 캐리처럼 선택하지 않은 길에 대한 불안을 가득 안고 말이다.

 


△ 뉴욕에 사는 30대 여성들의 삶을 그린 <섹스 앤 더 시티>는 뉴욕과 미국을 넘어서 세계 여성의 일상에 영향을 주었다.

 

하지만 후회란 과거의 행동에 대한 자기반성이다. 하지 않은 행동과 가지 않은 길에는 후회라는 단어는 어울리지 않는다. 단지 어떤 아쉬움이야 있겠지만. 어느새 이렇게 나는 스크린과 브라운관에서 만난 그녀들처럼 ‘내 인생 제대로 가고 있는 거야?’라고 묻다가 자신에게 ‘후회는 없다’고 다짐한다. 그러고는 다시 오지 않을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시시각각 손에 잡은 작은 변화들과 기회들에 전전긍긍하며 벼랑 끝처럼 살다가 종종 혼잣말로 다짐하고 질문하는 나의 30대를 돌아본다. 마음속에는 더욱 뜨겁게 이번에 만나는 상대가 영원하기를 바라고, 하고 싶은 일이 정말 이것일까에 대한 고민이 관념론에서 존재론으로 더욱 묵직하게 넘어오는 시기이기는 하지만 못 가진 것에 안달하고 손톱을 물어뜯으며 아쉬워하는 시간도 아니었다.

 

해방된 여자들은 바다 건너에만 있나

 

후회에 대해, 드라마 <결혼하고 싶은 여자>의 여주인공 이신영은 이렇게 말했다. “가지 않은 길에 대한 동경과 환상은 지금 내가 걷고 있는 이 길에서의 행복을 느끼지 못하게 만듭니다. 나는 이제 다른 길에 대한 미련을 버렸습니다. 지금 걷고 있는 우리의 이 길도 아름답다는 걸 깨달은 현장에서, 세상 떠난 동창의 명복을 비는 이신영입니다.” 그러고 보면 성과 사랑에서는 휠씬 화끈한 인생을 사는 것처럼 보였던 미국과 영국의 대중문화에 등장하는 30대들과 비교했을때 이신영과 김삼순도 뭐 하나 빠질 거 없는, 사실 어떤 부분은 더 멋있는 캐릭터다. 더 진보적이고 더 독립적이고 더 해방된 여자들은 언제나 바다 건너에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아니다. 안정과 결혼을 좀체 쉽게 약속해주지 않는 빅에게 상처받고 목매다는 <섹스 앤 더 시티>의 캐리와 두 남자 사이에서 행복한 비명을 지르며 몸부림치던 고독을 어느새 까맣게 잊어버리는 브리짓 존스보다, 여자친구들 간의 관계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사랑에서도 결코 품위를 잃지 않는 더 멋진 여자들이 한국의 대중문화에도 속속 등장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말이지, 실체도 없는 ‘된장녀’를 둘러싼 논쟁을 하느니, 멋있고 당당한 여성 캐릭터들에 대한 찬사를 던지는 것이 더 생산적이지 않냐는 이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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