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 한창 연애에 관심 많던 시절에, 책 제목만 보고 뭔가 있지 않을까 싶어서 본 책.

사랑하는 사람이 느끼는 여러 감정에 대한 단상들을 ABC 순으로 배열해놓은 책인데, 이 구성에서 드러나듯이 뭐라 규정하기 힘든 참 특이한 책이다.(소설가 이인성에 의하면 이 책도 소설로 봐야한단다.) 바르트라면 이 책 말고는 문화이론 개론서에 나오는 몇 페이지 밖에 본적이 없어 잘 안다고 할 수는 없지만 정말 대단한 문장가인 것 같다. 특히 이 '기다림'이란 글이 아주 콤팩트해서 좋아 했었다.지금 생각해보면 좀 우끼지만 얼마나 좋았으면 이 긴 글을 일일이 키보드로 쳐 뒀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기다림이라...뭔가 기약없이 기다리던 갑갑함을 모를 사람이 있을까? 다시 읽어봐도 그 갑갑함이 느껴지려는 구절들이 있다. 글 끝에 있던 선비와 기녀 이야기는 영화 시네마 천국에 나오는 공주와 병사 이야기와 구조가 똑같던데, 아마 서양에서는 좀 유명한 이야기가 아닐까 싶다. 좀 많이 낯간지럽긴 하지만 선비가 떠난 이유에 대해 예전, 아마 한 4년전쯤 써놓았던 글이 있어, 쪽팔림을 무릎쓰고 옮겨본다.

 

"바르트는 기다리는 사람은 항상 (기다림의 대상을)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기다리게 하는 사람은 (기다림의 주체를) 사랑하지 않는다. 만일 공주가 그 병사를 정말 사랑했다면 병사를 100일 동안이나 기다리게 하지는 았을 것이다. 병사는 매일 밤을 공주의 창 아래서 기다리는 동안 공주가 기다리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글쎄...지금 생각으로는 병사(선비)가 100일을 기다리는 것보다 99일 째에 떠나주는 것이 더 큰 사랑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는데, 사실 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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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다림

 

 

 

기다림 attente. 사랑하는 이를 기다리는 동안 별 대수롭지 않은 늦어짐(약속 시간·전화·편지·귀가 등)으로 인해 야기되는 고뇌의 소용돌이.

 

 

 

1. 나는 어떤 도착을, 귀가를 약속된 신호를 기다린다. 그것은 하찮은 것일수도 있지만 아주 비장한 것일 수도 있다. 쇤베르크의 「기다림 Erwartung」에서는 밤마다 한 여인이 숲속에서 그의 연인을 기다린다. 그러나 나는 다만 한 통의 전화만을 기다릴 뿐이다. 하지만 그것은 동일한 고뇌이다. 나는  크기에 대한 감각이 없다.

 

 

 

2. 여기 기다림의 한 무대 장식술이 있다. 나는 그것을 조직하고 조작한다. 시간을 쪼개어 사랑하는 이와의 이별을 흉내내며, 조그만 장례의 모든 효과를 유발하려한다. 그것은 연극 각본처럼 무대에 올려질 수 있다.

 

 무대는 어느 찻집 안. 우리는 만날 약속을 했고 그래서 난 기다린다. 서막에서 그 유일한 배우인 나는(그 이유는 말할 필요도 없는) 그 사람의 늦어짐을 확인하고 기록한다. 이 늦어짐은 아직은 수학적인, 계산할 수 있는 실체에 불과하다(나는 시계를 여러 번 들여다본다). 이 서막은 하나의 충동적인 생각으로 막을 내린다. 즉 나는 '걱정하기로' 결심하고 기다림의 고뇌를 터뜨린다. 그러면 제Ⅰ막 시작된다. 그것은 일련의 가정으로 채워진다. 만날 시간이나 장소에 어떤 오해가 있었던 게 아닐까? 나는 우리가 약속했던 순간의 모든 구체적인 사항들을 기억해내려고 애쓴다. 어떻게 해야 할까(처신의 고민)? 다른 찻집으로 가볼까? 전화를 해볼까? 하지만 만약 내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그가 나타난다면? 내가 안 보이면 가버릴지도 몰라 등등. 제Ⅱ막은 분노의 막이다. 나는 부재하는 그 사람을 향해 격렬한 비난을 퍼붓는다. "그이/그녀는 ~할 수도 있었을 텐데" "그이/그녀가 지금 내 곁에 있을 수 있다면!" Ⅲ막에서의 나는 버려짐의 고뇌라는 아주 순수한 고뇌에 이른다(또는 획득한다?). 나는 아주 짧은 순간에 부재에서 죽음으로 기울어진다. 그 사람은 죽은 거나 다름없다. 장례의 폭발. 내 마음은 창백하다 livide. 이것이 바로 기다림의 연극이다. 이 연극은 그 사람의 도착으로 좀더 짧아질 수도 있다. 그가 만약 막에서 도착한다면, 나는 그를 조용히 받아들일 것이고, 막에서 도착한다면, "한바탕 언쟁이 벌어질 것이며," Ⅲ막에서 도착한다면 오히려 감사해할 것이다. 마치 펠리아스가 지하동굴에서 나와 삶을 되찾았던 것처럼, 나는 깊숙이 장미 내음을 들이마실 것이다.

 

(기다림의 고뇌가 계속 격렬한 것만은 아니다. 침울한 순간도 있다. 나는 기다리고 있고, 내 기다림을 둘러싼 것은 모두 비현실적인 것으로 휩싸인 듯하다. 이 찻집에서 나는 들어오고, 수다떨고, 농담하고, 혹은 조용히 앉아 책을 읽는 사람들을 바라본다. 그들, 그들은 기다리고 있지 않다.)

 

 

 

3. 기다림은 하나의 주문(呪文)이다. 나는 움직이지 말라는 명령을 받았다. 전화를 기다린다는 것은 이렇게 하찮은, 무한히 고백하기조차도 어려운 금지 사항들로 짜여 있다. 나는 방에서 나갈 수도, 화장실에 갈 수도, 전화를 걸수도(통화중이 되어서는 안 되므로) 없다. 그래서 누군가가 전화를 해오면 괴로워하고(똑같은 이유로 해서), 외출해야 할 시간이 다가오면 거의 미칠 지경이 된다. 그 자비로운 부름을, 어머니의 귀가를 놓칠까봐. 기다림 편에서 볼 때 이런 모든 여흥에의 초대는 시간의 낭비요, 고뇌의 불순물이다. 왜냐하면 순수한 상태에서의 기다림의 고뇌란,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전화가 손에 닿는 의자에 앉아 있기만을 바라기 때문이다.

 

 

 

4. 내가 기다리는 사람은 현실적인 사람이 아니다. 젓먹이 아이에게서의 어머니의 젓가슴처럼, "나는 내 필요와 능력에 따라 그를 끊임없이 만들어내고 또 만들어낸다." 그 사람은 내가 기다리는 거기에서, 내가 이미 그를 만들어낸 거기에서 온다. 그리하여 만약 그가 오지 않으면, 나는 그를 환각한다. 기다림은 정신착란이다.

 

 전화가 또 울린다. 나는 전화가 울릴 때마다, 전화를 거는 사람이 그 사람일 것이라고 생각하면서(그는 내게 전화를 해야 할 의무가 있다), 서둘러 수화기를 든다. 조금만 노력을 해도 나는 그 사람의 목소리를 "알아보는" 듯하고 그래서 대화를 시작하나 이내 나를 정신착란에서 깨어나게 한 그 훼발꾼에게 화를 내며 전화를 끊는다. 이렇듯 찻집을 들어서는 사람들도 그 윤곽이 조금이라도 비슷하기만 하면, 처음 순간에는 모두 그 사람으로 인지된다.

 

 그리하여 사랑의 관계가 진정된 오랜 후에도, 나는 내가 사랑했던 사람을 환각하는 습관을 못 버린다. 때로 전화가 늦어지면 여전히 괴로워하고, 또 누가 전화를 하든간에 그 훼방꾼에게서 나는 내가 예전에 사랑했던 사람의 목소리를 듣는 듯하다. 나는 절단된 다리에서 계속 아픔을 느끼는 불구자이다.

 

 

 

5. "나는 사랑하고 있는 걸까?ㅡ그래, 기다리고 있으니까." 그 사람, 그 사람은 결코 기다리지 않는다. 때로 나는 기다리지 않는 그 사람의 역할을 해보고 싶어 다른 일 때문에 바빠 늦게 도착하려고 애써본다. 그러나 이 내기에서 나는 항상 패자이다. 무슨 일을 하든 간에 나는 항상 시간이 있으며 정확하며 일찍 도착하기조차 한다. 사랑하는 사람의 숙명적인 정체는 기다리는 사람, 바로 그것이다.

 

(정신분석학적 전이 tranfert 에서 사람들은 항상 기다린다ㅡ의사·교수, 또는 분석자의 연구실에서. 게다가 만약 내가 은행창구나 비행기 탑승대에서 기다리고 있다 한다면, 나는 이내 은행원이나 스튜어디스와 호전적인 관계를 맺게 된다. 그들의 무관심이 나의 종속 상태를 노출시키며 자극하기 때문이다. 타인과 공유해야 하며, 또 내 욕망을 떨어뜨리거나 내 필요를 진력나게 하려는 것처럼 자신을 내맡기는 데 시간이 걸리는 한, 현존에 나는 종속되어 있는 것이다. 기다리게 하는 것, 그것은 모든 권력의 변함없는 특권이오, "인류의 오래된 소일거리이다."

 

 


6. 중국의 선비가 한 기녀를 사랑하게 되었다. 그 기녀는 선비에게 "선비님께서 만약 제 집 정원 창문 아래서 의자에 앉아 백일 밤을 기다리며 지새운다면, 그때 저는 선비님 사람이 되겠어요"라거 말했다. 그러나 아흔 아홉번째 된던 날 밤 선비는 자리에서 일어나 의자를 팔에 끼고 그곳을 떠났다.

(김희영 譯, 58~62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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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1/26 23:29 2006/01/26 2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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