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OG ARTICLE 이전 | 5 ARTICLE FOUND

  1. 2007/09/09 내가 뽑은 열다섯 곡 (2)
  2. 2006/10/02 오윤 20주기 전 (3)
  3. 2006/01/26 롤랑 바르트, 사랑의 단상 中에서
  4. 2006/01/06 David Alan Harvey와 Cartier-Bresson
  5. 2005/12/26 조세희 선생 (2)

인터넷에 떠도는 자료가 재밌어서 나도 한번.

생각나는 순서대로....

 

 

1. charlie haden & hank jones,  danny boy

 

맑스주의자이자 해방음악단(liberation music orchestra)의 리더, 프리재즈 뮤지션 찰리 헤이든도 좋지만,

울림이 풍부한 베이스로 소박한 연주를 하는 찰리 헤이든도 좋다.

건반 터치 하나에도 소울이 느껴지는 원로 피아니스트 행크 존스와 흑인 영가, 민요를 녹음한 앨범 중에서.

오래 불려진 노래가 가지는 작은 우물같이 마르지 않는 생명력. 

 

 

2. keith jarrett trio,  ballad of the sad young men

 

이 곡에서 게리 피콕의 솔로는 자코 파스토리우스가 a remark you made에서 들려준 연주와 함께 최고의 베이스 연주라고 생각한다.

 

 

3.  smashing pumpkins,  landslide

 

플리트우드맥의 원곡. 특히 가사를 좋아한다.

 시간과 나이듦에 대한 관조라고나...

 

 

4. bill evans & jim hall ,  my funny valentine

 

재즈를 듣는다는 말과 스콧 라파로가 있던 시절의 빌 에반스 트리오를 좋아한다는 말은 동어반복이라 생각하기에,

그밖에 각별히 생각하는 'undercurrent'  앨범 중에서 한 곡.

대화는 꼭 말로 해야하는 건 아니다.

 

 

5. pixies,  debaser

 

태초에 픽시즈가 있었다.

너바나와 펄잼이 대폭발하기 이전, 땅밑에 꿈틀대던 마그마 같은 곡. 

스트레스 해소용으로 자주 애용한다.

 

 

6. red house painters, all mixed up

 

아무리 발랄한 노래라도 우울하게 만드는 마력을 지닌 뮤지션, 마크 코즐렉이 이끌던 밴드.

원래 방정맞은 노래를 잘 하던 카스의 곡이지만,  세상 산 다 사람의  읊조림으로 재탄생했다.

찬 물 한 바가지를 껴얹은 듯한 느낌.

 

 

7. stan getz,  first song (for ruth)

 

찰리 헤이든이 아내 루스 헤이든을 위해 만든 노래.

스탄 게츠가 세상을 뜨기 직전에 가졌던 코펜하겐 공연 실황 앨범에 케니 베론과의 단촐한  2중주로 담겨 있다.

젊은 날의 산뜻한 보사노바풍 블로잉이 아니라 죽음을 앞 둔 대가의 처연함이 있다.

 

 

8. tuck and patti,  time after time

 

80년대 신디 로퍼의 명곡.

처절한 신디 로퍼, 상큼한 INOJ, 신나는 슈가레이, 관록의 마일즈 데이비스의 연주도 좋지만

기타 반주 하나에 단촐하게 노래한 이 곡이 최고.

 

 

9. the beatles,  eleanor rigby

 

점점 깊어져 가던 시절의 비틀즈.

 외로운 사람들, 정말 그들은 어디서 오는 걸까?

 

10. jimi hendrix,  little wing

 

작은 날개. 채 펴기도 전에 으스러지고 마는 작은 날개.

이 곡이 그렇다. 꿈틀꿈틀 하다 뭔가 시작하기 전에 끝난다. 

 

 

11. bob dylan,  you belong to me

 

아프리카로 여행을 떠난 연인에게 "당신이 없는 동안 그리울 거예요, 돌아올 때까지 당신이 내 사람이란 걸 언제나 잊지 말아요" 라고 고백하는, 그냥그냥 심심한 사랑 노래.

 

 

12. goo goo dolls,  name

 

어릴 때 관심있게 보던 빌보드 락 차트 중에서 마음에 남아있는 곡.

꿈이 깨어지고 난 뒤에 남은 것에 관하여...

 

 

13. elvis costello and burt bacharach,  I still have that other girl

 

나이 먹은 펑크 락커와 전성기 20년 지난 작곡가의 회춘작 중에서 한 곡.

중산층스러운 팝의 대가 버트 바카락의 곡들은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이 곡이 수록된 앨범만은 아주 좋아한다.

'팝'이라는 이름을 달고 나올 수 있는 음악의 최고 수준.

 

 

14. 천지인,  청계천 8가

 

대학 들어와서 처음 들었던 노래.

집에서 민중가요를 듣지는 않지만 이 곡만은 가끔 찾아듣는다.

 

 

15. miles davis,  springsville

 

봄이 오면 창문을 열고 오래 쌓인 먼지를 닦고

마일즈 데이비스의 springsville을 들어야지.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07/09/09 00:57 2007/09/09 00:57

오윤 20주기 전

이전 2006/10/02 04:31

 지원이와 함께 과천에 오윤 20주기 전을 보러 갔다 왔다. 무식한 탓이라 해야겠지만 내가 장욱진과 함께 한국 회화에서 유일하게 관심있어 하는 작가가 오윤이다. 그나마 몇 가지 책이 나온 장욱진과는 달리 오윤은 오래전에 절판된 화집 하나 말고는 작품을 접할 경로가 별로 없었다. 나 역시 관심만 있지 작품을 제대로 본 적은 없었다.

 

 나이 마흔이라는 것이 사람의 일생에서 절 반 정도에 불과한, 짧다면 짧은 시간일 것이다. 오윤은 이 나이 마흔에서 인생을 중도하차했다. 하지만 초기 레제나 피카소를 모방한 듯한 작품에서 시작해 특유의 선 굵고 간결한 판화 작품으로 나아간 작품들을 보면 인생이 아닌 예술에서 오윤이 어떤 과정 위에서 중도하차했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오윤은 조세희 선생이 '이 땅으로부터의 불행한 실종'이라 부른 것을 이겨낸, 차돌같이 단단한 역사인식을 뿌리 깊은 민중예술에서 캐온 독자적인 양식으로 표현한 작가다. 물론 장욱진도 민화에서 가져온 독특한 세계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장욱진의 그것은 민중의 한과 힘, 그리고 역사성이 거세된 소시민적인 세계다. 그에 비해 오윤은 모든 것을 포괄한 훨씬 넓고 깊은 작가이다. 오윤은 이걸 완성하고 떠났다. 그래서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가 아니라 예술가로서 오윤은 더도 덜도 할 것 없는 온전한 삶을 살았다고 해야 옳은 말인 것 같다. 사실은 지하철 안에서 본 스티커 한 장 때문에 이런 생각이 드는 걸지도 모르겠다. KTX 여승무원을 탄압하는 철도공사 이철 사장을 고발하는 스티커였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젊음이 가고 난 뒤의 인생이란 게 자신의 가장 가치있던 시절을 모욕하는 과정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그러니 장수만이 능사는 아니지 않은가 말이다.

 

 나와 지원이 둘 다 똑같이 감탄한 작품이 '지옥도'라는 작품이다. 당신이 용기만 낸 다면 컬러 TV를 가질 수 있다, 12세면 숙녀니 화장픔을 발라라, 당신을 가꾸려며 이 옷을 입어라...이런 식의 상품 마케팅을 패러디한 작품이다. 변혁보다는 자본주의의 환상에 안주하게 하는 미시적인 기제들에 대한 탐구, 왜 사람들은 억압을 욕망하는가 하는 문제의식이 학문영역에서 본격적으로 논의된 것은 90년대를 지나면서인 걸로 안다. 10년을 앞서 이런 주제를 그릴 수 있는 작가의 감수성, 시대를 감지하는 이 더듬이가 결국은 훌륭한 예술가를 징표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딴 애기지만 며칠전에 집 근처 미술관에 다녀온 적이 있다. 들리는 말로는 노조를 결성하려는 자에게 납치, 감금도 불사한다는 그 자본가,  某 대학 명예철학박사 학위 소지자인 그 자본가의 후원을 받아 미술관을 지었다고 한다. 그 자본가가 개인 소장품을 전시한다는 某-UM이라는 미술관과 형제 정도 된다고. 미술관을 들어서는 감정이 좋지 않으니 모든 게 마음에 들리 없지만 특히 코웃음을 치게 만드는 문구가 있었다. 우리 미술의 후진성을 극복하기 위해 외국의 사조를 적극 수용해야 한다는 말,  미안하게도 나한테는 '이 땅에서의 불행한 실종'을 증명하는 이 말이 더 후진적으로 들린다. 과연 그 사람들을 역사의 방관자라고만 할 수 있을지, 사람들의 정신에 대해서만큼은 가해자의 역할을 해왔다고 해야하지 않을지, 더 생각해볼 일이다. 척박한 토양에서 강운구나 오윤 같은 작가가 나왔다는 것에 감사할 밖에.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06/10/02 04:31 2006/10/02 04:31

 예전 한창 연애에 관심 많던 시절에, 책 제목만 보고 뭔가 있지 않을까 싶어서 본 책.

사랑하는 사람이 느끼는 여러 감정에 대한 단상들을 ABC 순으로 배열해놓은 책인데, 이 구성에서 드러나듯이 뭐라 규정하기 힘든 참 특이한 책이다.(소설가 이인성에 의하면 이 책도 소설로 봐야한단다.) 바르트라면 이 책 말고는 문화이론 개론서에 나오는 몇 페이지 밖에 본적이 없어 잘 안다고 할 수는 없지만 정말 대단한 문장가인 것 같다. 특히 이 '기다림'이란 글이 아주 콤팩트해서 좋아 했었다.지금 생각해보면 좀 우끼지만 얼마나 좋았으면 이 긴 글을 일일이 키보드로 쳐 뒀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기다림이라...뭔가 기약없이 기다리던 갑갑함을 모를 사람이 있을까? 다시 읽어봐도 그 갑갑함이 느껴지려는 구절들이 있다. 글 끝에 있던 선비와 기녀 이야기는 영화 시네마 천국에 나오는 공주와 병사 이야기와 구조가 똑같던데, 아마 서양에서는 좀 유명한 이야기가 아닐까 싶다. 좀 많이 낯간지럽긴 하지만 선비가 떠난 이유에 대해 예전, 아마 한 4년전쯤 써놓았던 글이 있어, 쪽팔림을 무릎쓰고 옮겨본다.

 

"바르트는 기다리는 사람은 항상 (기다림의 대상을)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기다리게 하는 사람은 (기다림의 주체를) 사랑하지 않는다. 만일 공주가 그 병사를 정말 사랑했다면 병사를 100일 동안이나 기다리게 하지는 았을 것이다. 병사는 매일 밤을 공주의 창 아래서 기다리는 동안 공주가 기다리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글쎄...지금 생각으로는 병사(선비)가 100일을 기다리는 것보다 99일 째에 떠나주는 것이 더 큰 사랑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는데, 사실 잘 모르겠다.

----------------------------------------------------------------------------------------

 

             

                                         기다림

 

 

 

기다림 attente. 사랑하는 이를 기다리는 동안 별 대수롭지 않은 늦어짐(약속 시간·전화·편지·귀가 등)으로 인해 야기되는 고뇌의 소용돌이.

 

 

 

1. 나는 어떤 도착을, 귀가를 약속된 신호를 기다린다. 그것은 하찮은 것일수도 있지만 아주 비장한 것일 수도 있다. 쇤베르크의 「기다림 Erwartung」에서는 밤마다 한 여인이 숲속에서 그의 연인을 기다린다. 그러나 나는 다만 한 통의 전화만을 기다릴 뿐이다. 하지만 그것은 동일한 고뇌이다. 나는  크기에 대한 감각이 없다.

 

 

 

2. 여기 기다림의 한 무대 장식술이 있다. 나는 그것을 조직하고 조작한다. 시간을 쪼개어 사랑하는 이와의 이별을 흉내내며, 조그만 장례의 모든 효과를 유발하려한다. 그것은 연극 각본처럼 무대에 올려질 수 있다.

 

 무대는 어느 찻집 안. 우리는 만날 약속을 했고 그래서 난 기다린다. 서막에서 그 유일한 배우인 나는(그 이유는 말할 필요도 없는) 그 사람의 늦어짐을 확인하고 기록한다. 이 늦어짐은 아직은 수학적인, 계산할 수 있는 실체에 불과하다(나는 시계를 여러 번 들여다본다). 이 서막은 하나의 충동적인 생각으로 막을 내린다. 즉 나는 '걱정하기로' 결심하고 기다림의 고뇌를 터뜨린다. 그러면 제Ⅰ막 시작된다. 그것은 일련의 가정으로 채워진다. 만날 시간이나 장소에 어떤 오해가 있었던 게 아닐까? 나는 우리가 약속했던 순간의 모든 구체적인 사항들을 기억해내려고 애쓴다. 어떻게 해야 할까(처신의 고민)? 다른 찻집으로 가볼까? 전화를 해볼까? 하지만 만약 내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그가 나타난다면? 내가 안 보이면 가버릴지도 몰라 등등. 제Ⅱ막은 분노의 막이다. 나는 부재하는 그 사람을 향해 격렬한 비난을 퍼붓는다. "그이/그녀는 ~할 수도 있었을 텐데" "그이/그녀가 지금 내 곁에 있을 수 있다면!" Ⅲ막에서의 나는 버려짐의 고뇌라는 아주 순수한 고뇌에 이른다(또는 획득한다?). 나는 아주 짧은 순간에 부재에서 죽음으로 기울어진다. 그 사람은 죽은 거나 다름없다. 장례의 폭발. 내 마음은 창백하다 livide. 이것이 바로 기다림의 연극이다. 이 연극은 그 사람의 도착으로 좀더 짧아질 수도 있다. 그가 만약 막에서 도착한다면, 나는 그를 조용히 받아들일 것이고, 막에서 도착한다면, "한바탕 언쟁이 벌어질 것이며," Ⅲ막에서 도착한다면 오히려 감사해할 것이다. 마치 펠리아스가 지하동굴에서 나와 삶을 되찾았던 것처럼, 나는 깊숙이 장미 내음을 들이마실 것이다.

 

(기다림의 고뇌가 계속 격렬한 것만은 아니다. 침울한 순간도 있다. 나는 기다리고 있고, 내 기다림을 둘러싼 것은 모두 비현실적인 것으로 휩싸인 듯하다. 이 찻집에서 나는 들어오고, 수다떨고, 농담하고, 혹은 조용히 앉아 책을 읽는 사람들을 바라본다. 그들, 그들은 기다리고 있지 않다.)

 

 

 

3. 기다림은 하나의 주문(呪文)이다. 나는 움직이지 말라는 명령을 받았다. 전화를 기다린다는 것은 이렇게 하찮은, 무한히 고백하기조차도 어려운 금지 사항들로 짜여 있다. 나는 방에서 나갈 수도, 화장실에 갈 수도, 전화를 걸수도(통화중이 되어서는 안 되므로) 없다. 그래서 누군가가 전화를 해오면 괴로워하고(똑같은 이유로 해서), 외출해야 할 시간이 다가오면 거의 미칠 지경이 된다. 그 자비로운 부름을, 어머니의 귀가를 놓칠까봐. 기다림 편에서 볼 때 이런 모든 여흥에의 초대는 시간의 낭비요, 고뇌의 불순물이다. 왜냐하면 순수한 상태에서의 기다림의 고뇌란,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전화가 손에 닿는 의자에 앉아 있기만을 바라기 때문이다.

 

 

 

4. 내가 기다리는 사람은 현실적인 사람이 아니다. 젓먹이 아이에게서의 어머니의 젓가슴처럼, "나는 내 필요와 능력에 따라 그를 끊임없이 만들어내고 또 만들어낸다." 그 사람은 내가 기다리는 거기에서, 내가 이미 그를 만들어낸 거기에서 온다. 그리하여 만약 그가 오지 않으면, 나는 그를 환각한다. 기다림은 정신착란이다.

 

 전화가 또 울린다. 나는 전화가 울릴 때마다, 전화를 거는 사람이 그 사람일 것이라고 생각하면서(그는 내게 전화를 해야 할 의무가 있다), 서둘러 수화기를 든다. 조금만 노력을 해도 나는 그 사람의 목소리를 "알아보는" 듯하고 그래서 대화를 시작하나 이내 나를 정신착란에서 깨어나게 한 그 훼발꾼에게 화를 내며 전화를 끊는다. 이렇듯 찻집을 들어서는 사람들도 그 윤곽이 조금이라도 비슷하기만 하면, 처음 순간에는 모두 그 사람으로 인지된다.

 

 그리하여 사랑의 관계가 진정된 오랜 후에도, 나는 내가 사랑했던 사람을 환각하는 습관을 못 버린다. 때로 전화가 늦어지면 여전히 괴로워하고, 또 누가 전화를 하든간에 그 훼방꾼에게서 나는 내가 예전에 사랑했던 사람의 목소리를 듣는 듯하다. 나는 절단된 다리에서 계속 아픔을 느끼는 불구자이다.

 

 

 

5. "나는 사랑하고 있는 걸까?ㅡ그래, 기다리고 있으니까." 그 사람, 그 사람은 결코 기다리지 않는다. 때로 나는 기다리지 않는 그 사람의 역할을 해보고 싶어 다른 일 때문에 바빠 늦게 도착하려고 애써본다. 그러나 이 내기에서 나는 항상 패자이다. 무슨 일을 하든 간에 나는 항상 시간이 있으며 정확하며 일찍 도착하기조차 한다. 사랑하는 사람의 숙명적인 정체는 기다리는 사람, 바로 그것이다.

 

(정신분석학적 전이 tranfert 에서 사람들은 항상 기다린다ㅡ의사·교수, 또는 분석자의 연구실에서. 게다가 만약 내가 은행창구나 비행기 탑승대에서 기다리고 있다 한다면, 나는 이내 은행원이나 스튜어디스와 호전적인 관계를 맺게 된다. 그들의 무관심이 나의 종속 상태를 노출시키며 자극하기 때문이다. 타인과 공유해야 하며, 또 내 욕망을 떨어뜨리거나 내 필요를 진력나게 하려는 것처럼 자신을 내맡기는 데 시간이 걸리는 한, 현존에 나는 종속되어 있는 것이다. 기다리게 하는 것, 그것은 모든 권력의 변함없는 특권이오, "인류의 오래된 소일거리이다."

 

 


6. 중국의 선비가 한 기녀를 사랑하게 되었다. 그 기녀는 선비에게 "선비님께서 만약 제 집 정원 창문 아래서 의자에 앉아 백일 밤을 기다리며 지새운다면, 그때 저는 선비님 사람이 되겠어요"라거 말했다. 그러나 아흔 아홉번째 된던 날 밤 선비는 자리에서 일어나 의자를 팔에 끼고 그곳을 떠났다.

(김희영 譯, 58~62p)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06/01/26 23:29 2006/01/26 23:29

 

 

 데이비드 '앨런' 하비. 내가 눈여겨 보고 있는 사진가인데, 저명한 정치경제지리학자(데이비드 하비)와 이름이 거의 같다. 내셔널 지오그래픽 사진가이면서 그 유명한(!) 매그넘 소속으로 주로 쿠바나 남미 같이 히스패닉 문화권에서 작업을 많이 했다. 예전부터 사진집을 사보고 싶었는데 미안하게도 인터넷으로 다 봐버렸다.

 

cuba

http://www.digitaljournalist.org/issue9910/cubaintro.htm

 

divided soul

http://www.digitaljournalist.org/issue0310/divided_soul.html

 

 항상 좋은 사진가의 작품을 보면 느끼는건데 역시 사진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 관한 예술이 아닌가 싶다. 하비는 빈민가의 흑인을 찍기 위해 100일 동안 오두막에서 흑인들과 같이 생활했다고 한다. 좋은 사진은 무관심도 아니고 고발도 아니며 깊은 이해와 같은 어떤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사진에서 가장 기본이고 중요한 것은 구도감각도 아니고 색감이나 계조도 아니라, 피사체와 어떤 관계를 맺을 것인가 하는 문제일 것이다.  하비의 인터뷰를 보면 재미있는 이야기가 나온다.

 

"Though I was most influenced by Frank and Cartier-Bresson, as a photographer I'm different from them, and not just because I shoot color instead of black and white. Neither of those guys went inside people's homes or inside their lives. They were both stand-back, fly-on-the-wall photographers. I'm a participant; I get inside. I'm usually sitting at the same table with the people I'm photographing, so they sort of forget that I'm there to take pictures. It's a different way of getting a natural photograph."

 

  위 대목은 하비가 로버트 프랑크와 브레송으로부터 받은 영향과 그들과의 차이점에 대해서 설명하는 대목인데, 한마디로 프랑크와 브레송이 절대 사람들 속에 녹아들지 않는다면 하비는 참여하지 않고서는 못베긴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비의 사진에는 다른 미국이나 유럽 출신 사진가들과는 달리 제3세계 사람들을 바라보는 시건에서 어떤 위화감도 느껴지지 않는다. 피사체와 단순히 '찍고 찍히는' 관계를 넘어선 동등하고 친밀한 관계가 느껴진다는 것이 하비의 진정한 강점이 아닐까 싶다.

 

 반면 브레송의 사진에서는 사진가와 피사체와의 관계가 생략되어 있다. 이게 브레송의 그 유명한 '찍고 빠지기', 깡디드 수법이겠지만 사실 브레송의 사진에는 좀 모순적인 데가 있다. 그가 국민당 몰락 당시의 중국 군중을 찍거나 간디의 장례식에 모인 인도 사람들을 찍을 때, 혹은 루마니아의 농민을 찍을 때 그는 피사체와 교감하려 들지 않는다. 단지 기록의 대상으로 다루거나 아니면 사람들을 구도에 리듬을 불어놓해 위한 회화적 도구로 다룰 뿐이다. 반면에 샤르트르에서부터 자코메티, 뽈 발레리, 알베르 까뮈, 코코 샤넬 같이 유명한 사람들의 사진을 찍을 때에만 그와 피사체는 편안해하고 서로 교감한다. 그의 작품을 훑어 보면 사진이 일반인을 찍은 사진과 유명인을 찍은 인물사진으로 완전히 이분화 되어 있는 것 같다.

 

 브레송을 이야기할 때 항상 나치에 저항한 좌파 지식인이라는 수식어가 붙지만, 내 생각에 '인간 브레송'이 진보적일 지는 몰라도 '예술가 브레송'이 진보적이라는 생각은 별로 들지 않는다. 오히려 브레송의 사진은 귀족적이라고 하는 게 더 적당한 표현일 것이다. 미국과 서유럽 이외의 지역에서 찍은 그의 사진을 볼때면 처음으로 비유럽 땅을 밟은 유럽 선교사들의 시선, '착한' 제국주의자의 시선이 느껴져 좀 불편할 때가 있다.

 

 마치 지미 헨드릭스와 에릭 클랩튼이 항상 팬더 기타만 쓰듯이 하비와 브레송 모두 라이카로 작업하는 사진가들인데 주로 사용하는 화각이 다르다. 브레송은 익히 알려져 있듯이 50mm 표준렌즈로 대부분의 작업을 했다면 하비는 35mm나 28mm 같이 좀 더 광각의 렌즈로 작업을 한다. 아마 위에서 말한 특성과 그대로 연결되는 것이 아닌가한다.

 

맨 위의 사진은 하비가 쿠바에서 찍은 건데 좀 재밌는 구석이 있어 가지고 와봤다. 내가 사진으로 본 봐에 의하면 체 게바라는 덩치고 좀 있고 뱃살도 나온 사람이지 저렿게 광대뼈가 튀어나온 얼굴에 강렬한 눈빛을 가진 사람이 아니었다. 누군가의 평에 의하면 예전 임꺽정이라는 드라마에 임꺽정 역으로 나왔던 사람과 닮았다고. 쿠바의 아이들이 그린 체 게바라의 모습이 요즈음 자본주의 사회에서 소비되는 '쿠바의 제임스 딘' 같은 이미지와 더 닮았다는 게 좀 아이라니하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06/01/06 01:07 2006/01/06 01:07

조세희 선생

이전 2005/12/26 03:00

 

난쏘공 200쇄 기념본이 나왔다길래 두권 주문해서 한 권은 여친께 드리고, 또 한 권은 내가 틈틈이 보고 있다. 원래 집에 몇 권이나 있었던 것 같은데 내가 가지고 있던 문지판은 친구가 빌려갔고 다른 책들은 다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다. 난쏘공 다시 보고 싶은 생각도 들고 해서 겸사겸사 구해뒀는데 한정판 답지 않게 소박한 것이 난쏘공다웠다.

 

 벌써 몇주 지난 것 같지만 난쏘공 200쇄 기념으로 신문마다 조세희 선생 인터뷰가 실렸었다. 그때 놀란 게 60이 넘는 선생께서 아직도 집회에 다니며 사진을 찍는다는 것이었다. 최근에는 전경들의 방패에 전용철 씨가 숨진 농민집회 현장을 지키셨다고. 거기서 운이 좋아 살아 남았을 뿐이라 말씀하신다. 부끄러움을 느낀다. 그리고 다른 무슨 말보다도 조세희 선생은 역시 훌륭한 예술가라는 걸 다시 한번 느꼈다.

 

 요새 '한 때 좋은 예술가'는 많아도 '평생 좋은 예술가' 참 드물다는 생각을 많이 한다. 최근엔 어느 유명한 시인 겸 대학교수의 최신작을 읽다 덮어버린 적이 있다. 체험의 절실함도 없고 독서 감상문 같은 시집을 말이다. 과연 안락하게 사는 사람이 좋은 예술가가 될 수 있을까?

 

 "혁명이 필요할 때 우리는 혁명을 겪지 못했다. 그래서 우리는 자라지 못하고 있다. 제삼세계의 많은 나라들이 경험한 그대로, 우리 땅에서고 혁명은 구체제의 작은 후퇴, 그리고 조그마한 개선들에 의해 저지되었다. 우리는 그것의 목격자이다."

 

나이드신 분들이 이런 말씀 하실 때마다 힘이 난다. 부디 건필하셔서 빨리 '하얀 저고리'도 탈고 하시길.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05/12/26 03:00 2005/12/26 03: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