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아직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알랭 레네, 2012
감히, 영화라는 매체에 대한 영화라는 생각이 듦.
영화이기 때문에 누릴 수 있는 미학을 '연극'이라는 소재로 보여주는, 웬만해도 내가 폭 빠져들고야 마는 그런 장치인데 이 영화는 웬만한 정도가 아니다. 영화가 시작될 때부터 마지막까지 입을 떡 벌리고 숨 죽여가며 봤다. 시간과 공간과 인물의 넘나듦이 영화에서 무엇을 위한 장치가 아니라 그 자체가 주인공이 되어 보는 사람을 압도하는 영화.

 

<경주> 장률, 2014
죽음과 삶, 우연과 반복, 기억과 망각. 아주 새로울 것 없지만 그렇다고 아주 뻔하지도 않았던.
다른 건 몰라도 공간과 장소에 대한 묘사와 주인공들이 보여주는 몸짓, 그 리듬감은 꽤 좋았다. 특히 찻집(오후와 해질녘)과 찻집 주인의 집(새벽과 아침)이라는 공간에 담겨진(공간을 빚어내는 듯한) 빛은 참 매력적이었다. 그런데 왠지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지는 않은 그런 영화. 공간과 장소에 대해서는 냄새까지 연상될 정도로 확 빠져드는데 인물에게 공감이 잘 안 되서 그런가?

 

<가장 따뜻한 색, 블루> 압둘라티프 케시시, 2013
빛나고 찬란한 첫 사랑 이야기. 태양을 핥고 삼키는 듯한 공원에서의 키스 장면, 정말 아름다웠다.
사랑이 시작될 때, 사랑에 빠졌을 때 서로를 탐색하는 조심스럽지만 집요한 그 시선도 참 좋았다.
얼굴의 표정과 주름, 당황스러워 하는 눈빛과 찡그리는 표정, 입술의 일그러짐까지 한없이 매혹적인 그런 순간.
어지러울 정도로 탐미적이면서도 동시에 인물들이 발 딛고 살아가는 현실에 대한 묘사도 균형있게 잘 담아져 있어서 더욱 근사했던 영화.

 

<마세티 킬즈> 로버트 로드리게즈, 2013

끼야악. 전작 <마세티>도 대단했는데 이건 더 하다. 이런 엄청난 어이없음이라니. 얼토당토 안한 말도 안 되는 엉망징창 장난에 기꺼이 동참해서 킥킥거렸다. 즐겁다, 이런 영화.

 

<밀양> 이창동, 2007

영화의 원작인 이청준의 <벌레 이야기>를 고등학교 때쯤 읽은 듯하다. 꽤 오래 전에 읽은 소설인데도, 평균 이하의 기억력을 가진 내게 오랫동안 그리고 가끔씩 생각나곤 했던 소설이라 영화에 선뜻 손이 가지 않았더랬다. 가끔 그런 경우가 있다. 원작이 너무 좋아서, 혹은 좋았던 그 때의 기억을 그대로 남기고 싶어서 다시, 다르게 보고 싶지 않은 것들. 그랬다가 우연히 TV 채널을 돌리다가 <밀양>을 보게 됐고, 봤다. 역시나 좋은 영화이지만 그렇게 좋지 않았다. 물론 원작과 영화는 달랐다. 다르게 해석되었고 각색되었다. 여주인공의 상황과 심리, 행동이 더 복잡, 정교하고 풍성해졌다. 하지만 <벌레 이야기>를 읽으면서 '아내'에게 몰입되었던 감정선이 영화에서는 잘 안 됐다. 신애가 아니라 자꾸 전도연이 보이는 거라. 원작에 대한 기억 때문인지, 극에 몰입을 방해하는 배우 자체의 존재감 때문인지 헷갈리긴 하지만 쨌든 뚱하게 구경만 하고 말았다. 영화 자체의 완성도와는 다르게 이렇게 되고 마는, 가끔 이런 영화가 있다.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2013

몇 주 전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진짜로 일어날지도 몰라 기적>을 봤다. 큰 기대 없이 잔잔하게 보려고 선택했고 그렇게 보고 있었는데 아이들이 소원을 비는 장면에서 울컥해 버렸다. 아, 왜? 왜 그 장면에서 이런 감정이? 심지어 그 여운이 생각보다 오래 남아서 이 사람의 영화를 좀 더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선택한 영화.

6년이나 키운 아이가 내 아이가 아니었다. 병원의 실수(아니 자신을 거부하는 전처의 아이를 키워내야 하는 재혼 생활이 힘겨웠던 간호사의 우발적인 복수)로 아이가 바뀐 것이다. 대도시 중산층, 소도시의 서민 이렇게 섞일리 없을 두 가족은 이 사건으로 인해 만나게 되고, 아이를 교환하기 위해 1년 남짓한 시간 동안 서로를 탐색하고, 만나가고, 어울린다. 아이들의 충격을 최소화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선택한 관계이기 때문에 두 가족은 서로의 차이가 영 탐탐치 않다. 한 쪽은 오만하기 그지없고, 다른 한 쪽은 지나치게 궁상맞다. 이렇게 설명하면 인물들이 상당히 전형적이고 뻔할 것 같지만 감독이 누구인가. 소탈하고 유쾌하지만 궁상스러운 아버지, 강단 있고 화통하지만 직설적인 어머니. 자신만만하고 권위적인 하지만 미처 어른이 되지 못한 아버지, 수동적이고 유약하지만 정이 깊은 어머니. 일상적인 사건들 속에서 배어나오는 인물에 대한 묘사가 무척 자연스럽다(이런 거 너무 좋아!). 가족, 핏줄이라는 기준에서 이탈해버린 내 아이이지만 내 아이가 아닌 존재를 바라보고 떠나보낼 불안에 아이들이 이 상황을 받아들일 준비가 안 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주인공은 서로의 아이를 교환할 것을 결정하고, 아이들을 예전의 가족에게서 분리시킨다. 그렇게 교환되어 버린 아이들은 조용히 애처롭게 저항한다. 결국 흐트러진 일상과 관계를 감당할 수 없게 된 주인공은 자신이 변화해야 함을 인정하고 받아들인다. 무시하고 하찮히 여기던 내 아이의 가족들에게 머리를 숙이고 예의를 표한다. 자신의 불행했던 유년시절, 안간힘을 써서 밀어내기만 했던 아버지와 새어머니에게 말을 건넨다. 아이에게 용서를 구한다. 그렇게 그는 아버지가 된다.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영화는 타인과의 관계를 통해 변화, 성장하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는 듯하다. 그리고 그의 영화에서 선택하는 타인은 가장 가까운 타자, 바로 가족이다. 그의 이야기는 가족의 균열 혹은 틈에서 출발하며, 큰 사건을 작은 일상들로 쪼개 들어가고, 그 과정에서 갈등과 화해, 인정과 존중이라는 사람에 대한 태도와 관계가 어떻게 변화 가능한지 풀어간다. 무엇보다 그의 영화의 미덕은 지극히 평범하고 현실적인 우리 주변의 가족 구성원들에 대해 이야기하되 동시에 '다른' 가족의 형태, 관계성에 대해 이야기를 건넨다는 점이다. 그것도 아주 자연스럽게.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전작들을 야곰야곰 챙겨봐야겠다. 동시대의 좋은 작가를 만나게 된 즐거움이 쏠쏠하다.
 

<이미테이션 게임> 모튼 틸덤, 2014

앨런 튜링, 뛰어난 재능만큼이나 비범한, 비참하기 그지없었던 삶과 죽음이 무척 인상적이었던 인물. 그래서 영화에 기대가 컸다. 게다가 앨런 튜링 역이 베네딕트 컴버배치라니 어찌 기대하지 않을소냐. 결과는 영화적으로 큰 흠이 있는 건 아니었지만 아쉬움이 컸다는 것. 앨런 튜링이 암호해독 기계(디지털 컴퓨터)를 만들어가는 과정은 괴팍하지만 천재적인 탐정이 탁월한 관찰력과 통찰력으로 단서들을 모아 범인을 찾아내는 듯 흥미로웠다. 다만 영화의 대부분이 그 부분에 할애되면서 게이라는 그의 삶의 가장 큰 질곡, 비극적인 삶과 죽음의 정수를 충분히 다루지 못했다는 점은 너무 아쉽다. 3부작으로 완결된 시리즈의 1편만 보고 만듯한 기분이랄까. 아, 앨런 튜링에 대한 영화는 다른 누군가가 다르게 좀 만들어주었으면-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 벤 스틸러, 2013

벤 스틸러는 나이 들수록 멋있어지네. 그의 전작들에 비해 벤 스틸러 특유의 소란스러움과 재기발랄함은 줄었지만 조용하지만 꼼꼼한 풍자와 화려한 이미지 아래 은근히 깔려 있는 사람에 대한 소박한 애정은 보는 사람을 기분 좋게 만들어준다. 벤 스틸러 영화는 보고 나서 다시 보게 만들 정도는 아니지만 신작이 나온다면 꼭 챙겨보고 싶게 하는 매력은 분명하다. 

 

<갤럭시 퀘스트> 딘 패리소, 1999

당신이 SF 열성 팬이라면 상당히 유쾌하고 달달하게 즐길 수 있을 영화. 나는? 귀엽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그렇다고 특별하게 흥미롭거나 인상적이지는 않았다. 귀여우시네 허허허, 정도. 조금만 더 80년대 텔레비전 SF 시리즈물의 우스꽝스러움과 촌스러움을 밀고 갔다면, 그렇게 낄낄거릴 수 있는 요소가 있었으면 좋았겠지만 그렇다면 이 영화는 배신이지. 암, 이 영화는 오로지 SF 팬들을 위한 영화니까(라고 생각이 듦).


<내일을 위한 시간> 다르덴 형제, 2014

너무 좋다. 심지어 영화를 보는 내내 '이런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이들의 영화 중 처음 본 건 <자전거 탄 소년>. 숨 죽여 영화를 보다가 자전거를 타고 달리는 소년의 뒷 모습을 담은 마지막 장면에 가슴이 턱 내려앉았던 기억이 난다. <내일을 위한 시간>은 내가 본 다르덴 형제의 이제 겨우 두 번째 영화이지만 역시 기대 이상이다. 요란스러울 것 없는 소재를 가지고, 지극히도 현실적인 묘사를 통해 감독은 과하게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질문을 남기는 이야기를 완성해낸다.

병가를 마치고 돌아온 공장, 사장은 경영상의 어려움을 이유로 조건부 복직을 통보한다. 그 조건은 직원들의 보너스 대신 그녀의 복직, 선택은 직원에게 맡긴다라는 것. 영화는 이미 직원 투표를 통해 대다수의 동료들이 보너스를 선택한 상황에서 시작된다. 하지만 투표 과정에서 그녀가 복직되면 다른 사람이 해고될 수 있다는 반장의 압력이 있었고 이에 대한 부당함을 호소하며 사장을 설득해 재투표를 간신히 끌어내지만, 주어진 시간은 주말 이틀 뿐이다.
해고가 되면 대출금을 갚을 수 없어 집을 잃게 되는 상황의 주인공. 일자리를 지키기 위해서는 보너스 대신 자신의 복직을 선택하라고 동료들을 설득해야 한다. 우울증을 앓고 있는 주인공은 이 상황을 견디기 힘들다. 사장의 결정이 부당하다고 생각하지만 스스로가 쓸모없는 존재일수도 있다고 의심하고, 동료들의 결정에 억울해하면서도 그들에게 동정을 호소하는 듯한 자신이 비참하다. 남에게 보이고 싶지 않은 눈물은 겉잡을 수 없고, 꼭 필요한 상황에서는 말문이 막힌다. 그런 그녀가 안정제와 어두운 방 안에 숨어 버리는 순간마다 집 밖으로 나오게 하는 건 처음부터 그녀를 지지했던 동료 한 명과 남편이다.
단 두 명의 동료만이 그녀를 지지하고, 남은 14명의 동료들을 한 명씩 찾아가 설득해야 하는 상황들에서 그녀는 스스로를 의심하고, 동료들의 거절에 상처받고, 절반의 동료들의 원망을 감수해야 하는 복직을 두려워하며, 도망가지 못하게 하는 남편에게 분노한다. 그런 식으로 자신의 존재를, 쓸모를 증명 받아야 하는 부당한 상황 속에서 그녀로 인해(재투표의 기회를 주어서) 또는 자신의 필요와 이유로 인해 또는 마땅히 그래야 한다는 도리와 인정에 의해 그녀를 지지해 주는 사람들이 있다. 물론, 그녀 대신 보너스를 선택한 동료들에게도 자신의 선택에 대한 각각의 필요와 이유, 상황과 사연이 있다(심지어 반장조차도).
문제는 그들에게 주어진 두 가지의 선택지 자체이다. 이 틀 안에서는 어떤 선택도 자신의 선택(자기 자신을 배신하지 않는)일 수가 없다. 그 누구에게도. 이것을 명쾌하게 보여주는 건, 8;8이라는 투표 결과로 복직이 좌절된 그녀에게 사장이 제안하는 그것. 그녀의 복직을 지지하는 직원들이 절반이니 공장의 분위기(팀웤)을 위해 계약직인 동료의 계약이 만료되는 2개월 뒤 재계약을 하지 않고 그녀를 복직하겠다는 약속이다. 그 계약직 동료는 그 작은 공장 안에서도 가장 약자인 유색인종의 이민자(로 추정되는)이다. 관리자의 눈치를 가장 많이 볼 수 밖에 없는 가장 큰 불안을 가진 그는 자신의 처지를 너무 잘 알지만 그래도 그녀를 지지했던 사람이다. 이웃을 해하지 않는 것이 신의 뜻이라는 이유로. 사장의 마지막 제안에 그녀는 누군가를 해고하는 조건으로 내가 복직할 수는 없다고 조용하지만 단호하게 이야기하고 공장을 나선다. 사장이 제시하는 부당한 조건과 선택 자체를 거부한 것이다. 그리고 남편에게 전화한다. '우리 잘 싸웠지? 나는 지금 행복하다'고. 그런 그녀의 뒷모습을 응시하며 영화는 끝난다.

그녀의 이틀 간의 여정에서 이 영화는 평범한 노동자들을 둘러싼 가족, 세대, 성별, 종교의 문제 등 계급을 포함한 아니 계급의 문제 안팎의 현실을 담담하게 얽어낸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부당한 삶의 조건, 더 부당한 선택을 요구 받는 사람들이 서로에게 그리고 스스로에게 어떻게 힘을 주고, 힘을 나눌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그렇게 이 영화는 화려한 서사, 극적인 요소 없이도 부조리한 사회, 다양한 삶의 무게와 조건, 거기에서 이어지는 사람들 간의 힘의 자장을 담백하고 묵직하게 전달한다. 그 힘이 대단하다.

<내일을 위한 시간>의 마지막 장면, <자전거 탄 소년>도 그랬고 <내일을 위한 시간> 역시 시련을 겪고 난 후의 사람의 뒷모습을 응시하는 그 시선이 참 좋다. 그를 둘러싼 현실은 달라지지 않았지만, 그래도 뚜벅 뚜벅 홀로 나아가는 전과는 다른 존재로서의 그. 그래서 더 응원하고 싶은 그 자리. 사람의 뒷모습을 담아내는 그 느리고 깊고 넓은 시선이 참 고맙다.

 

<더 그레이> 조 카나한, 2012

그저그런 재난영화려니 생각하고 볼 생각도 안 했던, 그러다 우연히 케이블 채널을 돌리다 보게 되었는데, 엄청니다.

 

알래스카 숲에 추락한 비행기, 생존자들은 혹한과 늑대 떼에 쫓기며 살아남기 위해... 까지는 여느 재난영화와 크게 다르지 않다. 영화 중반부까지도 사고 전 주인공 오트웨이의 행동(아내의 죽음에 절망한 그는 자살을 시도하기도 한다)도 있고 하니 '아, 주인공이 극한의 상황에서 삶의 의미를 깨닫고 지혜를 발휘해 살아남겠구나' 정도로 생각했다. 생존자 7명을 보면서도 '음, 누군가는 주인공을 방해하는 삐뚤어진 사람일테고, 누군가는 주인공의 충실한 조력자일테고, 존재감 없이 있다가 의외의 기지를 발휘하는 누군가도 있겠지. 그렇게 주어진 장애와 사건들을 헤쳐가며 각자의 캐릭터를 잡아가고 죽어가면서 주인공의 기지와 의지를 더 돋보이게 하겠지' 정도였다. 그, 그런데 이 영화는 아니다. 재난영화의 외피를 두르고 있지만, 이 영화는 어떻게 살아남을 것이냐가 아니라 죽은 사람, 죽어가는 사람, 죽음을 앞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당연히, 주인공 오트웨이도 죽는다. 아무도 죽음을 비껴가지 못한다. 영화가 중반부를 넘어가면서 누가 살아남을까, 어떻게 살아남을까는 중요하지 않게 된다(생존자 셋이 남아 강을 따라 걸어가는 장면을 보면서 아, 모두 죽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감이 좋아서가 아니라 대사도 사건도 없는 장면 자체가 주는 그런 힘이 있었다). 남은 세 사람은, 아니 오트웨이는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죽음 앞에서 어떤 태도를 보일 것인가가 영화의 후반부를 끌고 가는 힘이다.

 

특히, 생존자 셋이 남았을 때 존이라는 인물이 죽음을 선택하고 받아들이는 장면은 이 영화의 백미 중하나다. 그는 생존자 중 가장 문제적 인물로 이기적이고 공격적이며 그러면서도 가장 두려움이 많았던 사람이다(아니 그 두려움 때문에 공격적이었던 사람이다). 그런 그가 더 이상 힘을 낼 기력이 없으니 자신을 두고 가라고 한다. 혼자 되는 순간 늑대 밥이 되거나 얼어죽을 게 뻔한 상황. 남은 사람들은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남았는데 여기서 포기하냐고 같이 가자고 그를 설득하지만 그는 그렇게해서 살면 뭐가 있냐고, 하루 종일 기계 돌리고 밤에 술 푸고 그런 삶이 남았을 뿐이라며 창백하게 주저 앉는다. 돌아서는 사람들. 그리고 카메라는 자기 삶과 같다고 말한 숲을 바라보고 앉은 존의 뒷 모습을 풀샷으로 담고 응시한다. 서서히 아주 조심스럽게 존의 뒷 모습에 줌 인되는 화면, 존의 목소리가 들린다 '난 두렵지 않아'. 돌아서서 강을 따라 내려가던 두 사람은 대화를 한다. 비행기 사고 전 날, 술집에서 오트웨이를 봤다고. 존의 표정에서 그 때 당신의 표정을 보았다고(오트웨이는 그날 자살을 시도했다). 그렇게 존은 삶을 포기하는 방식으로 죽음을 선택했을 수 있다. 또는 이미 죽어있던 자신의 삶, 누구보다 거칠고 호기로웠지만 실은 늘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던 삶을 접고, 두려워하지 않으며 죽음을 받아들였을 수도 있다. 그렇게 두려움 없는 마지막 삶을 누렸을 수도, 선택했을 수도 있다. 어느 쪽이어도 좋다. 중요한 건 삶과 죽음이라는 게 이렇게 서로 겹쳐 있다는 걸 그가 보여주는 것이니까.

반면 오트웨이는 꼼짝없이 죽을 수 밖에 없는 그 상황에서 주먹을 쥐고 죽음에 돌진한다. 혼자 남은 그가 사경을 걷듯 걸어걸어 겨우 숲을 벗어난 듯 했는데 그렇게 도달한 곳이 늑대들의 소굴이었던 것이다. 늑대 소굴에 있다는 걸 알아차리기 전, 지친 그는 삶을 내려 놓았다. 유가족들에게 건네기 위해 보관하고 있던 죽은 이들의 지갑을 하나씩 꺼내 그들의 사진(가장 소중했던 삶의 순간들이 포착된)을 보며 마지막으로 자신의 지갑을 무덤 같은 그곳에 얹는다. 그리고 나서 자신이 늑대 소굴에 들어왔다는 걸 알아차린다. 늑대 먹이감이 된 사체들과 자신을 노리는 늑대들에게 둘러쌓인 그는 잠시 황망해 하다가 칼과 유리조각을 손에 묶고 늑대 우두머리를 바라본다. 마지막까지 싸우기로 결정한 것이다. 늑대, 죽음을 응시하는 클로즈업 된 오트웨이의 주먹과 눈빛도 이 영화에서 손꼽을 장면이다. 암전되는 화면, 그리고 늑대와 함께 죽어가는 오트웨이의 뒷 모습에서 영화는 끝이다.

 

영화를 보고 난 후, 왜 이 영화 제목이 '더 그레이 The Grey'일까 궁금했다. 회색지대, 죽음과 삶의 경계로서의 의미라고 한다. 죽음과 삶의 경계라는 상징은 공간, 시간의 넘나듦(과거와 현재가 교차하는 꿈 혹은 환각 같은 플래쉬백), 사건 등 영화 전체에 일관되게 적용된다. 특히 이들이 추락한 숲 자체가 죽음과 삶의 중간지대, 어떻게든 빠져나갈 수 없는 폐쇄된 세계, 토마스 만의 마의 산과 같은 공간이다. 아니 어쩌면 이들이 처한 삶 자체도 다르지 않다. 알래스카,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에 위치한 정유공장의 노동자들. 세상에서 밀리고 밀려 도달한 감옥 같은 곳. 공교롭게도 오트웨이의 직업은 이들을 공격하는 들짐승을 죽이는 프로페셔널 가드이다. (인부들의) 삶과 (늑대들의) 죽음, 그 사이에 그가 있다. 늑대를 저격한 후 오트웨이는 마지막 숨을 내쉬는 늑대의 죽음의 순간에 손을 얹었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 (싸움을 마친) 늑대와 오트웨이 이 두 존재는 서로 포개어진 상태로 마지막을 함께 한다.

비행기 사고 직후, 죽어가는 사람에게 오트웨이는 말한다. 당신은 죽어가는 중이라고. 삶에서 가장 좋았던 때를 떠올리라고, 그렇게 죽음을 받아들이라고. 오트웨이의 삶에서 가장 소중한 기억은 병상에서 죽어가며 자신을 쓰다듬고 응시하던 아내의 모습, 이미 죽은 아버지와 함께 했던 어린시절의 한 순간이다(아버지 무릎 위에서 아버지의 손에 자신의 손을 얹었던). 대사가 많지 않은 편인 이 영화에서 반복되는 말이 있다. 오트웨이 아내의 속삭임 "두려워하지마.", 오트웨이 아버지의 시 " 한 번 더 싸우자. 내가 맞이할 최후, 최고의 싸움으로. 오늘 살고 또 죽을 것이다. 바로 이날을 살고 또 죽을 것이다."

죽음의 실체는 삶 속에 있으며 그것이 없으면 삶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영화는 죽은 사람과 죽어가는 사람과 죽음과 대결하는 사람들을 통해 이런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두려워하지 말고, 살겠다는 의지로 마지막까지 깨어있는 존재로 죽음을 받아들이라고. 그게 삶이라고. 결국 죽음 속에 삶이 있고, 삶 속에 죽음이 있는 것이라고. 

 

<디스커넥트> 헨리 알렉스 루빈, 2013

보는 내내 불안했다. 불안의 시작은 피해자에게 이입되는 감정에서 출발했지만, 불안이 증폭되는 지점은 나 역시 쉽게 가해자가 될 수 있다는 걸 알게 되는 순간이었다. 이 영화에서 인터넷을 둘러싼 범죄, 피해와 가해의 구도는 선명하게 나눠지지 않는다. 가해자들은 폭력과 갈취를 인지하고 행동하는 게 아니다. 범죄의 실체(사기/성매매의 최종 수혜자, 학교라는 집단 자체가 갖는 폭력성 등)는 영화에서 드러나지 않는다. 가해와 피해로 서로 연루된 사람들의 절박함과 절망이 영화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가해자들을 옹호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문제는 그들이 특별히 악하거나 잔인하고 탐욕스러운 존재가 아니고, 그냥 외롭고 어리석은 그래서 참 뻔하고 평범한 사람들이었다는 것이다. 무서운 건 가해와 피해의 구도에서 그 누구도 그 결과를 모르고 행동하게 만드는 인터넷이라는 도구의 섬찟함이다.
기껏해야 위안, 조롱, 인정, 유혹 ... 을 바랬던 사람들. 사람들에게 완전한 도덕성을 요구하는 게 아니라면 아주 일상적인 감정들이다. 이런 욕구가 대면이 아닌 익명으로 가장한 위치, 온라인을 통해 배출, 유포되면서 그 누구도 책임지거나 감당할 수 없을 일들이 벌어진다. 가해자들은 자신의 행동이 초래할 상황에 대해 정말 모르고 있다는 게 서글플 정도로 무섭다.
이 영화의 미덕은 인터넷을 둘러싼 이런 사건들이 이미 일상적인 것처럼, 이 사건들로 인한 파장 역시 형사물에서 자주 선택되는 살해, 자살, 파멸 등 극단적인 사건 자체로 안착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저그런 뻔한 사람들의 얽키고 섥히는 관계들에 집중한다. 범죄는 해결되지 못한다. 그래서 재산과 가족, 직업과 신뢰를 잃은 이들이 그래도 결국 소중한 건 우리였어라고 위안하는 마지막 장면은 뜬금없다. 아니 서둘러 봉합하듯 안이하게 마무리된는 상황이 현실적이지도 못하고, 그리 공감 되지도 않는다. 불안을 끝까지 밀고 갔어야 했다. 그게 현실이지 않을까. 그래서 반쯤 좋았고 반쯤 아쉬웠던 영화다.

 

<까미유 끌로델 1915> 브루노 뒤몽, 2013

면회 온 남동생에게 애원한다.'... 집으로 돌아가서, 문 닫고 살고 싶어'. 다른 것도 아니고 그저 혼자 조용히 살고 싶다는 그녀의 삶의 마지막 바람은 결국 허락받지 못한다. 그렇게 까미유 끌로델은 29년을 더 정신병원에서 보내고 79살에 죽는다. 불과 100년 전이다. 새로울 것도,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사실이지만 속 터져서 보고 있기 힘든 건 어쩌랴.

줄리엣 비노쉬의 연기가 좋았다. 모욕 당하고 감금된 자신의 상황을 수용하고 간신히 버텨내면서도, 슬퍼하고 분노하고 동생에게만은 버림 받지 않을 거라고 매달리는 사흘 간의 모습, 텅 빈 눈빛과 예측할 수 없는 표정을 만들어주는 주름들. 이 영화를 그래도 끝까지 보게 만든 건 8할이 그녀의 힘이다. 

 

<리딕> 데이빗 토히, 2013
시간 죽이려고 본 영화인데 나쁘지 않네. 벤 디젤이란 액션배우는 거의 스티븐 시걸 급으로 생각하고 있었는데ㅋ 내 취향은 아니지만 그 정도는 아니구나. 스토리도, 액션도 연기도 무리하지 않고 깔끔한 게 장점. 

 

<스턱 인 러브> 조쉬 분, 2012
세상에서 가장 평범한 가족의 특별한 로맨스라는 홍보 문구, 장난하냐. 이 가족이 평범하면 나는 40년째 문맹이다. 

 

<50/50> 조너선 러바인, 2011
순하고 착하고 다정한, 조셉 고든 레빗(이라는 배우의 이미지) 같은 영화. 그나저나 세스 로건, 너무 귀여우신듯-

 

<셰임> 스티븐 맥퀸, 2011

남자는 관계를 두려워하고, 여자는 관계에 집착한다. 여자는 상대를 집요하게 옭아매지만 그를 책임지지 않고, 남자는 상대를 갈구하지만 그녀로부터 끝임없이 도망친다. 이 두 사람은 남매이다. 그게 수치의 원인인 걸까. 결코 벗어날 수 없는 반복되는 천형 같은 이야기.

감독은 현대 뉴욕을 배경으로 뭔가 비극의 원형 같은 걸 보여주고 싶었나보다. 건조한 질감과 반복 혹은 변주하는 은유. 대도시, 빌딩과 유리창, 지하철, 투명하지만 차갑고 단호한 공간들. 주인공이 호소하는 집요한 갈망과 벗어날 길 없는 공허함을 보여주는 좋은 선택이다. 

 

<노예 12년> 스티븐 맥퀸, 2013

노예해방법이 통과되고 노예수입이 금지된 시기, 뉴욕에서 자유시민으로 살고 있던 주인공은 노예상에게 납치되어 12년간 노예의 삶을 살게 된다. 영화는 그가 탈출 후 남긴 자서전을 토대로 만들어졌다. 이렇게 영화의 기승전결을 이미 알고 있는 상황에서 과연 이 소재를 가지고 '다른' 영화가 가능할까 반신반의하며 영화를 볼까 말까 고민했다.

무엇보다 역사적 사실로서의 집단적인 폭력(공적으로 허용된 폭력)을 다룬, 아니 영화에서 아무리 잔인하게 묘사한다 하더라도 그 이상이었을 노예 학대와 학살의 장면들을 보게 될게 끔찍해서 피하고 싶기도 했다(내가 전쟁영화, 전투 장면을 못 견디는 이유와 비슷). 하지만 감독의 전작 <셰임>이 보여준, 사건 자체보다는 휘청거리고 스러져가는 인물의 내면을 응시하던 감독의 시선이 무척 인상적이어서 '그래도'라는 기대를 갖고 선택한 영화이기도 하다.

좋았던 건, 남북전쟁 전 노예제도 하의 남부 백인들에 대한 묘사이다. 내가 접했던 이 시기를 다룬 영화 혹은 드라마 대부분은 북부와 남부의 대립을 정의와 민주주의, 자유와 인권이라는 절대선과 절대악의 구도로 단순화하고, 등장 물들도 굉장히 전형적이고 상투적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미국의 노예제도, 남북전쟁이라는 역사적 사건을 둘러싼 다양한 경제적 문화적 정치적 배경들과 맥락들은 부차적인 게 되고, 지금까지도 풀어내지 못하고 있는 인종 갈등, 혐오의 문제를 미국식 정의와 민주주의의 승리의 역사로 정리해내는 게 석연치 않은 지점이기도 했다.

스티븐 맥퀸의 <노예 12년>은 달랐다(나에게는 다르게 읽혔다). 영화를 보는 내내 눈에 밟히는 건 무지와 폭력이라는 백인우월주의로만 설명되지 않는, 이미 세를 거스를 수 없는 산업자본주의의 흐름에서 낙오되어가는 남부 백인들의 불안과 절박함이었다.

포드. 그는 합리적이지만 위선적인 농장주이다. 그가 주인공의 능력을 인정하고 그에게 자비를 베푸는 것은 그가 쓸모 있는 노동자이자 기술자였기 때문이다. 당연히 주인공이 자유민인 것을 알면서도 눈 감아 버리고, 문제가 생길 법하자 자신의 빚 대신 그를 노예들을 학대하기로 악명 높은 농장주에게 팔아 넘긴다. 그는 이익에 있어서만 합리적일 뿐, 사람을 사고 파는데 있어서 조금의 손해도 감수하지 않는다(혹은 감수할 수 없는 처지인 듯하다).

엡스. 그는 자신의 광기와 폭력을 제어하지 못하는 농장주이다. 몰락해 가는 자신의 삶에 대한 불안 그리고 이로 인한 폭력에 노예들도 가족들도 자기 스스로에게도 재앙에 가까운 삶을 살게 하고 있는 인물이다. 시대의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는 그는 술에 취하면 자고 있는 노예들을 깨워 옛 전성기를 재현하려는 듯이 거실에서 춤을 추게 한다. 그는 이 영화에 등장하는 그 누구보다도 물리적으로 감정적으로 노예에게 의존적인 존재이기도 하다(그래서 더 불안하고 폭력적인 인물).

포드 사업장의 감독관. 그는 노예들 앞에서는 기세등등하지만 고용주에게 능력있는 피고용인으로서 인정받지 못함에 불안해한다. 주인공에게 제압당하고(쓸모로든 육체적인 힘으로든) 분풀이로 그를 죽이려하지만 그에게 자신의 고용주의 재산가치를 훼손하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다.

포드 사업장의 또 다른 감독관. 그는 고용주의 재산을 지킨다는 명분으로 주인공이 나무에 목이 매달리는 순간 그를 구해주지만 그대로 매달아 둔 채(하루 종일) 주인을 기다릴 뿐이다. 그의 행동은 양심 때문도 아니고, 자신을 고용한 사람에 대한 존경 때문도 아니다. 그냥 그에게 주어진 역할 자체만을 수행한다. 어떤 갈등도 없이 차분하게.

엡스의 농장의 백인 노동자. 무능력과 가난으로 인해 감독관에서 농장 노동자로 전락한 백인이다. 사람을 채찍질하는 일이 괴로워 술에 의지하다 보니 직업도 돈도 잃어버렸다고 한다. 주인공의 탈출을 돕겠다고 돈도 받고 흥정까지 해 놓고서 엡스에게 꼰지른, 하지만 주인공의 기지로 되려 사기꾼으로 몰리게 된 사람. 그는 잔인하고 탐욕스럽다기 보다는(그럴 능력도 위치도 누리지 못한 인물) 속물적이지만 동시에 어리숙한 사람이다.

이들이 무언가를 선택하고 움직이게 하는 동력은 돈이다. 백인우월주의, 법과 제도, 도덕과 종교는 이들의 이윤/돈의 확보와 축적을 위한 충실한 들러리로 기능한다.

물론 주인공 역시 여기서 자유롭지 않다. 영화의 도입부의 한 장면, 분량은 적었지만 영화를 보는 내내 그리고 보고 나서도 계속 떠오르던 씬이 있다. 주인공이 아내를 위해 고가(로 예상되는) 물건을 사는 상점 씬이 그것. 여행을 떠날 아내를 위해 가방을 사러 들른 가게. 깍듯하게 그를 대하는 백인 상점주인, 비싼 듯한 가방을 소개 받고 갖고 싶어하는 아내. 주인공은 아내의 만족 보다는 가방 가격이 더 궁금하고, 그 때 분명 그에게 무언의 도움을 청하는 태도의 흑인이 가게로 들어와 그에게 눈빛을 건네지만(그는 가게 밖에서부터 주인공을 주시하고 있었다) 주인공은 그 눈빛을 그리고 그를 서둘러 빼내는 백인의 부자연스러움을 분명 인지했음에도 모른 척하고 가방 흥정에만 몰두한다.

주인공은 전형적인 영웅 캐릭터가 아니다. 백인 같은 흑인, 노예이지만 자유인이었던 두 개의 삶을 산 경계인이다. 노예의 삶에서의 탈출(해방이라기 보다는 신분의 회복)도 그의 자유에의 갈망과 의지만으로 이뤄졌다기 보다는 (상당히 뜬금없이 등장한) 선한 사마리아인의 도움에 의해서였다. 주인공이 특별히 비범했던 인물이 아니었듯 그의 삶이 그리 특별히 비극적이었던 것도 아니다. 그래서 되려 노예제도가 합법이었던 그 시대의 비참함이, 지나간 과거로 회고하기에는 여전히 진행 중인 제도화된 착취의 사회 시스템이 영화를 통해 더 무시무시한 존재감을 발휘한다는 생각이 든다. 

 

<어거스트 : 가족의 초상> 존 웰스, 2013

메릴 스트립 때문이라도 이 영화는 두 번은 더 볼 수 있을 거 같다. 

 

<보이후드> 리차드 링클레이터, 2014

가족, 관계, 변화, 자란다는 것... 유년시절을 이렇게 담아낼 수 있다니. 완전히 반했다.

그 누구도 그렇게 특별하지 않지만, 단 한 사람도 허투른 삶이 없다. 만남과 관계도, 시간과 순간도 마찬가지. 

6살 아이가 18살 청년이 될 때까지의 일상은 물론 사회, 경제, 정치, 문화의 자장까지 담아내는 이런 호흡은 어떻게 가능한 걸까. 묵직하면서도 재치있는, 날카로우면서도 느긋한, 남다르지만 요란스럽지 않은 이런 균형감은 어떻게 가능한 걸까. 반해버렸다, 이 영화.
나의 20대와 40대를 리처드 링클레이터라는 감독, 그의 영화들과 함께 할 수 있다는 게 너무 좋다. 땡잡았다.

 

<달라스 바이어스 클럽> 장 마크 발레, 2013

살기 위해 악착스럽게 버티기. 그리고 싸우기. 그 삶이 얼마나 가치 있는지(가치 있을지)를 전면에 내세우지 않은, 그래서 더 설득력 있는, 매우 영리한 영화다.

 

<비긴 어게인> 존 카니, 2013

104분짜리 뮤직비디오. 볼만 했던 건 노래 덕, 이야기는 들러리. 

 

<빅 아이즈> 팀 버튼, 2014
끙... 최근 몇 년 간 팀 버튼 영화는 아쉽아쉽.

 

<피의 피에로> 토미 리 월레스, 1990

좋은 영화는 아닌데, 묘하게 매력 있다. 무엇보다 원작(IT)이 매우 궁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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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4/03 19:33 2015/04/03 1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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