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봄날은 간다>에서 상대방의 순진하고 맹목적인 사랑에 버거워하던 '은수' 같았던 그와, 어떻게 사랑이 변하냐고 외치던 '상우' 같았던 20대 중반의 내가 있었다.

 

대부분의 일상과 적잖은 기준들이 그에게 맞춰져 있었으며, 그의 미래가 나의 미래가 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나'라는 사람을 그가 원하는 모습으로 만들고 싶었고, 그렇게 '나'를 구성하고 있던 조각들을 하나씩 버리고 나니 이별이 찾아왔다. 그리고 떠난 그와 함께 '나'는 사라지고 빈 껍데기만 남았었다.

 

당시 그가 아닌 '나'를 조금 더 사랑했다면 그 사랑의 기간을 조금 더 연장할 수 있었을까? 허망하게 텅빈 나를 다시 채우기 위한 힘겨웠던 방황과 좌절의 시간들이 조금쯤은 쉬웠을까? 그래서 불에 댄 듯 '사랑'을 만지는 것 조차 조심스러워 매번 멈칫하고 그만둬 버리는 어리석은 짓 따위는 반복 하지 않았을까? 가끔 되묻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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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아 감독의 2007년 작 <두번째 사랑>은 상대방에게 맞추느라 조바심치고 급급한 첫번째 사랑이 아닌, 자신과 자신의 욕망을 사랑하기에 더 성숙한 사랑에 대한 이야기이다.  


영화에는 미국에서 태어났으나 유색인으로서 그 사회에 온전히 편입되지 못하고 겉도는 자신의 삶에 절망하는 남편 앤드류(데이비드 맥기니스)와 그가 삶의 애착을 갖도록 하기 위해 아이가 필요한 소피(베라 파미가), 그리고 한국에 있는 애인을 데려와 미국에서 살기 위해 밤낮 없이 세탁소와 육류창고에서 일하고, 보따리 장사에 정자까지 팔고자 하지만 이마저도 여의치 않은 불법체류자 지하(하정우)가 등장한다.

 

끝내 자살시도까지 하는 앤드류를 살리기 위해서 아이가 다급하게 필요해진 소피는 불임클리닉을 찾았다가 불법체류자라는 이유로 정자를 팔지 못하고 발길을 돌리는 지하를 만난다. 그를 미행한 소피는 앤드류와 같은 외모의(한국인) 지하에게 거래를 제안한다. 한번에 300불씩, 아이를 갖게 되면 3만불을 지불하는 조건으로 소피가 임신을 할 때까지 함께 잠자리를 해주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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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몸으로 시작된 둘의 관계는 거래로만 끝나지 못하고 새로운 사랑으로 이어지고, 소피는 앤드류와 결별하고 누구를 위해서거나 어떤 이유를 위해서가 아닌 '자신'의 아이를 낳고 살아간다.

 

자신들을 다 버려도 좋을 만큼 사랑했던 사람들을 버리고 두번째 사랑에 빠져드는 이 과정은 단순히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과정이 아닌, 타인의 욕망에 맞추던 첫번째 삶을 버리고 자신의 욕망과 스스로를 사랑할 수 있는 두번째 삶으로의 전환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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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드류는 '아이'라는 매개체가 없다면 스스로 목숨을 끊을 만큼 세상이나 소피에게 미련이 없고, 소피는 이미 서로의 눈을 바라보지 않고 하는 섹스를 반복하면서 그가 떠날지 모른다는 불안감을 느끼고 있었다. 자살을 시도한 앤드류가 집으로 돌아와 밤에 피아노를 치는 신은 거울에 비친 앤드류와 그를 바라보는 소피가 서로 등을 돌리고 있도록 설정되어 있어 그들의 관계가 이미 끝났음을 보여주는데, 개인적으로 가장 맘에 드는 신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그를 끝까지 붙들고자 지하와 거래를 시작한 소피가 앤드류를 위해 아이를 가지려던 과정은 지하와 사랑에 빠지면서 자신을 사랑하고 자신의 아이를 갖는 과정으로 치환된다. 영화는 만삭의 소피가 해변에서 아이와 함께 시간을 보내는 장면에서 소피의 미소를 클로즈업하면서 끝나는데, 그 알듯 말듯 한 미소는 어떤 메시지라고 딱히 규정하긴 어려우나 영화 속의 그 어떤 대사들보다 강한 이미지로 남아있다. 

 

사실 이 영화를 세 번 이상 봤는데, 볼 때마다 우습게도 '너 다음 사랑에는 저렇게 웃을 수 있겠어?' 라고 스스로에게 묻게 된다. 그리고 그렇게 사랑하고 싶어지게 만드는 영화라 좋아할 수밖에 없기도 하다.

 

그 외에도 이 영화의 장점은 많다. 영화는 불법체류자이며 이주노동자인 지하의 현실을 그저 일상처럼 거리감 있게 묘사한다. 그러나 길가에 버려진 의자를 아무렇지 않게 주워가는 장면이나, 무거운 맥주박스를 혼자 나르는 그를 바라보는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며 바라보는 백인 노동자들의 모습, 쉬는 날이면 밀수품 시계를 팔기 위해 무표정한 얼굴로 긴 터널을 바삐 걸어가는 모습 등은 오히려 타국에서의 힘겨운 삶과 외로움이 일상이 되어버렸을 우리 안의 수많은 이주노동자들을 떠오르게 해 가슴을 먹먹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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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카리스마 있는 외모와는 정반대로 약한 이민2세의 모습을 잘 연기한  <컷 런스 딥>(The Cut Runs Deep/이재한/1998)의 데이빗 리 멕기니스의 반가운 모습이나, 쉬이 깨질 것 같은 하얀피부와 파란눈동자 만큼이나 예민하게 사랑을 잃는 것에 대한 두려움과 새로운 사랑에 대한 떨림과 흥분을 잘 표현한 베라파미가의 연기도 영화를 보는 즐거움 중 하나다.

 

마지막으로 영화 <밀양> 만큼이나 찬송가를 부르거나 기도하는 장면이 많이 등장하고 소피에게 기도를 강요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는 다수의 동포들이 맺고 있는 기독교 커뮤니티를 기반으로 하는 동포사회의 약간은 비정상적이고 외부인에게 폭력적이기까지 한 속성을 보여준다.

 

이래저래 많은 것을 생각을 하게 하는 영화 <두번째 사랑>, 함께 볼래요?

 

Writer profile
한때, 영화평론가가 되고 싶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글이 어려워 몇번을 읽어도 잘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좋아하는 영화평론가 정성일은 영화평을 쓰기 위해 한 영화를 세번 본다고 했습니다. 아무런 생각 없이 그냥 한 번, 핸디카운터로 컷 수를 세면서 다시 한 번, 마지막으로 관객들의 반응을 보기위해 또 한 번.

그 얘기를 들은 후 영화평론가는 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이 코너는 평을 하는 코너가 아닙니다. 친한 친구에게 재밌게 본 TV 프로그램이나 영화에 대한 느낌을 이야기하듯 그 느낌을 나누는 코너입니다.

여러분, 저랑 같이 보실래요?

Posted by 신미지

2011/02/13 15:50 2011/02/13 1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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