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이 흐믈 흐믈 해지는 나른한 오후... 버스창에 머리를 기대어 단맛 나는 쪽잠을 청하고 있었던 어느날 버스안에서 그 가난의 처절함 때문에 참담해진 가슴을 쓸어내렸던 기억이 난다.
버스안 승객들은 저마다 딱히 할일이 없어 보였고, 나처럼 머리를 쳐막으며 잠을 청하고 있거나, 아무 생각없이 창밖 풍경에 정신을 빼놓고 있거나...
그저 흔하디 흔한 오후 한낮의 버스안 풍경의 일상이 있었을 뿐이다.
그 무료함을 깨우는것은 무심하게 틀어 놓은 라디오에서 나오는 수다스런 디제이들의 말장난과 서민의 애환을 달래주는 편지글들 뿐.
그 글을 듣고 있거나, 디제이가 던지는 맨트에 간혹 킥킥거리며 응수하는것이 전부였다.
어느 가난한 아내는 오늘도 가족을 위해, 일터에서 여념이 없을 남편에게 사랑 가득한 편지를 띄웠다. 아마 이들 부부는 가난한 연인으로 만나, 결혼식도 제대로 올리지 못하고 그럭저럭 살림을 차리고 살아가다가 아이가 초등학교 입학할 무렵 주변 사람들의 도움으로 늦깍기 결혼식을 올린 모양이다. 그들은 모처럼 큰 맘 먹고 신혼여행 겸 여름 피서 계획도 세우고, 친지 친구들과의 한판 잔치 계획도 세웠다. 그러나 그런 꿈들은 항상 가난한 사람들에게만 호락호락 하지 않다. 그런건 언제나 가난한 사람들에게만 유독 사치품 같은 꿈이 된다.
IMF라는 괴물은 이들 가난한 부부에게도 찾아왔고, 다행히 실업자 신세는 면했지만 그다지 넉넉하지 않았던 월급봉투는 절반으로 줄어 한달 생활하기에도 빠듯하기만 했다. 그나마 그 월급이라는 것도 계속 제대로 받을 수 있을지 의문이다.
오랫동안 너무나 써보고 싶었던 면사포였지만 그녀는 담숨에 포기해 버렸다. 10년 만에 처음으로 신혼여행에 업혀가는 여름휴가 였지만 그녀는 그 호사도 포기해 버렸다. 좀 아깝기는 했다.
그냥... 가까운 강가에 가서 식구들하고 딱 하루, 발만 담그고 오려고 했었다.
그런데 뭐...정리해고다 뭐다 해서 하루아침에 실업자 된사람들이 어디 한둘인가... 아예 공장이 문을 닫아버려 퇴직금은 고사하고 몇달치 월급도 제대로 못챙겨 나온 사람들이 수두룩한데...뭐.. 그까짓 웨딩드레스가 대수겠는가. 그까짓 여름휴가가 별거였겠는가.
대신, 이들 부부는 평소 애들이 먹고 싶다고 졸라도 심장이 벌렁거려 감히 사먹어 보지도 못한 아이 머리통 두배 만한 수박을 큰맘 먹고 사서 온가족이 배터져라 먹어보기로 했다. 그리고 대야에 찬물도 받고, 얼음도 띄우고, 거기에 발 담그고 선풍기 강풍으로 틀어 놓는 것으로 그해 여름 피서를 대신하기로 했다고 했다. 그리고 편지 마지막 부분에서 이들 가난한 부부는 갑자기 초라해진 휴가를 이렇게 위로 했다. 다시 한번 허.리.띠를 졸라매자... 그래 다시 한번 허. 리. 띠.를 졸라매자.
그 글은 비교적 경쾌하게 읽혀 내려갔다. 아마 방송에 적합하도록 작가들의 손을 거쳐 서민적이지만 구질 구질 하지 않게 다시 다듬어졌을 것이다. 그리고 자칫 늘어지기 쉬운 오후 시간을 위해 남녀 디제이의 입담을 섞어 부러 더욱 깔깔거리고 있었을 것이다.
아니...사실은 정말로 그들은 행복해 보였다. 비록 10년 동안 그 흔한 여름휴가 한번 못가 봤지만, 그렇게 허리띠를 졸라맨 덕분에 지금까지 그들은 잘 살아 남았고... IMF라는 태풍속에서도 꿋꿋하게 살아남았지 않았던가. 그리고 더 허리띠를 졸라매서라도 살아남겠다고 다짐하고 있지 않았던가.
나는... 그만... 허리띠를 졸라매겠다고 두번이나 반복해 적어 놓은 부분에서... 두번이나 강조한 그것이 어떤것을 의미하는지 잘 이해하지 못하고 눈치없이 읽어 내려가는 디제이의 철없는 두번째 반복 부분에서 나도 모르게 울컥,...목울음이 넘어 오는것을 간신히 참아냈다.
티브 뉴스를 통해 "국민 여러분 우리 모두 어려운때 입니다. 다시 한번 허리띠를 졸라매서 지금의 어려운 시기를 슬기롭게 극복합시다'라고 동남아 골프여행권 두둑하게 챙겨 가지고 있을 어느 정치인의 엿같은 목소리와 점점 더 가늘어 가는 그녀의 허리가 겹쳐져 부아 치민 가슴을 애써 쓸어내리고 있었다. <아름다운황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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