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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부지 5주기 제사

5년이다. 벌써 5년이 흘렀다.

음... 5번의 제사 중에 1번을 빼고는 아빠를 보러 왔다.

시댁과 제사가 겹치는 게 항상 마음의 짐 같지만, 올해는 짝꿍도 못내려오게 되고 해서

광주 부모님이 여수로 가라고 배려를 해주셨다.

원래는 유성에 들러서 아빠 산소에 다녀오려고 했는데... 일 때문에 결국 점심 때가 넘어서야 기차를 탔다.


5시간이 넘는 시간 동안 시간 떼울 겸, 톨스토이의 단편선을 거금을 주고 샀다.

톨스토이 후기 작품들이 많아서기독교 색채가 짙기는 했지만, 삶을 살아갈 때의 윤리, 정의, 선...이런 가치들을 다시 돌이켜볼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역시나 도덕교과서 같은 내용이 나올 때는 '젠장' 이란 반응이 나오는 건 어쩔 수 없다. 그 중에 괜찮은 단편들도 있었는데... 자세한 건 나중에 적는 것으로 하고...

그렇게 지루함을 달래고.. 중간 중간 졸기도 하면서... 6시간 만에 여수에 도착했다. 아... 멀긴 멀다...


집, 고향은 잠시 머물기는 편안한 곳이다.

하지만, 원고를 2개나 써야 한다는 부담감... 으이구... 왜 쓴다고 해서...

다음 날 아빠 제사 준비가 좀 늦어졌다. 괜히 게으름이 났던 것이기도 하고....

엄마 노래교실 가 있는 동안 현정과 나는 방청소를 하고... 전을 부쳤다.

보통때보다 많이 늦어져서 걱정이었는데, 엄마의 빠른 솜씨로 후다닥 준비를 했다.

 

엄마는 항상 젯밥을 짓기 전에 제사상 밑에 둔 쌀을 살펴본다.

아빠가 여기에 오셨다는 걸 확인하는 '의식' 같다.

아무런 흔적없이 평평했던 쌀에 희미하지만, 작은 길들이 나 있다.

첫번째 제사 때는 내가 기억하기에도 굉장히 뚜렷한 표시들이 있었는데...

점점 그 흔적이 약해지는 것 같다.

그래도 엄마는 그 작은 흔적들을 살피며, 아빠가 오셨음에 안도하신다.

이번에도 빈손으로 온 철없는 큰딸한테 엄마는 다음에는 다른 것 말고, 꼭 쌀을 가져오라신다.

그렇게 해야 복을 받는다고...-_-;; 福...


첫 제사 때만큼 슬프지 않았다. 명절 때 차례 지내는 것 같았다.

하지만 엄마는 이날도 울었다.

왜 먼저 갔는지... 왜 이렇게 외롭게 하는지... 엄마는 아빠가 원망스럽다 한다.

그 마음을 어떻게 다 헤아릴까...

예전에 삼동이형이 10년이 지나도 엄마는 아빠 제사때만 되면 우신다는 얘기가 그저 남얘기 같았는데...

아마도 평생 엄마는 아부지제사를 그렇게 보내지 않을까 싶다....


올해는 엄마, 나, 동생들... 그리고 못난이(울 집 강아지)랑 조용히 제사를 모셨다.

어느 누구한테도 전화가 오지 않았다. 할머니는 큰 아들이 돌아가신 것도 모르시고...

작은아빠들, 고모들은 아는지 모르는지도 모르게 아예 연락을 끊고 지내고..

외가 식구들도 올해는 조용하다.

엄마는 많이 서운한 눈치다.

난... 원래 그런 거라고 so cool~하게 생각한다.

기대하면 할수록 상처를 받는 건 우리니까...

 

제사가 끝나고 늦게 외할아버지가 오셨다.  엄마 걱정때문이었을 거다.

외할아버지의 그런 관심이 부담스러운 엄마는 약속 있다며 나가셨다.

나는 밤새 원고 쓰느라 정신이 없었다.겨우 원고 하나를 끝내고, 새벽에 잠이 들었다.


다음 날 할아버지와 함께 나와서 버스정류장에 모셔 드리고,

나는 다시 서울로 가기 위해 여천 기차역으로 왔다.

가는 택시 안에는 외할아버지는 엄마한테 평생 엄마한테 잘해준 게 없다며 미안한 속내를 내비치신다.

그리고 엄마가 얼마나 외로웁겠냐며, 우리들이 잘해야 한다고 거듭 당부하신다.

이런 얘기를 전해드리자 엄마는 평생 할아버지가 그런 얘기를 한 것은 처음이라며...

호랑이 같던 노인네... 이제 늙었나보다 하신다.

 

늙는다는 게 뭘까... 올라오는 기차 안에서 세월 가는 것, 늙는 것, 어떻게 살아야가야 하는지에 대해서

생각하다 기분이 우울해져버렸다.

 

올해 아부지 제사는 그렇게 끝났다.

마음을 다하지 못한 채, 치르는데 급급했다.

그렇게 무던히 세월이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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