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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장을 울리는 영화 <우리학교>

다큐멘터리는 끝나고 엔딩크레딧이 올라가고 있다.
그러나, 아무도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는다.
화면이 꺼지고 극장 불이 켜지고, 그제서야 하나둘씩 일어난다.
그러나, 평소의 영화관처럼 영화평을 얘기하는 사람이 없다. 주위는 조용하다.
나는 그 이유를 알고 있었다.
아니다. 나 자신이 아무 말이 없었다. 뭔가 말을 하면 울어버릴 것 같았다.
결국, 영화관 문을 나서지 못하고 벽을 기대어 울고 말았다.

 

 

‘우리학교’라는 평범해 보이는 제목. 상영시간이 131분이나 되는 다큐멘터리.
7000만원이라는 초저예산 제작비. 개봉하고 있는 극장에서도 하루 한번 상영하는 정도.
어찌 보면 쫄딱 망하는 모든 조건을 완벽하게 구비하고 있는 다큐멘터리가 엄청난 폭풍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다큐를 본 사람들의 입소문을 타고 올라온 뜨거운 기류는 저예산 다큐멘터리의 모든 기록을 갱신하며 관람객 3만명을 향해 힘차게 내닫고 있다.
이 다큐멘터리의 무엇이 관객들의 심장을 울리는 것일까?

 

반도의 남쪽에서는 철저히 잊혀져 있지만, 일본이라는 힘든 곳에서 민족의 자주성을 생명처럼 지키며 사는 조선학교. 그 중에서도 혹가이도 조선학교 재일동포들의 모습을 담은 영상은 3년 5개월간 그들과 함께 살면서 촬영한 감독의 거리만큼 가깝다.

 

조선학교의 학생들은 조선말을 쓰고, 조선말로 수업을 하며 여학생들은 치마저고리를 입고 생활한다. 한국(조선)에서는 내면의 정체성을 가지면 외적인 모습은 크게 중요하지 않지만, 일본에서는 외적인 모습으로 민족성을 표현하지 않으면 내면까지 금방 일본인이 되어버린다는 한 학생의 말은 그들이 왜 그렇게 조선의 것을 지키려고 하는 지를 잘 표현해준다.

 

해방 후 540여개가 있었던 우리학교(조선학교)가 지금은 80개만이 남아있는 상황. 일본 우익들의 이성을 잃은 공격이 극심한 상황에서 조선인으로의 정체성을 지키며 살아가는 그들의 모습은 삶 그 자체가 투쟁이라는 생각이 들도록 만들었다. 해방 이후 조선학교를 일본인으로부터 지키기 위해 공부는 나중 문제였고, 싸움이 첫째였다는 재일동포 1세대 할머니의 회상은 마음 깊은 곳을 파고들었다.

 

그러나, 우리학교가 우리의 심장을 울리는 까닭은 단순히 하나의 민족이라는 지점에서 멈추지 않는다. 우리학교에서 학생과 선생님이 어우러지는 모습은 입시경쟁과 물질만능주의(자본주의)의 노예가 되어 고통받고 자살하기까지 이르는 이곳의 학교와는 달라도 너무나 다르다.

 

아이들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헌신하는 선생님들의 모습. 일본에서 어렵고 힘들게 사는 동포들의 생각하며 이를 악물고 축구대회에 나가는 학생들. 아름다운 공동체를 이루고 사는 우리학교의 모습에 감동해서 눌러앉아 버린 일본인 체육교사. 이지메(왕따)가 없고 서로가 서로를 위해 살아가는 공동체의 모습 속에서 우리는 그동안 잊고 살았던 소중한 가치들을 발견하게 된다.

 

 

▲ 축구대회에서 아쉽게 패배하고 슬퍼하는 학생들의 모습. 하지만 동포들을 위해 최선을 다했기 때문에 아름답다.

 

 

아름다운 공동체의 모습 속에서 인공기도 만경봉호도 어색한 이북식 말투도 어느덧 자연스러운 모습으로 다가온다. ‘동무’라는 단어가 이렇게 아름다운 단어인 것을 우리는 모르고 살았다. 고향은 ‘남쪽’이고 조국은 ‘북조선’이라는 우리학교 학생들의 서슴없는 말은 사실은 필연적인 것이다. 재일동포 문제는 그들의 문제라며 사실상 방치해왔던 남쪽 정부와는 달리 이북은 처음부터 지금까지 물심양면으로 조선학교를 지원해온 것이다.

 

만경봉호를 타고 조국(북조선)을 처음으로 방문하는 아이들이 배에서 내리면서 발보다 손을 먼저 짚는 모습. 조선의 태양은 아름답다며 석양을 바라보며 감상에 젖는 아이들의 모습. 이북의 안내원, 군인들과 어우러져서 춤추고 정을 나누는 모습. 일본으로 떠나는 만경봉호에 다시 오르면서 조국과 동포들에 대한 뜨거운 감정에 눈물 짖는 아이들의 모습. 판문점을 방문한 아이들이 38선은 무슨 거대한 벽으로 되어 있을 줄 알았는데 저렇게 조그만 선으로 조국이 갈려있다는 것에 놀라고 안타까와 한다.

 

 

▲ 꿈에도 그리던 조국을 방문하고 다시 일본행 만경봉 호에 오른 아이들이 아쉬움을 못이겨 모두 배 밖으로 나왔다.

 

 

“많이 먹고 자는 것은 행복이 아니죠. 돈을 가지고 있는 것도 행복이 아니죠. 그런데 인민들은, 정말의 행복을 알고 있죠.” 일본학교를 다니다가 고급부 1학년으로 편입하여, 처음엔 자신이 조선 사람인 것이 싫었다는 학생이 고국(북조선) 방문 뒤 상기된 표정으로 북에서 만난 동포를 향한 애정을 고백한다.

 

마지막을 장식하는 우리학교의 졸업식은 선생님과 아이들 모두가 울음바다가 되어버린다. 관객들 모두가 2시간이라는 어찌보면 짧은 시간동안에 졸업식에서 아이들이 흘리는 눈물을 이해하게 되었다. 그다지 슬프지도, 그다지 분노가 일어나지도, 그다지 기쁘지도 않은데 관객들 모두가 졸업생들과 함께 눈물을 흘리고 있다. 이것이 바로 한 민족이라는 것일까.

 

이 영화가 올 한해 내내 극장에서 내려가지 않고 상영되기를 마음 속으로 빌면서, 두 번째 감상할 기회를 빨리 마련해야 겠다.

 

 

▲ 감동적인 졸업식 장면. 이미 학생들과 관객들은 하나가 되어 있다.

 

 

우리학교 OST - 우리를 보시라

 

 

그 언제나 나를 보는 눈길들 내가 서는 자리마저 하나없듯이
마음을 숨기며 발자취도 감추고 세상에는 저 혼자라 알아왔네
단 하나의 이름을 불러주는 동무들이 나를 나를 이루어주고
두 팔을 크게 벌려 여기 오라고 안아주는 나의 학교

 

우리를 보시라 그 어디 부럼 있으랴
마음껏 배워가는 이 행복 넘치네
아침의 해빛이 아름답고 고운 그 모습을 그려 살리라

 

굽이굽이 돌아드는 이 길을 함께 가니 푸른 하늘이 열리여있네
조선옷 입고서 얼굴 바로 들고서 날마다 학교가는 이 기쁨아
불리우는 이름을 몰랐었네 자란 곳이 다른 줄을 몰랐었네
더는 헤매지 말고 웃어 보라고 안아주는 나의 학교

 

우리를 보시라 그 어디 부럼 있으랴
참되게 살아가는 이 행복 넘치네
아침의 해빛이 아름답고 고운 그 모습을 그려 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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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네수엘라 혁명의 수도 카라카스 방문기 (4)

1월 30일 오전에 베네수엘라 국회 방문을 마치고 다음으로 방문한 곳은 볼리바리안 대학이었다.


볼리바리안 대학의 건물로 사용하고 있는 곳은 원래 국영석유회사 PDVSA 본사 건물이었다고 한다. 2002년 11월부터 2003년 2월까지 보수세력들은 어용노조인 PDVSA의 노조를 앞세워서 전국적인 총파업을 벌였다. 그러나, 차베스를 지지하는 가난한 사람들, 노동자들이 정지된 PDVSA 공장을 다시 가동시키고 문을 닫은 상점들 대신 민중상점들을 열게 되면서 보수세력들의 총파업은 실패를 하게 된다. 차베스는 총파업 후에 PDVSA 본부 건물을 볼리바리안 대학의 건물로 사용하는 조치를 취했다.



▲ 볼리바리안 대학 건물의 모습. 이전에는 국영석유회사 PDVSA 본사 건물이었다고 한다

 




▲ 베네수엘라의 무상교육 시스템을 설명해주고 있는 대학 관계자 야루마 로드리게스 씨

차베스 정부는 예산 중 상당부분을 무상의료(미션 바리오 아덴트로), 무상교육(미션 로빈슨, 미션 리바스, 미션 수크레)과 같은 사회 사업을 위해 쓰고 있다.  이러한 프로그램에 대한 민중들의 관심과 참여는 폭발적이었다. 일례로 중등교육을 담당하는 미션 리바스의 경우 2003년 시작해서 지금까지 150만명이 무상교육의 혜택을 받았다고 볼리바리안 대학 관계자 야루마 로드리게스씨는 전한다. 물론 보수세력들의 반대도 만만치 않았다. 일례로 베네수엘라의 의사들은 세계최고 의료수준을 자랑하는 쿠바의사들을 돌팔이라고 매도하면서, “쿠바 의사 죽이고 애국자 되자”라는 입에 담지도 못할 슬로건을 내걸고 실제 실행에 옮기기도 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국민들, 그리고 보수적인 서방의 언론들 조차도 사회사업의 성과들에 대해서는 한결같이 칭찬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지난 2006년 12월 ’Venezuelanaysis’의 기사를 보면, 2007년 베네수엘라 정부 예산 536억달러 중 44%가 무상의료와 교육이 포함된 사회보장비에 쓰일 예정이다. 지난해 3월 이 매체가 차베스 정부의 성과를 분석한 자료를 보면, 1998년 총 인구 중 60~70%가 기본적인 의료 혜택을 받지 못했지만, 2005년에는 이들 중 70%가 거주 지역에서 의료 혜택을 받고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98년 7%였던 문맹률도 현재는 모두 퇴치한 것으로 유네스코 보고서는 밝히고 있다.


야루마 로드리게스 씨에게 "볼리바리안 대학에서 학생은 어떻게 선발하는가?"라고 물어보았다. 야루마 씨는 "따로 입학시험은 없으며 선착순으로 학생을 선발한다"는 충격적인 대답을 했다. 그리고, 지방에 사는 학생들을 위해 분교를 여러 곳에 건설하고 있다고 한다. 베네수엘라의 무상교육 프로그램들의 특징은 학습과 지역의 사회사업을 연결시킨다는 점이다. 학생에게는 학기마다 과제가 주어지는데, 과제의 내용은 지역에서의 사회사업활동과 연계시키는 것이라고 한다. 재미있는 사실은 학생을 평가하는 방식이었다. 우리나라처럼 시험문제를 풀어서 점수를 부여하는 방식이 아니고 학생들이 회의를 통해서 서로를 평가하고 총화를 진행한다. 장학금을 줄때도 학생들이 모여서 회의를 통해 가장 어렵고 장학금이 필요한 사람에게 준다고 한다. 베네수엘라의 무상교육 프로그램 자체가 민주주의의 학교라는 느낌이 들었다.





▲ 대학 내에서 체스를 두고 있는 학생들의 모습. 여유롭고 한가로운 모습이다

볼리바리안 대학을 떠나 다음으로 방문한 곳은 리베르따도르 주에 있는 지역공동체.


이 곳에서 우리는 무상교육 프로그램의 일환인 ’미션 로빈슨’을 수업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미션 로빈슨’은 문맹퇴치와 초등교육을 담당하는 프로그램이다. 교실에서 수업중인 78세의 까를로따 뻬레스 씨는 “이름이 어떻게 되세요?”는 물음에 이름을 직접 써보였다. 그는 “늦었지만 이제라도 글자를 읽게 돼 기쁘다”고 말했다. 뻬레스가 공부하고 있던 자그만 교실에는 다양한 연령대의 사람들이 10명 내외로 모여서 영상자료를 보며 학구열을 불태우고 있었다. 수업 진행을 돕는 야릭사 모따 씨는 “600여명이 글을 익히고 초등교육을 받고 있다”고 설명했다. 모따와 같이 수업을 진행하는 이들은 대개 이 지역 자원봉사자들이다. 





▲ 리베르따도르 주의 지역공동체 건물. 예전에는 경찰서 건물이었는데 주민들이 자치공동체 건물로 개조했다고 한다. 왼쪽에는 체 게바라, 오른쪽에는 시몬 볼리바르의 얼굴이 인상적이다. 가운데에 있는 94.6FM이라는 글씨는 이 건물에 있는 지역공동체 FM 방송국을 나타내는 것이다

 



▲ 지역 공동체 활동가인 야릭사 모따. 그녀가 우리에게 미션 로빈슨 프로그램에 대해 설명해 주고 있다. 손에 들고 있는 비디오 테잎은 쿠바에서 제작한 문맹퇴치 교육용 자료이다. 베네수엘라의 무상교육 프로그램에도 쿠바는 헤아릴수 없는 많은 도움을 주었다. 같은 스페인어를 사용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기도 하다



▲ 미션 로빈슨 수업모습. 영상 자료를 보면서 열심히 공부를 하고 있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따로 교사를 두지는 않고 수업을 도와주는 진행자가 있다고 한다. 독특한 방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 78세의 까를로따 뻬레스 씨가 우리에게 자신의 이름을 써보이고 있다



▲ 미션 로빈슨에서 사용하는 교재

 



▲ 건물 내부에 있는 지역공동체 방송국의 모습. 한참 바쁘게 진행하고 있는 것 같아서 제대로 말을 걸지 못했다



▲ 지역 주민들이 무료로 사용할 수 있는 컴퓨터실. 주로 아이들이 많이 사용한다고 한다. 어디서나 아이들은 컴퓨터를 좋아하는 것 같다. 마침 이 날은 컴퓨터의 시스템을 정비하는 날이라서 사람이 없었다. 컴퓨터 화면에 동일하게 떠 있는 창들이 바로 시스템 정비중임을 알리는 내용. 가는 날이 장날이라더니... ^^



▲ 성을 배경으로 기념촬영. 가운데에서 빨간 티를 입고 있는 것이 필자. 가운데 군인은 이 곳을 지키는 예비군이다

 



▲ 성 내부의 공간을 학교로 이용하고 있었다. 무상교육에서 중등교육을 담당하고 있는 ’미션 리바스’ 수업을 받기 위해 모여있는 주민들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 성 내부의 모습. 이 곳이 차베스가 쿠데타 실패를 인정하는 방송 인터뷰를 한 곳이라고 한다

방문일정을 마치고 인천공항 행 비행기를 타고 오면서 베네수엘라에서 만난 사람들의 얼굴들이 떠올랐다. 그들은 하나같이 희망에 차고 혁명의 열정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의 표정 속에서 나는 베네수엘라의 21세기 사회주의 혁명이 성공하리라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이것으로 아쉽지만 베네수엘라 방문기를 마치겠습니다. 부족한 글이나마 관심가지고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궁금한 것이 있으시면 reltih@nate.com 으로 연락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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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네수엘라 혁명의 수도 카라카스 방문기 (3)

1월 29일에는 아침부터 언론사를 돌아다녔다.

 

우리가 처음 방문한 곳은 Diario VEA 라는 작은 신문사였다. 20여명의 기자가 일을하고 발행부수는 하루 10만부 정도라고 한다. 차베스가 추진하는 사회주의 혁명을 지지하고 대중들에게 진실을 알리려는 혁명적 열정으로 가득차 있는 곳이었다. 이러한 소규모의 진보적 언론사들이 2002년 4월 보수반동 쿠데타 이후에 많이 생겼다고 한다. 2002년 4월에 미국의 사주를 받아 혁명에 반대하는 보수반동세력이 쿠데타를 일으켰는데 보수언론들은 진실을 감추고 대중들을 호도하기만 했다. 물론, 그 쿠데타는 진보적 군인들과 민중들이 대통령궁과 거리를 탈환하고 섬에 갇힌 차베스를 구출하면서 극적으로 반전되었다.

 

이 신문 편집장 루이스 사라가는 “2002년 차베스가 보수세력의 쿠데타로 잠시 물러났을 때 보수적인 방송매체들은 만화영화 ‘톰과 제리’ 등을 방영하며 상황을 보도하지 않았다”며 “그러나 카라카스의 빈민가 까띠야 지역의 공동체 방송국은 차베스는 사임한 것이 아니며 보수세력 등이 쿠데타를 벌이고 있다는 사실을 전했고, 이로 인해 이 지역에서 주민들의 시위가 크게 일어났다”고 말했다.

 

 

▲ 진보적 신문사인 Diario VEA 의 정문 모습이다.

 

 

▲ Diario VEA 내부의 안내데스크. 차베스에게 투표하라는 포스터가 인상적이다.

   

 

▲ Diario VEA 편집장 루이스 사가라 씨가 우리에게 진보적 언론의 상황에 대해 얘기해주고 있다.

 

 

▲ Diario VEA 신문의 1면 모습. 스페인어를 모르는지라 도대체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

 

다음으로 방문한 곳은 1941년에 설립했으며, 베네수엘라 최대 발행부수를 자랑하는 Ultimas Noticias.

진보적 성향의 일간지라고 한다. 발행부수 2위와 3위를 달리는 El Nacional 과 El Universal 은 극렬한 보수신문.

Ultimas Noticias 는 서민들이 많이 보고 El Nacional 과 El Universal 은 부자들이 주로 본다고 한다.

이 곳에서 기자와 인터뷰를 했는데, 다음날 우리가 방문한 것이 신문에 나온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베네수엘라에서는 전체 언론의 70% 이상을 시스네로스 그룹 등 몇 개의 미디어 재벌이 소유하고 있다. 이 가운데 시스네로스 가문은 세계 39개국에 70개 계열사를 거느리고 있다. 시스네로스 그룹의 연간 매출액은 2002년 기준 35억달러(3조3천억원)에 이른다. 이들 거대 언론재벌들이 소유하고 있는 상업방송은 기득권의 대변인 역할을 해왔다.


 

▲ Ultimas Noticias 신문사 건물 모습. 최대 발행부수 답게 엄청나게 큰 건물을 사용하고 있었다.

 


▲ Ultimas Noticias 신문사 내부의 모습. 인력과 규모가 상당한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 기념촬영. 맨 왼쪽의 빨간티를 입은 사람이 필자. 가운데에 신분증을 걸고 있는 사람이 Ultimas Noticias 의 기자. 맨 오른쪽의 아름다운 여성이 베네수엘라 외교부 직원 다니엘라 세고비아.

 

이번에는 방송국을 방문했다. VIVE TV 라고 불리는 방송국인데, 국영방송이었다. 기존의 방송들과는 달리 공동체, 학생, 노동자, 농민들이 방송에 참여하고 만들어나가는 진보적인 방송국이었다. 규모는 크지 않았지만 혁명적 에너지가 넘치는 곳이었다.

프로듀서 에릭 가나 씨는 “엘리트들이 만든 프로그램을 일방적으로 전달하던 기존 방송구조를 바꾸려고 노력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농민활동가가 취재를 요청하면 그들의 이야기를 방송에 내보내기도 하고, 시민들이 스스로 제작한 프로그램을 방영하기도 한다”고 말했다. 하루 24시간 차베스와 혁명에 반대하는 방송을 하는 방송국, 하루에 12시간 차베스와 혁명에 반대하는 방송을 하는 방송국. 이것이 베네수엘라의 언론 현실이라고 한다. 그러나, 진보적이고 대안적인 매체들이 열심히 일하는 모습을 보니 미래는 밝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 VIVE TV 내부의 모습. 큰 선전물이 인상적이다. 담배는 절대 못피게 되어있다.

 

 

▲ 분주하게 돌아가는 방송국 내부의 모습. 매우 활기가 넘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 민주노동당 베네수엘라 혁명 연수단 단장인 이승헌 대외협력실장을 취재하고 있는 방송국 스탭들

 

 

▲ 기념촬영. 맨 왼쪽에서 빨간 옷 입고 있는 사람이 필자. 가운데 하얀 머리의 사람이 방송국 PD

 

 

▲ 장 폴 샤르뜨르 가 언론에 대해 언급한 말이라고 한다. 방송국 입구에 크게 걸려있었다. '언론의 자유라고 하는 것은 언론종사자의 자유가 아니라, 언론을 통해 옳바른 정보를 얻을 수 있는 민중들의 자유'라는 내용의 문구라고 한다. 확인은 불가능. ^^

 

다음날인 1월 30일 일정은 국회의원 면담과 의회 방문으로 시작했다.

우리가 만난 의원은 집권당(MVR)의 청년위원장을 맡고 있기도 한 Tania D'Amelio 씨이다. 2006년 12월에 있었던 베네수엘라의 대통령 선거에서 차베스가 63% 달하는 높은 지지로 당선되는데는 청년들의 힘이 크게 작용했다고 한다. 선거 연합전선체인 Commando Miranda 의 청년조직을 총괄했던 사람이기도 하다. 우리에게 대통령 선거 당시의 일들과 현재 진행되고 있는 베네수엘라 사회주의 연합당 건설과정 및 혁명에 대한 입장 등에 대해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다. 지역주민자치의회가 활성화되고 있다는 것을 언급하며 민중들이 지역차원에서도 정치의 주인이 되는 조치들이 취해지고 있다고 역설했다. "가난을 끝장내는 유일한 방법은 빈민들에게 권력을 주는 것" 이라는 차베스 대통령의 철학이 주민자치의회로 구현되고 있었다. 청바지에 티셔츠를 입은 모습에서 소탈하고 친근한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면담 후에 곧바로 의회를 방문했다. 의회 안의 여기저기를 둘러보면 설명을 들었는데 벌써 한 달이 넘게 지나고 나니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

 

 

▲ 국회의원들이 사무를 보는 건물의 입구이다. 중요인사들이 많은 만큼 보안검색이 철저했다.

 

 

▲ 국회의원 Tania D'Amelio 씨. 열정적이면서도 친절하게 설명을 해주어서 정말 고마웠다.

 

 

▲ 의회 건물의 모습. 황금색 돔형 지붕이 눈에 띤다. 금일까? 페인트일까? ㅎㅎ

 

 

▲ 의회 내에서 법안 공동회를 하는 모습. 진지하게 듣고 있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 의회 건물 내부에 있는 시몬 볼리바르의 초상화. 가장 실제 모습에 가까운 초상화라고 한다.

 

 

▲ 의회 내부에 있는 중요한 상자. 베네수엘라 독립선언서가 들어있다고 한다. 1년에 한번씩 독립기념일 날에 대통령이 상자를 연다고 한다. 역시 상자에는 시몬 볼리바르의 흉상이 조각되어 있었다.

 

 

▲ 의원들이 회의를 하는 곳. 우리가 만난 Tania 의원의 자리는 맨 앞에 있었다. 아마도 발언을 열심히 하기 때문인 듯. ^^

 

 

▲ 의장석의 모습. 의장석 위에 있는 국가문양과 8개의 별이 인상적이다. 원래는 별이 7개 였다. 7개의 별은 베네수엘라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7개의 주를 상징하는 것이었는데 차베스가 '볼리바르의 별' 이라며, 별을 하나 더 추가했다고 한다. 그리고, 국가문양에 보면 말이 왼쪽으로 달리고 있다. 원래는 오른쪽을 향하고 있었는데 차베스가 오른쪽은 제국주의의 방향이라고 지적하며 왼쪽으로 바꿨다고 한다.

 

 

▲ 의회의 분수 앞에서 기념촬영. 빨간옷을 입은 필자의 옆에 있는 사람이 Tania 의원. 청바지에 쫄티를 입은 모습을 보고 누가 국회의원이라고 하겠나. 베네수엘라의 21세기 사회주의 혁명이 국회의원들도 민중들과 닮은 사람으로 만들고 있었다.

 

방문기는 4부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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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네수엘라 혁명의 수도 카라카스 방문기 (2)

1월 28일 일요일에는 짜여진 일정은 없었다. 하지만, 어렵게 방문한 베네수엘라에서 일요일이라고 그냥 놀수만은 없는 일.

마침, 일요일 새벽에 뒤늦게 합류하게 된 황세영 진보정치 기자, 임은경 민중의소리 기자, 송정순 당원과 함께 까라까스 시내로 나섰다.

우리가 방문한 곳은 19세기 초에 라틴아메리카를 스페인 제국주의로부터 해방시킨 시몬 볼리바르를 기념하는 박물관이었다.

 

시몬 볼리바르는 베네수엘라 사람들에게 항상 중요한 역사적 인물이었지만, 차베스 정권이 들어서면서 혁명의 핵심적 내용을 형성하는 인물로 내세워졌다. 차베스와 베네수엘라 민중들이 만들어가는 혁명이 "볼리바리안 혁명(시몬 볼리바르를 따르는 혁명)"이라 불리는 것만 봐도 그 중요성을 새삼 알수 있다. 시몬 볼리바르는 미제국주의에 맞서서 라틴아메리카를 민중적으로 통합하려는 차베스 대통령의 아이콘인 것이다.

 

 

▲ 시몬 볼리바르 박물관 앞에서 기념사진. 맨 오른쪽에서 기념품을 한무데기 들고 있는 사람이 필자
 
▲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시몬 볼리바르의 초상화
 
 
▲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시몬 볼리바르가 입던 의복들
 
▲ 베네수엘라 국가를 큰 돌판에 새겨놓은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 시몬 볼리바르의 친필 서류
 
박물관 내부는 규모가 크지는 않았지만, 시몬 볼리바르에 관한 것은 작은 것이라도 빠뜨리지 않고 모아놨다는 인상을 받았다.
시몬 볼리바르의 전투를 그당시의 신문기사, 작전도와 함께 배치해 놓은 것은 매우 인상적이었다.
박물관 바로 옆에는 시몬 볼리바르의 생가가 붙어있었다. 그곳도 당연히 빠뜨리지 않고 방문했다.
 
▲ 시몬 볼리바르의 생가 앞에서 기념사진 한장. 여전히 맨 오른쪽에서 기념품을 들고 있는 사람이 필자.
 
▲ 시몬 볼리바르의 생가 내부의 모습. 귀족 출신이라 집이 꽤 으리으리했다.
 
▲ 시몬 볼리바르가 자던 침대의 모습
 
▲ 집의 내부에는 이와같은 혁명 벽화들이 가득했다. 후대의 사람들이 볼리바르를 기리기 위해 그려넣은 것이다.
 
박물관과 생가를 방문하고 밖으로 나왔는데, 박물관의 벽에 크게 쓰여진 글씨가 눈에 들어왔다.
 
"자연이 우리를 거역한다면, 우리는 맞서 싸워 복종시킬 것이다"
 
1812년 3월에 볼리바르가 한창 스페인으로부터 해방전쟁을 벌이고 있던 상황에서 엄청난 지진이 일어나서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스페인 편이었던 카톨릭 사제들은 신도들에게 볼리바르의 해방전쟁에 대한 신의 분노로 지진이 일어났다고 소문을 냈다.
이에 대해 시몬 볼리바르가 단호하게 "자연이 우리를 거역한다면, 우리는 맞서 싸워 복종시킬 것이다." 라는 말로 대응했다.
혁명가의 기풍을 느낄수 있는 매우 인상적인 얘기이다.
 
▲ 위에 언급한, 시몬 볼리바르가 했던 유명한 말을 새겨넣은 벽의 모습. 위쪽의 국가문장들(콜롬비아, 베네수엘라, 에콰도르, 볼리비아, 페루, 파나마)은 볼리바르가 해방시킨 나라들이다.
 
바로 근처에는 시몬 볼리바르 광장이 있었다. 광장의 가운데에는 시몬 볼리바르의 동상이 당당하게 서있었다.
마침 미션 꿀뚜라의 일환으로 베네수엘라의 민중 노래패가 공연을 하고 있었다.
우리는 운좋게도 이 노래패의 뮤직비디오가 담긴 DVD와 노래가 담긴 CD를 얻을 수 있었다.
근처에는 까라까스 시청도 있었다. 그 곳에 방문하니 마침 볼리비아의 에보 모랄레스 대통령을 노벨 평화상 후보로 추천하자는 캠페인이 벌어지고 있었다. 국경을 뛰어넘은 연대가 까라까스 시에서도 벌어지고 있는 모습을 발견했다.
 
▲ 광장 가운데에 우뚝 솟아있는 시몬 볼리바르의 동상
 
▲ 광장 가운데서 공연을 하고 있는 민중 노래패. 매우 유명한 노래패인 듯 보였다.
 
▲ 까라까스 시청의 모습.
 
▲ 까라까스 시청 내부의 모습.
 
▲ 시청 내부에 전시된 볼리비아 에보 모랄레스 대통령 관련 포스터들
 
시몬 볼리바르 광장을 떠나 차를 타고 이동을 해서 방문한 곳은 시몬 볼리바르의 유해가 모셔진 곳이었다.
군인들이 정문에서 경비를 서고 있었고, 매우 엄숙한 느낌을 주는 곳이었다.
안에 들어서니 정면으로 시몬 볼리바르의 동상과 함께 유해를 모신 관이 있었다.
좌우로는 볼리바르의 혁명동지였던 수크레 장군과 미란다 장군의 동상이 서 있었다.
 
▲ 시몬 볼리바르의 유해가 모셔진 장소. 매우 엄숙하고 장엄한 분위기를 느꼈다.
 
▲ 시몬 볼리바르의 유해가 모셔진 관의 모습.
 
까라까스 시내 전체가 시몬 볼리바르를 기념하는 공간인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이렇게 민중들이 200년이 지나도 기릴 수 있는 훌륭한 지도자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우리는 세계에서 가장 길다는 케이블카를 타기 위해서 이동을 했다.
케이블카를 타는 곳은 지상이었다. 도로 위를 지나서 산으로 올라가는데 직접 보기에는 그다지 길지 않아 보였다.
그러나, 그것은 착각이라는 것을 금방 알게되었다. 케이블카에 몸을 싣고 올라가는 과정에서 내가 도착지점이라고 생각했던 부분은 단지 한개의 작은 봉우리를 넘어가는 초반단계에 불과했다. 올라가는데에만 20분이 넘게 걸린 것 같다.
올라가는 과정에서 까라까스 시내를 한눈에 볼 수 있었다. 산에 둘러싸인 분지라는 것을 바로 알 수 있었다.
 
▲ 케이블카를 타기 위해 기다리는 사람들
 
▲ 선을 따라 올라가고 있는 케이블카의 모습.
 
▲ 케이블카에서 내려다본 까라까스 시내의 모습. 지상부터 도대체 얼마나 올라온 것인지.... 정말 길다.
 
케이블카의 도착지는 산봉우리의 정상이었다. 그곳에 놀이시설과 호텔을 지어놓았다. 휴일이라 그런지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산봉우리에서 내려다 본 풍경은 정말 입을 다물수 없을 정도로 장관이었다. 처음에 우리 돈으로 2만원 정도나 하는 케이블카의 가격에 불평을 했지만 케이블카를 타고난 후에는 오히려 가격대비 만족도가 최고라고 얘기하게 되었다.
 
▲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선 산봉오리에서 내려다본 모습. 그 감동을 이 사진은 100분의 1만큼도 전하지 못하고 있다.
 
케이블카를 타고 다시 20여분에 걸쳐 내려온 후에 우리는 빈민가 지역을 방문했다.
나중에 알고보니 방문한 빈민가는 체류기간 내내 우리가 타고다닌 차의 운전을 맡은 분이 사는 곳이었다.
동네에서 만난 사람들은 차베스에 대한 애정이 넘쳐흘렀다.
총기사고로 턱부분을 크게 다친 아들을 둔 아저씨는 차베스 덕분에 아들이 병원에서 공짜로 치료를 받았다고 얘기했다.
나는 일부러 차베스 지지문구가 쓰여진 빨간 T셔츠를 입고 다녔다.
외국인임이 확연하게 드러나는 동양인 외모의 사람이 차베스 지지 T셔츠를 입고 다니는 것이 신기했는지 사람들은 간혹 나에게 말을 걸기도 하였다. 어떤 사람은 자신이 MVR(차베스가 소속된 집권당)의 당원임을 밝히면서 매우 친절하게 대했다.
 
▲ 빈민가에서 만난 사람들과 함께 사진한방. 왼쪽에서 두번째에 위치한 필자는 항상 빨간티를 입고 다녔다. 아이들 한손에 안고 있는 아저씨가 바로 아들이 턱에 총상을 입은 사람이다. 이 분이 우리의 지역병원 방문을 도와주었다.
 
우리가 방문한 빈민가에 위치한 병원을 지역주민의 도움으로 방문할 수 있었다. 
지역병원은 꽤 규모가 있는 곳이었으며, 무상의료 프로그램인 바리오 아덴트로에 소속되지는 않았지만 역시 무상의료가 실시되고 있는 공공병원이었다.
그 곳에서 우리는 두 명의 의사와 얘기를 나눌 수 있었다. 둘 중에 한명은 외국에서 온 의사였다. 정확히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아마 아르헨티나였던 것 같다.
이 의사는 한달에 400달러를 받고 일하고 있었으며 자신의 활동에 매우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자신의 국가에서 의사로서 편하게 돈벌수도 있는데 이렇게 베네수엘라까지 와서 의료봉사를 하는 모습에서 라틴아메리카의 미래가 밝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한편으로는 같은 스페인어를 사용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 빈민가의 병원에서 만난 의사들. 오른쪽이 외국(아마도 아르헨티나?)에서 온 의사. 혁명과 의료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얘기하고 있다.
 
방문기는 3부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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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네수엘라 혁명의 수도 카라카스 방문기 (1)

지난 1월 24일 인천공항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캐나다 밴쿠버 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최종 목적지는 베네수엘라의 수도 카라카스. 밴쿠버에서 토론토 행 비행기를 갈아타고, 토론토에서 카라카스 행 비행기를 또 갈아타는 긴 여정이었다.


나는 민주노동당의 베네수엘라 혁명 답사단 및 정당 교류 실무협상팀의 일원으로 카라카스에 가게 되었다. 그동안 우고 차베스 대통령이 이끄는 베네수엘라의 혁명과정을 연구하고 책을 출판한 성과가 민주노동당의 정당교류로 이어져서 매우 흐뭇한 기분이었다.

함께 베네수엘라로 출발한 사람들은 이승헌 민주노동당 대외협력실장, 김영욱 진보정치연구소 부소장, 조수연 민주노동당 국제부장, 통역을 맡은 분이다. 그 외에도 임은경 민중의 소리 기자, 황세영 진보정치 기자, 송정순 당원이 후발대로 따로 출발했다.


토론토에서 하루를 묵고 카라카스 행 비행기를 올라탔다. 드디어 마지막 비행기다. 약간의 사고가 생겼다. 후발대와 함께 토론토 공항에서 합류하기로 했는데 후발대가 오지 않은 것이다. 후발대는 다행히 며칠 후 카라카스에서 월요일에 합류했는데, 사정을 들어보니 갈아 탈때 시간이 지체돼서 비행기에 못 탔다고 한다.


카라카스의 공항에 거의 다 왔을 때 비행기의 창 너머로 주변의 장면을 사진에 담았다.

 

▲ 비행기의 창밖으로 보이는 베네수엘라의 풍경

 

카라카스 공항에 도착한 시간은 현지시간으로 오전 7시 30분경이었다. 오전임에도 불구하고 날이 꽤 밝았고 하늘이 무척 파랗다는 인상을 받았다. 카라카스 공항은 인천공항에 비하면 규모가 작고 허름했다. 주변의 사람들이 죄다 스페인어를 말하는 것을 보니 베네수엘라에 오긴 온 모양이다.


베네수엘라의 외교부에서 우리를 맞이할 직원이 나와 있을 것이라는 답신을 받았지만 내심 걱정이 되었다. 중남미를 방문한 사람들에게서 중남미 특유의 만만디 성향에 대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기우였다. 공항을 나서자마자 한 아리따운 여성이 우리쪽의 통역에게 한국에서 왔냐고 말을 건냈다. 순간 무척 안심이 되었다. 외교부 직원인 여성의 이름은 다니엘라 세고비아. 나중에 잘 안 되는 영어로 물어봤는데 나이는 23살.

 

▲ 베네수엘라의 첫날부터 마지막날까지 우리를 가이드해준 다니엘라 세고비아. 외교부의 아시아 담당 직원.

 

다니엘라 세고비아를 따라 공항을 나서서 준비된 차량에 탑승했다. 우리가 묵을 호텔로 이동을 하는 것이었다.

공항에서 도심으로 이동하는 동안 창밖을 통해 산에 있는 수많은 빈민가들이 눈에 들어왔다. 비라도 심하게 오면 금방 무너질 것 같은 절벽에 위험하게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있었다. 저 곳에 사는 대부분의 빈민들이 차베스 대통령을 열렬히 지지하는 사람들이다.


공항에서 시내로 가는 도로상황이 썩 좋지 않았다. 산길을 굽이굽이 돌아서 시내로 들어갈 수 있었다.

 

▲ 산 위에 보이는 조그만 상자같은 것들이 빈민가의 집들이다. 밤에 산을 보면 집에 불이 켜저 있는 것이 마치 크리스마스 트리같다.

 

시내의 호텔들에 자리가 숙소를 구하는데 꽤나 어려움을 겪었다. 다니엘라가 초조해하면서 우리에게 매우 미안해했다. 우리는 다니엘라의 긴장을 풀어주기 위해서 말을 걸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어렵사리 구한 호텔은 멜리야 호텔. 베네수엘라에서 가장 좋은 호텔이라고 한다. 전화위복이란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일까?


호텔에 여장을 풀고 잠시 쉬다가 외교부 건물을 방문해서 아시아 담당 국장을 만났다. 아시아 담당 국장인 또레스 씨는 우리에게 환영의 뜻을 밝히며 향후 있을 일정 등에 대해 설명을 해주었다. 도착한 날의 일정은 이것으로 마무리되고 우리는 간단하게 이후의 상황에 대해 공유를 하고 잠자리에 들었다.


한국과 13시간 차이가 나는 베네수엘라는 그야말로 낮과 밤이 정반대인 곳이다. 시차적응에 매우 애를 먹었다. 잠이 들어도 오래지 않아 깨는 일이 많았다. 억지로 잠을 청한 후 다음날인 현지시간 27일(토) 아침에 호텔 앞에서 우리는 차량을 타고 베네수엘라 혁명을 엿볼 수 있는 곳으로 이동했다.


우리가 방문한 곳은 'FABRICIO OJEDA'라고 불리는 Nucleo de Desarrollo Endogeno(자생적 발전의 핵) 이다. 자생적 발전이라는 개념은 외부에 의존하지 않고 내부에서 자기완결성을 가지는 경제 및 생활구조를 만드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국가차원에서 자생적 발전이라고 하면, 석유산업 의존도가 강한 베네수엘라의 경제구조를 다각화 하는 것이다.


지역차원의 자생적 발전은 지역에 Nucleo(핵)을 건설하는데, 여기에는 의료시설, 협동조합, 교육시설 등이 한꺼번에 갖춰져서 자기완결성을 가지는 공동체가 건설되는 것이다. 우리가 방문한 곳은 바로 이 자생적 발전의 핵의 시범지구이다.

 

▲ 21세기 사회주의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간판. 자생적 발전의 핵(Nucleo de Desarrollo Endogeno) 지역 입구에 있다.  

 

이 지역에서 우리는 의료시설을 방문했다. 무상의료 시스템으로 유명한 미션 바리오 아덴트로의 2단계에 해당하는 병원이었다. 1단계는 Consultorio(진료소)라고 불리는 작은 보건소이고, 2단계는 왠만큼의 규모를 가진 2차 의료기관이었다. 우리가 방문한 지역의 2차 의료기관은 'Fabricio Ojeda' Clinica Popular 라고 불리는 곳이었다. 이 병원의 소장이 나와서 우리에게 설명을 해주었다.


이 병원에는 17명의 의사가 상주하고 있다고 한다. 내과, 가정의학, 방서선, 치과 등 왠만한 진료는 이곳에서 해결되며 당연히 치료비는 무료다. 하루에 500명 정도가 이용한다고 하는데 24시간 쉼 없이 진료한다고 한다. 이 의료기관은 단순히 병을 치료하는 것뿐만 아니라 지역의 주민들에게 예방의학을 가르쳐서 병에 걸리지 않도록 하는 부분에 신경을 많이 쓴다고 했다.


조금 짖궃은 질문을 했다. "민간의료기관보다 보수가 적을 텐데 의사로서 어떻게 생각하느냐?"

소장은, 자신은 이 일에 만족하며 혁명사업에 함께 하는 것에 보람을 느낀다며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 공공의료기관이 무상으로 치료를 해주는데다가 서비스의 질도 좋아져서 민간의료기관들을 대체해가고 있다고 덧붙였다. 외국인도 무상으로 의료서비스를 받을 수 있다는 말이 참 인상적이었다.

 

▲ 2차의료기관의 소장. 전염병 분야의 전공의라고 한다. 우리에게 병원 내부를 다니며 친절하게 설명을 해주었다.

 

▲ 치과의 모습. 병원내부는 검소해보이면서도 깨끗했다.

 

▲ 감기 치료를 받는 아이들의 모습.  

 

▲ 기념촬영. 왼쪽부터 김영욱(진보정치연구소 부소장), 통역, 다니엘라(외교부 직원), 보건복지부 직원, 병원 소장, 이승헌(민주노동당 대외협력실장), 임승수(필자)

 

이 병원의 바로 옆에는 154명의 조합원들이 일하는 협동조합이 있었다. 의복을 만드는 곳이었다. 자생적 발전의 핵답게 직장, 병원 등의 기관들이 한곳에 모여 있었다. 이곳의 모든 조합원들은 같은 임금을 받고, 조합장과 각 조의 조장을 조합원 직접 투표로 선출한다.


협동조합에 대해 설명하는 분은 조합의 자금을 담당하는 분이었는데, 이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이전에는 자본주의적 회사에서 착취당하면서 살았거나 혹은 실업자로 지내던 사람들이라고 일러준다.


이 협동조합은 미션 부엘반 까라스(Mision Vuelvan Caras)의 일환으로 2004년에 설립되었다고 하며, 국영석유회사인 PDVSA의 도움으로 회사를 건설했고, 정부가 초기운영자금으로 20억 볼리바르를 대출해줬다고 한다. 무이자로 대출해주었으며 원금도 아직 상환유예받고 있다고 한다.


군복이나 공공부분에 필요한 옷들을 만든다고 한다. 조합원들은 INCE라고 하는 기관에서 전원이 교육을 받는다고 한다. 예를 들어서 절반이 일을 하고 나머지 절반은 일을 하는 식으로 교육이 진행된다고 한다.

이 기관은 협동조합들에게 볼리바리안 혁명 사상과 협동조합에 필요한 내용을 교육하는 기관이다. 일은 오전 8시부터 오후4시 30분까지 한다고 하며, 일과 후에는 무상교육 프로그램인 미션 리바스(Mision Ribas)에 참가해 고등학교 과정을 공부한다고 설명했다.

 

▲ 협동조합 공장으로 들어가는 문의 모습

 

▲ 공장문 앞에서 우리를 보자 열렬하게 차베스를 지지하는 발언을 하는 할아버지의 모습
 
▲ 협동조합 공장 내부의 모습. 여기서 만드는 티셔츠의 색깔은 대부분 붉은 색이다. ^^
 
▲ 협동조합에 대해서 설명해주고 있는 아주머니. 조합에서 자금부분을 담당하고 있다고 한다.

 

'Fabricio Ojeda' 에서의 일정을 마치고 우리는 다음 장소로 이동을 했다. 우리가 도착한 곳은 소아암센터였다. 이곳은 Dr. Gilberto Rodriguez Ochoa 라는 사람의 이름을 딴 병원이다. 그는 훌륭한 의사로서 차베스 정권의 초대 보건복지부 장관이었는데 불의의 사고로 사망했다고 한다. 무상의료 시스템인 미션 바리오 아덴트로의 실질적 설계자로 알려진 인물이기도 하다.

 
▲ 소아암 센터의 정면모습. 매우 현대적이고 깨끗한 병원이다.
 
▲ Gilberto Rodriguez Ochoa 의사의 사진. 병원의 벽에 장식되어 있다.
 

병원 측에서 나온 홍보담당자들이 병원내부를 보여주면서 자세한 설명을 들려주었다. 이 소아암센터는 미션 바리오 아덴트로 3단계에서 속하며, 전국의 8개 암 진단기관과 협력관계를 맺고 있다고 한다. 미션 바리오 아덴트로 3단계면 우리의 종합병원에 해당하는 것이라고 한다. 2006년 8월 20일에 개장했으며, 쿠바 소아암센터를 모델로 한 것이다. 쿠바의사와 간호사들이 와서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고 홍보담당자는 말했다. MRI 등 최신식 의료장비가 가득한 이 병원 역시 이용할 때 무료라고 한다. MRI를 바로 해보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 소아암 센터를 소개해주고 있는 홍보담당자.
 
▲ 병원 내부의 벽에 걸려있는 시몬 볼리바르의 그림. 시몬 볼리바르는 라틴 아메리카를 스페인 제국주의로부터 해방시킨 19세기 영웅.
 
▲ 병원에 설치되어 있는 MRI 기계. 이것도 역시 무료로 이용할 수 있다고 한다.  
 
▲ 병원에 있는 최신식 의료장비의 모습
 
▲ 쾌적한 병원 환경.
 
▲ 친절하게 포즈를 잡아 준 베네수엘라 의사의 모습
 
▲ 병원에서도 어김없이 혁명에 관한 선전물을 볼 수 있었다. 체 게바라의 얼굴이 인상적이다.
 
▲ 병원 안에 있는 기도하는 곳의 모습. 국민의 대부분이 카톨릭을 믿는 베네수엘라의 모습을 반영한다.

병원에 있는 의료장비들은 여러 나라들과 협정을 맺어서 들여온 것이라고 한다. 아르헨티나에서 들여온 한 장비는 베네수엘라의 석유와 교환했다고 한다. 이 병원은 의료기관 뿐만 아니라 교육기관의 역할을 하고 있었다. 의학 전공하는 학생들이 이 병원에서 실습을 하고 있었다. 의학도들은 물론 무상으로 교육을 받고 있으며, 장학금을 받는다고 한다.

 

소아암센터라는 특성에 맞게 이 병원에서 치료를 받는 아이들을 위한 공부방을 운영하는 모습도 인상적이었다. 2007년 1월 27일 현재 36명이 입원해 있으며, 이틀 뒤인 29일 월요일에 16명이 더 입원한다고 홍보담당자는 설명했다. 

현재 병원의 가동율은 50% 정도이며 이것은 의사가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하지만, 현재 이 병원에서 공부를 하는 의학도들이 있기 때문에 2년 뒤에는 가동율이 100%로 올라간다고 말했다.

이 병원은 142명이 입원 가능하고 중환자 병상 33개, 4개의 수술실이 있다. 베네수엘라 국민뿐만 아니라 외국인에게도 완전 무상의료 서비스를 제공한다. 실제 볼리비아에서 온 아이도 입원해 있다고 한다.

 

병원의 바로 옆에는 지방 혹은 외국에서 온 환자들의 가족이 머물 수 있는 숙소를 짓고 있었다. 2개월 후에 완공된다고 하는데, 이 숙소 또한 무상으로 제공된다고 한다. 21세기 사회주의를 내세우며 새로운 사회를 만들고 있는 베네수엘라의 모습이 참으로 감동적이다. 

이러한 사업에 필요한 재원은 국영석유회사인 PDVSA의 석유사업을 통해 얻은 이익에서 나온다. 이전에는 미제국주의와 국내소수 기득권만을 위해 봉사하던 PDVSA가 혁명정부가 들어서면서 민중을 위한 회사로 바뀐 것이다.

 
▲ 입원해 있는 아이의 모습. 치료 받고 꼭 낫기를 바란다.
 
▲ 식당에 모여있는 의학도들의 모습. 전액 무료로 공부하며 장학금을 받는다고 한다.
 
▲ 병원 옆에 짓고 있는 숙소의 모습. 지방이나 외국에서 온 환자의 가족들이 무료로 머물 수 있는 곳이다.
 
▲ 소아암 센터 앞에서 기념사진 촬영.
 
소아암 센터를 방문한 후에 우리는 차를 타고 라 베가 (La Vega) 지역으로 이동했다. 이곳은 범죄자들이 많이 모이는 곳이기 때문에 치안에 문제가 있어서 무척 조심을 했다. 빈민가 지역이라서 그런지 차베스를 지지하는 포스터나 낙서들이 더욱 눈에 띄었다.

생활필수품들을 시장가의 40% 가격으로 판매하는 메르깔 상점에 들렀다. 주말이라서 물건이 많이 비어있었다. 사람들이 많이 사가는 모양이다.

 

▲ 차베스를 지지하는 문구로 가득찬 벽의 모습.
 
▲ 치안문제 때문에 카라카스의 상점들은 이렇게 철문으로 굳게 무장되어 있다.
 
▲ 철조망 너머로 파란집이 생필품을 40% 가격으로 싸게 파는 메르깔 상점이다.
 
▲ 라 베가 지역의 진료소(Consultorio) 모습. 빨간벽돌 집이 진료소이다. 쿠바 의사가 머무는 곳.
 

방문기는 2부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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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차베스는 민중들의 지지를 받게 되었을까 - 인터뷰로 엿본 당선이유

12월 3일에 있었던 베네수엘라 대통령 선거에서 ‘21세기 사회주의’를 내세운 우고 차베스 대통령이 다시 당선되었다. 이미 언론들에서는 다양한 시각에서 분석기사들이 나오고 있다. 여기서는 조금 시각을 달리해서 차베스가 2004년에 알레이다 게바라(체 게바라의 딸)와의 인터뷰에서 언급한 내용들을 다뤄본다. 인터뷰 내용속에는 차베스가 왜 베네수엘라 민중들의 지지를 받게 되었는지를 엿볼 수 있는 내용들이 들어있다. 도움이 되기를 바라며 몇 개의 장면으로 나눠서 소개해 본다.


#장면 1


나는 고등학교 때 야구에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메이저리그에서 투수가 되거나 마가야네스 팀에서 뛰는 것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나는 프로야구 선수가 되는 것이 꿈이었습니다. 나는 군인이 되려고 사관학교에 들어간 것이 아닙니다. 군인이 되는 것이 수도인 카라카스에 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집은 매우 가난했고, 아버지는 카라카스에 학비를 댈 능력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고등학교를 마치고 사관학교에 들어갔습니다. 거기서 1년만 있다가 야구를 하러 떠날 생각이었습니다.

나는 역사를 공부하면서, 독서를 하면서 선주민들에게 무슨 일이 있어났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프레이 바르톨로메 데 라스 카라스 및 다른 역사책들을 읽은 후, 나는 진정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우리를 학살했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되면서 나 자신의 삶과 충돌이 일어났습니다. 우리는 사관생도 시절에 병원 앞에 있는 콜롬부스의 동상을 지나면서 행진을 했습니다. 나는 동료들에게 물었습니다. “도대체 우리가 왜 저 침략자에게 경의를 표해야 하는 거지?” 그것은 정말로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우리 민중들이 권력을 잡고, 새로운 시대를 열며, 잘못된 것을 바로잡는 데는 30년이 걸렸습니다. 콜롬부스 동상은? 우리는 콜롬부스 동상을 끌어내리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거기에 그대로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더 이상 그에게 경의를 표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선주민 저항군 지도자인 과이카이푸로에게 경의를 표합니다. 스페인 사람들이 과이카이푸로의 아내와 아이들을 죽인 후 그를 죽이기 직전에 과이카이푸로는 스페인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이 외쳤습니다. “스페인 놈들아! 와서 이 땅의 자유인, 인디언 과이카이푸로가 어떻게 죽어가는지  봐라.” 우리는 선주민 추장인 마나우, 아이마르, 타마카레스, 카리브 해의 인디언들에게 경의를 표합니다. “아나 카리나 로테 아우노 토토 파파로토 만토로”(카리브 해 원주민의 외침 : “우리만이 유일한 사람이다. 다른 이들은 노예다”) 내가 이 말을 할 때면, 내 안에서 카리브  인의 감정이 느껴집니다. 왜냐하면 나는 아프리카 인의 피가 섞인 인디언이기 때문입니다. 백인의 피도 약간 섞였죠. 우리는 반反백인주의자가 아닙니다.



#장면 2


작년(2003년)에 한창 우리가 ‘석유 테러’라 불렀던 석유파업이 있을 때, 베네수엘라의 기득권층과 그들의 국제 동맹세력(미 제국주의)이 석유 정제소들을 파괴하고, 수백만 리터의 우유를 버리고, 가축들을 죽였습니다. 그래서 먹을 것이 없었습니다. 그들의 계획은 사회 붕괴, 혼란 등을 야기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다방면으로 엄청난 노력을 했음에도, 석유도 없고 천연가스도 없고 음식물도 거의 없었습니다. 나는 피델(카스트로)이 우리에게 콩을 가득 실은 배를 보내주면서 전화로 “나중에 여건이 되면 갚아라”고 말한 것을 기억합니다. 다른 물품들은 브라질에서 왔습니다. 우리는 콜롬비아로부터 우유, 고기, 석유들을 구입했습니다. 그 당시 사람들은 몇 리터의 연료를 사기위해 사흘 나흘을 기다리기도 했습니다.

그 힘든 어느 날 오후에 나는 몇몇 동지들에게 저 산골마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직접 보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산골마을로 갔습니다. 거리는 분주했습니다. 사람들은 쌀, 바나나 등을 찾아다니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근처를 다닐 때 사람들이 우리에게 인사하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그들에게 상황이 어떠냐고 물어보았습니다. 그러던 중 강한 인상의 흑인 할머니가 내 손을 꼭 잡고 끌어당기면서 “차베스, 이리 와봐요”라고 말했습니다. 그 할머니와 다툰 것은 아닙니다. “차베스, 이리 와봐요. 나를 따라와요. 당신이 우리 집에 와보면 좋겠어요.” 우리가 집에 들어갔을 때 그들은 장작 위에 냄비를 올려놓고 쌀, 감자, 파초 등을 요리하고 있었습니다. 노인은 나의 눈을 지그시 보더니 양복저고리를 잡고 말했습니다.

“차베스, 내 집에는 의자가 남아있지 않아요. 당신이 보고 있는 저 장작이 침대 다리에요. 우리는 가구, 지붕을 뜯어서 불을 피울 겁니다. 우리는 문도 떼어낼지 모르겠군요. 그렇게 해서 요리를 할 거에요. 하지만 절대 물러서지 마세요. 차베스.”

우리가 이 나라에서 무엇을 하려는지 알고 있는 300만 명의 사람들이 노인과 같은 신념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그렇게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당신은 물었습니다. “베네수엘라 민중들의 정수는 무엇인가요?” 그들은 전사들입니다. 군대입니다. 예전에 볼리바르는, 베네수엘라는 전투 속에서 태어났다고 말했습니다. 그 당시에 모든 민중들이 전투를 벌였습니다. 민중들은 군대이며,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스페인에 맞서 그들 자신을 희생할 준비가 되어있었습니다.

그러한 민중들은 꿈을 꾸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머릿속에 볼리바르와 같은 꿈, 하나의 국가를 만드는 꿈 말입니다. 돈키호테 같은 볼리바르는 외쳤습니다. “모든 라틴 아메리카를 통합하자...예전에 스페인 땅이었던 아메리카를!!” 그때 그는 군대를 이끌고 포토 시로 갔습니다. 그리고 아야쿠초에서 수크레는 제국주의자들을 쳐부수고 아르헨티나, 리오 델 플라타, 칠레, 아르티가스, 파나마를 통합했습니다. 그는 완전한 연합 해방군을 창설했고, 쿠바와 푸에르토리코를 해방할 계획까지 세웠습니다.

우리의 의지력은 시험받고 있습니다. 우리 민중들은 강하며 사랑스럽습니다. 당신이 쿠바 민중을 안다면 당신은 이미 베네수엘라 민중을 알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볼리바르가 말했듯이 예전에 스페인의 식민지였던 모든 아메리카는 우리의 조국이며, 아메리카의 모든 민중들은 모두 동등하기 때문입니다.



#장면 3


이전에 베네수엘라에서 능숙히 글을 읽을 수 있는 수준에 이르는 사람들은 많아야 연간 15000명 정도 생겼습니다. 2003년에 6개월간 우리는 100만 명에게 읽고 쓰기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단 한 해만에 15000명에서 100만 명으로 폭발적으로 증가한 것입니다.

우리는 각 과정들을 매우 엄격한 기준을 가지고 주시하고 평가하고 촉진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보자면 나는 학교 문턱을 넘어본 적도 없는 102세의 노인이 7주 동안에 글을 배우는 것을 직접 보았습니다. 85세의 할머니도 보았고요. 아버지가 없는 8살, 10살 그리고 12살 먹은 형제들이 눈물을 글썽이며 이렇게 말하더군요. “대통령 아저씨, 우리는 지금까지 학교에 다닐 수 없었는데 지금은 글을 배우고 있어요.” 그 아이들은 지금 학교에 다니고 있고 정규교육 체계의 보호 아래에 있습니다.

이런 것은 초기의 교육 구상이었고 충만한 자신감으로 미션 수크레를 출범시켰습니다. 우리는 문맹퇴치 프로그램에 등록되어 있는 150만 문맹자들의 성공을 지켜보면서 고등학교를 마친 학생들이 대학 교육을 받지 못하는 현실을 깨달았습니다. 거기에 착안해서 미션 수크레가 나오게 되었습니다. 어느 일요일에 대상자들을 소집해보았습니다. 열풍이 일어난 것처럼 60만 명이 넘는 어쩌면 100만에 가까운 사람들이 몰려들었습니다.

그 뒤 우리는 많은 사람들이 초등학교에 입학한 뒤 6년 과정을 마치지 못하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이 사람들을 모아보니 역시 100만 명에 가깝더군요. 우리는 잃어버린 고리를 고안해냈습니다. 어느 날 이른 아침에 피델과 대화중에 우리가 잃어버린 고리를 놓치고 있다고 했지요. 그러자 피델이 이러더군요. “잃어버린 고리라니, 차베스?” “네, 잃어버린 고리란 제2의 교육을 받게 됐는데도 마저 끝마치지 못하는 사람들이죠.” 우리가 그들을 파악해보니 거의 70만 명이었습니다. 보시다시피, 각 부류의 사람들이 자기에게 맞는 미션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베네수엘라에서는 전 인구의 60퍼센트가 배우고 있는 중이죠.

카터 전 미 대통령이 최근 방문해서 카라카스 시의 지역 지도인사를 만났을 때 그는 정확하게 보았습니다. 카터는 나와 나눴던 대화 내용을 TV 기자회견에서 재차 발언해서 과두지배 세력을 분노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는 “이 지역 지도자들과의 만남은 내 생애에서 가장 놀라운 만남 중의 하나입니다”라고 말했어요. 그 지역 모임에서 만난 한 사람은 그 지역에 거주하는 20만 명의 주민들이 지금까지 의사를 구경도 못했다는 말을 카터에게 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쿠바 의사들이 참여하고 있는 미션 바리오 아덴트로에 대해 말했지요.

거의 40년 동안 그 지역의 20만 명이 넘는 주민들에게 의사는 없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응급치료를 기다리다 죽기도 했고, 임산부는 마룻바닥에서 출산을 하고 아이들은 천식과 설사로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의사가 있습니다. 이제 한 시간 내에 의사에게 신속한 치료를 받지 못하는 사람은 그 지역에서 한 사람도 없습니다. 게다가 의사들이 약품도 비치하고 있어서 더 이상 약을 사지 않아도 됩니다. 카터는 이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카터에게 요즘 우리 동네에서는 춤추고 술 한 잔 할 시간이 일요일밖에 없다고 농담을 하기도 했죠. 왜냐고요?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평일 5시 이후에는 학습을 하기 때문입니다. 모든 주민들이 공부하고 글을 배우고 학교 시험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들이 피델이 있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혹자는 나에게 “당신 제정신입니까? 한 해 동안 이 모든 미션들을 시작한다니요?” 지금 물론 광범위한 대중의 참여로 모든 미션들이 진행 중에 있습니다. 되풀이 말하지만 쿠바의 놀라운 지원이 있어 가능했습니다. 비록 많은 사람들이 내가 쿠바 이야기를 꺼낼 때마다 화가 나서 길길이 뛰겠지만 상관없습니다. 나는 내가 어디에 있든, 누구와 있든, 세계포럼에서 연설을 하든지 간에 쿠바에 대한 감사를 공식적으로 상기시키고 부각시킬 것이며 이를 표현하는 데 주저하지 않을 것입니다.



#장면 4


나는 지금 죽음이 한 걸음씩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알레이다, 당신 때문이 아니라 내 자신에게 좀 더 솔직해지기 위해 이런 말을 하는 거예요. 쿠데타가 있었던 2002년 4월 12일 자정에 그들은 사형집행을 하기 위해 나를 해변가로 데리고 갔습니다. 그들이 받은 명령은 일출에 기해서 사형을 집행하라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손에 십자가를 쥐고 예수 그리스도와 체 게바라를 떠올렸습니다. 기관총으로 무장한 군인들과 용병들이 주위를 에워쌌습니다. 그들 중 한 명이 등 뒤로 다가오자 뒤에서 날 쏠거란 생각이 들더군요. 그래서 뒤를 돌아 그 사람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는 그 순간 마음속에서 체 게바라의 모습이 떠오르는 것이었습니다. 체는 그가 죽은 라 이게라마을의 작은학교에 있었습니다. 나는 내 자신에게 이렇게 중얼거렸습니다. “나는 체 동지처럼 죽게 될 것이다. 당당히 맞서자.”

 운이 좋게도 당시의 군사적인 상황덕분에 그때 죽지 않을 수 있었죠. 그 순간에 상공에는 헬리콥터가 날고 있었고 파도는 거칠게 몰아치고 밤하늘의 별들은 반짝이는 가운데 군인들은 총으로 나를 겨누고 있었습니다. 나는 죽을 준비를 하고 있었죠. 그러나 갑자기 나를 감시하던 젊은 군인 하나가 손에 총을 쥐고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대통령을 죽이는 순간 우리도 모두 죽게 될 거야. 저 사람은 베네수엘라 대통령이야.” 갑작스럽게 혼란이 닥쳤고 나는 그들을 진정시키기 위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진정해라. 모두 침착해라. 너희는 모두 내 편이다.” 나는 그들과 대화를 시작했고, 가까스로 협력을 얻어서 결국은 진정시켰습니다. 나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잘 들어라. 나는 포로이니 포로로 대우해라. 그렇지만 내가 베네수엘라의 대통령이란 사실은 잊지 말아라.”

 그 후 그들은 나를 격리시켰고 거의 쉴 시간이 없던 우리는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나는 그들에게 말했습니다. “내일은 새로운 날이 올 것이다. 지금 일어나고 있는 상황을 직시하되 침묵을 유지해라. 서로 죽고 죽이는 일이 일어나선 안된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사회문제에 대해 이야기합시다. 올해는 내가 나 스스로에게 말해왔던 혁명 속의 혁명이라는 점에서 우리에게 대약진의 해가 될 것입니다. 내 자신이 할 수 없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 요청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나만의 일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총체적인 노력이 필요합니다. 칼 맑스는 역사는 지도자에 의해 만들어지지만 역사가 그들에게 부과한 조건이라는 틀을 벗어날 수 없다고 했지요. 지도자는 쿠바에서 피델이 그러하듯이 해야 할 역할이 있습니다. 쿠바에 피델이 없다면 쿠바라는 나라는 존속하겠지만 지금과 같지는 않을 것입니다. 피델은 체 게바라나 카밀로 시엔푸에고스가 그러했듯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필연적인 지도자 이론이 아니라 지도자가 역사가 부여한 명령안에서 역사를 만들어 간다는 맑스의 이론이라고 할 것입니다. 지도자는 부분적으로는 역사 그 자체와 역사적 조건에 매여 있는 포로라고 할 수 있지요.

 4월 11일 쿠데타 이전에 내 의지가 유연했기 때문에 일련의 사건발생을 야기했다는 것은 명확합니다. 우선적으로 군사적 관점에서 본다면 쿠데타 지도부는 군부를 장악하고 있었습니다. 지금 비록 쿠데타를 지지했던 TV채널들을 폐쇄하려고 해도 시초부터 실패할 것입니다. 그러나 다시금 이러한 반혁명세력, 파시스트들이 준동한다면 다시는 나와 우리의 조국을 4.11쿠데타에서처럼 지옥의 나락에 빠뜨리지 않겠다고 내 자신에게 맹세합니다.



#장면 5


이러한 관계는 꽤 오래 전인 수감생활을 하던 시절에 시작되었습니다. 그 당시 나는 『역사가 나를 사하리라History Will Absolve Me 』『Face to Face with Fidel Castro』 프레이 베토의 『Fidel and Religion』, 지아니 미냐의 『An Encounter with Fidel』을 읽었습니다. 피델에 관한 많은 책을 읽었고 항상 이곳을 나오기만 하면 그를 만나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감옥에서 썩어야 하는 긴 시간을 떠올리면서 그가 죽지 않기만을 바랐습니다. 그를 만나보길 고대하고 있었는데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아세요! 쿠바에서 초청장이 날아왔습니다. 1994년 12월이죠. 당신도 알다시피 나는 그곳에 갔습니다. 비행기 착륙 후에 보니 피델이 나를 기다리고 있더군요. 깜짝 놀랐습니다. 정말로 그를 만나보고 싶었지만 정기항공 편을 이용했음에도 비행기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당시 우리는 포옹을 나눴는데 이미 말했듯이 베네수엘라의 과두세력은 신문 1면에 그 사진을 실었습니다. 신문 1면에 등장해 본 일은 처음이었습니다. 내가 신문 전면에 실리다니요? 악의적인 헤드라인과 함께 컬러 사진이 실렸습니다. 상당히 많은 수의 기사들도 실렸더군요. ‘피델이 차베스를 먹어 치우다’ ‘차베스 피델에게 복종하다’ ‘악의 축’ 따위의 것들이었습니다. 이런 주문과도 같은 것들은 존재하지도 않는 것이었지만 우리 민중들에게 공산주의, 피델 카스트로와 독재에 대한 공포를 주입하기 위해 악마적이고 사악한 방법으로 만들어낸 것에 불과합니다. 모두 꾸며진 이야기에 불과합니다.

과두세력은 내가 쿠바에 체류하는 이틀간 그들이 할 수 있는 모든 부정적인 선전을 쏟아냈습니다. 내가 아바나에서 한 연설 일부를 방송에 내보내고 몇 명의 전문가들을 불러와 논평을 해댔습니다. 이틀 후에 베네수엘라로 돌아왔습니다. 12월이었는데 크리스마스 시즌이 시작되어 거리는 사람들로 넘쳐났습니다. 마이퀘티아에 도착해서 동지와 함께 택시를 타고 카라카스 시내로 갔습니다. 거기에는 변호사 친구가 돈을 빌려주어 얻은 얼마 안 되는 가구와 작은 회의실이 있는 작은 사무실이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자는 일도 있었습니다.

나는 그 무렵 어둑해진 카라카스 시내를 가게 되었습니다. 피델과 내가 나눈 포옹에 대해 사람들에게 쏟아진 악선전을 생각해보세요. 무슨 일이 벌어질지 누가 알겠습니까. 시내 중심부에서 한 취객이 손에 술병을 들고 지그재그로 걸어오고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완전히 취해 있었습니다. 가는 도중 우리는 부딪치고 말았습니다. 피하려고 길 반대쪽으로 가려했지만 그 사람이 술병을 든 채 갈지자로 걷는지라 별 수 없었습니다. 그러자 그가 말하더군요. “당신 차베스처럼 생겼는데.” 젊어 보이는 사람이었습니다. “내가 차베스네. 괜찮은가?”하고 손을 뻗쳤는데 몇 마디 중얼거리면서 반대 방향으로 걸어갔습니다. 갑자기 등 뒤에서 날 부르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나는 뒤를 돌아보았지요. 결코 그 사람의 표정을 잊을 수 없을 겁니다. “차베스, 피델 만세!”

그건 과두세력의 어리석음에 대한 응답이었습니다. 피델 만세! 피델과 나의 특별한 관계를 이용해 내 개인적, 정치적 명성에 흠을 내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은 오히려 그들이 그 반대의 결과를 가져오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자들은 1959년(쿠바혁명이 승리한 직후)에 피델이 베네수엘라를 방문했을 때 우리 기억 속에 생생하게 남아있는 가장 대규모 집회가 있었다는 사실을 잊고 있습니다. 최근 몇 십년간 내내 우리 민중들은 피델을 존경해왔습니다. 민중들은 그를 지지하고 그를 사랑합니다.

1989년에 난 카를로스 페레즈 안드레스 대통령의 취임식에 피델이 참석했던 때를 기억하고 있습니다. 당시 미라플로레스 궁에서 근무하고 있었기 때문에 모든 행사를 지켜봤습니다. 군사 퍼레이드가 있어 세계적 인사들이 도착하고 있었습니다. 모두가 버스에서 내렸습니다. 의회의 중간계급, 정객, 공무원, 심지어 보수정당인 AD당 지지자까지도 말이죠. 그들은 모두 피델이 도착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모두 내릴 때까지 피델이 나타나지 않자 의회에는 실망하는 분위기가 감돌았습니다. 그들은 그곳에 앉아 군사 퍼레이드를 참관하는 피델을 가까이서 보고자 했습니다. 피델은 그 퍼레이드에 결국은 나타나지 않았는데 내 생각엔 경호상의 이유였던 것 같습니다.

선거기간 동안 그들은 다시 1994년도의 비디오로 다시 한 번 사람들을 혼란에 빠뜨리려고 했습니다. 베네수엘라 군에 피델과 내가 아바나에서 한 연설이 담긴 비디오테이프가 제공되었습니다. 그들은 비디오를 유포하기 위해 병영마다 찾아갔습니다. 그러자 일부 군사심리학자들이 그들에게 경고합니다. “제기랄, 당장 이 짓을 그만두시오. 역효과만 가져오고 있습니다. 이 비디오가 피델과 차베스에 대한 젊은 군인들의 찬양을 불러일으키고 있습니다, 당장 그만두시오.”

내가 대통령이 된 새로운 상황에서도 그들은 치졸한 짓을 계속했습니다. 1999년 1월 말 취임하기 며칠 전에 여행을 가서 아바나에 잠시 체류할 계획이었습니다. 이미 부에노스아이레스, 브라질리아, 멕시코시티를 거친 다음이었습니다. 우리는 마드리드에 있었습니다. 마드리드에서 우리는 파리로 이동 후 다시 로마로 갔습니다. 그리고 로마를 떠나 베네수엘라로 잠시 간 뒤 아바나로 가고 마지막으로 도미니카 공화국을 방문할 예정이었습니다. 가장 가깝기 때문이죠. 취임 전에 방문해 보고 싶었습니다.

마드리드에서 대기 중이었는데 보좌관이 오더니 워싱턴에서 전화가 왔다고 하더군요. 마드리드에서 경제인들과 오찬을 함께하고 있던 중이라 나는 물었습니다. “워싱턴에서 전화가?”  “네, 피터 로메로입니다.” 로메로는 이베로-아메리카 사무국의 차관이었습니다. 그는 12월만 해도 클린턴 대통령이 보낸 워싱턴 방문 초청장을 가지고 베네수엘라에 왔었기 때문에 나는 즉시 전화를 받았습니다. 당시 그는 내가 비자를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 알고 싶어 했습니다. 미국에서는 내게 비자를 내준 적이 없었습니다. 항상 거절당하곤 했죠.

내가 수화기를 들자 얘기하더군요. “대통령 각하, 우리가 듣기로 아바나를 방문하신다고요.”  “그렇소, 며칠 후에 아바나에 갈 거요.” 그러자 그 즉시 말하더군요. “음... 우리는 아바나에 방문하지 말라는 권고를 드리고 싶습니다.” “뭐라고?” “그렇습니다. 만일 아바나에 방문한다면 클린턴 대통령과 접견하는 데 어려움이 있을 겁니다.” 나는 화가 치밀어서 얘기했습니다. “잘 들으시오, 로메오. 당신은 전혀 잘못 짚은 거요. 당신은 독립국가의 대통령을 상대로 얘기하고 있소. 이 문제를 다시는 꺼내지 마시오. 메시지를 남기고 싶다면 보좌관에게 연락하시오.”

다음날, 파리에서 언론인 몇에게 전날 있었던 일을 공개했습니다. 그날 밤 호텔에서 로메로가 다시 전화를 걸어와 통화를 나눴습니다. “대통령 각하. 제 말을 오해하신 겁니다. 그런 뜻이 아니었습니다. 클린턴 대통령은 접견을 원하고 있습니다.” “뭐, 좋소. 클린턴 대통령이 날 만나지 않는다고 해도 상관없소. 어쨌든 난 아바나에 갈 것이고, 이것은 이론의 여지가 없소. 누구도 다시는 그 문제를 꺼내선 안 돼오. 당신 아니라 누가 말하든 난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오.”

나는 아바나를 방문했고 이틀 뒤에 백악관에서 클린턴을 만났습니다. 우리 일행에는 결국 반대파에 가담하는 루이스 미낄레나 같은 사람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그들은 내가 연설이나 TV, 라디오와의 인터뷰에서 피델 카스트로를 언급하는 것에 대해 끊임없이 우려를 표시했습니다. 그들은 그렇게 자주 피델을 언급할 필요가 없다고 하더군요. 하지만 이 점에 있어서는 어떠한 양심의 가책도 느끼지 않습니다.

미주정상회담이 있던 몬테레이에서 부시가 그의 개막연설 중 피델이 불참한 상황에서 쿠바와 피델을 공격하는 것을 보고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일었습니다. 내 연설 차례가 오자 앞에서 이미 언급했듯이 정상회담의 주제가 균등한 성장임에도 2003년 베네수엘라에서 경제 성장은 없었다고 얘기했습니다. 경제성장은 쿠데타와 석유업계의 사보타지로 인해 적어도 10퍼센트는 하락했습니다. 경제 후퇴였습니다. 그럼에도 쿠바의 헤아릴 수도 없는 지원으로 베네수엘라는, 예를 들면 미션 로빈슨 같은 것들을 통해 사회복지, 평등, 사회정의 확대를 가져올 수 있었습니다. 이런 것들이 적어도 내가 할 수 있는 것이었고 그렇게 했습니다.

그들은 내게 부시가 분노로 타오르고 있다고 하더군요. 직접 그를 보진 못했지만 나중에 부시가 얼굴을 붉힌 채 의자에 꼼짝 않고 앉아있더란 말을 들었습니다. 난 쿠바에 대해 3번이나 언급했습니다. 쿠바 인민과 피델이 보내준 지원에 대해서 감사를 표명했습니다. 이 점에 대해선 전혀 후회가 없지만 다른 몇 가지 점에서는 용서를 표명합니다.

몬테레이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 카다피와 전화 통화를 나눈 적이 있었습니다. 그는 왜 쿠바가 아메리카 대륙에 있는 전 국가가 참석하는 회담에 참가하지 않았냐고 묻더군요. “아! 그건, 미국이 쿠바를 배제시켰기 때문입니다.” “우고, 잘 듣게. 우리 아프리카의 예를 들어보게. 영국이 유럽연합 회담에 짐바브웨 무가베 대통령이 참석하는 것을 막은 적이 있네. 그때 우리는 무가베가 갈 수 없다면 우리 누구도 참석할 수 없다고 했네. 라틴 아메리카에서도 그렇게 해야 하네.” 미국이 얼마나 철저하고 교묘하게 조종하는지 한 번 보세요.

우리는 나름대로 후회 없이 최선을 다한 것이었습니다. 나는 피델의 우정에 경의를 표하고 마음속 깊은 곳에서 느끼고 있으며 그것을 표현합니다. 그에게 나 자신이 아니라 우리 국민을 대신해서 사의를 표합니다. 우리와 협력하기로 한 피델의 결정은 전례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어느 지도자와 자국의 민중들이 아닌 다른 나라의 민중들과의 사이에 이러한 전례가 있겠습니까. 게다가 우리의 협력은 영원하고 굳건하며 갈수록 증대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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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만명이 일어섰다. 우리의 양심은 어디에 있는가?

11월 22일, 겨울로 접어드는 날씨에 전국에서는 동시다발적으로 한미FTA에 반대하는 시위가 일어났다. 전부 15만명이 가두시위에 참가했으며 지방에서 시청, 도청을 점거했다고 한다. 유력 일간지들과 방송에서는 불법시위니 폭력시위니 하면서 떠들어대고, 정부는 엄정대응하겠다고 한다. 다음, 네이버 등의 포털사이트에 가보면 관련 뉴스에 집회참가자들을 비난하는 댓글이 굴비처럼 달리고 있다.


여러분이 그렇게 욕해마지 않는 15만명의 이름은 민주노총, 전농(전국농민회총연맹), 전빈련(전국빈민연합), 민주노동당, 한총련 등이다. 이들이 한미FTA를 저지하기 위해서 범국민운동본부를 꾸려서 뭉친 것이다. 단체의 이름들을 들으면서 빨갱이니 주사파니 직업적 데모꾼이라느니 하는 사람들이 벌써 있을지 모르겠다. 이 글을 쓰는 나 자신 또한 민주노동당 에서 일하고 있는 사람이다.


지금 여러분이 그렇게 욕해마지 않는 15만명의 이름들을 다시 불러보고 싶다. 이 15만명은 세상 모두가 비정규직을 외면하고 무시할 때, 그리고 비정규직들이 거리로 나서서 싸울 때 같이 싸우고 같이 눈물을 흘린 사람들이다. 이 15만명은 350만 농민들이 잘못된 농업정책과 한미FTA추진으로 알거지가 될 위기에서 농민들의 처지를 자신의 일처럼 슬퍼하고 그들과 함께 잘못된 정책에 맞서 싸운 사람들이다. 이 15만명은 미국의 부도덕한 이라크 전쟁에 편승해 정부가 자이툰 부대를 파견할 때 인류의 양심에 따라 거리에 나와 전쟁반대를 외친 사람들이다. 여러분이 그렇게 욕해 마지않는 이 15만명은, 광우병 쇠고기를 수입하고 나라경제를 미국에 팔아넘기는 한미FTA를 저지하기 위해서 앞장서서 싸운 사람들이다.


못살겠다고 거리로 나온 노동자와 농민들이 폭력경찰의 방패에 맞아서 벌써 세 명이나 죽었다. 죽은 사람은 있는데 죽인 사람은 아직 없다. 이러한 개같은 현실에 분노한 사람들이 아직 우리에게는 15만명이나 있는 것이다. 당신이 욕하는 이 15만명에게서 나는 아직 시대의 살아있는 양심을 본다. 자본과 권력에 의해 착취당하고 억압당하고 기만당하고 속아온 이 현실에 분노해서 일어설 수 있는 시대의 양심을 본다.


이 글을 읽는 당신은 재벌인가? 재벌가의 자제인가? 맨날 골프치고 외제차 타고 다니는 사람인가? 이 세상이 그냥 그 자체로 천국인 사람인가? 그렇다면 굳이 이 15만명을 지지해달라고 하지 않겠다. 당신들은 이 세상이 그대로 있는 것이 좋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글을 읽는 당신이 노동자라서 서럽고, 농민이라서 서럽고, 돈없어서 빽없어서 서러운 사람이라면 더 이상 우리를 욕하지 말라. 우리가 분노하는 현실은 당신이 분노하는 현실과 같다. 이 15만명이 150만명이 되고, 150만명이 1500만명이 될 때 우리는 더 이상 착취당하고 억압당하고 기만당하고 속지 않게 될 것이다.


당신은 지금 이대로의 세상, 비정규직 차별의 세상, 농민 다 죽이는 세상, 한미FTA를 추진하는 매국세상을 원하는가? 아니면, 비정규직 없는 세상, 농민이 행복한 세상, 미국에 당당한 자주적인 세상을 원하는가? 당신이 노동자 농민이고 민중이라면 답은 이미 나와있다. 먼저 나선 15만명과 함께 이 썩어빠진 세상을 바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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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개 공장이야기”를 감상하고 - 베네수엘라 노동자 공장 자주관리운동

노동자뉴스제작단이 개최하는 서울국제노동영화제가 벌써 10회째다. 11월 16일 목요일부터 19일 일요일까지 나흘간 일정으로 진행된 영화제의 개막작은 “5개 공장이야기”라는 작품이 다. 이 작품은 10회 영화제의 개막작이라는 상징성 뿐만 아니라, 베네수엘라에서 노동자들이 공장을 자주관리하는 내용을 다루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2005년에 우고 차베스 대통령이 21세기 사회주의로 나아가자고 선언한 이후 베네수엘라에서는 노동자들이 스스로를 조직하고 공장을 직접적으로 통제하는 실험들이 벌어지고 있다. 노동자들이 공장을 통제하는 모습을 생생하게 다루었다는 점에서 사회의 변혁을 고민하는 사람들에게는 매우 매력적인 주제이다.


11월 18일 토요일 오후9시로 상영일정이 잡힌 “5개 공장이야기”를 보기 위해 지인들과 함께 고려대학교 4.18기념관을 찾았다. 개막작이면서도 18일에 한번 더 상영일정이 잡혔기 때문에 볼 수 있었던 것은 매우 다행스런 일이었다. 상영장소에 들어가니 하이닉스 매그나칩 투쟁 영상 상영이 끝나고 영상제작자들과 청중 사이의 대화가 진행중이었다. 영상을 보지는 못했지만 청중들의 진지한 분위기와 무대 앞에 나온 영상제작자들의 굳게 다문 입술에서 미루어 짐작을 할 수 있었다. 아쉬운 것은 청중들이 너무나 없다는 점이었다. 많은 사람들의 관심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곧이어 “5개 공장이야기”가 시작되었다. 전체적인 분위기는 매우 차분하며, 공장 관계자들의 인터뷰 위주로 진행되었다. Dario Azzellini 라는 사람이 제작했다고 소개를 하는데 사실 누구인지는 잘 모른다.


영상에서는 전부 다섯 개의 공장이야기를 다룬다. Alcasa라고 하는 알루미늄 공장, 직물공장, 케챱공장, 카카오 공장, 펄프공장 등 서로 연관이 없어보이는 공장들이 차례로 나온다. 이 회사들의 공통점은 노동자가 공장을 직접적으로 통제하고 있다는 사실 하나이다. 각 회사들이 노동자들의 통제하에 들어오는 과정은, 각 공장에서 만드는 제품들만큼 서로 상이하다. 알루미늄 공장인 Alcasa의 경우는 애시당초 국영기업이었고, 직물공장은 사장의 방만한 경영으로 회사가 중단된 경우이고, 펄프공장은 자본철수를 한 상황이었다.


차베스에 의해 Alcasa의 대표로 임명된 Carlos Lanz 씨(과거 좌익 게릴라 활동 경력)는 베네수엘라의 노동자 참여경영(co-management)는 서유럽의 사회민주주의 방식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말한다. 서유럽의 사회민주주의는 노동자들에게 주식을 나눠주고 경영회의에 몇자리 배려해주는 방식이며, 이것은 노동자들의 공장통제와는 무관한 것이라는 얘기다. 베네수엘라에서 진행되고 있는 노동자 참여경영은 노동자평의회에서 공장의 중요한 결정이 내려지고 노동자들이 직접 예산을 짜는데 참여하며 이윤동기가 아닌 지역공동체와의 나눔을 강조한다.


사실 이러한 근본적인 변화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생산관계에 직접적인 변화가 있어야 한다. 즉 자본가가 생산수단을 소유하고 있는 상황에서는 이러한 변화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노동자가 생산수단에 대한 통제력을 행사할 수 있도록 소유구조를 바꾸어야 한다. 위에 언급한 공장들은 바로 이러한 근본적 변화가 있었다. 정부측 소유지분과 노동자들이 결성한 조합의 소유지분이 거의 반반씩으로 되어 있다. 쉽게 얘기하면 민중의 정부에서 절반, 노동자들이 절반씩 공장에 대한 통제력을 가진다는 의미일 것이다.


노동자들이 조합을 조직하고 결성한 후 사업계획서를 준비해서 제출하면 정부에서는 검토 후에 인적 물적 자원을 지원한다. 노동자들은 개별이 아닌 조합이라는 틀을 통해 공동체를 형성해서 공장을 운영해나간다. 모든 중요한 결정은 평의회를 통해 결정되며 자기자신이 공장의 주인이 되는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된다. 이전에는 사장이 시키는대로 일하고, 모든 중요한 결정은 사장 독단적으로 행해졌다. 비민주적인 독재의 현장이 바로 공장이었던 것이다. 반면 지금은 공장이 민주주의의 학교가 되고 삶의 주인으로 되는 현장이 된 것이다.


모든 노동자들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동등한 임금을 받으며, 공장의 수익은 조합원들에게 동등하게 분배되고 지역의 가난한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는데 쓰이게 된다. 예를 들어서 펄프공장에서는 지역의 아이들에게 공책을 무료로 나눠준다던지, 회사의 병원을 지역주민들이 무료로 이용하도록 한다는 등이다. 또한, 지역의 실업자들에게 직업교육을 시키고 회사에 취업을 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이전에는 이윤을 위해서 노동자를 정리해고 했다면 지금은 사람을 위해서 일자리를 늘려나가는 것이다.


노동자들은 인터뷰에서 언제나 차베스를 언급한다. 차베스 대통령의 지도가 가장 중요하다고 말하는 것에서 혁명정부가 들어섰을때 개별 공장에서도 이러한 변화가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된다. 정권이 바뀌지 않은 상황에서 개별 공장에서 노동자 자주관리를 시도하는 것은 여러 가지로 어려움과 한계에 봉착했을 것이다. 정부의 지원도 없었을 것이며, 자본주의 경쟁속에서 회사가 살아남기도 힘들었을 것이다.


“5개 공장이야기” 다큐멘터리에서는 이러한 내용들이 공장 관계자들의 인터뷰를 통해서 잔잔하게 이어진다. 약간은 지루하다고 느낄수도 있겠지만, 변혁을 고민하는 사람들에게 많은 것을 시사해주고 있다. 어찌보면 혁명이란 것은 <볼리바리안 혁명> 같은 역동적인 영상뿐만 아니라 이렇게 일상의 삶 속에서도 느려보이지만 변화해나가는 모습일 것이다. 사회주의로 나아간다고 갑자기 별천지가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영상에서 주는 느낌이었다.


오히려, 공장의 노동자들은 이전보다 많은 것을 고민해야할지도 모른다. 예전에는 그저 시키는 일을 정해진 시간까지 하다가 집에가면 되었겠지만, 지금은 공장의 주인으로서 지역의 주민으로서 더 많은 것을 고민해야 한다. 노동자평의회에도 참여해야 하고 예산도 직접 짜야 하고 기술개발에 대한 의견도 내야하는 것이다. 영상은 사회주의라는 것이 권리뿐만 아니라 의무와 책임이 따르는 것이라는 것을 느끼게 해준다.


각 공장에는 공장노동자들의 이러한 의식화 조직화 사업을 도와주는 활동가들이 파견되어 있다. 이들은 정부에서 공장에 파견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개별공장 차원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혁명적 지향을 가지고 방향을 제대로 잡도록 도와준다. 알루미늄 공장의 대표인 Carlos Lanz씨도 인터뷰를 통해 자신은 알루미늄에 문외한이며 혁명가로서 공장의 자주관리운동에 참여하고 있다고 얘기한다.


Carlos Lanz 씨는 영상 말미에 다음과 같이 강조한다. 이전의 사회주의에서는 노동자들의 아래로부터의 참여가 결여된 관료적인 성향이 강했다는 점이다. 베네수엘라의 모델은 노동자들이 자주적인 조직을 결성해서 스스로 공장을 운영해나가는 주체로 선다는 점이 이전의 국가사회주의 모델과는 다르다고 얘기한다. 그리고, 이러한 모델을 전파하고 노동자들의 공장 자주관리운동을 더욱 강화해야 한다고 말한다. 지금의 베네수엘라는 혁명의 과도기이며 이러한 시기에 개별공장에서 노동자들의 자주관리운동을 통해 새로운 모범을 세우는 것이 중요하다고 역설한다. 그리고 정부가 소유한 절반의 지분도 노동자들의 지분으로 점점 바꿔야 한다고 얘기한다.


다큐멘터리가 끝나고 자리를 나오면서 지인들과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었다. 민주노동당 서울시당 중구위원회에서 강연을 할 때 “5개 공장이야기”를 볼것을 권했는데, 그때 봤던 당원들이 눈에 띠었다. 반가워서 인사를 나누었다.


우리가 사회주의를 얘기하면서 들뜨고 유토피아를 생각하고 상상의 나래를 펼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에서의 사회주의는 어떤 것일까? 내가 일하는 공장에서 사회주의가 가지는 의미는 무엇일까? 이런 질문의 중요성이 새삼 머릿속에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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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라는 입장에서 본 북한 핵실험

 

2006년 10월 9일 오전 북한이 핵실험을 했다. 나는 아침 일찍부터 모처에서 예비군 훈련을 받고 있었다. 갑자기 부대 내에서 KBS 뉴스의 속보를 스피커를 통해 틀어주는데, 대부분의 내용이 주로 북한이 매우 잘못하고 있다는 식이었다.


점심 먹기 전에 예비군 교육의 일환으로 강의를 하는데, 북한이 한반도의 악의 근원이며, 그렇기 때문에 한미동맹을 강화해야 한다고 얘기한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대부분의 예비군들은 졸고 있었다. 나도 잠시 졸다가 약간 관심을 가지고 교육내용을 지켜보았다.


북한의 핵실험 문제를 어떻게 볼 것인가? 극우보수세력들은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이 말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방식으로 북한을 비난하고 있다. 진보진영 일부에서도, “평화”라는 개념을 제시하며 북한의 핵무장은 이런 절대적 명제에 위반된다고 비난하고 있다. 물론 보수세력과는 달리 일차적 원인은 미국에서 찾고 있기는 하다.


많은 사람이 혼란스러워 할 것 같다. 어떤 잣대를 가지고 북한 핵문제를 바라봐야 하는지 말이다. 나는 북한 핵문제를 바라보는 가장 중요한 기준은 “평화”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더 나아가기 전에 우선 “평화”라는 단어에 대해서 좀더 들여다 보아야 할 듯 싶다.


“평화”란 어떤 것일까? 굳이 국어사전을 찾이 않더라도 우선적으로 떠오르는 생각은 전쟁이 없는, 무력 사용이 없는 상황일 것이다. 그런데, 갑자기 칼 맑스가 스파르타쿠스의 봉기에 대해서 언급한 내용이 생각난다. 칼 맑스는 스파르타쿠스의 봉기를 인류역사상 가장 정당한 전쟁이라고 얘기했다고 한다. 지배계급의 변태적 쾌락을 위해 서로 죽고 죽이는 삶을 살아야 했던 검투사들이 지배계급에 대해 봉기를 한 것이다. 그런데, 단순히 “평화”를 무력사용이 없는 상황으로 본다면 칼 맑스는 평화주의자가 아니다. 스파르타쿠스는 봉기를 하지 말았어야 한다. 왜냐면 그 봉기에서 그들은 모두 죽었기 때문이다. 물론 로마병사들도 엄청나게 죽었다.


“평화”라는 개념은 과연 이런 것일까? 그렇다면 녹두장군 전봉준도 비난받아야 한다. 그들은 “평화”를 깨고, 농민항쟁을 일으켰다. 외세를 몰아내고 부정부패를 타파하기 위해 일어난 그들은 평화주의자가 아니다. 만주에서 항일무장투쟁을 하던 독립군들도 평화주의자가 아니다. 스페인 내전에서 파시즘을 막기 위해 목숨을 바친 국제저항군들도 평화주의자가 아니다.  “평화”를 위와 같이 정의하는 순간 우리는 이런 딜레마에 빠져버린다.


베네수엘라 민중들의 투쟁을 담은 “볼리바리안 혁명” 다큐멘터리에서 우고 차베스가 이렇게 얘기하는 대목이 있다.


“우리는 평화를 원합니다. 단순한 평화가 아니라 사람이 존중되는 평화를! 아프리카에서 노예로 잡혀온 우리 선조처럼 노예처럼 살아가는 평화나, 삶의 뿌리를 박탈당한 원주민이나, 죽은 자가 누릴 수 있는 평화가 아니라 생명이 존중되는 평화를! 정의가 구현되는 평화를! 존엄성이 보장되는 평화를!”


차베스가 말했듯이, 우리가 말하는 평화는 단순한 평화이어서는 안된다. 사람이 존중되고, 정의가 구현되는 평화이어야 한다.


우리가 북한의 핵실험 문제의 원칙을 세울 때 사용하는 “평화”는 바로 이런 평화이어야 한다. 바로 그러한 “평화”라는 절대명제에서 우리의 입장을 세워야 한다.


이 땅에서 지금 평화를 깨려고 하는 세력은 누구인가? 이 문제는 6.15 공동선언을 통해서 확실해졌다. 북한의 최고지도자와 남한의 대통령이 만나서 우리민족끼리 자주적이고 평화적으로 통일을 이루자는데 합의한 것이 6.15 공동선언이다. 이 6.15 공동선언을 통해서 북한, 그리고 남한의 진보진영 뿐만 아니라 남쪽의 지배계급 일부까지도 평화와 통일을 원하고 있다는 것이 명백해졌다.


이러한 6.15 공동선언에 대해서 노골적으로 불만을 표시한 세력은 누구인가? 당연히 미제국주의이다. 한반도가 평화로워지면 주한미군의 존재조건이 사라지고, 무기를 팔아먹을 유력한 시장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이러한 미국의 태도는 사실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다. 그 동안 미국이 벌인 부도덕한 짓거리들이 모든 것을 증명하고 있다.


있지도 않은 대량살상무기를 들먹이면서 이라크를 침공해서 엄청난 사람들을 전쟁의 죽음으로 몰아넣고, 꼭두각시 정권을 세워 이라크의 석유와 중동에서의 영향력을 강화하려는 미국의 부도덕한 전쟁은 이미 전세계가 알고 있다. 민주적으로 선출된 베네수엘라의 우고 차베스 대통령을 몰아내기 위해서 2002년 쿠데타를 배후 조정한 것도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 외에도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고, 칠레 아옌데 대통령, 파나마의 토리호스 대통령 등 수많은 사람을 암살한 것이 미국이다. 남한에게는 경제식민지로 가는 한미FTA를 강요하고 있고, 전략적 유연성이란 군사적 목적하에 평택미군기지 이전을 위해 대추리 주민을 내쫓고 있다.


이라크, 아프가니스탄, 파나마가 군사강국이었다면 이렇게 쉽게 미국에게 농락을 당했을까? 미제국주의의 모든 종류의 위협에 현명하게 대처하지 못하면 이라크, 아프가니스탄, 파나마 처럼 되는 것은 역사가 가르쳐주고 있는 사실이다. 미제국주의는 힘없는 나라들에게 강요하고 있는 것이다. 미제국주의의 노예로 살 것인가? 아니면 죽을 것인가? 를 말이다. 이 선택지에서 노예처럼 사는 “평화”를 택한 것이 진정한 평화일까? 그렇다고 죽음을 선택할 것인가? 자신의 역량이 있을 때 제3의 선택지를 만들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미제국주의에 맞설 수 있는 무력인 것이다.


물론, 무모해서는 안된다. 힘도 없는데 무모한 상황을 만드는 것은 모험주의의 오류에 빠지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북한의 핵실험은 의미있는 구석이 많다. 나오는 뉴스들을 보라. 벌써부터 미국이 얘기한 레드라인은 “제3국으로의 핵이전”이라는 말이 나온다. 주가가 많이 빠졌다고 하지만 오히려 해외투자자들은 매수세라고 한다.


지금 미국은 이라크에서 교착상황에 빠져있고 이란문제로 정신이 없다. 게다가 중남미에서는 차베스를 선봉으로 좌파바람이 거세다. 전세계적으로 미제국주의의 전선이 교착상태 혹은 수세적 국면인 것이다. 이 시기에 나온 북한의 핵실험은 북한의 입장에서는 그 시기가 가장 적절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북한의 핵실험은 오히려 한반도에서 전쟁의 위협을 경감시킨다고도 볼 수 있는 것이다. 핵 뿐만 아니라 대륙간탄도탄까지 보유한 북한은 이라크, 아프가니스탄, 파나마와는 그 질이 다른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북한은 남한이 자신들의 안전한 핵우산 안에 있다고 얘기하는 것이다.


이런 주도권을 가지고 있을 때야 말로 진정한 협상이 가능한 것이다. 아무런 카드도 힘도 없는 사람이 협상을 할 수 있을까? 알다시피 북한은 지속적으로 미국에게 평화협정을 맺자고 제안해왔다. 미국은 그러한 협정을 피하기 위해서 그 무슨 달러위조 문제를 내세우면서 6자회담을 파탄내려 했지만, 결국 상황은 자신들에게 불리하게 된 것이다. 북한은 미제국주의의 무수한 위협과 경제제재 속에서도 “노예로 사는 평화”를 택하지 않은 것이다.


이러한 시기에 남한의 진보진영은 어떠한 “평화”를 얘기해야 할까? 북한에게 미제국주의의 “노예로 사는 평화”를 선택하라고 할 수 있는가? 아니면 미제국주의에 당당하게 맞서는 “자주적 평화”를 선택하는데 함께 할 것인가?


우리가 평화의 개념을 명확히 할 때 북한의 핵실험 문제에 대한 입장은 명확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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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세계를 사로잡은 '하루히 댄스'의 열풍속으로


  
  


  스즈미야 하루히 : 세계를 자신의 뜻대로 바꿀 수 있는 신 같은 소녀 (자신은 그 사실을 모르고 있음)
  
  나가토 유키 : 대(對) 유기생명체용 휴머노이드 인터페이스 (도대체 무슨 말인지...^^)
  
  아사히나 미쿠루 : 미래에서 온 아름답고 맹~한 소녀
  
  고이즈미 이츠키 : 초능력을 쓸 줄 안다고 말하는 수수께끼의 전학생
  
  쿈 : 자신의 이름을 놔두고 ‘쿈’이라고 불리는 진짜 평범해 보이는 소년


  
  이 다섯 명을 섞어놓으면 도대체 무슨 이야기가 진행될까? 전 세계를 하루히 열풍으로 몰아넣고 있는 애니메이션 <스즈미야 하루히의 우울>에 나오는 다섯 명의 중요 등장인물이다.
  
  같은 이름의 라이트 노벨을 원작으로 한 이 애니메이션은 풀메탈패닉의 제작사로 잘 알려진 교토에니메이션이 2006년부터 4월 2일부터 방송을 시작해서 전체 14화로 마무리를 했다.
  
  바쁜 일정 속에서도 적지 않은 애니메이션을 섭렵해온 필자로서는 스즈미야 하루히의 우울에 대한 뜨거운 반응을 듣고 즉시 어둠의 경로(?)를 이용해서 첫 회부터 감상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것이 무슨 일인가? 최신작이라서 좋은 화질을 기대했건만, 16:9 화면에 좌우 검은 공간이 존재하고 어설픈 화질. 게다가 삼류 개그같은 스토리는 또 뭔가? 그러나 이런 의문점은 1화가 끝나갈 즈음에 자연스럽게 풀리게 된다.
  
  

△화면 좌우의 검은 공간이 압박인 1화의 장면. 사진속의 인물은 미래소녀 아사히나 미쿠루. 의상이 인상적이다.


  <스즈미야 하루히>는 전체 14화가 스토리 순서대로 배치되어 있지 않고, 뒤죽박죽으로 섞여있다. 첫 회는 스토리 순서로 본다면 14화중에 11화에 해당한다. 사실 뒤죽박죽이라기보다는 치밀하게 계산해서 섞어놨다는 말이 정확할 것이다.
  
  이렇게 섞어놓은 이유는 원작인 라이트 노벨 <스즈미야 하루히> 시리즈가 아직 끝나지 않고 연재중이기 때문이다. 아직 마무리도 되지 않은 스토리를 애니메이션에 담으려고 하다 보니 가장 인상적인 장면을 마지막화(14화)로 돌리고 나머지를 적절하게 다시 배치한 것이다.
  
  

△ 드러나는 1화의 정체. 애니메이션 안에서 상영하는 영화였단 말인가.


  섞인 순서는 다음과 같다. 왼쪽의 순서가 방송순서이고 오른쪽의 순서가 스토리 순서이다. 그러나, 스토리 순서대로 재구성해서 보는 것보다 방송순서대로 보는 것을 추천하고 싶다.
  
  01화 - 朝比奈ミクルの冒險 (아사히나 미쿠루의 모험) - 11화
  02화 - 凉宮ハルヒの憂鬱Ⅰ (스즈미야 하루히의 우울 1) - 1화
  03화 - 凉宮ハルヒの憂鬱Ⅱ (스즈미야 하루히의 우울 2) - 2화
  04화 - 凉宮ハルヒの退屈 (스즈미야 하루히의 무료) - 7화
  05화 - 凉宮ハルヒの憂鬱Ⅲ (스즈미야 하루히의 우울 3) - 3화
  06화 - 孤島症候群(前編) (고도증후군 전편) - 9화
  07화 - ミステリック サイン (미스테릭 사인) - 8화
  08화 - 孤島症候群(後編) (고도증후군 후편) - 10화
  09화 - サムデイ イン ザ レイン (Someday In the Rain) - 14화
  10화 - 凉宮ハルヒの憂鬱Ⅳ (스즈미야 하루히의 우울 4) - 4화
  11화 - 射手座の日 (사수자리의 날) - 13화
  12화 - ライブアライブ (Live a Live) - 12화
  13화 - 凉宮ハルヒの憂鬱Ⅴ (스즈미야 하루히의 우울 5) - 5화
  14화 - 凉宮ハルヒの憂鬱Ⅵ (스즈미야 하루히의 우울 6) - 6화
  
  스즈미야 하루히는 따분한 학창생활을 재미있게 보내기 위해서 학내에 SOS단(團) 이라는 제멋대로의 동아리를 만든다. 이 SOS단에 쿈, 나가토 유키, 아사히나 미쿠루, 고이즈미 이츠키 등이 가입하게 되면서 얽히는 이야기들로 진행된다.
  
  

△ 스타일 좋고 성적우수, 스포츠 만능인 슈퍼우먼 스즈미야 하루히. 그러나 자신이 신과 같은 능력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그렇다면, <스즈미야 하루히의 우울>에서 가장 인기있는 캐릭터는 누구일까? 스즈미야 하루히? 땡!! 정답은 나가토 유키이다. 대(對) 유기생명체용 휴머노이드 인터페이스라고 자신을 소개하는 나가토 유키는 신세기 에반게리온의 아야나미 레이와 비슷한 느낌을 주는 인물이다. 에반게리온의 레이에 수많은 사람들이 열광했던 것과 비슷한 일이 나가토 유키에게도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말수도 적고 가끔 툭 뱉어내는 짧은 말들이 매우 인상적이며 표정변화도 거의 없다. 왜 이런 캐릭터에게 사람들은 열광하는 것일까? 궁금하다. 하지만, 나 자신도 가장 좋아하는 캐릭터가 나가토 유키이다. ^^
  
  

△(왼쪽)정보사념체가 파견한 대(對) 유기생명체용 휴머노이드 인터페이스 나가토 유키. (오른쪽)에반게리온에 나오는 아야나미 레이. 역시 보통 인간이 아닌 복제인간이다. 나가토 유키와 비슷한 느낌이라면 필자만의 착각일까.


  야구시합, 살인사건, 초자연 현상 찾기, 학교축제 등 어떻게 보면 어수선하고 연관성 없어보이는 다양한 주제들이 순서까지 섞여서 진행되고 있음에도, 내용에 통일성이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이 다양한 사건들이 결국 스즈미야 하루히라는 인물의 감정의 변화에서 기인하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하루히는 자신이 생각하는 대로 세상을 바꾸고 창조할 수 있는 능력의 소유자다. 하루히의 기분이 우울해지면 거대한 인간모양의 괴물들이 나타나서 기존의 공간들을 파괴하게 되고 이것이 세상의 멸망으로 이어질 수 있다.
  
  

△ 쿈(오른쪽)이 하루히를 데리고 괴물에게서 도망치고 있다. 사실은 하루히의 능력이 만들어낸 괴물.


  이러한 위기를 막기 위해서 하루히의 주변에 우주인 나가토 유키, 미래인 아사히나 미쿠루, 초능력자 고이즈미 이츠키가 모인 것이다. 그리고, 문제해결의 열쇠를 쥐고 있는 것은 가장 평범해 보이는 쿈. 스토리는 바로 이 쿈의 일인칭 시점으로 진행된다. 무덤덤하게 느껴지는 성우의 나레이션이 꽤 인상적이다.
  
  

△ 초능력자이자 수수께끼의 전학생 고이즈미 이츠키.


  매 화마다 내용도 재미있지만, 특별히 하루히 댄스라고 불리는 엔딩과 12화에 나오는 밴드의 라이브 공연 장면은 전체를 통틀어 가장 인기를 끌고 있는 부분이다. 하루히 댄스는 일본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패러디 영상이 돌풍을 일으키고 있다. 국내 고등학교의 축제 때 학생들이 따라서 하기도 하고, 댄스 장면을 정확히 본딴 다양한 패러디 동영상을 포털에서 쉽게 찾을 수 있다. 12화에 나오는 라이브 공연장면은 기타와 드럼 등을 연주하는 장면을 손가락 움직임까지 그대로 묘사하는 치밀함을 보여준다. 곡도 듣기 매우 좋아서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운영하는 블로그에 올려놓고 있다.
  
  

△ 손가락의 움직임까지 정확하게 잡아낸 놀라운 라이브 장면.


  

△ 스즈미야 하루히가 노래를 부르는 장면. 성우가 직접 불렀음.


  

△ 스즈미야 하루히가 침튀기며 열창하는 장면. 화면에 보이는 하얀 점들은 침이다. 정말 세밀한 묘사.


  

△ 마치 진짜 라이브를 보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지게 만드는 다양한 구도.


  

△ 나가토 유키의 카리스마 넘치는 기타 연주 모습.


  
  필자는 여러분께 서비스로 12화의 라이브 장면과 하루히 댄스로 불리는 엔딩 동영상을 보여드리도록 하겠다. 민중의 소리에 애니메이션 기사를 쓰다 보니 약간 어색하기도 하고 색다르기도 하다. 아무튼 이런 기회가 또 온다면 더욱 재미있는 내용을 써보겠다. 다음 판을 기대하시라. ^^
  
  

△ 하루히 댄스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등장인물들.


  빼먹은 얘기가 있다. 아직 <스즈미야 하루히의 우울>을 안 보신 분은 다양한 어둠의 경로를 동원해서 꼭 보시기를 권한다. 이제는 바야흐로 애니메이션의 시대인 것이다. 시대에 뒤처지지 말자.

 

하루히 12화 라이브 동영상 (플레이 버튼을 눌러주세요.)

 

하루히 댄스(엔딩) 동영상 (플레이 버튼을 눌러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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