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열했던 시기, 그에게 빚지지 않은 자 있는가
정운영 영면에 바치는 추도사
장제형(berliner) 기자
"솔직히 고백하건데 나는 알튀세르의 이론과 실천을 정리해내는 데에 결코 적임자가 아니지만…."
정운영이 90년 10월에 타계한 프랑스 철학자 루이 알튀세르에 대한 추도사를 <말>지 12월호에 발표한 것을 기억한다. 24일 오전, 이 경제평론가의 영면 소식을 듣고 하필이면 왜 제일 처음 그가 쓴 추도사가 생각났을까. 나 또한 고백하건데 정운영의 공과 과에 대해 정리해내는 데에 결코 적임자가 아니지만, 그가 알튀세르에게 그랬을 것이라고 헤아리듯이 그에 대한 과거 어느 한 순간의 애정과 존경의 념에 의거해서 이 추도사를 바친다.
정운영식의 글쓰기가 가져온 '변화'
1988년 5월 <한겨레신문>이 창간되었을 때, 당시 보도기관의 찌라시에 염증을 느끼던 사람들은 일종의 해갈의 느낌을 맛보았을 것이다. 그 해갈은 저 후안무치한 보도기관 종사자들에 의한 왜곡과 굴절이 아닌, '우리' 자신의 목소리를 문공부 허가필증을 득한 신문 지면을 통해서도 어느 정도 확인할 수 있었다는 데에서 연유할 것이다.
하지만 반벙어리가 비로소 말을 그럭저럭 할 수 있게 되었다는 기쁨은 잠시일 뿐, 더 나아간 의문이 제기된다. 어떻게 하면 세련되고 정치한 사고와 언어를 구사할 것인가. 둔탁하고 건조한 투쟁의 언어도 아니고, 내면의 넋두리에만 머물러 있는 사적인 잠꼬대도 아닌, 비판적 사고가 결합된 문체의 고양된 에세이적 경지를 어떻게 마련할 수 있을 것인가. 그랬기에 바로 이 새로운 정운영식의 문체에 독자들을 열광하지 않았던가. 정운영의 '전망대'는 우리에게 독보적인 글쓰기의 경지를 통해 새로운 '전망'을 보여준 것이었다.
이 '전망대'에 카스트로와 체게바라의 이름이 오르내리는 것에서 우리는 생경한 즐거움을 맛보았고, 광주와 파리코뮌이라는 100여년 시차를 둔 사건의 세계사적 공통점을 충혈된 눈으로 배웠으며, 1500명의 교직원 노조원을 일거에 잘라버린 한 교수에게 선사한 학생들의 밀가루 달걀 반죽 메이크업이 결코 '패륜'이라는 한마디 말 따위로 치지도외될 수 있는 행위가 아니라는 것-69년 아도르노가 학생들에게 당한 "황홀한 봉변"이 '스승'에 대한 패륜이라는 말로 간단히 기각될 수 없는 것처럼-이 분명하게 되었다.
박재동의 만평, 고종석의 문학기사, 정성일의 영화평 등과 더불어 정운영의 '전망대' 칼럼은 90년대 초반까지 당시 <한겨레신문>을 집어들게 만드는 데에 일조했고, 우리 세대의 시대정신을 반영한 학술 문화적 대표 아이콘이었다. 그의 글은 메마르고 딱딱한 글이 칼럼인 것처럼 오해하게끔 했던 척박한 한국 언론역사의 풍토에서 고유한 문체 구사의 확립을 통한 칼럼쓰기의 첫 번째 사례로 기록될 것이다.
교수로서의 '정운영'
나의 경우 더더욱 행운이었던 것은 글뿐만 아니라 강의로도 그를 만날 수 있었다는 점이다. 80년대 말에서 90년대 초에 대학을 다녔던 이들에게 당시 정운영 '교수'의 강의는 암묵적인 필수 과목이 되었다. 강의실에서는 애시당초 찾는 것이 불가능했고, 기껏해야 집회나 거리위에서나 보았던 얼굴들을 강의실에서도 서로 확인할 수 있게 했었던 거의 유일한 강좌였으며, 대형 강의실이 입추의 여지가 없이 꽉꽉 들어찼던 그의 '가치론'과 '공황론' 수업을 추억해 보자.
논전이 과열되어, 그의 말에 의하면 백묵이 날아다니고 멱살잡기 직전까지 가는 살벌한 상황이 빈번히 연출되었다지만, 그럼에도 그는 매우 행복한 선생이었으리라. 열띤 논쟁은 거의 매 수업시간마다 빼놓을 수 없는 백미였으며, 그는 수백명 학생들 앞에서 그들의 격렬한 이론적 반론과 문제제기에도 불구하고 거의 자신의 논점을 관철시켰다.
학기 마지막 시간은 항상 그의 '덕담'으로 마무리 되었다. 그중 하나.
"내가 젊었을 때는 20대 면장, 30대 시장, 40대 군수, 50대 장관… 뭐 이런 식으로 출세욕이 있었는데, 그걸 신영복 선생을 다시 만나면서 모두 깼어."
자신의 지나간 허욕 한 자락을 청중들 앞에서 털어놓을 수 있는 그 진솔함이 그에 대한 인간적 매력을 불러일으켰던 점 중 하나인 것은 분명하다. '고엽'과 '인터내셔널'이 18번 레퍼토리로 동거하는 여유 또한 그 매력을 배가시키는 데에 일조한다.
현존 사회주의 붕괴 이후 "때로는 질 줄 알면서도 싸워야 할 때가 있는 법이다"라는 비장한 하이네의 말을 인용하면서 <이론>지의 창간을 주도하던 그가 싸워야 할 대상은 유감스럽게도 남한의 천민자본주의와 분단 체제만에 국한된 것만은 아니었다. 80년대 중반 "민중신학"의 아성 한신대에서 그가 김수행 교수와 함께 쫓겨났을 때, 그가 느꼈던 씁쓸함과 환멸의 정조는 그의 글에서나 스쳐지나가듯이 언급했던 말들에서나 누누이 확인된다. "운동권"에도 개념정리가 필요하다고.
편히 잠드소서
<한겨레신문> 창간멤버이자 비정규직 "비상임 논설위원" 정운영이 그곳을 떠났을 때, 눈 밝은 독자들은 정권교체 후 정부출연 언론기관의 최고책임자로 임명되어 간 그 신문 출신의 몇몇 소위 논설위원과 남은 이들을 명확히 구분해 판단했을 것이다. 당시 할 말은 많지만 별로 얘기하고 싶지 않다던 그가 영영 떠난 지금, 이제는 결코 하고 싶어도 말할 수가 없겠지만 그가 느꼈을 감정의 편린들을 그럭저럭 미루어 짐작할 뿐이다.
그러나 소위 일부 "운동권"들에 대한 환멸이 컸던 탓인지, 첫 직장으로의 30년만의 재취업의 차원인지 아니면 또 다른 무엇인지 분명치는 않지만, 2000년, 그가 <중앙일보>로 이직했을 때의 독자들의 어리둥절함이나 당혹감 또한 적지 않았으리라. 더구나 공론장의 영역에서 민망하게도 자신의 대학 동창이라는 사실을 인연으로 현직 공정거래위원장을 겨냥해 "나라 위해 우리 변절합시다"라며 마치 요정에서 정치꾼들이 의기투합하는 장면을 연상케 하는 요상한 제목을 단 칼럼은 충격이었다. 공정거래법 개정에 대한 힘겨루기가 한창일 때 나온 그 칼럼 내용의 문제적 성격을 고려하면 더더욱 독자들의 당혹감은 커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우리의 당혹감은 망자 앞에서 잠시 유보하도록 하고, 애초에 이 추도사를 쓰게끔 한 그에게 품었던 회억의 감정으로 돌아가 그에 충실하자. 그럴 만큼 우리는 어느새 지나가버렸는지도 몰랐던 그 시기, 그에게 빚진 것 또한 많았으니까.
91년 우리의 벗들이 맞아 죽고, 밟혀 죽고, 의문사 당하고, 자신의 몸에 불꽃을 달고는 그들의 곁으로 갔을 때, 정운영은 또한 어느 글에서 짤막한 추도문을 낭독한 일이 있다. 이제는 우리가 그를 위해 추도문을 짤막하게 읽을 차례이다.
'편히 잠드소서.'
Requiescant in pace
2005-09-25 16:50
ⓒ 2005 OhmyNews
우연히 들어와 봤는데 낯익은 이름이라 반갑고나. ^^
근데 이 오마이의 장제형 기자도 내가 아는 장제형일까나? ^^
그런데 나는 누구일까? ^^
말 놓으시는 것 보니 제 연배 이상인 여성이신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