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읽는시간 2009/08/09 15:57

논어

 

"사람됨이 효제로우면서 위계 질서를 어기는 사람은 거의 없다. 위계 질서를 중시하면서도 난을 일으키는 사람은 없었다. 그래서 군자는 근본에 힘을 써야 하는데, 그 이유는 근본이 바로 서야 올바른 길로 나아가기 때문이다. 효제라는 것은 바로 인을 이루는 근본인 것이다."

- 논어, '학이'중에서

 

'논어'는 공자의 어록이며, 공자의 제자들과 문인들의 대화나 행동에 대한 기록도 함께 실려 있다. 중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스승이자 사상가로 꼽히는 공자의 면모를 현대인들이 근거리에서 직접 파악해 볼 수 있는 유일한 책이다. 공자는 한나라 이후 유교가 중국의 공식 지배 이데올로기의 위치에 오른 뒤로 2천 년 동안 줄곧 성인의 위치를 차지해 왔으며 중국 문명을 뒷받침해온 주요한 이데올로기였다.

공자의 이상은 주나라 초기의 안정적인 봉건적 사회 질서를 복구하는 것이었다. 봉건적 사회 질서라는 것은 강력하고 안정적인 중앙 집권적 정치 체제와 혈연적 상하 관계를 연상시키는 왕과 신하들 사이의 엄격한 위계 질서를 그 핵심 내용으로 한다. 즉 통치자는 단순히 정치 권력의 소유자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백성들을 자식처럼 보호해야 할 부모와 같은 권한과 책임의 소유자이며, 신하와 백성들에게 있어서 통치자는 마음으로부터 존경하고 받들어야 하는 부모와 같은 존재로서 상호 인정과 신뢰가 이뤄져야 한다. 따라서 공자는 높은 덕성을 갖춘 통치자의 어진 정치와 그에 대한 백성들의 충심으로부터의 복종이라는 덕치를 주장했으며, 정치질서와 사회 윤리는 다 함께 효제라는 가족 윤리로부터 출발함을 역설했던 것이다. 또한 그럼 규범적이면서도 조화로운 질서를 가능하게 하는 원동력을 '인'이라고 보았다. 인은 도덕적 규범과 행위의 규칙이 인간성의 깊숙한 곳에 내면화되어 있어서 자연스럽게 질서와 규범을 받아들이며 외적인 강제가 전혀 없는 상태에서도 사회적 규범이나 도덕적 규칙의 속박을 오히려 즐거워할 수 있는 정신적 능력을 가리킨다.

현대적 시각에서 볼 때 '논어'는 지배 계층의 개인적 도덕성을 지나치게 중시하는가 하면 위계 질서를 과도하게 강조하는 정치 사회적 관점을 견지하고 있어서 보수적이라는 비판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노예제 사회를 벗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춘추 시대 당시의 시대 상황을 고려할 때 공자의 그런 관점은 다른 각도에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논어'는 정치 사회적 불안정의 극복은 궁극적으로 사회 구성원 개인의 이기심이 절제되고 검약과 겸양의 정신이 모든 구성원들에게 내면화될 때만 진정으로 가능해질 것임을 우리에게 일깨워주고 있다.

 

고전도 그렇지만 한문은 더 어렵다. 제목은 알고 있으되 손이 가지 않는 책 - 고전, 그중에서도 한문 원전인 책은 더욱 그렇다. 더운 날을 핑계 삼아 차일피일 미루다가 한두장씩 설렁설렁 그렇게 논어를 읽기 시작했다. 그런데 풀이글 중심으로 읽다보니 의외로 그럭저럭 읽을만했고 많은 부분이 한번쯤 들어본 문구들이어서 아! 생각보다 현실속에 공자의 사상이 가까이 있음을 깨닫게 된다.

 

사실 진작에 이 책을 읽었지만 뭔가를 쓰는 것 자체가 부담스러웠다 끊임없이 전해오는 쌍용자동차 투쟁소식과 아직 서투른 직장 업무에 대한 부담감, 일 끝난 후엔 겨우 저녁밥 해먹고 지쳐 잠들고 마는 쳇바퀴같은 일상에 조금씩 숨이 막혀왔다. 게다가 오래전 헤어짐의 기억에 우울함까지 겹쳐졌다.  책을 읽는다고 소인이 당장 군자가 될 수는 없는 노릇. 신영복은 '논어'를 '인간관계론의 보고'라고 하며 진보진영의 모습까지 비추어보기도 했지만 말이다.

 

子曰 知之者 不如好之者 好知者 不如樂之者

아는 것은 좋아하는 것만 못하고 좋아하는 것은 즐기는 것만 못하다

-  論語 雍也

여러번 읽고 들었음에도 논어의 구절인 줄은 미처 몰랐었다. 좋아해서 써먹은 적도 있었는데 ㅜㅜ 아는 것보다도, 좋아하는 것보다도, 스스로 즐기는 것 - 그렇게 살고, 일하고 싶었었다. 하지만 나처럼 평범한 사람에게 삶이 그렇게 쿨할리 없다. 그저 억지로 하는 숙제처럼 낑낑거리면서 하루하루를 힘겹게 버텨낼 뿐이지.

 

먼 곳에서 벗이 찾아오니 어찌 즐겁지 않으랴

- 論語  學

스스로 쌓은 담 때문에 나는 더 외로운 지도 모른다. 틀에 박힌 이 문구를 들여다보다 문득 깨달았다. 이제 나는 더이상 먼저 사람들에게 다가서지 않는다는 것을. 아주 조금 활동은 다시 시작했지만 예전과는 달라진 것이다. 모임에서 만나는 낯선 얼굴들에 대해 나는 묻지 않는다. 그 사람이 누군지 뭐 하는 사람인지 관심도 없고 굳이 애써 인사하거나 얘기나누지 않는다. 특히나 남성이라면 더욱 더. 그저 내게 말 걸어오는 사람, 몇몇 아는 사람들과만 일상적인 대화를 나눌 뿐. 하기는 이미 알아왔던 몇명조차 아직 서로 어색하거나 무관심하다. 서로 노력하지 않으면 그 간격은 좁혀지지 않을 것이다. 내 심장 깊은 곳에 위치한 인간에 대한 경계령도 쉽게 풀리진 않겠지. 먼 곳에서 찾아오는 벗 따위 결코 내겐 없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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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8/09 15:57 2009/08/09 1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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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다넘을벽 2009/08/09 18:55 ADDR EDIT/DEL REPLY

    "인간이 인간에 대한 경계령"
    그것을 경계한다

  • 벽너머 2009/08/10 01:34 ADDR EDIT/DEL REPLY

    차가운 심장에 불(佛)을 지핀다.
    "논어에 심치하면" 가장 위대한 공자가 될수도 있다?
    그러면 먼곳의 벗은 그 위대함에 더욱 멀어질수 밖에 없다.
    머리의 경계가 아니라 마음의 경계이다.
    차가운 심장을 불로서 데워야 한다.
    예와 불이 만날때 자칫 더욱 차갑거나 그 반대가 될수있다.
    고궁으로 가거나 절로 가는것은 경계의 벽을 더욱 높이는 것이다.
    그럼으로 경계의 진정한 소멸은 거리(路者)에서 만나야 한다.

    노자는 새로운 세상을 건설하는 즐거움이다.

  • wine 2009/08/10 12:59 ADDR EDIT/DEL REPLY

    인위적인 너무도 인위적인 사고로 인해 인간을 피곤하게 만든 사람 중 하나. 그나마 위안이라면 눈에 보이는 거짓말을 안 했다는......, 석가와 예수, 마호멧 보다는 좀 낫다는.

  • 명자 2009/08/10 14:57 ADDR EDIT/DEL REPLY

    와인은 맛을 미각으로 느끼지만
    막걸리는 온몸으로 맛을 느낀다.
    공자 석가 노자도 독특한 성격의 품질을 가지고 있지만
    서로 회통하면 품질이 소멸한다.
    회통은 와인의 경계와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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