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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경선의 이기적인 상담실-결혼, 외로움 푸는 전화방 놀이 아니죠

 

결혼, 외로움 푸는 전화방 놀이 아니죠
[매거진 esc] 임경선의 이기적인 상담실
 
 
한겨레  
 
 
마흔 앞두고 만난 지방 남자인데, 전화통화로는 너무 좋은데 확신이 안 서요

 

Q 39살 된 여자입니다. 선을 봤는데 저는 서울에 살고 그 사람은 충남에 살고 있습니다. 만난 것은 한 번이지만 전화통화를 많이 했습니다. 종교가 같고 직장도 그 정도면 됐다고 생각이 드는데 막상 얼굴을 보고 이야기하면 전화할 때처럼 좋지가 않아요. 그래서 이별을 고했는데 일주일 후 다시 전화가 와서 또 연락을 하고 있습니다. 통화하고 나면 ‘그래, 이 정도면 됐어’ 그러다가도 다음날이면 평생 함께 살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면 부정적이 됩니다. 여자의 변덕이라 하기엔 무리라는 생각에 잠도 못 이룹니다. 혼자인 것이 편해서 그런지 남자에게 매력을 느끼지 않으면 그 멀리까지 가서 사는 것에 자신이 안 생깁니다. 나이를 생각하면 이런 기회가 별로 없는데 말이죠. 아직도 남자의 외모를 보는 건지 그 사람에게서 매력을 못 느끼는 건지 나 자신을 모르겠습니다. 그는 키가 작고 통통하거든요. 어른들은 남자는 살아보면 다 거기서 거기라던데, 솔로로 편하게 살고 싶다는 생각과 가정을 이루고 싶다는 생각이 혼재되어 날마다 남자에 대한 태도가 변하고 있습니다. 이랬다저랬다 하는 저 자신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글을 씁니다.

 

A 지난번 칼럼에 이어 선택의 문제 2탄. 이 나이에 배부른 소리 하다가 있는 것마저 놓쳐 평생 외로이 혼자 살 것이냐, 하지만 이대로 결혼했다간 어쩌면 이 뒤에 나한테 좀더 잘 어울리는 남자가 나타나는 건 아닐까 - 확실히 고민되는 선택이긴 합니다. 이래도 괴롭고 저래도 괴로운 경우를 상상해보는 거니깐요. 하지만 고민 백날 해봤자 뭐합니까. 지금처럼 한 눈 감고 한 눈 뜬 상태에선 결혼할까 말까가 아니라 실질적으로 결혼까지 가기가 힘든데.

결혼은 대개 두 눈을 질끈 다 감고 있거나 아니면 두 눈 다 번쩍 뜨고 있을 때나 실천할 수 있는 것이지요. 마음의 백지 상태에서 뭣 하나 남자에 대한 혼란이나 고민, 의심 하나 없이 그저 ‘좋아하고 사랑하니까 결혼한다’, 혹은 남자라면 충분히 쓴맛 단맛 다 맛보았다고 생각해서 이젠 더 이상 남자한테 기대를 갖기보다 내가 되레 남자를 행복하게 해줄 수 있느냐는 자비의 경지까지 올라갔을 때 결혼은 자연스레 내게 찾아옵니다. 마음이 투명하고 열려 있는 상태니까 타인을 내 인생에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지요.

그런데 지금처럼 눈을 한쪽만 뜬 경우는 조금 골치가 아픕니다. 남자에게 아직도 기대하고 꿈꾸는 부분이 있으면서 동시에 남자의 야비함과 나약함이 하는 수 없이 눈에 들어옵니다. 그 남자를 두 눈 질끈 감고 믿고 싶지만 또 속고 싶지도 않아 두 눈 번쩍 떠보게 됩니다. 그러다 보니 한쪽 눈은 뜨고 한쪽 눈은 감은 상태로 밀고 당기기를 한동안 하게 되는 건데요. 대개 그 상황이 오래가면 남자들은 기분이 상하면서 그럴 수만 있다면 아무것도 묻지 않는 젊고 착한 여자에게 마음을 주길 원합니다. 이로써 그녀의 마음은 한층 더 의심 가득해지고 탁해지게 되죠.

눈 깜빡깜빡거리며 이리저리 남자를 수화기 너머 탐구한다고 해도 열 번 통화 한 번 직접 만나는 것만 못합니다. 마찬가지로 열 번 채팅 한 번 통화한 것만도 못하고요. 혼란스러울 때는 머리를 쓸 게 아니라 발을 써야 합니다. 앞으로 남은 인생 중 내가 가장 젊은 것은 바로 오늘.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주말 퇴근길에 불쑥 충남행 버스를 잡아타고 그를 만나러 가봅시다! 이것이 현 상태에서 상황을 가장 능동적으로 움직여볼 수 있는 방법인 것 같습니다. 내가 움직인 거리만큼 아마도 그동안 안 보였던 것이 더 명료하게 보일 것입니다. 원거리 관계의 한계보다 기회를 이용하잔 말입니다.

 





로드무비 한 편 좀 찍어봅시다. 충남에 도착하면 그에게 전화해서 또 한번 정겨운 통화를 한 후, “실은 저 여기 왔어요”라고 그를 깜짝 놀라게 해주며 주말을 그곳에서 보낼 거라고 말해보세요. 그동안에 얼굴을 본 것은 맞선이라는 매우 비일상적 상황. 그의 홈그라운드, 즉 실제로 결혼 후 공유하게 될 일상 속 그의 모습, 그리고 그 배경 속에 함께 출연하는 나의 모습을 몸소 보고 느끼고 오란 말입니다. 그의 단골집에 가서 밥도 먹어보고, 가능하면 그의 집에도 가보고 기회 닿으면 그의 방 쓰레기통도 뒤져보고…. 한편 들이대듯 불쑥 나타나 압박전술을 거는 여자에게 남자는 어떻게 반응할까 너무 궁금해지는데요, 우쭐해지며 거만하게 굴거나, 여자가 스토커인 양 두려워하며 부담스러워하거나, 순수한 마음으로 기뻐하거나, 셋 중 하나일 것입니다. 아마 이 남자의 태도와 기량, 당신에 대한 감정, 그 모든 것이 적나라하게 무자비하게 드러나게 되겠지요. 결혼은 고정된, 혹은 과장된 프로필과 이력서만 검토한 후 ‘이 정도면 됐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인간과 하는 거잖아요. 순간의 외로움을 달래기 위한 전화방놀이와는 차원이 다른 ‘관여에의 약속’인 것입니다.

 

 
» 임경선의 이기적인 상담실
 

그를 더 좋아할 수 있을지, 제대로 정나미가 떨어져서 돌아올지, 아직은 알 수가 없습니다. 다만 둘 중 하나로 결론날 거라는 것 하나는 확신합니다. 이것만큼 그와 나를 동시에 총체적으로 시험에 들게 할 수 있는 방법도 없으니깐요. 뭘 귀찮게 버스 타고 지방 내려가서까지 만나야 하냐고요? 그럼 계속 혼자 속 편히 사는 방법도 정말 나쁘지 않을 것 같습니다. 급격한 액션을 취하기보다 조금 더 천천히 추이를 살피겠다고요? 예, 불혹의 나이 마흔살 생일을 미리 축하드립니다.

칼럼니스트/고민 상담은 gomin@hani.co.kr

[매거진 esc] 임경선의 이기적인 상담실
 
 
한겨레  
 
 
마흔 앞두고 만난 지방 남자인데, 전화통화로는 너무 좋은데 확신이 안 서요

 

Q 39살 된 여자입니다. 선을 봤는데 저는 서울에 살고 그 사람은 충남에 살고 있습니다. 만난 것은 한 번이지만 전화통화를 많이 했습니다. 종교가 같고 직장도 그 정도면 됐다고 생각이 드는데 막상 얼굴을 보고 이야기하면 전화할 때처럼 좋지가 않아요. 그래서 이별을 고했는데 일주일 후 다시 전화가 와서 또 연락을 하고 있습니다. 통화하고 나면 ‘그래, 이 정도면 됐어’ 그러다가도 다음날이면 평생 함께 살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면 부정적이 됩니다. 여자의 변덕이라 하기엔 무리라는 생각에 잠도 못 이룹니다. 혼자인 것이 편해서 그런지 남자에게 매력을 느끼지 않으면 그 멀리까지 가서 사는 것에 자신이 안 생깁니다. 나이를 생각하면 이런 기회가 별로 없는데 말이죠. 아직도 남자의 외모를 보는 건지 그 사람에게서 매력을 못 느끼는 건지 나 자신을 모르겠습니다. 그는 키가 작고 통통하거든요. 어른들은 남자는 살아보면 다 거기서 거기라던데, 솔로로 편하게 살고 싶다는 생각과 가정을 이루고 싶다는 생각이 혼재되어 날마다 남자에 대한 태도가 변하고 있습니다. 이랬다저랬다 하는 저 자신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글을 씁니다.

 

A 지난번 칼럼에 이어 선택의 문제 2탄. 이 나이에 배부른 소리 하다가 있는 것마저 놓쳐 평생 외로이 혼자 살 것이냐, 하지만 이대로 결혼했다간 어쩌면 이 뒤에 나한테 좀더 잘 어울리는 남자가 나타나는 건 아닐까 - 확실히 고민되는 선택이긴 합니다. 이래도 괴롭고 저래도 괴로운 경우를 상상해보는 거니깐요. 하지만 고민 백날 해봤자 뭐합니까. 지금처럼 한 눈 감고 한 눈 뜬 상태에선 결혼할까 말까가 아니라 실질적으로 결혼까지 가기가 힘든데.

결혼은 대개 두 눈을 질끈 다 감고 있거나 아니면 두 눈 다 번쩍 뜨고 있을 때나 실천할 수 있는 것이지요. 마음의 백지 상태에서 뭣 하나 남자에 대한 혼란이나 고민, 의심 하나 없이 그저 ‘좋아하고 사랑하니까 결혼한다’, 혹은 남자라면 충분히 쓴맛 단맛 다 맛보았다고 생각해서 이젠 더 이상 남자한테 기대를 갖기보다 내가 되레 남자를 행복하게 해줄 수 있느냐는 자비의 경지까지 올라갔을 때 결혼은 자연스레 내게 찾아옵니다. 마음이 투명하고 열려 있는 상태니까 타인을 내 인생에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지요.

그런데 지금처럼 눈을 한쪽만 뜬 경우는 조금 골치가 아픕니다. 남자에게 아직도 기대하고 꿈꾸는 부분이 있으면서 동시에 남자의 야비함과 나약함이 하는 수 없이 눈에 들어옵니다. 그 남자를 두 눈 질끈 감고 믿고 싶지만 또 속고 싶지도 않아 두 눈 번쩍 떠보게 됩니다. 그러다 보니 한쪽 눈은 뜨고 한쪽 눈은 감은 상태로 밀고 당기기를 한동안 하게 되는 건데요. 대개 그 상황이 오래가면 남자들은 기분이 상하면서 그럴 수만 있다면 아무것도 묻지 않는 젊고 착한 여자에게 마음을 주길 원합니다. 이로써 그녀의 마음은 한층 더 의심 가득해지고 탁해지게 되죠.

눈 깜빡깜빡거리며 이리저리 남자를 수화기 너머 탐구한다고 해도 열 번 통화 한 번 직접 만나는 것만 못합니다. 마찬가지로 열 번 채팅 한 번 통화한 것만도 못하고요. 혼란스러울 때는 머리를 쓸 게 아니라 발을 써야 합니다. 앞으로 남은 인생 중 내가 가장 젊은 것은 바로 오늘.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주말 퇴근길에 불쑥 충남행 버스를 잡아타고 그를 만나러 가봅시다! 이것이 현 상태에서 상황을 가장 능동적으로 움직여볼 수 있는 방법인 것 같습니다. 내가 움직인 거리만큼 아마도 그동안 안 보였던 것이 더 명료하게 보일 것입니다. 원거리 관계의 한계보다 기회를 이용하잔 말입니다.

 





로드무비 한 편 좀 찍어봅시다. 충남에 도착하면 그에게 전화해서 또 한번 정겨운 통화를 한 후, “실은 저 여기 왔어요”라고 그를 깜짝 놀라게 해주며 주말을 그곳에서 보낼 거라고 말해보세요. 그동안에 얼굴을 본 것은 맞선이라는 매우 비일상적 상황. 그의 홈그라운드, 즉 실제로 결혼 후 공유하게 될 일상 속 그의 모습, 그리고 그 배경 속에 함께 출연하는 나의 모습을 몸소 보고 느끼고 오란 말입니다. 그의 단골집에 가서 밥도 먹어보고, 가능하면 그의 집에도 가보고 기회 닿으면 그의 방 쓰레기통도 뒤져보고…. 한편 들이대듯 불쑥 나타나 압박전술을 거는 여자에게 남자는 어떻게 반응할까 너무 궁금해지는데요, 우쭐해지며 거만하게 굴거나, 여자가 스토커인 양 두려워하며 부담스러워하거나, 순수한 마음으로 기뻐하거나, 셋 중 하나일 것입니다. 아마 이 남자의 태도와 기량, 당신에 대한 감정, 그 모든 것이 적나라하게 무자비하게 드러나게 되겠지요. 결혼은 고정된, 혹은 과장된 프로필과 이력서만 검토한 후 ‘이 정도면 됐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인간과 하는 거잖아요. 순간의 외로움을 달래기 위한 전화방놀이와는 차원이 다른 ‘관여에의 약속’인 것입니다.

 

 
» 임경선의 이기적인 상담실
 

그를 더 좋아할 수 있을지, 제대로 정나미가 떨어져서 돌아올지, 아직은 알 수가 없습니다. 다만 둘 중 하나로 결론날 거라는 것 하나는 확신합니다. 이것만큼 그와 나를 동시에 총체적으로 시험에 들게 할 수 있는 방법도 없으니깐요. 뭘 귀찮게 버스 타고 지방 내려가서까지 만나야 하냐고요? 그럼 계속 혼자 속 편히 사는 방법도 정말 나쁘지 않을 것 같습니다. 급격한 액션을 취하기보다 조금 더 천천히 추이를 살피겠다고요? 예, 불혹의 나이 마흔살 생일을 미리 축하드립니다.

칼럼니스트/고민 상담은 gomi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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