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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글라 소식2- 자말 동지

자말 동지를 만나러 가는 길은 참으로 멀고도 멀었다.

주소도 전화번호도 없이, 비두 동지가 딱 한 번 갔던 그 길을 기억을 더듬어 가야했다.

 

템포(트럭을 개조해서 만든 교통 수단) 를 타고,

릭샤(자전거 인력거) 를 타고 또 다른 릭샤를 갈아타고,

저 멀리 마을이 보이는 큰 강 앞에 섰다.

 

여기쯤인거 같다고, 비두 동지가 말했다.

강건너 마을을 바라보며,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자말 집이 어디냐고 물었다.

누군가 저 건너 마을에 한국에서 일하다가 온 자말이 산다고 했다.

아, 사람을 이렇게 찾는 것이 가능하구나...

 

통통배로 강을 건너, 드넓은 감자밭을 지나, 꼬불꼬불한 길을 따라가니

저 끝이 바로 자말 집이라고 얘기해 주었다.

 

" 어떻게 만날까? "

이른 점심을 먹고 출발해서 해거름에 도착한 자말동지의 집.

화장실 갔다는 자말동지를 기다리는 시간이 너무나 길게 느껴졌다.

 

2003년 10월 26일 전국비정규직 대회 투쟁에서

비두 동지와 함께 연행된 자말.

당시 열여덟의 솜털조차 가시지 않은 소년이었던 그는

외국인 보호소에서 날마다 울었다.

한국에서 3년동안 일했지만 본국에서 진 빚도 다 갚지 못한 상황에다가

사말 동지의 말을 믿고, 형들과 삼촌을 따라 왔던 집회에서 덜컥 연행된 것이다.

방글라데시로 강제추방되기 전, 마지막 면회에서 자말 동지가 보낸 원망과 슬픔의 눈빛이 생생했다.

아, 어떻게 만날까?

 

감자 농사를 짓느라 햇볕에 검게 그을린 자말이 저 멀리서 하얀이빨을 드러내며 웃고 왔다. 그리고 만나자마자 원망의 말을 한다.

" 뭐에요? 그동안 연락도 한 번 안하고..."

" 다른 동지들은 어떻게 지내요?"

나는 계속 고개만 끄덕이고 말았다.

 

 

<자말동지와 친구-오른쪽이 자말>

 

자말동지는 친구들이랑 같이 동네 시장에서 전화가게를 열었다고 한다. 방글라데시에는 전화기 몇 대를 놓고, 한통화당 얼마씩 받는 가게들이 많이 있다. 자말 동지의 가게도 그 중 하나이다. 낮에는 농사일도 돕고, 오후에는 친구들이랑 가게를 본다고 했다. 하지만 이제 갖 스물을 넘긴 청년 자말에게 시골의 작은 전화가게는 전망도 희망도 없는, 너무나 좁은 공간인 것 같았다.

 

" 집에 소도 있고, 밭도 조금 있어서 팔아서 다른 나라 가고 싶은데... 어떻게 가야할지 모르겠어요... 누나, 아는 사람있으면 소개 좀 시켜줘요..."

" 우리 나라엔 일자리가 없어요... 외국 나가야 되는데..."

 

나는 아무런 대답도 못하고, 그저 손잡고 고개만 끄덕이다가 자말동지의 집을 나서고 말았다. 며칠 후 자말 동지는 다카(방글라데시 수도)에 오기로 했다. 마음이 한없이 무거웠다.

 

 

<비두, 자말 동지>

 

며칠 뒤, 우리는 비두 동지 집에서 다시 만났다. 자말 동지는 가방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외국인 보호소에 있을 때 명동성당 농성단에서 보내준 유인물, 동지들의 편지 그리고 2003년 다이어리. 2003년 10월 26일부터 2004년 1월 1일 달력에는 숫자위에 커다랗게 엑스 표시가 되어있었다. 70일 가까운 날들을 하루하루 엑스표치며 보냈던 그 시간이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열여덟 소년에게 투쟁은 무엇이었을까? 그리고 지금 자말동지에게 투쟁은 무엇으로 남아있을까?

 

그는 비두 동지에게 말했다.

"투쟁하는 다른 동지들 다 잘 살고 있는 것 같아요. 형도 그렇고, 누나도 그렇고."

하룻밤 자고 가라는 비두 동지의 말도 애써 사양하고, 릭샤에 올라 손을 흔들며 자말은 떠났다.

그 날 어둠 속에서 한참을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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