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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생, 첫사랑.

마석 성생공단이 텔레비젼에 나왔다.

출입국관리소의 단속차량을 막아선 마을 주민들과 사업주들 그리고 샬롬의 집.

아는 얼굴들이 화면 속에서 지나간다.

 

처음 소식을 전해들었을 때

내가 뭘 할 수 있을까

라고 중얼거렸다.

급박한 상황이 되면 이상하리만치 냉정해지고 무덤덤해지는 습관

그 습관을 다시금 불러일으킨 시간이었다.

 

여전히 성생공단에서 일을 하고 있는 몇몇 동지들한테 전화를 하고

상황을 묻는다.

빨리 오라며 재촉하는 동지도 있었다.

전주 맛자랑 식당 , 성생 초등학교, 비두씨네 집

눈에 보듯 빤한 그 길에서 출입국 차량은 9시간 동안 마을의 한국 사람들과 대치중이라고 했다. 이주 동지들은 단속을 피해있다가 간혹 몇몇이 왔다갔다 하고 있다고.

 

옷을 주섬주섬 갈아입고

집을 나서다가

다시 되돌아온다.

누가 있을까?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자신이 없었다.

동지들, 우리 다 같이 싸웁시다!

라고 하는 순간 무표정으로 반응할 마을의 이주노동자들

니가 얘네들 책임질 거냐 며

야! 방글라, 필리핀 니네들은 집에 들어가 있어

라며 고함칠 한국 사람들.

 

마치 이주노동자들을 대변하고 보호하는 양

큰소리 치다가도

어는 순간, 어떤 방식으로든, 뻔하게 타협하는

그들의 속성을 모르지 않는다.

그 속에서 난 싸울 자신이 없었다.

같이 싸울 동지가 없는 그곳에서 나 혼자 어떻게?

라는 질문이 터지자

그냥 힘이 빠져버렸다.

마석 근방에만 가도 가슴이 내려앉는 그 기분을 또 느끼고 싶지 않았다.

이불을 뒤집어 쓰고 한참을 잤다.

 

마석 상황 종료!

단속된 이주노동자들을 출입국으로 일단 연행한 후

풀어 줄 수도 있다는

애매한 대답을 듣고

장장 9시간의 대치를 풀었던 모양이다.

불안하게 혹은 분노하며 구경했던 이주노동자들

9시간 동안 가슴 졸이며 출입국 단속 차량에 감금 되었던 30명의 이주노동자들.

다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예전에, 예전에 말이다.



우리는 성생공단 사수투쟁을 준비하고 있었다.

단속이 공표된 전날 밤

출입국차량이 들어오면 어떻게 막고 싸울 것인가를 준비했다.

비두와 꼬빌이 중심이 되어 동네 곳곳에 포스트를 세우고

유래없는 한 판 큰 싸움을 결의했었다.

그날 새벽 비두와 꼬빌이 수십명의 출입국직원들에게 연행되면서

모든 계획은 물거품이 되었고

연이은 출입국, 경찰, 한국인 지역 사람들의 탄압에

마석 성생공단,

한국 이주노동자 투쟁의 시발지였던 그곳은

초토화 되었다.

공단의 이주노동자들은 투쟁에 알레르기를 보였다.

마치 남한의 레드 컴플렉스처럼.

투쟁이라는 말만 들어도 이주노동자들을 불안에 떨도록 만든

간악한 인간들을 생각하면 치가 떨린다.

그리고

그리고

무엇보다

그 폐허가 되버린 공단지역에 다시 투쟁의 바람을 일으키려고 노력하지 못했던

내 패배감에 가슴이 무너진다.

 

그곳에서 어제 싸움이 있었다.

공장 사장들과 지역주민들이 출입국 차량을 막았던.

 

하지만 나는 상상했다.

다른 싸움을.

한 때 집회에 참가하기 위해 공단 곳곳에서 밀려나왔던  이주동지들의 그 거대한 물결이

출입국 차량을 가로막는 상상을.

그 가운데 비두와 꼬빌 동지가 선동을 하고

출입국에 대한 분노를 발산하는 함성을 동지들이 외친다.

오금을 저리며 도망가는 출입국을 혹은 경찰과 대치하는 모습을...

만약 상황이 그러하면 어제 출입국 차량을 막아섰던 사람들은 무엇을 하고 있을까?

혁명의 시기에 소자본가들과 선량한 시민들의 역할이란?

하며 혼자 상상을 한다.

 

한국에 있는 동지들은 텔레비젼을 봤을 것 같다.

정부의 탄압과 동료들의 비난을 못 이겨 다른 지역으로 뿔뿔이 흩어진 이주 활동가들.

함께 성생공단 사수투쟁을 준비했던 예전의 동지들.

어디선가 나처럼 가슴에 돌덩이를 느끼고 있겠지.

많은 이들이 본국으로 추방되거나 돌아갔고

많은 이들이 연락이 끊겼다.

 

너무나 허전함 마음에 전화기만 만지작거리며

멍하니 앉아있던 밤.

패배감, 투쟁, 폐허, 동지, 책임감, 성생공단, 차가운 시선, 두려움, 상상...

단어는 무수히 쏟아지고

잠은 오지 않고

가슴은 내려앉고

...

실패한 첫사랑의 기억은 너무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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