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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 노란선 위의 나

그 때,

얼이 빠져 혼자 중얼대며 도로 중앙선을 타고 걸어다녔다.

날이 환한 아침이었고,

그곳은 남대문에서 명동으로 가는 팔차선 도로였고,

차들은 내 양 옆으로 달리거나 신호를 기다리며 서있었다.

나는 중앙선을 넘지 않기 위해 한발 한발 노란선을 밟았다.

 

그 때,

술취한 밤이면 소리내 울면서

길을 걷기도 했다.

 

남녀 공용 화장실에서 나오는 순간

성추행범이 내 가슴을 쳤고,

전력을 다해 그놈을 잡겠다며 뛰었던 날도,

 

시청 공무원인 친구의 몸에 

우리의 술자리에 갑자기 끼어든

느물거리던 인사담당 공무원의 한 손이 닿았을 때,

(혹은 닿았다는 환각이 들었을 때)

벌떡 일어나 "안돼!"라고 소리를 지르던 날도

 

그렇게 울면서 길을 걸었다.

 

그 때,

내 주위엔 아무도 없었다.

이건 분명 성폭력이라고 누군가는 말했다.

하지만 그 뿐이었다.

누군가는 나중에 말했다.

그 때 얘기들었는데, 연락못했다고.

 

나는 그를 직접 만날 수 밖에 없었다.

그는 그날 밤을 기억한다고 얘기했다.

나는 성폭력이라고 말했다.

그는 자신이 그런 파렴치범이냐며 인정하지 않았다.

나는 그가 성폭력 가해자라고 말했다.

그는 나를 좋아한다고 말했다.

 

나는 그가 속한 조직의 사람을 만났고,

그녀는 진지하게 같이 대응하겠다고 했다.

공개할 것인가 말것인가?

공개하기에는 너무나 많은 고려가 필요했다.

 

성폭력에도 수위가 있다면,

폭력 사건에 몇 주 진단 내리듯

그럴지도 모른다면

'경미'한 사안이라는 것,

 

투쟁의 마무리 시점에서 모두가 지쳐있고

그가 없이는

혹은 내가 없이는

투쟁을 마무리하기에 너무나 벅차다는 것,

 

내가 속한 조직에서

이 이야기가 시작되는 순간

불보듯 뻔하게 우루루 쏟아질

2차 가해자들에게 맞설 여력이 없다는 것,

 

혼란스러웠다.

누구도 나에게

어떻게 이 문제를 풀어야 하는지

가르쳐주지 않았다

어떤 이들은 침묵했고,

대부분은 당사자인 내가 어떻게 할 것인지를 물었다.

중앙선을 타고 걷던 나에게

울면서 밤길을 걷던 나에게

말이다.

 

결국,

비공개 대책위가 꾸려지고

1년이 훨씬 넘어가는 지금도

대책은 진행중이다.

 

지난 1년 간

대책위는 간간이

그에게 교육을 진행했고

나는 대책위 사람들을 아주 가끔 만나곤 했다.

 

처음 대책위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를 할 때면

그동안 내가 당해온 무수한 성폭력을 이야기했다.

집단적 가해자였던 '동지'라는 이름의 그들에 대해.

그들이 던진 끈적거렸던 눈빛과

악수하자며 잡고는 놓지 않았던 내 손과

투쟁을 빙자해 끊임없이 걸어오던 연애질과

그리고

그리고

인간에 대한 이해와 동지에 대한 내 마음에 즉각적으로 대응해 준

나에 대한 성적 대상화와 그들의 마스터베이션.

 

참 느슨했던 대책위가 곧 마무리하게 될

그 성폭력도 어쩌면 그 중 하나였는지 모른다.

한방에 나를 기절시켜버린 폭력은 아닌

그래서

혹자에겐 배부른 소리로 들려

특별히 개입하려 들지 않았던,

또 공개하기에도 뭔가 좀 깨름직한

그런 성폭력.

 

난 그런 성폭력을 매일 당하고 살았다.

그러니까 매일 매일 표시 안나게 한대씩 맞고 살아온 것이다.

오늘은 다리를 살짝 걷어차고

또 오늘은 팔을 좀 비틀어주고

또 오늘은 지나가며 뒷통수를 한대 때리기도 하고

그 수위가 넘고 넘어 만신창이가 되었던 

그 때,

 

나는 이른 아침 혼잡한 도심 차도의 중앙선

그 노란선을 밟고

위태롭게 걸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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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지영을 지지합니다.

며칠 째 그녀를 생각했고, 저를 생각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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