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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의 슬픔에 대처하는 법

나는 엄마의 장례를 치루었고,

말로는 이루 설명할 수 없는 상태에 놓여져 있다.

밥도 먹고, 잠도 자고, 웃기도 하고, 농담도 하지만

이전엔 한 번도 경험해 본 적이 없는 깊은 통증이 수시로 찾아온다.

마치 예전엔 한번도 슬프거나 외롭거나 가슴이 아퍼본 적이 없었던 것 처럼,

도무지 비교할 수 없는 그 무엇이건만,

 

주변의 사람들은

 

그래도 넌,

 

으로 시작하는 말을 자꾸한다.

 

그래도 넌 마지막까지 엄마랑 같이 있었잖아.( 난 나라에 갈 수 없어서 돌아가실 때 얼굴도 못봤어!)

그래도 넌  어른이 되서 헤어진 거잖아.(어릴 때 부모를 잃은 사람들 생각 좀 해봐!)

그래도 넌 아빠가 계시잖아.( 완전 고아가 된 건 아니잖니?)

 

그래도 난,

 

한줌도 위로가 되지 않는다.

 

이건 뭔가 다른 상황과 비교한 후에, 안도의 한숨을 쉴 수 있는 종류의 슬픔이 아니다.

주위의 모든 사물이 백지가 되고,

숨이 멎은 엄마와 나

그렇게 둘 만이 존재했던 그 순간처럼

그 자체로 절대적인 것일 뿐이다.

 

아마도 경험해 보지 않은 사람들은 절. 대. 로.

알 수 없을 것이다.

 

친구의 아버지 장례식장에서 술퍼먹고 어린 애인 자랑하며 떠들었던 것

친구가 좋아했던 시아버지를 잃어 슬플 때 함께하지 못했던 것

어려서 부모님을 떠나보낸 친구의 이야기에 무심히 끄덕이고만 있었던 것

 

이제와 생각하니 너무나 미안한 일이지만

 

내 엄마의 장례식장에 와서

의사 사회의 보수성과 거기에 물들어 가고 있는 자신에 대해 한---참 하소연 하던 친구도

양다리 걸쳐 나를 삼각관계 연애의 비련의 주인공으로 만들던 녀석이 제 아이 자랑하는 모습도

이주 운동 속에서 이제는 몸도 맘도 너무나 피폐해진 자신에 대한 이야기만 절절히 하던 옛 동지도

 

어쩔 수 없는 일인지 모르겠다.

 

그래도

오늘 제 기분이 우울하니 만나자고 하는 오랜 친구에게서

새로운 여친이 날 보고 싶어 한다는 옛 애인의 문자에서

그래, 요즘 잘 지내? 라고 경쾌하게 던져지는 질문 앞에서

 

얕은 절망이 찾아오기도 한다.

 

왜 하필 지금, 나에게

그렇게 하냔 말이다.

 

엄마가 스르륵 연기처럼 빠져나간

휑한 가슴으로

세상을 마주해야 하는 지금

일상은 그렇게 쉽게 오지 않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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