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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자는 글은 안쓰게 된다.

어느날 어떤 글을 써보고 싶어진다. 게임이라든가, 만화라든, 애니메이션이라든가, 혹은 나에 관련된 어떤 것들. 조금은 심각하고, 조금은 잘난 체 해볼 수 있는 그런 것들. 한 번 그러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니까 이번엔 왠지 좀더 잘 쓰고 싶다는 글 욕심도 생긴다. 그래서 자료조사랍시고 이것저것 준비를 한다.

어디서는 관련된 논문을 찾아 필요한 부분을 발췌한다. 집에 굴러다니는 책을 뒤적여 그에 관련된 내용을 찾기도 한다. 인터넷에서 비슷한 주제에 관련된 글을 찾아 스크랩해놓기도 한다. 글에 삽입할 그림도 열심히 찾아 모은다. 필요하다면 음악도 다운로드받아 준비해놓는다. 하여튼 글 쓰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으면 일단 최대한 모아둔다. 오랜시간에 걸쳐서. 많은 노력을 기울여서.

그러나 정작 모든 준비가 갖춰지면 쓰지 않는다. 절대. 결코. 쓰고자 해서 그토록 준비했던 글은 거의 대부분 쓰여지지 않은 채 머릿속에만 남는다. 쓰려고 준비하는 동안 쓰고자 하는 모든 에너지를 다 소비해버리기 때문이다. 논문을 보고, 책을 뒤지고, 인터넷을 돌아다니는 사이, 어느새 쓰고 싶다는 욕구 자체가 완전히 충족되어버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가 쓰는 글은 대개 즉흥적인 것들이 많다.

조금 잘 써보겠다고 쓰는 글들은 대개 글이 되지 않는다. 대신 전혀 자료조사 없이, 전혀 사실확인 없이, 그냥 충동이 시키고, 손가락이 내켜서 휘갈겨쓰는 것들이 글이 된다. 20분 안팎 걸려 쓰여진, 길어아 한 시간 정도 딴 짓 하면서 대충대충 쓴 그런 것들이 글이 된다. 컴퓨터 하드에는 그와 관련된 좀더 멋진 글을 쓰기 위한 다양한 자료가 남아있는 채.

비효율도 이런 비효율이 없다. 조금 잘난 체 해보겠다고 열심히 준비하면 준비하는 동안 만족해버려서 글 안쓰고도 배불러 배 두드리며 손 털어버린다. 전혀 생각지도 않던, 준비따위는 전혀 되어 있지 않던 것들은 어느 순간 충동에 밀려 글이 되어 인터넷에 공개된다. 잘난 체 좀 해보겠다고 블로그니 뭐니 만들어놓은 주제에 바보짓도 이 정도면 국보급이다. 그러고도 블로그 운영이라니.

지금도 내 하드에는 내가 쓰고자 기획만 해두었던 글에 대한 자료들이 많이 있다. 사진만 해도 몇 백 메가가 되고, 텍스트만 또 몇 백 메가다. 하지만 대부분 내가 뭣 때문에 모았는지조차 잊고 있다. 그때 내가 어떤 글 쓰자고 저 자료들을 모았는지조차. 그러면서 잘난 척 여기저기서 즉흥적인 글은 잘도 쓴다. 아는 사람이 보면 비웃고 말 그런 글들을. 그야말로 사서쪽팔림이다. 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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