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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의 임계점...

나는 코미디를 잘 보지 못한다. 코미디를 보는 것이 때로 괴롭기까지 하다. 그러나 그렇다고 아주 보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어느 정도 수준까지는 본다. 그리고 그 수준을 넘어서더라도 보는 것 자체는 가능하다. 다만 웃지 못할 뿐이다. 웃던 것을 웃지 못하게 되고, 무덤덤하던 것이 괴로워질 뿐이다. 즉 임계점이다. 같은 상황에서도 전혀 다른 감정을 느끼게 되는.

 

예전에 텔레비전에서 본 영화의 한 장면이다. 사막에서 홀로 떠돌다가 우연히 사막 원주민에게 구해진 아이가, 자신을 구해준 원주민을 오해해서 돌을 던지자 그 원주민은 화를 내며 미련없이 아이에게서 등을 돌려버린다. 그 원주민의 관습에 돌을 던지는 것은 결코 해서는 안되는 금기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린아이 혼자 살아가는 것이 불가능한 사막에 어린아이를 버려두고 떠나버린 것이다.

 

현실에서도 그런 경우를 많이 보게 된다. 처음에는 웃고 떠들던 누군가가 어느 순간 갑자기 화를 내며 일어서는 것을. 아니 화를 내고 일어서는 것을 넘어 폭력적이 되어버리거나, 아예 친하던 사이를 단절시키는 것을. 대개는 그런 사람에 대해 주위에서는 비난을 한다. 속이 좁다고. 뭐 그런 걸 가지고 그러냐고. 그러나 그 사람에게는 그것이 결코 건드려서는 안되는 금기였던 것이다.

 



물론 그것이 처음부터 금기였던 것은 아닐 것이다. 처음부터 결코 해서는 안되는 그러한 경우도 없지는 않겠지만, 대개는 처음에는 어느정도 허용할 수 있는 그런 것이었을 경우가 더 많다. 그렇게 처음에는 같이 웃으며 즐기다가, 어느 순간부터 웃지 못하게 되고 관계를 고려해 참게 되고, 그러다가 한 순간 폭발해 화를 내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임계점이다. 허용할 수 있던 것을 더이상 허용할 수 없게 되는 것.

아마 누구나 그러한 임계점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누군가 장난을 칠 때 어느 정도 선까지는 대개는 다 참아낼 수 있다. 그리고 그 선을 넘어가면 참지 못하고 화를 낸다. 대개는 그렇다. 장난 그 자체로서 화를 내는 것이 아니라, 그 장난이 내가 정해놓은 어떠한 선을 넘어서기 때문에 화를 내는 것이다. 처음엔 웃음이었던 것이 임계점을 거치면서 인내가 되고 화가 되는 것이다.

웃는 것만 그런 것이 아니다. 웃는 것, 우는 것, 화내는 것, 미워하는 것, 기뻐하는 것, 모든 감정이 임계점을 가지고 있다. 어느 수준까지는 좀더 긍정적이고 우호적인 감정을 갖다가, 어느 수준을 넘어서면 좀더 부정적이고 배타적인 감정을 갖게 되는 어떠한 선. 물론 그 선은 사람마다 다 다르다. 말하자면 역린이라고나 할까? 건드려서는 안되는. 넘어서는 결코 안되는. 그런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감정의 임계점을 타인은 물론 스스로도 잘 알지 못한다는 것. 대개는 모른다. 자기가 어디까지 참아내지 않아도 되고, 어디까지 참아낼 수 있으며, 어디까지 참아낼 수 없는지. 참아내야 하는 상황이 되고 참아낼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서야 겨우 알게 된다. 스스로든 혹은 타인이든. 그래서 싸운다. 그래서 갈등한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만나고 사귀다 등을 돌린다. 그리고 등을 돌리지 않은 사람들은 깊은 친구사이가 된다.

진정한 친구라 하는 것은 다른 게 아니다. 싸우고 갈등하고 절교하는 과정에서 서로의 금기와 감정의 임계점을 알고, 그것을 이해하고 존중해주는 사이다. 서로의 금기를 범하지 않고, 서로의 임계점을 넘어서더라도 용서해주는, 설사 참지 못하고 싸우게 되더라도 끝내 이해할 수 있는, 그런 사이를 진정한 친구라 한다. 처음부터 좋기만 한 사이가 아니라, 상처가 쌓여 어떠한 상처도 이겨낼 수 있는 사이를 진정한 친구라 하는 것이다.

여기서 친구라 하는 것은 좁은 의미에서만의 친구는 아니다. 그 친구는 아버지가 될 수도 있고, 어머니가 될 수도 있으며, 여동생이 될 수도 있고, 선생이 될 수도 있다. 나이와 관계를 뛰어넘어 서로를 깊이 이해하고 받아들여줄 수 있을 때 그들은 서로 친구가 된다. 그것이 친구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그래서 친구를 갖기란 평생을 사랑할 사람을 얻기보다 더 어렵다.


어쨌든 감정의 임계점이라 하는 것은 참 미묘하면서도 사람 관계에 있어 중요한 것이다. 허용할 수 있고 없고의, 공존할 수 있고 없고의, 중요한 기준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고 대개는 알지 못하는 사이 넘어선 그 임계점의 경계로 인해 싸우고 등돌리고 원수가 되어버리기도 한다. 그래서 그 임계점을 다루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사람 사이에서 살아가고자 한다면 말이다.

나 자신의 가장 큰 문제 가운데 하나가 감정의 임계점이 매우 낮은 선에 머물러 있다는 것. 아주 낮다. 한 마디로 되는 건 되는데, 안되는 건 처음부터 안된다고 못을 박아버린다. 못을 박지 않을 거라면 혼자 끙끙 앓다 아예 폭발해 버리거나. 대개 이런 사람들을 소심하다고 그런다. 감정의 임계점의 폭이 좁은 사람을 일컬어 흔히 소심하다 하는 것이다. 내가 코미디를 보지 못한다고 하는 것은 그러한 소심함의 결과인 것이다.


그래서일까? 사람 대하는 것이 정말 서툴다. 서툴러서 서툰게 아니라 스스로를 다스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람 대하는 것을 모르는 것은 아닌데 어느 순간 감정을 이기지 못해 지나치게 솔직해져 버리고 만다. 그리고 후회한다. 왜 그랬을까 하고. 그리고 끝. 그래서 이 나이 먹도록 사람 대하는 것이 어렵다. 아마 평생 가도 사람 대하는 것이 더 쉬워지지는 않을 것이다. 한심한 노릇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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