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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5/07/31
    고양이와 바퀴벌레...(5)
    불그스레
  2. 2005/07/29
    고양이와 닭고기를 나누어 먹다...
    불그스레
  3. 2005/07/26
    사람은...
    불그스레
  4. 2005/07/06
    고양이 기르기에 대한 잡상...
    불그스레

고양이와 바퀴벌레...

그동안 내 방의 주인은 바퀴벌레였다. 내가 끔찍이도 바퀴벌레를 싫어하는 바람에, 바퀴벌레를 잡기는 커녕 보는 것만으로도 끔찍해하는 탓에, 바퀴벌레는 그야말로 무소불위 절대의 권력자로서 내 방의 모든 것을 지배했었다. 심지어 방주인인 나조차도 바퀴벌레가 행차하면 알아서 자리를 비켜주어야 했을 정도로.

 

그런데 고양이가 들어오고 나서 그 서열이 바뀌었다. 이를테면 바퀴벌레의 수난시대라고나 할까? 벌써 항상 눈에 보이던 손가락 세개 굵기의 바퀴벌레들이 이제 한 마리 겨우 남아 있다. 나머지는 방바닥 어딘가에, 그리고 싱크대 주위 어딘가에 개미가 들끓는 것을 흔적으로 발견했다. 그 주범은? 다름아닌 고양이다.

 

고양이가 바퀴벌레 사냥을 시작한 것은 얼마 되지 않았다. 대략 보름 전쯤. 그 전에는 너무 어려서인지, 아니면 집에 적응이 덜 되어서인지 바퀴벌레를 잡는다거나 하는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갑자기 언제부터인지 휘리릭 날아다니며 바퀴벌레며 파리며 낼름낼름 잡아서 먹는다.

 

녀석들이 방안에서 사냥을 한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된 건 날아가던 파리를 앞발로 때려 떨어뜨린 뒤 그걸 낼름 삼키는 모습을 보면서. 그리고 그날 바퀴벌레 한 마리를 잡아 물고 방안을 누비는 그야말로 살떨리는 경험을 했다. 고양이 입에 물린 채 꿈틀거리는 바퀴벌레 뒷다리라니.(우웩~)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속이 울렁거린다.

 

그 이후 내 방은 고양이의 사냥터가 되었다. 때로는 파리도 잡아먹고, 때로는 모기도 잡아먹고, 가끔 길잃은 잠자리가 날아 들어오면 그것도 먹는다. 귀뚜라미는 고양이밥과 더불어 양대 주식이다. 그리고 또 하나. 먹는 지, 아니면 잡아서 어디다 갖다 버리는 지 알 수 없는, 후자이기를 간절히 바라는 바퀴벌레다.

 

덕분에 이제 내 방의 서열은 완전 바뀌었다. 서열 1위는 역시 고양이. 이놈들 자리에 누우면 나는 피해서 앉아야 한다. 컴퓨터 앞에 자리를 잡으면 키보드 들고 한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자판을 두드린다. 가끔 바퀴벌레라도 입에 물고 들어오면 나는 아예 방을 나선다. 그러면 방은 온전히 고양이의 차지가 되어 버린다.

 

서열 2위는 고양이에게 서열 1위의 자리를 빼앗긴 바퀴벌레. 아직도 나는 바퀴벌레가 보이면 일단 도망부터 치고 본다. 물론 바퀴벌레는 모습을 보이자 마자 고양이 두 마리의 추격에 온몸이 너덜너덜 만신창이가 되어 죽거나 혹은 잡히거나 도망친다. 도망치는 경우는 극히 드물고 대개는 잡혀 장난감 신세가 된다. 불쌍한 서열 2위라고나 할까?

 

마지막 서열 3위는 당연하게도 나다. 고양이 배고프면 밥 차려주고, 오줌 똥 싸면 오줌 똥 다 치워주고, 심심하면 놀아주고, 잘 때는 옆에서 난로역할 해주는 고양이의 종, 고양이의 노예, 바퀴벌레의 압제로부터 해방해주는 댓가로 고양이에게 절대복종을 맹세한 바로 나다. 덕분에 여전히 바퀴벌레에게 쫓기면서도 요즘은 비교적 맘 편하게 지내고 있다. 아아. 바퀴벌레가 한 마리밖에 보이지 않는 쾌적한 한경이라니.

 

하여튼 걷는 모습에서도 서열의 표가 확연히 드러난다. 고양이 놈들은 항상 자세를 꼿꼿이 세우고, 꼬리마저 치켜들고 걸어다닌다. 나는 주머니가 빈 티를 팍팍 내며 어깨를 구부정하니 숙이고 다니고. 바퀴벌레는? 여전히 빨빨거리며 잘도 쏘다닌다. 누가 보더라도 이 방의 실세가 누구인지 확연히 드러나는 모습이다.

 

오죽하면 고양이가 내 이불에 오줌을 싸도 한 대 때리지 못했겠는가? 고양이가 똥을 싸는 바람에 가방을 빨아야 했음에도 웃으며 넘어갔겠는가? 밥을 주지 않는다고 얼굴을 핥으며 맛을 볼 때는 발발 떨면서 재빨리 고양이밥을 차려 앞에다 대령했겠는가? 고양이가 내 애완동물인 게 아니라 내가 고양이의 애완동물이 된 기분이다.

 

하긴 이런 맛에 고양이를 기르기는 한다. 말 잘 듣는 고양이면 고양이가 아니다. 고양이는 항상 주인 알기를 애완동물 알 듯 해야 한다. 항상 자기가 방 주인인 줄 알고 있어야 하며, 그래서 오만과 건방이 털 오라기 하나하나마다 뚝뚝 떨어져야 한다. 그래야 고양이다. 그래야 고양이를 기르는 맛이 있는 것이고.

 

어쨌거나 예전에는 쥐를 잡으려 고양이를 길렀는데, 이제는 바퀴벌레 잡이용으로 고양이를 기르게 되었다. 쥐를 보기가 그만큼 힘들어진 때문일까? 아니면 바퀴벌레 보기가 쥐를 보기 만큼이나 흔해졌기 때문일까? 예나 지금이나 사냥꾼으로서의 본능이 일생에 도움이 되는 동물이 고양이다. 그러니 충성을 맹세하지.

 

지크 고양이! 지크 쭈그리! 지크 꼬맹이! 우야뜬둥 고양이 만세! 반자이! 비바 고양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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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와 닭고기를 나누어 먹다...

고양이 사료를 사러 동물병원에 갔더니 협박을 한다. 고양이에게 사료 이외의 것을 먹이면 안 좋다고. 인터넷을 뒤졌더니 마찬가지 이야기가 나온다. 고양이에게는 사료만 먹이라고. 그래서 지금껏 쭈그리와 꼬맹이 녀석들에게 사료만 먹였다. 어찌되었거나 그게 더 좋다니까.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그렇게 사료만 먹이고 있으려니 꼭 고양이를 기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같이 사는 것이 아니라 고양이를 기르고 있는 것이다.

 

예전에 고양이를 기를 때는 기른다기보다는 함께 살아간다는 생각이 강했다. 먹는 것을 같이 먹었기 때문이다. 생선을 먹으면 생선을 나눠먹었고, 고기를 먹으면 고기를 나눠먹었다. 하다못해 된장국을 먹어도 된장국 안에 들어 있는 멸치는 고양이 차지였다. 그래서 밥상에서는 전쟁이 벌어진다. 뭐라도 하나 얻어먹으려는 고양이와 그것을 막으려는 어머니의.

 

그러면서도 어머니는 시장에 갔다 오실 때마다 먹지도 않는 생선대가리와 내장들을 억지로 챙겨오셨다. 고양이를 먹이기 위해서였다. 가족의 밥을 차릴 때면 부엌 한 구석에서는 생선대가리와 내장이 밥알과 함께 익어가는 비린내가 진동하곤 했고, 그 냄새에 이끌린 고양이와 어머니의 싸움이 또 시작되었었다.

 

고양이가 새끼를 낳았을 때 어머니는 애써 종이박스를 구해 산실을 따로 만들어 주고, 미역국을 끓여주셨다. 나나 동생도 먹지 못하는 우유를 뼈에 좋다고 사다 주시고는, 그래도 애 낳았는데 미역국은 먹어야 한다며 닭고기를 찢어 넣은 미역국을 끓여 고양이에게 먹이셨다. 어머니도 고양이를 마치 한가족처럼 여기셨던 것이다.

 

하기야 사람이 먹는 것 가운데 사람 몸에 좋은 게 몇 가지나 되겠는가? 나처럼 먹는 대부분을 밖에서 사들고 와서 먹어야 하는 사람이라면야 두 말 할 필요도 없다. 튀김닭에 쓰인 기름이나 양념들은 사람에게도 안 좋은 것들이다. 하물며 고양이에게는 어떻겠는가? 그래서 어제 닭을 먹으면서도 고양이를 쫓기 위해 꽤나 많은 노력을 기울였었다.

 

그런데 그러고 있으려니 꼭 고양이와 내가 남인 것 같다. 아니 그보다는 먹을 것을 달라고 외치는 파리 시민들에게 "빵 없으면 케잌을 먹으면 되지 않느냐."는 어떤 바람난 유부녀의 말이 생각난다. 먹는 것과 먹고자 하는 것과 그것을 가로막는 어떠한 보이지 않는 선에 의해 고양이는 같은 집에 살면서도 전혀 별개의 존재가 되어버린 것이다.

 

오늘 어제 남은 닭을 데워 먹으며 일부를 떼어 고양이에게 주었다. 그랬더니 내 발 밑에서 잘도 먹는다. 두 마리가 서로 머리를 앞발로 눌러가며, 먹던 것을 빼앗아 도망도 다니며 아주 잘도 먹는다. 먹는 것이 보기 좋아 닭을 조금 더 떼어 주니 더 좋아한다. 같이 먹는다는 기분. 무언가를 나누어 같이 먹는 다는 그 느낌. 그러고 있으니 마치 고양이가 가족이 된 것만 같다.

 

앞으로도 고양이에게 사료 이외의 것을 먹이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고양이를 좋아하기에 고양이에게 안 좋다고 하는 것을 굳이 먹이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자칫 고양이가 탈이라도 나게 된다면 무척이나 슬프고 아플 것이기에 가족이라는 느낌이 좋기는 하지만 여전히 사료로만 고양이를 먹일 것이다.

 

그러나 가끔은 그런 딱딱한 이야기따위 모두 무시해 버린 채 먹던 것을 나누어 먹으며 가족이라는 느낌을 확인해보고 싶을 것이다. 내가 먹는 것을 고양이도 먹고, 고양이가 먹는 것을 나도 먹는다는 예전 고양이를 기르면서 느꼈던 일체감을 다시 한 번 느껴보고 싶을 것이다. 조마조마. 무슨 탈이라도 날까 가슴을 조이면서도.

 

어쨌거나 걱정과는 달리 참 잘도 먹는다. 한 번도 먹어보지 못한 닭고기이건만 자기들끼리 잘도 먹어댄다. 저렇게 잘 먹고 있는 것을 보니 그동안 먹여주지 못한 것이 미안하다. 그렇다고 사료 대신 다른 것을 먹이기엔 내가 또 너무 소심하고. 주인을 잘못 만난 탓이다. 불쌍한 것들. 언제고 생선을 먹을 일 있으면 또 먹으라 나눠주어야지. 그 정도는 괜찮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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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사람은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자기가 듣고 싶은 것만 들으며 자기가 믿고 싶은 것만 믿는다. 보고 싶지 않은 것은 보아도 본 것이 아니고, 듣고 싶지 않은 것은 들어도 들은 것이 아니며, 믿고 싶지 않은 것은 존재하되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나뭇가지 하나가 서 있어도 그것은 귀신이 되고, 칼이 되고, 군대가 되기도 한다. 그저 둥실 떠다닐 뿐인 구름이 양떼가 되기도 하고, 사람의 얼굴이 되기도 하며, 솜사탕이 되기도 한다. 그림이 실제 풍경을 보듯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풍경이 그림을 보듯 아름답다.

그래서 사람의 기억이란 믿을 게 못된다. 사람의 판단 또한 믿을 게 못 된다. 아마 세상에 못 믿을 게 사람이 보고 듣고 믿는 것일 게다. 그럼에도 결국 사람이 믿을 것도 사람이 보고 듣고 믿고 있는 것일 테니 이보다 난감한 일이 또 없다.

믿을 수 없는 것을 믿어야 한다는 것. 믿어야 하는 것을 믿을 수 없다는 것. 믿어야 할 것을 믿고, 믿지 말아야 할 것을 믿지 않는다는 모든 것이 사람이 갖는 번뇌와 혼란과 갈등의 원인이다. 결국 현명하다 하는 것은 이러한 가운데서 바른 길을 찾는다는 의미일 것이고.

지혜란 다른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많이 알고 그것을 멋지게 표현해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믿어야 할 것을 믿고, 믿지 말아야 할 것을 믿지 않는, 당연한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길 수 있는 그 단순하고 솔직한 본질이야 말로 지혜롭다고 하는 것일 게다.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것이 당연한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세상에서 가장 쉬운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대현은 대둔과 통한다 하던가? 하긴 쉬운 것을 쉽게 하는 것 또한 당연한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것 만큼이나 어려운 일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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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 기르기에 대한 잡상...

어렸을 적, 그러니까 아직 중학교 다니던 무렵에 집에서 고양이를 한 마리 키운 적이 있었다. 이름은 그냥 평범한 야옹이. 암컷이라 나중에 새끼를 낳으면서부터는 에미가 되었다. 검은색이라 동생들은 네로라 이름짓기를 졸라댔지만 어쩐 일인지 야옹이였고 에미인 채로 자랐고 새끼를 낳고 그리고 죽었다. 모두 세 배, 15마리의 새끼를 낳았으니 고작 3년의 인연치고는 꽤 많은 것을 남기고 간 셈이다.

그때 처음 에미를 기르던 때 사실 고양이를 기른다고 하는 자각은 그리 크게 없었다. 집에 고양이가 한 마리 있고, 고양이 밥그릇이 있다는 정도에 불과했다. 고양이 집이 따로 있는 것도 아니고, 고양이를 위한 다른 배려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다만 그래도 고양이라고 사람도 자주 먹지 못하는 생선 대신 멸치를 넣어 국을 끓여주는 정도였다. 똥이야 그냥 알아서 돌아다니다 아무데나 싸고 돌아오면 그만이고.

그런데 이제 다시 고양이를 키우려니 고양이를 키운다고 하는 것이 너무도 크게 현실로 와닿는다. 그냥 사람 먹는 것을 먹이면 안 된단다. 먹다 남긴 밥이라든가, 술안주로 사다 놓은 오징어포라든가, 예전에 에미를 기를 때는 오히려 별식으로 주던 것들이 자칫 고양이가 탈이 날 수 있어 피해야 할 것들이 되었다. 물도 수돗물은 고양이에게 안 좋으니까 생수를 먹이라 하고. 그래서 한 봉지에 8천원이나 하는 고양이먹이를 사다 먹이고 물도 따로 사서 먹이고 있다.

먹이는 것도 큰 일이지만 함부로 밖에 내보낼 수도 없어 방안에서 똥오줌을 받아야 하니 화장실 꾸미는 것도 일이다. 사실 이번에야 고양이를 키우기 시작하고서 화장실용 모래를 따로 팔고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심지어 어떤 것들은 사람이 쓰는 변기에서도 녹도록 사람도 없어서 못 먹는 옥수수나 쌀을 사용해서 만든 것들이란다. 가격도 만만치 않다. 아마도 집에서 기르는 잡종고양이 두 마리 모두를 합해봐야 화장실용 모래 한 봉지 값도 안 나올 것이다. 그렇다고 그냥 모래를 쓰자니 모래를 구하기도 애매한 것이 옛날에야 학교 운동장에서 퍼 오면 그만이었지만 지금은 그런 것이 허용되는 시대가 아니다. 그나마 공짜로 뿌려지는 무가지를 가져다 화장실에 두텁게 깔아 모래를 대신하지 않았다면 모래 값으로만 수억 깨졌을 것이다. 워낙 똥을 많이 싸야지.

참 어렵다. 고양이를 키운다는 것이. 뭐 그리 안 되는 게 많고, 뭐 그리 해야 하는 게 많고, 뭐 그리 돈 들어가는 게 많은지. 가족처럼 밥 먹이고 같이 뒹굴면 그만이던 그때와는 너무도 다르다. 솔직히 지금도 예전처럼 남은 밥 먹이고, 오징어포 같이 나눠먹던 그때 방식대로 기르고 싶다. 가끔 멸치대가리 가지고 장난도 치고, 생선가게에서 생선대가리며 내장 얻어다가 고양이밥 만들어 주고도 싶다. 하지만 아는게 병이라던가? 우유조차도 고양이는 일반우유를 소화시키지 못한다는 말에 먹이기 꺼려진다. 고양이를 기른다는 것이 왜 이리도 어렵고 거추장스러운 일이 되어 버린 것일까?

하긴 대개의 일이 그렇다. 처음에는 단순하다. 일상처럼 단순하고 당연하게 모든 것이 이루어진다. 그러다 시간이 지나면 그것은 하나의 체계가 되고 원리가 되고 규칙이 되어 사람을 구속하게 된다. 밥 나눠먹으며 기르던 개나 고양이도 개나 고양이를 위한 어떠한 특별한 것을 제공해야 하고, 일상에서 쓰는 그리 대단할 것도 없는 말이어야 할 언어는 문법과 맞춤법과 어휘 속에서 구속되고 강제된다. 그러면서 먼저 체계와 원리와 규칙을 지배한 자들이 모든 이익을 독점하게 되고.

아마도 이런 것이 지식의 속성일 것이다. 아무것도 아닌 것들을 특별한 것으로 만들어 사람을 구속하고 강제함으로써 소수의 특정인들을 위한 이익을 구하는 것. 역사상 나타났던 모든 형태의 지식이 추구하는 바가 바로 그것이었다. 겉포장이야 보다 많은 다수를 위해서라고 하지만 그 궁극적인 목적은 결국 그 지식을 먼저 선점한, 혹은 그 지식이 지향하는 위치에 있는 자들의 이익을 위한 것이었던 것이다. 나 또한 그러한 농간에 현혹되어 헤어나지 못하는 소시민일 뿐이고.

참 돈도 많이 들어가고, 손도 많이 간다. 예전 생각하고 고양이 덜컥 맡았다가 꽤나 고생이 심하다. 그래도 뭐 귀여우니까 모든 것이 용서가 된다. 하긴 그 비싼 고양이밥이며 고양이모래며 만들어 팔 수 있는 것도 그 귀여움 때문일 것이다. 때로 자고 있는 데 배 위에 올라와 웅크리고 자는 뜨거운 체온을 느낄 때면 당장 고양이쇼핑몰에 가서 이것저것 다 사다주고 싶어지니까. 그래서 고양이를 요물이라 하는 것일게다. 역시 여자는 예쁘면 장땡이고 고양이는 귀여우면 광땡인 모양이다. 아유 귀여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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