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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평의회] 직접행동

 * [노동자평의회] 2부 투쟁 중에서 [직접행동] 글이 여러 홈페이지에 올려져있습니다. 그 글은 과거에 번역한 초역이며, 오역이 많습니다. 최종 번역 완성된 글을 올립니다

 

 

[노동자평의회] 2부 투쟁중에서

2. 직접행동

  자본에 대항한 노동계급의 투쟁 수단으로서 노동조합은 그 중요성을 상실했다. 하지만 투쟁 그 자체는 끝날 수 없다. 거대 자본주의에서 노동계급의 힘이 저하되는 경향이 더욱 강해지고 있기 때문에, 노동자들의 저항 역시 더욱 강해져야 한다. 경제적 위기들은 더욱 파괴적으로 성장하였으며, 명백하게 확보한 진보를 훼손하고 있다. 급속히 성장하는 자본을 위한 이윤율의 저하를 완화시키기 위해 착취는 강화되었다. 따라서 노동자들은 다시 한번 저항하도록 자극받고 있다. 하지만 강력하게 성장한 자본의 권력에 대항한 구태의연한 투쟁 방법들은 더 이상 적당하지 않다. 새로운 방법들이 요구되며, 그리고 그것들은 머지않아 출현할 것이다. 그것들은 거친 파업(wild strike)1)과 직접행동에서 자생적으로 발생한다.

 1) (역주) 예고되지 않고, 지도부의 승인 없이 밑으로부터 자발적으로 일어나는 파업을 말함. 보통 살쾡이 파업(Wild-cats strikes)이라고 부름.

직접행동은 노동조합 관료들의 매개 없이 이루어지는 노동자 스스로의 행동을 의미한다. 하나의 파업은 규칙들과 규제들에 따라 노동조합에 의해 선언되는 파업과는 대조적으로 거친 파업이라고 불린다. 노동자들은 노동조합에 의하여 선언되는 파업이 효과가 없다는 것을 안다. 왜냐하면 그것은 자신들의 의지와 통찰을 거스르면서 관료들에 의해 파업이 선언되는 것이고, 관료들은 아마도 이 어리석은 노동자들이 유익한 교훈을 얻을 수 있는 기회를 주지 않으려는 생각을 하고 있을지 모르며 또한 그들은 언제나 파업을 빨리 종결시키려 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억압이 너무 가혹할 때, 경영자들과의 협상이 효과 없이 지연될 때는 결국 크고 작은 집단들에서 분노가 폭발해 거친 파업으로 나아간다. 



 

 자본에 대항한 노동자들의 투쟁은 조직 없이는 가능하지 않다. 그리고 조직은 자생적이고, 즉각 출현한다. 물론 새로운 조합이 광범위하게 선별되고, 성문화된 법령으로 공식화된 규정들의 형태로 설립되는 것은 아니다. 종종, 확실하게, 노동자들은 비효율성을 구태의연한 지도자들의 개인적 단점으로 귀착시키거나, 기존의 노동조합에 대한 분노 때문에 그들의 가장 유능하고 활력적인 사람들을 앞세워 새로운 조합을 설립하기도 한다. 이렇게 결성된 새로운 조합은 처음에는 진실로 활력적이고 강력한 행동을 보인다. 하지만 결국에는 새로운 노동조합은 만약 그것이 소규모인 것으로 남는다면 그 활동성에도 불구하고 힘을 얻지 못하는 반면, 만약 그것이 거대해진다면 필연적으로 기존의 노동조합과 동일한 성격으로 발전한다. 그러한 경험을 한 후에, 노동자들은 결국 전적으로 자신들이 스스로 투쟁한다는 그 방침을 견지하기 위해 다른 방도를 모색한다.

  지도력이라 불리는 자신들 스스로에 의한 지도란 모든 주도권과 결정권이 노동자들 스스로부터 나오는 것을 의미한다. 비록 모두가 항상 함께 있을 수 없기 때문에, 파업위원회가 있더라도 모든 일들은 파업참가자들에 의해 이루어진다. 지속적으로 서로 접촉하면서 과업을 배분하고, 모든 조치들을 고안하며, 모든 행동들을 직접 결정한다. 결정과 행동은 결합되어 하나를 이룬다.

  가장 우선적이고 중요한 임무는 파업을 확대하기 위한 선전 작업이다. 자본에 대한 압력은 강화되어야 한다. 엄청난 자본의 권력에 개별 노동자들뿐만 아니라 분열된 집단들 역시 무기력하다. 자본에 필적할만한 유일한 힘은 전체 노동계급의 견고한 통일체이다. 자본가들은 이점을 잘 알고 있고 또한 그렇게 느끼고 있다. 그래서 양보를 얻어낼 수 있는 유일한 유인책은 자본가들이 파업이 널리 퍼질 것이라는 공포를 느끼도록 하는 것이다. 따라서 파업 참가자들의 의지가 더 단호하고 그리고 파업에 더 많은 사람들이 참여할수록, 더욱 성공의 기회도 높아지는 것이다.

  이러한 확대는 가능하다. 왜냐하면 파업은 다른 집단들보다 더 열악한 조건들 속에 있으면서 스스로를 일반적 수준으로 끌어올리기 위해 노력하는 마지못해서 참여하는 집단의 파업이 아니기 때문이다. 새로운 환경 속에서 불만은 널리 퍼져있다. 모든 노동자들은 자본가의 우월성이라는 조건 속에서 절망감을 느낀다. 때문에 폭발의 동력은 어디에서나 축적되어있다. 만약 노동자들이 투쟁에 결합한다면 이는 다른 사람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위한 것이다. 노동자들이 고립감을 느끼고, 일자리를 잃을까 두려워하고, 동료들이 무엇을 할지를 확신할 수 없고, 견고한 통일을 이루지 못한다는 한, 그들은 행동을 하는데 위축될 것이다. 그러나 일단 그들이 투쟁에 임하면, 그들은 새로운 인간으로 변한다. 즉 이기적인 공포는 뒤로 물러나고 공동체, 연대, 헌신의 힘, 솟아오르는 용기나 불굴의 인내가 우세해진다. 이러한 것들은 전염성이 있다. 투쟁하는 활동이 다른 사람들을 일깨우는 경우 같은 동지라고 느끼는 사람들 역시 협동정신, 자긍심 같은 동일한 힘이 일깨워진다. 따라서 들불처럼 거친 파업은 다른 기업들로 번져가서 더욱 많은 대중들이 참여하게 될 것이다.

  물론 몇몇 용감한 동지들은 그러한 일의 강력한 추동력은 될 수 있지만, 거친 파업은 노동조합 관료나 자발적인 새로운 대변자들 같은 소규모 지도자들만의 일이 될 수는 없다. 그것은 모든 사람들의 의지이자 작업이 되어야 하고, 공동의 주도권에서 행해져야만 한다. 노동자들이 행동해야 할 뿐만 아니라, 모든 것들을 스스로 고안하고, 생각하고, 결정해야 한다. 노동자들은 자신들을 돌봐주는 노동조합 같은 기관에 의사결정권과 책임을 떠넘겨서는 안 된다. 그들은 자신들의 투쟁에 대한 전적인 책임을 져야하고, 성공과 실패는 그들 자신에게 달려있다. 노동자들은 수동적인 존재에서 능동적인 존재로 변해야 하고, 단호하게 자신들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 자신만을 돌보는 분리된 객체로부터 벗어나 견고하고, 확고한 통일체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자생적인 파업들은 다른 중요한 측면을 보여준다. 노동자들이 상이한 개별 노동조합으로 분할되는 것이 사라진다는 점이다. 노동조합에서 이전의 소자본가 시대로부터 시작되는 노동조합의 세계적 전통들은 노동자들을 종종 경쟁하고, 시기하고, 그리고 비난하는 회사들로 분리시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몇몇 나라들에서 종교적, 정치적 차이들은 자유주의적 노동조합, 가톨릭 노동조합, 사회주의적 그리고 다른 노동조합으로 분리시키는 분할 장치로 작용해왔다. 작업장에서 상이한 노동조합에 소속된 조합원들은 서로 반목한다. 파업을 할 때조차도 그들은 종종 분리된 상태로 참여했다. 때문에 통일이라는 관념에 접하기 어려웠고 행동의 조화와 타협은 유일하게 위원회와 관료들이 담당했다. 하지만, 이제 직접행동에서 어느 노동조합의 회원이냐는 차이는 표면적인 딱지로서 의미가 없어진다. 이러한 자생적 투쟁들을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노동자들 사이의 통일이 요구되었다. 즉 통일이 없이는 어떠한 투쟁도 불가능했다. 작업장에서 상이한 위치에서 같이 일하며 공통적으로 착취를 받고 있는 노동자들은 동일한 주인에 대해 저항했고 결집해서 공동행동을 했다. 그들의 실제적인 공동체는 작업장이었다. 동일한 기업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공동의 노동, 공동의 운명, 공동의 이해에 기반해서 자연적으로 연합체를 결성했다. 마치 한낱 과거의 유령처럼 상이한 조합원들 간의 오래된 구별들은 사라졌고, 같이 투쟁하고 있는 동료들의 새로운 삶의 현실에서 거의 잊혀졌다. 새로운 통일체에 대한 생생한 의식은 권력의 열정과 감각을 강화시켰다.

  이와 같이, 거친 파업에서 도래할 투쟁형태의 몇몇 특성이 모습을 드러낸다. 우선 모든 활동과 결정을 스스로의 손으로 처리하려는 자율적 행동, 자기주도권이라는 특성, 그리고 기업들의 자연적 집단화에 따른, 이전의 소속감과 상관없는 단결이 그것이다. 이러한 형태들은 빈틈없는 계획에 의해서가 아니라, 더 이상 진지하게 싸울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한 구태의연한 조직에 대한 자본의 힘의 우위에 의해 추동되어 자생적이고 불가항력적으로 형성된다. 따라서 이제 그 규모가 변했고 노동자들이 승리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거친 파업들은 대부분 패배했고, 그들의 범위는 너무 협소했다. 단지 몇몇 유리한 경우들만이 노동조건을 낮추는 것을 저지하는데 성공했을 뿐이다. 이러한 파업들의 중요성은 억압되어 질 수 없는 신선한 투쟁정신을 증명해 보여줬다는 점이다. 자기 보존이라는 심층적인 본능 및 가족과 동료들을 지키려는 의무감으로부터 스스로를 지켜내려는 의지가 계속해서 분출했다. 여기서 성장하는 자기의존성과 계급감각을 획득할 수 있었다. 성장하는 자기의존성과 계급감각은 가혹한 억압과 심층적인 고통을 동반한 거대한 사회적 비상사태가 있을 때, 대중들이 강력한 행동을 할 수 있도록 안내할 미래의 위대한 투쟁들을 위한 선구자이었다.

  거친 파업들이 거대한 대중들을 결집하고, 전 산업 분야, 도시와 지방에서 대규모로 발생했을 때, 조직은 새로운 형태를 취해야 한다. 한 곳에 모여 심사숙고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어느 때보다 상호이해는 공동행동을 위해 더욱 필요해진다. 사태를 지속적으로 논의하기 위한 파업위원회는 모든 사람들의 대리자들로 구성된다. 이러한 파업위원회들은 관료들의 노동조합위원회와는 전적으로 상이한 것이다. 그것들은 이미 노동자평의회의 특성을 보여주고 있다. 그것들은 투쟁으로부터 도출되어 투쟁 방향의 통일성을 부여해준다. 하지만 그것들은 기존의 의미에서 어떠한 지도자들도 없으며, 명령권도 없다. 자주 다른 사람들로 구성되는 대리자들은 자신을 보낸 사람들이나 집단의 의견과 의지를 표현하기 위해 평의회에 모인다. 이러한 사람들은 의지를 표출하는 행동을 대표한다. 그러나 그 대리자들은 그들의 위임집단의 단순한 전달자들이 아니다. 그들은 논의의 선진부위를 담당하며 널리 퍼진 신념들을 구현한다. 위원회 회의에서 의견들이 논의되고 그것들이 해당 국면의 상황에 적합한 것인지를 검증받게 된다. 그 후 회의 결과와 결론은 그 대리자들에 의해 해당 사람들 및 집단들의 회합에 전달된다. 이러한 매개과정을 통해 현장 노동자들 스스로가 심사숙고와 의사결정에 참여하게 된다. 이렇게 해서 거대한 대중들의 행동 통일이 보장된다.

  확실히 이러한 방식에서 모든 집단들이 위원회의 결정에 복종하는 것은 아니다. 어디에도 그러한 권력을 위원회에 부여한다는 조항은 없다. 집단적 투쟁에서 통일은 권한의 법적인 규제의 결과가 아니라, 정열적인 행동 영역에서 자생적인 필요성에 의한 것이다. 노동자들은 그러한 권리가 용인된 규칙으로 자신들에게 주어져서가 아니라, 자신들의 행동을 통해 실제로 어떠한 것에 대한 결정을 내리기 때문에 스스로 결정한다. 물론 어떤 집단이 논쟁을 통해 다른 집단을 설득할 수는 없을 수도 있다. 하지만 행동과 본보기를 통해서 그들은 이러한 것들을 극복할 수 있다. 자신들의 투쟁 행동에 대한 노동자들의 자기결정은 이론이나 실행가능성에 의한 주장들이 아니라 실천에서 전개되는 사실의 진술을 요구한다. 종종 발생한 거대한 사회운동에서 -그리고 계속 발생할 것이다- 행동이 결정에 일치하지 않는 경우가 발생해왔다. 때때로 중앙위원회는 전면적(universal) 파업을 호소했고, 단지 적은 집단들만이 여기저기에서 이를 따랐을 뿐이었다. 다른 곳에서 위원회들은 모험적인 결정을 피하려고 꼼꼼히 따지면서 머리를 굴렸지만, 노동자들은 대중 투쟁으로부터 떨어져 나왔다. 열정적으로 파업을 결의한 동일한 노동자들이 막상 행동을 취해야 할 때는 위축되는 경우도 가능하다. 또는 반대로 소심하게 주저하며 아직 결심을 못 내리고 있던 사람들이 내적인 힘에 이끌림으로써, 아직 결의되지 않고 불가항력적으로 파업이 발생하는 수도 있다. 한편 그들의 의식적 사고 속에서는 오래된 슬로건과 이론이 역할을 하고, 논쟁과 주장을 결정하는 반면에, 번영과 걱정이 의존하는 결정적인 순간이 되면, 현실 상황에 대한 강력한 직관이 발생해 행동을 결정하게 될 경우도 있다. 물론 그러한 직관이 항상 옳은 길로만 인도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들의 외적 상황들에 대한 느낌은 잘못될 수도 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노동자들이 결정하는 것이다. 즉 이것은 낯선 지도력에 의해 대체될 수 없고 아무리 현명한 안내자들이 있다고 할지라도 노동자에게 명령할 수는 없는 것이다. 투쟁과정에서 성공과 역경을 거치면서 겪은 노동자 자신들의 경험과 노력에 의해 노동자들은 올바르게 자신들 이해를 다룰 수 있는 능력을 획득해야 한다.

  노동조합과 규제된 파업이라는 과거의 것과 자생적인 파업 및 노동자평의회라는 새로운 것, 이 두 가지 형태의 조직과 투쟁은 대조를 이룬다. 이는 노동조합이 언제인가는 유일한 대안인 노동자평의회로 단순히 대체될 것이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노동조합의 나쁜 점과 약점을 교정하고 그것의 올바른 원칙들은 유지하려는 노력하는 중간적 형태들이 고안될 것이다. 즉 관료들의 관료제의 지도력, 협소한 동일업종조합과 노동조합의 이해에 의한 분리를 피하면서, 이전의 투쟁들의 경험을 보존하고 이용하려는 노력들이 나타날 것이다. 이는 대파업 이후에 최상의 투쟁가들을 핵심으로 한데 모여 일반 연맹을 이루며 수행될 것이다. 파업이 자생적으로 발발하는 곳은 어디에서나 숙련된 선전선동가들과 조직가들을 가지고 있는 이 연맹이 자신들의 조언을 통해 경험이 없는 대중들을 돕고, 교육하며, 조직하고, 그들을 방어 할 것이다. 이런 식으로 모든 투쟁은 조직의 진보를 의미한다. 이러한 진보는 조합비를 내는 조합원의 의미가 아니라, 계급적 통일성이 성장했다는 의미에서 그러하다.

  이러한 거대 연맹의 본보기는 미국의 거대한 노동조합인 “세계 산업노동자”(Industrial Workers of the World, IWW)를 들 수 있다. 19세기 후반부에 높은 임금을 받는 숙련노동자로 이루어진 보수적인 “미국노동연맹”(American Federation of Labor, AFL)과는 대조적으로, 세계 산업노동자는 특수한 미국의 조건에서 성장했다. 즉, 세계 산업노동자는 부분적으로는 광부와 목재노동자 및 극서부의 황무지를 독립적으로 개척했던 사람들이 풍부한 목재와 토지를 독점하고 소유하고 있던 대자본에 맞서 격렬하게 투쟁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졌다. 또 부분적으로는 동부와 남부 유럽으로부터 이주해서 동부의 도시들에 있는 공장과 광산에 모여서 오래된 노동조합으로부터 경멸받고 멸시받으며 착취당하고 있던 비참한 대중들의 궁핍에 의한 파업들로 이루어졌다. 세계 산업노동자는 그들에게 경험이 많은 파업지도자들과 조직가들을 제공했고, 그들은 경찰의 테러리즘에 맞서는 방법, 여론과 법정에서 스스로를 방어하는 방법, 연대와 통일을 이루는 방법, 사회와 자본주의 그리고 계급투쟁을 바라보는 폭넓은 시야들을 가르쳐줬다. 이러한 거대한 투쟁들 속에서 수 만 명의 새로운 조합원들이 세계 산업노동자에 가입함으로써 단지 소규모 집단들만이 남게 되었다. 이러한 “하나의 거대한 연맹”은 독립적이었던 개척자들로 이루어진 대중들을 굴복시켜가면서 권력을 장악했던 미국 자본주의의 거칠었던 성장에 적합했다.

  노동자들이 아직도 모든 문제들을 스스로 처리할 완전한 자신감을 아직 갖지 않고 대투쟁에 직면 했을 때, 유사한 투쟁 형태와 조직형태가 선전 될 수 있을 것이고, 각지에서 나타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일시적인 이행 형태이다. 거대 산업에서 미래의 투쟁조건과 과거 미국의 투쟁조건 사이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존재한다. 과거에 자본주의는 성장기에 있었으나, 이제 자본주의는 쇠퇴할 것이다. 과거에는 개척자들이나 원주민들의 세련되지 못한 독립심 또는 이주자들의 생존을 추구하는 원시적 이기주의는 자본주의적 착취의 멍에에서 재갈이 물려져야 할 중간계급 개인주의였다. 하지만 이제 대중들은 기계와 자본에 의해 일생동안 규율을 훈련받았고, 그들은 또한 생산기구들과의 강력한 기술적, 정신적 결속을 통해 연관되어 있으며, 이 모든 것들의 유용성을 새로운 협동의 토대에서 조직해내고 있다. 이러한 노동자들은 완전히 프롤레타리아적이며, 중간계급 개인주의의 모든 완고함은 집합적 노동의 습관을 통해 오래 전에 낡은 것이 되어버렸다. 그들 속에 숨겨진 연대와 헌신의 힘은 단지 그것들을 지배적인 생활 원칙으로 전개시킬 대투쟁을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또한 단지 주저하면서, 동료들의 행동에 참여하며 동료들의 모범에 의지하고자 하면서 가장 억압받는 층위를 이루고 있는 노동계급들조차도 곧 그들 내부에서 성장하는 공동체의 새로운 힘을 느낄 것이다. 또한 노동계급은 해방을 위한 투쟁이 자신의 충실성뿐만 아니라 자기활동성과 자기의존성 같은 자신의 모든 힘들을 개발시킬 것을 요구한다는 점을 인식하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이, 부분적 자기결정의 모든 중간 형태들을 극복하면서 앞으로 진보하는 길은 분명히 평의회 조직으로 향한 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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