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방문

엄마는 다소 충격에 휩싸인 듯하다.

 

결혼도 하지 않았고, 심지어는 결혼할 마음도 없이 남자와 한 집에서 살고 있는 내가, 엄마 눈에는 문자 그대로 '미친년'으로 밖에는 안 보인다는 반응이다.

 

이미 현관에 발을 들여 놓은 상황에서, 이미 완벽하게 우리 둘을 위해 짜여진 이 공간에서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최대한 충격과 당혹스러움을 절제하는 것 밖에는 없어 보였다. 그리고 그녀는 그 일을 꽤나 잘 해냈다고 할 수 있다.

 

그 다음의 반응은 채념과 인정. 그리고 다시 그녀의 틀 속으로 나를 끌어다 맞추는 일. 엄마는 졸업한 후에 곧장 '머리를 올릴' 것을 협상안으로 내놓았다. 어쨌든간 지난 수원 방문 때 합격점을 받은 남자친구랑 그냥 결혼해서 살았으면 하는 심산이다. 이미 한남자랑 '살을 섞고' 동거한 경험이 있는 여자는 (그 남자랑 결혼하지 않는 한) 평생 불행해질 것이라는 게 엄마의 지론이다.

 

연애만 하면서 살았으면 좋겠다는 나의 발언은, 그야말로 엄마한테는 미친 소리, 한심한 소리, 세상 모르는 소리(이건 맞는 말이다)로 밖에는 들리지 않는다.

 

그에 비하면 아빠의 반응은 훨씬 호의적이다. 하지만 이건 놀랄 일은 아니다. 이십여년의 결혼생활 동안, 수십차례의 외도로, 그러니까 수십차례의 로맨스로 엄마를 울리고 본인은 웃었던 아빠는, 엄마에 비해선 연애의 기쁨을 좀 더 잘 아는 사람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 수십차례 중의 한 번, 더이상 참을 수 없이 분노한 엄마와, 엄마에 대한 의리, 아빠에 대한 증오와 경멸로 다듬어진 우리 남매는 어느 차가운 겨울날의 새벽에 집을 나왔다. 그리고 아빠는 원래의 '우리집'에서 5분도 안되는 거리의 원룸에 그 때 '당시' 사랑에 빠져있던 여자와 살림을 차렸다. 그 집은 곧 동네 사람들의 입을 거쳐 엄마에게 발각됐고, 엄마는 그 집 문을 따고 들어가 이불이며 옷가지를 모두 찢어버렸다. 복받치는 설움과 악, 그리고 묘한 쾌감으로 그 공간을 발기발기 찢어버린 것이다. 그 때 나는 충실한 공모자의 역할을 했다.

 

어쨌든 엄마에게, 혼외(성)관계는 모두 '악'이다. 그리고 이 기준은 묘하게도(실은 당연하게도) 여자에게 더욱 가혹하다. 외도를 하고, 가족을 불행하게 했던 것은 여자인 자신이 아니라, 남자인 아빠였음에도 말이다. '몸을 함부로 굴린 여자'의 끝은 불행일 수밖에 없다는 믿음. 엄마는 심지어 자신이 아빠를 만나 한평생을 고생한 것도, 어느정도는 '처녀성'을 지키지 못해 스스로의 몸값을 낮춘 본인의 탓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여기에 대해선 아무리 열을 올리고 싸움을 걸어봤자 시멘트 벽에다 바늘을 꽂는 격이다.

 

아빠는 '그 녀석'이 내 속을 썩이면, 자기가 술의 힘을 빌어 단번에 해결해 주겠다고 괜한 장담을 한다. (정말이지, 너나 잘하세요. 라고 말해주고 싶은 순간이다. 그리고 아빠와 나의 애인은 실로 아무 관계도 아니지 않은가! )그리고 덧붙여, 나보곤 열심히 살림을 배우란다. 그래도 명색이 사내라면 여자가 지어주는 밥을 먹고 살아야 한다는 거다. 본인이 그러했듯이.

 

둘의 방문은 아주 짧은 시간이었다. 엄마는 오전 내내 정성껏 만들어서 깔끔하게 정리한 반찬들을 내려놓고, 공간을 탐색하고, 놀람과 당황스러움과 분노와 절망과 채념과 인정과 부끄러움 등의 감정을 오갔다. 아빠는 그 짧은 동안에도 냉장고에 조금 남은 술병을 찾아내고, 술을 마시느냐고 나에게 묻고, 그 술을 비우고, 장롱에서 튀어나온 나사못을 찾아내 '사내녀석'의 부주의함을 힐난한다.

 

집까지 차를 몰고 오는 내내 말을 하지 못했다. 어차피 도착해보면 알테니까 조금만 미루자는 심정으로. 학교구경도 할 겸 반찬도 실어다 줄 겸 집까지 태워다 주겠다는 엄마 아빠의 제안을 적극적으로 거절하지 않은 건, 어쩌면 그냥 알아버리길 바랬던 나의 욕망 때문이었을거다. 잘못을 하지 않았으니 감출 것도 없다는.

 

올 때는 아빠가 운전을 했으니, 갈 때는 엄마 차례다. 아빠는 다음번엔 애인과 함께 내려오라고 하고, 엄마는 제발 혼자오라고 한다. 그래도 여전히 나에게 미운건 아빠고, 가엾고 존경스러운건 엄마다. 둘은 창문 안에서 뭔가 시끄럽게 대화를 나누면서 신림동의 골목을 빠져나간다. 홀가분함과 허무함과 왠지 모를 씁쓸함, 그리고 나의 가족사. 여러가지 감정과 기억이 스멀스멀 머릿속과 가슴속을 스쳐간다. 이제 점심 먹을 시간이로군. 담배 한대를 빼물로 얼른 집으로 뛰어들어간다.



by 새빨간 혀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