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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기장 - 2009/12/08 09:48

* 열린사이버대 발달심리학 과제용...
 

인간의 삶은 죽음과 함께 간다. 사람은 태어나면서 죽어간다. 지극히 단순하면서도 너무나 슬픈 사실을 우리는 자주 잊고 산다. 그 잊음은 프로이트식 표현에 따르자면 어쩌면 ‘의도적 실착’일수도 있다. 아무리 잊고 산다하더라도 결국 인간은 시간과 공간의 유한한 좌표축 어느 지점만을 일시적, 부분적으로만 점유할뿐이다. 그 한계와 시간의 불가역성앞에 도저히 항거할 수 없는 인간의 인생은 그래서 숙연하고 경이롭다.

 

 

David Fincher 감독이 만들고 Brad Pitt, Cate Blanchett 등이 출연한 영화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는 F. 스콧 피츠제럴드가 1920년대에 쓴 단편소설에서 모티브를 얻었다고 한다. “인간이 80세로 태어나 18세를 향해 늙어간다면 인생은 무한히 행복하리라”던 마크트웨인의 명언에서 피츠제럴드가 작가적 영감에 의해 충동적으로 쓴 이야기가 근 60년만에 영화로 완성된 것이다. 원제는 “The Curious Case of Benjamin Button”으로서 직역한다면 “벤자민 버튼의 기이한 사건”정도 일텐데, 한국 개봉명은 엉뚱하게도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였다.

 

 

영화의 기본 줄거리는 여든살 노인의 몸으로 태어나 점점 젊어지다가 아기의 모습으로 ‘늙어 죽는’ 한 사람의 이야기이다. 인간의 보편적 발달 과정을 역행하는 주인공 벤자민의 삶과 사랑을 통해 인생의 의미를 되새겨보게 한다.

 

 

곧 죽을것 같은 노인의 얼굴과 몸을 가지고 태어난 아이가 양로원 앞에 버려진다. 양로원을 운영하던 흑인여성 퀴니는 이 아이를 ‘벤자민’이라고 이름짓고 자기가 키우기 시작한다. 금방이라도 죽을 것같았던 아이는 조금씩 일반적인 인간의 생체주기를 역류하며 젊은이로 성장해 간다. 젊은 벤자민은 노구(老軀)를 이끌고 선원이 되어 자기 삶을 스스로 책임지는 성인이 된다. 몸의 나이만 거꾸로 먹어가는 사람은 역시 외롭다. 세상에서 오직 그의 몸만이 다른이들과 반대방향을 향해 가면서 그는 사회적 제관계의 총체로서 존재한다는 인간의 유적본질로부터 소외된다. 그 소외의 심연에서 그를 건져올린건 사랑이었다. 순행과 역행의 짧은 교차점에서 평생의 사랑 데이지를 만나 열정적인 사랑을 하고 결혼하여 아이도 낳는다. 그러나 몸의 나이가 시간을 배반하면서 그는 사랑하는 아내와 아이를 두고 떠나게 된다. 아이에게 필요한건 ‘놀이친구’가 아니라 진짜 아빠였기 때문에. 그렇게 벤자민은 떠나지만 이 둘의 운명적인 사랑은 이렇게 끝나지 않는다. 늙어버린 데이지와 어린이가 되버린 벤자민은 다시 만나게 되고 이둘은 평생을 함께 한다. 물론 오직 둘만이 아는 비밀을 간직한 채. 나이가 여든에 가까워지고 생체 나이가 유년에 가까워진 벤자민은 치매에 걸리고 결국 데이시의 품에 아기의 모습으로 안겨 노환으로 죽게된다.

 

 

한국 개봉명처럼 시간이 ‘거꾸로’ 가진 않는다. 생체발달이 시간의 일반적 흐름을 역류할뿐이다. 그래서 그의 삶의 발달과정을 아동기, 청년기, 중년기, 노년기로 나누는 것은 쉬운 문제가 아니다. 몸을 기준으로 할 것인가, 아니면 정신을 기준으로 할것인가의 고민은 단순한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인류역사상 가장 치열한 논쟁주제였고 아직도 보편적으로 합의된 답을 가지지 못하고 있는 인간의 본질에 대한 철학적 고찰이기도 하다. 몸의 시간을 따라가자면 영화의 스토리 전체를 역산하여 재배열해야 한다. “cogito ergo sum”의 전통을 따르기로 한다.

 

 

벤자민의 아동기는 명백히 ‘애늙은이’의 삶이었다. 날때부터 백내장에 관절염을 앓고, 피부의 탄력은 없으며 손발도 딱딱하게 굳어버린 80대 노인의 몸으로 태어났다. 보통 다른 이들이 축복속에 태어나 부모의 따뜻한 양육하에서 어린시절을 보내는 것과는 달리 벤자민은 태어나자마자 아버지로부터 버림받았고, 곧 무덤에 갈 노인들만이 있는 양로원에서 자란다. 아버지조차 버린 아이를 ‘퀴니’는 ‘기적’이라며 자신의 아이로 키운다. 퀴니에게 벤자민은 단지 기적 ‘같은 것’이 아니라 기적을 경험하는 것이었다. 사실 모든 이들에게 삶은 기적 같은것이 아니라 기적을 경험하는 것이다. 양로원에서 자라는 벤자민은 자신이 어린애였다는 것도 모르고 스스로 황혼기에 접어든 노인 한사람이라고 생각하며 커간다. 그러나 역시 벤자민은 거리에는 뭐가 있을지, 길모퉁이에는 뭐가 있을지 호기심에 가득한 아동이었다. 인간은 스스로 주위세계를 이해하고자 노력하는 능동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세상과 인간의 삶에 대한 벤자민의 호기심앞에 어머니 퀴니는 “모두가 한 두가지씩은 다르다고 느낀단다. 하지만 우린 결국 같은 곳을 향해 가지. 단지 서로 다른 길을 가는 것 뿐이야..넌 너만의 길을 가는 거고.”라며 주워진 길이 있음에 감사하며 살라고 얘기한다. 그리고 평생의 사랑 데이지를 만나게 된다.

 

 

그의 청년기는 누구에게나 그렇듯 도전과 사랑의 시기였다. 예인선 선원으로서 한사람의 사회적 개체의 삶을 시작한 벤자민은 어머니 퀴니가 얘기한 것처럼 자신만의 인생길을 걷게 된다. 엘리자베트를 만나 짧은 사랑을 나누기도 하고, 세계 제2차대전에도 참전한다. 그리고 운명인지 필연인지 다시 데이지를 만나 결혼에까지 이르게 된다. 청년기의 벤자민이 신체적 약점을 극복하고 운명에 도전하는 삶을 상징적으로 비유하고 있는 것은 영화 후반에 등장하는 엘리자베트의 도버해협 횡단이다. 플로렌스 카탈리나라는 영국 여성의 실제 경험담을 차용해온 장면에서 감독은 인생은 도전하는 것이며 포기하는 자만이 실패한다는 사실, 스스로 행복하고자 노력하는 자는 행복하게 살수 있다는 사실을 역설한다. 실제 사건의 주인공이었던 플로렌스도 두 번째 도버해협 횡단 도전에서 성공한뒤 “안개 때문에 포기한 것이었다. 500미터 앞이 해안이라는 사실만 알았어도 끝까지 전진했을 것이다”라고 얘기한바 있다. 극중 최고령 할머니로서 34시간 22분 14초만에 도버해협 횡단에 성공한 엘리자베트도 “난...불가능은 없다고 생각해요”라는 소감을 밝혔다. 벤자민도 역시 주어진 운명에 굴종하지 않고 스스로의 삶과 사랑을 개척해 갔다. 숱하게 많은 걱정과 우려를 이기고 데이지를 만나 딸을 낳아 잠시나마 인생의 가장 행복한 시기를 보내게 된다.

 

 

아이가 커가고 벤자민 스스로도 중년에 접어들면서 고민이 많아진다. 아이에겐 놀이친구가 아니라 ‘진짜 아빠’가 필요한데, 점점 어려져가고 있는 상황에서 어떻게 아이 아빠가 될 수 있을지? “그건 아이한테도 불공평한거야..난 누구의 짐도 되고 싶지 않아”라며 벤자민은 사랑하는 가족을 떠난다. 그러나 아내와 딸에 대한 그칠줄 모르는 사랑으로 매년 딸의 생일에 세계 각지에서 엽서를 보낸다. 무엇이 ‘책임감’인지 인생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찾아 홀로 여행을 계속한 것이다. 그 여행에서 벤자민이 얻은 결론을 딸에게 보낸 편지를 통해 이렇게 이야기 한다. “가치있는 것을 하는데 있어서 늦었다는 건 없다. 하고 싶은 것을 시작하는데 시간의 제약은 없단다. 넌 변할 수 있고 혹은 같은 곳에 머물 수도 있지. 규칙은 없는거니까. 최고로 잘 할수도 있고, 최고로 못 할 수 도 있지. 난 네가 최고로 잘 하기를 바란단다. 그리고 너를 자극시키는 뭔가를 발견해 내기를 바란단다. 전에는 미쳐 느끼지 못했던 것들을 느껴보길 바란단다. 서로다른 시각을 가진 많은 사람들을 만나보기를 바란단다. 너가 자랑스러워하는 인생을 살기를 바란단다. 이게 아니다 싶으면 다시 처음부터 시작할 수 있는 강인함을 갖기를 바란단다“. 이것이 한 사내의 시간을 역으로 돌려가며 감독이 전하고 싶었던 인생의 메시지였을 것이다.

 

 

영화에서 벤자민의 노년은 데이지와의 재회로 시작한다. 아무도 없는 폐가에서 치매에 걸린 ‘어린아이’의 모습으로 벤자민은 데이지와의 사랑을 비롯한 자신의 인생 전부를 기록한 일기장과 함께 살다 이미 늙어버린 데이지 곁으로 돌아온다. 자기가 누군지 어디에 있었는지도 모르며 매우 혼란스러운 상황이지만 벤자민은 ‘평생을 살았던 그런 느낌’을 간직한채 날고 싶어한다. 세상과는 반대로만 흐르던 자기 몸과 그 몸으로 인해 감내해야 했을 인생의 힘겨움을 마지막까지 벗어버리고 싶어했을 것이다. 그런 평생의 소원을 안고 벤자민은 데이지의 품에 안긴 아기의 모습으로 삶을 마감한다.

 

 

감겼던 태엽이 다 풀리면 시계는 멈춘다. 그렇지만 시계가 멈춘다고 시간도 정지하는 것은 아니다. 시계바늘을 거꾸로 돌린다고 해서 시간이 반대로 흐르지도 않는다. 인생의 시련앞에서 인간은 햄릿의 나지막한 독백처럼 “노도처럼 밀려오는 운명에 굴복할 것인가? 아니면 이에 맞서 싸울 것인가”를 고민한다. 시간을 되돌릴수만 있다면 이런 고민은 전혀 무의미할 것이다. 인생의 불가역성은 인간의 힘으로 뛰어넘을 수 없는 숙명이다. 과거나 주어진 상황에 발목 잡히지 않고 스스로 행복해지길 두려워하지 않으면 누구나 자기의 길을 걸으며 행복할 수 있다. 벤자민 버튼은 이 단순하고도 위대한 진리를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며 증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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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2/08 09:48 2009/12/08 0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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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기장 - 2009/12/08 09:24

기관지 편집팀에서 일하는 동지에게 전화가 왔다. 비폭력대화에 관한 원고를 하나 써달라는 취지였다. 워낙에 글재간도 없는데다 비폭력대화센터에서 초급과정을 잠깐 듣긴 했지만 글을 쓸만큼의 배움도 없다고 나름 정중히 거절했다. 그리고 비폭력대화가 어떤 점에서는 사회적 관계의 문제를 개인화하는 한계도 있어서 소개하는 것이 좋을지에 대한 판단도 안선다는 말도 덧붙였다. 그러나 전화를 건 동지는 ‘부탁’이라는 말을 여러번 되풀이하며 ‘무조건’ 써달란다. 이 경우 그 동지의 요청은 과연 ‘부탁’이었을까? 상대방에게 거부할 권리를 보장하지 않는 요구는 그것이 아무리 공손한 말들로 표현됐다 하더라도 ‘강요’다. 비폭력대화에서는 부탁과 강요의 차이를 그렇게 구분한다.


비폭력대화(NonViolent Communi cation)는 미국의 심리학자 마셜 로젠버그에 의해 제안된 대화방법(말하기와 듣기)이다. ‘관찰-느낌-욕구-부탁’이라는 과정을 거치며 연민이 우러나는 방식으로 다른 사람들과 유대관계를 맺고, 우리 자신을 더 깊이 이해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기본 골격은 상대의 행동이나 말을 비디오로 찍은 듯 관찰하여, 그것을 보거나 들은 나 자신의 내면에 든 느낌을 확인한 다음 그 느낌 뒤에 존재하는 욕구를 확인하여 상대방에게 자신의 욕구를 충족할 수 있도록 전달하기 위해 노력하는 방식이다.


회의에 자주 늦는 동지가 있다고 치자. 이 동지가 흔히 들을 수 있는 비판은 “넌 왜 항상 늦냐! 너 때문에 짜증이 난다! 그러고도 네가 활동가냐!”라는 것이다. 비폭력대화는 이럴 경우 “지난번에 이어 오늘도 회의에 늦게 오니까(관찰) 무슨 일이라도 있는지 걱정도 되고, 회의 시간 내내 다음 약속 때문에 초조했어(느낌). 다른 일정이 있어서 제때 회의를 시작하는 게 나한테 중요하니까(욕구) 다음부터는 늦지 않았으면 좋겠어(부탁)”라는 식으로 얘기할 것을 권한다. 자신이 회의에 늦게 온 입장이라면 어느 쪽이 더 편안한가? 어떤 말을 들었을 때 변명하거나 물러나거나 반격하지 않고 “다음부터는 회의시간을 잘 지키겠다”는 마음의 다짐을 하게 하는가?


누구에겐가 화가 난다는 것은 사실 우리의 욕구가 충족되지 못해서 기분이 불쾌하다는 말이다. 다른 사람의 말이나 행동이 우리의 느낌을 불러일으키는 자극은 될수 있어도, 결코 원인이 아니라는 것이다. 충족되지 못한 욕구는 상대방에게 융단폭격같은 분노를 쏟아 붓는다고 해서 해결되지 않는다. 상대방이 내게 화를 낼 때, 그의 진정한 욕구가 무엇인지에 대해 집중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두터운 방탄복을 걸쳐 입고 그와의 일대결전에 나서는 것이다. 그 길의 끝에는 결국 피투성이가 된 두 사람의 쓰라린 상처만 남게 된다. 다른 사람은 나를 행복하게 해주기 위해서만 사는 것이 아니고, 나도 그 사람의 행복을 창조해주기 위해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때문에 우리는 서로 받아주고, 성숙해지고, 사랑하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그런 관계맺음을 배우고자 하는 사람에게 비폭력대화는 요긴한 지침이 될 수 있을 듯싶다.


집회신고를 하러 경찰서에 갔다가 우연히 보았던 「보고서 작성요령」이란 책자는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 그들의 지침은 “운동권의 용어를 그대로 사용하여 경찰 내부에 운동권의 사상을 자기도 모르게 유포하는 경우가 있으니 순화해서 사용하라”였다. 일테면 ‘가두투쟁’은 ‘가두불법시위’로, ‘민중문학’은 ‘좌경의식화문학’으로 ‘순화’해서 사용하고, 대체할 만한 용어가 없을 때에는 ‘소위’나 ‘이른바’등의 부사를 붙여서 쓰라는 것이다. 이런 그들의 언어정치가 낳은 대표적인 사례가 ‘민노총’이란 불가사의한 명칭이다. ‘민주’노총이란 말을 쓰기 싫어 ‘민노총’이란 신조어를 만들어 썼던 것이 지금까지도 널리 사용되고 있다. 저들은 이렇게 단어하나에도 자신의 사상과 계급적 입장을 불어넣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다하고 있다는 사실이 내게는 너무도 충격적이었다. 그에 비하면 우리의 말글살이는 과연 어떠한가. 우리가 가진 인간에 대한 사랑과 존중, 자유와 평등의 이념, 그리고 동지에 대한 애정이 우리의 언어에는 얼마나 올곧게 담겨있는가? 이제 동지들과 무심결에 나누는 한마디 한마디에도 차별과 착취의 폭력적인 언어를 버리고 새로운 세상을 만들겠다는 사람들다운 희망과 의지를 새겨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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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2/08 09:24 2009/12/08 0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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